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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키재기 - 하구치 이치요 (유윤한 옮김, 궁리)

by handaikhan 2023. 2. 10.

에디션 F 08

하구치 이치요 작품선

목차

섣달그믐・7
키 재기・31
흐린 강・101
열사흘밤・149
가는 구름・175
해질녘 보랏빛・195
달과 꽃과 먼지의 일기・201

옮긴이의 말・247
수록 작품의 원제명・256
히구치 이치요가 걸어온 길・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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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 - 키재기 (1896년)>

 

마을에서 큰길로 돌아가면 요시와라 유곽 대문의 버드나무까지는 꽤 멀다. 유곽에서 밤을 보낸 남자들이 새벽녘 돌아가며, 아쉬움에 돌아보는 곳이 버드나무 근처라 한다.

요시와라를 에두른 검은 도랑엔 유곽의 3층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어리고, 게이샤를 불러 소란스럽게 노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하다. 쉼 없이 오가는 인력거를 ㅂ보면 요시와라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번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이온지마에(큰 절 앞마을)'라는 동네 이름은 절간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막상 마을 사람들은 '알고 보면 활기찬 동네'라고 한다. (p.31)

 

"오토리다이묘 신이시여, 갈퀴를 사는 사람들에게 큰 복을 주신다면, 만드는 우리에게는 만 배 이익을 주소서"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생각과는 다른 법. 이 근처에 큰 부자가 산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다. (p.32)

 

요시와라에선 이런 일도 있다. 어제까지는 개천가의 격이 낮은 기생집에서 '무슨 무라사키'라고 <겐지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유녀를 하던 여자가 오늘은 마을의 건달과 함께 익숙지 않은 꼬치구이 밤 장사를 한다. 그리고 장사에 실패해 밑천을 다 날리면 친정으로 돌ㅇ가듯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곳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이고, 어딘지 풋내기보다는 좋게 보는 분위기다. 이렇다보니 요시와라에는 이에 물들지 않는 아이가 없다. (p.3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겐지 이야기 - 무라사키 시키부 (추영현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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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로에게 다나카야의 쇼타로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다. 산고로네 부자가 모두 다나카야로부터 받고 있는 은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자가 씨기는 않지만, 가난한 산고로네 집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는 금전주이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산고로, 우리 큰길로 놀러와"라고 쇼타로가 부르면 의리상 싫다고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렇기는 해도 산고로 자신은 골목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자란 몸이다. 살고 있는 곳도 용화사 땅이다. 집주인은 조키치의 부모이므로, 드러나게 골목파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은밀하게 큰길파 일을 보다가 눈에 띄어 골목파로부터 미움 받는 것도 괴로웠다. (p.48)

 

쇼타로가 사라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버렸다.

"그 애가 없으니 어른인 나도 어딘지 쓸쓸하네. 소동을 벌이지도 않고, 산고로처럼 농담을 지껄이지도 않지만 사람들이 좋아해. 부잣집 아들치곤 드물게 애교가 있어."

"좀전에 봤어? 다나카야 과부의 추한 꼴 말이야. 나이는 예순넷이나 돼. 그나마 화장을 하지 않아서 괜찮지만, 젊은 척하면서 머리를 너무 크게 말아올렸어. 간사한 목소리로 상냥한 척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빚을 받아내는 사람이야. 마지막엔 돈과 동반자살하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 가나한 사람들은 돈의 후광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어쨌든 나도 돈을 갖고 싶어. 요시와라의 큰 기방 주인에게도 돈을 빌려 주었대."

아주머니 두세 명이 큰길에 서서 다나카야의 재산에 대한 소문을 지껄이고 있었다. (p.4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가난한 사람들 -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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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토는 스님인 주제에 여자랑 이야기하며 좋아서 인사도 하다니 이상하지 않아? 분명히 미도리는 후지모토의 아내가 될 거야. 원래 절간 안주인도 미도리네 가게 이름처럼 '다이코쿠'님이라고 부르잖아."

