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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X. 정리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by handaikhan 2023. 2. 5.

나쓰메 소세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6년)

 

<작품해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처녀작인 동시에 출세작이다. 1905년 1월에 아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11회분이 실리면서 [호토토기스] 동인 야마카이에서 낭독된 것이 연재의 발단이 되었다.

처음에는 제1장으로 끝낼 에정이었을 만큼 짧은 것이었으나 의외로 호평을 받아 1906년 8월까지 10회에 걸쳐 연재되어 현재의 장편소설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은 고양이 한 마리의 눈을 통해 인간을 연구 비평함과 동시에 20세기 메이지인의 생태와 사회를 풍자한 소설이다.

"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들은 제멋대로 행세한다고 단언할 수 밖에 없게끔 되었다."라는 문장에도 집약되어 있듯이, 이 작품은 한 마리의 고양이가 인간 사회를 관찰하고 그들의 자기본위나 어리석음, 뻔뻔스러움 등 여러 가지 인간사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첫째, '속세인'들과 같기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묘사하며

둘째, 미학자임을 자칭하는 허풍선이에다 거짓말쟁이 메이테이는 이 작품의 풍자와 해학을 중폭시키는 중요 인물이며

셋째, 세상을 등지고 세상 뒤에 숨어 