신뇨는 원래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놀리듯 이야기 하는 게 듣기 싫어 고개를 돌리는 성격이다. 그런데 자신을 놀리는 이야기를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후 미도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두려운 마음이 앞서고, 다시 누군가를 놀릴까봐 불안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미도리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화를 낼 수는 없고, 가능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언짢은 얼굴로 지나쳤다. 하지만 미도리가 직접 말을 걸어오기라도 하면 당혹스러웠다. 대부분 "몰라" 하고 한 마디로 대화를 끝내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미도리는 그런 신뇨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처음엔 "후지모토 후지모토"하면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아름답게 핀 희귀한 꽃을 발견하자, 미도리는 뒤로 한 발짝 정도 늦게 오던 신뇨를 기다렸다.

"꽃이 너무 예쁜데 가지가 높아서 꺾을 수가 없어. 신뇨, 너는 키가 크니까 손이 닿지? 부탁이야. 꺾어주지 않을래?"

미도리는 뒤에 오던 무리 중에 나이가 많은 신뇨에게 부탁했다. 과연 신뇨는 뿌리치고 지나가지 못하면서도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하니 괴롭기만 했다. 할 수 없이 가까운 가지를 끌어당겨 아무 꽃이나 되는 대로 한 송이를 꺾어 던져주고 부리나케 지나가버렸다. 그런 신뇨를 보고 미도리는 "뭐야. 퉁명스럽기는" 하고 질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자신에게 일부러 심수루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나한테만 차갑게 굴어.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고, 옆에 가면 도망가고, 말을 걸면 화내. 성격이 어둡고 답답해서 어떻게 기분을 맞춰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저렇게 성격이 까다로운 애는 제멋대로 화내고, 심술부리니까, 친구로 생각하지 않으면 돼. 그럼 말을 걸 필요도 없어.'

미도리도 화가 나서 스쳐지나가도 말을 걸지 않았고, 길에서 만나도 모른 척했다. 어느새 둘 사이엔 큰 강이 흐르는 것 같아서 서로 오고갈 배도 뗏목도 없이 강가를 따라 각자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p.61-6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고정아 옮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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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출세한 후 사람들이 딸을 귀하게 여긴다는 내용의 <장한가>를 예로 들 것도 없이, 여자아이가 어디서나 귀중히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p6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백거이 시선 - 백거이 (정호준 옮김,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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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와라에서 나날을 지내다보면 흰 옷에 붉은 물이 스미듯 이곳 생활에 어쩔 수 없이 물들게 된다. 미도리의 눈에 남자는 조금도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오이란이란 직업도 그리 천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언니가 고향을 떠날 때 울며 떠나 보냈던 일이 꿈만 같았다. 지금은 언니가 인기를 끌고, 부모에게 효도하니 부러울 뿐이다. 잘나가는 오이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수많은 어려움을 참고 있는지는 모른 채, 손님을 끌기 위해 '쥐 울음 소리'를 내거나 격자문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우거나 헤어질 때 등을 두드리는 세기와 관련된 비밀에 이르기까지 미도리는 그저 모든 것이 재미있게 들렸다. 어린아이가 요시와라 유녀들이 사용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미도리는 이제 우리 나이로 겨우 열네 살이다. 인형을 안고 볼을 비비는 모습은 귀한 집안의 딸과 다를 바 없지만, 몸가짐의 도덕이라든가 가정예절 같은 것은 학교에서 조금 배운 것이 전부다. 어쨌든 매일 아침저녁으로 듣는 것은 손님에 대해 '좋다, 싫다' 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철마다 유곽 주인이 나눠주는 옷, 단골손님에게 받은 침구, 찻집에 보내는 선물이 화려하면 칭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초라하다며 무시하는 것을 보고 배운다. 자신의 일이든 다른 사람의 일이든 아는 척하고 나서기엔 아직 이른 나이이고, 어린 마음에는 그저 눈앞의 화려함만 보일 뿐이다. 원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요시와라의 분위기에 물들어 점점 심해지다가 구름처럼 커져버렸다. (p.67-68)

 

축제가 열리는 밤에는 인파에 휩쓸려, 사는 사람들도 눈이 어두워진다. 어젯밤 이 절에 극락왕생을 빌러 왔던 것도 잊고, "비녀 세 자루에 75전"이라고 비싸게 부르면, "다섯 자루에 73전이라면 사지"라고 깎으며 지나간다.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둠을 틈타 돈을 버는 일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p.73)

 

같은 부모를 둔 남애에 남이 섞이지 않은 온화한 가정이라 신뇨가 우울한 성격으로 자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어른스러운 데다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도 어머니가 하는 일도, 누나의 가정교육도 모두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자기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포기하니 어쩐지 슬프고 한심스러웠다. 친구들은 신뇨가 외골수에다가 심술궂다고 하지만, 사실은 금세 침울해지는 여린 성격이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이 있어도 싸울 용기가 없어 방에 틀어박힌 채 남과 얼굴도 못마주치는 겁쟁이였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승려의 아들이라는 천하지 않은 신분 덕도 있어. 신뇨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p.74)

 

마당의 미도리는 그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아, 서툴기는, 저렇게 해선 고쳐 신기 어려운데. 종이끈은 흐물흐물하고, 지푸라기를 꼬아 앞에 있는 구멍에 넣어봤자 오래 가기 어려워. 그건 그렇게 옷소매가 땅에 끌려 흙투성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있어. 어, 우산이 구르잖아. 접어서 세우두면 좋을 텐데...'

미도리는 하나하나 너무 안타까웠지만, "여기 천조각이 있어. 이걸로 나막신 코끈을 끼워"라고 말을 걸려고는 하지 않았다. 비에 옷이 젖는 것도 상관치 않고, 살짝 숨어 신뇨를 엿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미도리의 엄마가 멀리서 불렀다.

"다리미 불 다 피웠어. 미도리 뭐 하고 노는 거니? 비오는데 밖에서 장난치면 안 돼. 또 지난번처럼 감기 걸릴라."

"네, 갈게요."

미도리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그 소리가 신뇨에게 들릴까봐 부끄러웠다. 가슴이 두근두근.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격자문을 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신뇨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격자문 틈으로 손에 쥐고 있던 붉은 비단 조각을 던졌다. 신뇨는 모른 척하며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쌀쌀맞아.'

원망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미도리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다.

'내가 뭐 그리 싫어 저렇게 매정한 척하는 건지. 불만 있는 건 난데 정말 너무해.'

와락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엄마가 몇 번이나 부르자 할 수 없이 한 걸음, 둘 걸음 주저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에잇, 뭐가 미련이 남ㅁ아서. 이런 내 모습을 신뇨가 어찌 생각할까? 부끄럽지도 않아?'

미도리는 과감하게 몸을 홱 돌려, 딸각딸각 징검돌을 밟으며 돌아갔다. 신뇨는 미도리가 떠난 뒤, 그제야 조금 쓸슬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니 붉은 비단 조각이 비에 젖은 채 단풍잎처럼 자기 발 언저리에 흩어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지만, 차마 주워 올릴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신뇨는 자기 손재주가 서투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게다 끈 꿰는 것을 포기했다. 하오리의 긴 끈을 풀어 나막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발에 칭칭 감아 묶었다. 꼴사나운 임시방편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걸어보았지만, 걷기 어려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대로 누나가 없는 다마치까지 갈 생각을 하니 큰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어나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두 걸음 정도 가는데, 미도리가 던진 비단 조각의 붉은빛이 눈에 아른거려 멈칫했다. 마치 비에 젖은 단풍잎 같았다. 버려두고 가려니 마음이 괴로워,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따.

"신뇨, 어쩐 일이야? 나막신 끈이 끊어진 거냐? 보기 흉해."

불쑥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p.87-8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은수저 - 나카 칸스케 (양윤옥 옮김, 작은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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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뇨는 다마치의 누나에게로, 조키치는 자기 집 쪽으로 떠났다. 마음이 담긴 붉은 비단 조각만 애처로운 모습으로 격자문 밖에 쓸쓸히 남아 있었다. (p.89)

 

괴롭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일이 몸에 일어난 처지였다. 미도리는 칭찬하는 말도 조롱으로 들렸다. 멋진 시마다 머리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자신을 경멸하는 듯이 느껴졌다.

"쇼타, 나 집에 갈래."

"왜 오늘은 안 놀 거야? 너 무슨 잔소리라도 들은 거니? 언니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쇼타로가 어린아이 같은 질문만 던지니 미도리는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이 함께 단팥죽 가게 앞을 지나는데, 키다리 바보 녀석이 밖을 내다보며, '어이, 사이가 좋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놀렸다. 미도리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쇼타 너랑 같이 안 갈래."

미도리는 쇼타로를 남겨두고 혼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토리 신사에 함께 참배를 가기로 했으면서 갑자기 자기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미도리를 보고, 쇼타는 다시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렸다.

"너 같이 안 갈거야? 왜 그리로 가는 거니/ 너무해."

미도리는 그런 쇼타로를 뿌리치듯 하고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쇼타로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쫓아가 미도리의 소매를 잡으며 영문을 몰라 이상하게 여겼다. 미도리는 얼굴만 붉히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어 보였다.

쇼타로는 다이코쿠야의 숙소 문을 지나 안으로 들었다. 평소 자주 놀러 오는 곳이라 익숙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툇마루에 올라 미도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미도리의 엄마가 이 모습을 보고 "쇼타야, 마침 잘 왔어. 오늘 아침부터 미도리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모두 쩔쩔매고 있어. 좀 놀아줘"라고 말했다.

"몸이 안 좋은가요?"

쇼타로가 어른스럽고도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야."

미도리의 엄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조금 지나면 나을 거야. 언제나 제멋대로니까. 저러다 친구들과 싸우기도 할 텐데...정말 어쩔 수 없는 아가씨야."

뒤돌아보니 미도리는 어느새 작은방에 이불을 꺼내놓고, 오비를 풀고, 겉옷을 벗은 채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쇼타로는 멈칫멈칫하면서 베갯머리로 다가갔다.

"미도리, 어떻게 된 거야? 몸이 아픈 거야? 기분이 안 좋은 거야? 도대체 왜 그래?"

더 가까이는 가지 못하고 무픞에 손을 올린 채 애만 끓였다. 미도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매로 눈을 가리고 남몰래 울어 아직 틀어올리지 않은 앞머리가 젖어 보인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쇼타로는 어린 마음에 어떤 위로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울 뿐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네가 화낼 만한 일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그리 화가 난 거야?"

쇼타로는 미도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쇼타, 나 화난 게 아니야."

미도리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러는 거야?"

쇼타가 다시 물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숨기고 싶기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뺨이 붉어지고, 특별히 무엇이 기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점점 불ㄹ안해졌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부끄러움이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할 수만 있으면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구랑도 이야기하지 않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종일 지내고 싶어. 그럼 이렇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 언제나 종이인형 가지고 소꿉놀이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싫어. 왜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걸까? 일곱 달, 열 달, 아니 일 년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도리는 노인 같은 생각만 하면서, 쇼타로가 귀찮은 듯 말을 걸어와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돌아가줘. 쇼타. 부탁이니 돌아가줘. 네가 여기 있으면 죽어버릴 것 같아. 네가 말을 걸면 머리가 아파. 대답을 하려면 어지럽고. 누구도 여기 있는 게 싫으니까 너도 돌아가줘."

평소와 다른 미도리의 말투에 쇼타는 이유를 모른 채 당황했다. 마치 연기에 휩싸인 듯한 기분이 되었다.

"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이런 말 할 아이가 아닌데. 이상해!"

분한 마음을 감추면서 침착하게 말했찌만, 마음이 약한 ㅅ효타로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미도리는 그런 쇼타로의 모습을 알아차릴 리가 없다.

"돌아가. 돌아가라고. 계속 여기 있으면 친구도 무엇도 아니야. 미운 쇼타."

미도리가 밉살스러운 말을 퍼부었다.

"네가 그렇게 싫다면 갈게. 귀찮게 해서 미안해."

쇼타로는 목욕탕의 더운물을 살피고 있는 미도리의 어머니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툇마루를 뛰쳐나갓다. (p.94-97)

 

미도리는 이날부터 다시 태어난 듯 태도가 변했다. 일이 있으면 요시와라의 언니에게는 갓지만, 마을 아이들과 전혀 놀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르러 가도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지키지 않을 약속만 했다. 그렇게 친하던 쇼타로가 찾아가도 데면데면하게 굴며 얼굴만 붉혔다. 문구점에서 활발하게 춤추던 못흡도 이제는 보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병이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미도리의 엄마는 우수으며 "곧 다시 말괄량이 본성이 나타날 거예요. 지금은 잠깐 쉬는 중이지요"라고 이유가 있다는 듯이 말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여자답게 얌전해졌어"라고 칭찬하기도 하고, "모처럼 재미난 아이를 망쳐버렸어"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큰길은 갑자기 불이 꺼진 듯 쓸쓸해졌다. 쇼타로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매일 밤 대나무 손잡이가 달린 초롱의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수금을 하려고 초롱을 든 채 둑길을 걷는 쇼타로의 그림자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가끔 함께 걷는 산고로의 목소리만 늘 그렇듯 익살스럽게 들려왔다.

용화사의 신뇨가 스님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러 떠났다는 소문을 미도리는 듣지 못했다. 신뇨를 향한 마음은 가슴에 묻어두었다. 한동안은 몸에 일어난 변화와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에 자신이 낯설고, 무엇이든 부끄러웠다.

그러던 어느 서리 내린 아침. 조화로 된 수선화를 격자문 안으로 밀어넣은 사람이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미도리는 이 수선화에서 까닭 모를 그리움이 느껴졋다. 선반 위의 꽃병에 이 꽃을 꽂아두고 쓸쓸하고 청초한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들려온 말에 따르면, 다음 날 신뇨는 승려학교에 들어가 잿빛 승복으로 갈아입고 출가했다고 한다.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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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년 5월 2일 ~ 1896년 11월 23일)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서 직업 소설가이다.
메이지 5년(1872년) 히구치 노리요시(樋口則義)의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메이지 16년(1883년) 세이카이 소학교(私立青海学校) 고등과 제4급(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여자에게 더 이상의 교육은 필요없다는 어머니의 반대로 더 이상 학업을 잇지는 못했다. 이후 이치요는 바느질을 배우며 집안일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치요의 재능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인정해 메이지 19년(1886년) 이치요를 나카지마 우타코가 운영하는 와카를 배우는 사설 기관 하기노야(萩の舎)에 다니게 해 주었다. 당시 하기노샤는 황족, 화족 등 높은 신분의 여성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이치요는 발표회에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기도 했다. 메이지 20년(1887년) 오빠 센타로가 결핵으로 사망하여 이치요가 17세의 나이로 호주가 되었다. 1889년에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사망했고 일가는 둘째 오빠 도라노스케의 집으로 이사했다. 같은 해 이치요는 경제적인 이유로 약혼자 시부야 사부로(渋谷三郎)에게서 파혼당했다. 이듬해 어머니와 오빠의 불화로 이치요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오빠의 집을 나와 혼고로 이사했고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메이지 22년(1891년 4월 14일 노노미야 기쿠코의 소개로 아사히 신문의 기자였던 작가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를 만나 그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고, 메이지 23년(1892년) 3월 나카라이가 발간한 잡지 《무사시노》 창간호에 첫 작품 <어둠 속의 벚꽃>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이치요와 나카라이 모두 독신이었기 때문에 이치요가 나카라이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이치요는 나카라이와 연을 끊게 되었다. 이후 이치요는 고다 로한의 <풍류불>의 영향을 받아 예술에 대한 도공의 정열을 사실적 문체로 묘사한 <매목>(1893)으로 재능을 인정받았고, 같은 해에 요시와라 유곽 근처로 이사해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듬해에 문을 닫았다. 이치요는 생활고를 헤쳐나가기 위해 계속 글을 써야했고《문학계》 등의 잡지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탁류>(1895) 같은 서정성 넘치는 수작을 발표하여 복고적 시대 풍조 속에서 주목을 받았다. 메이지 29년(1896년) 발표한 〈키재기〉가 모리 오가이 등에게 호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인정받게 되었지만 같은 해에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치요의 작가 생활은 14개월에 불과했지만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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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재기 - 히구치 이치요 (임경화 옮김, 을유 세계문학)

꽃속에 잠겨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배반의 보랏빛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가는 구름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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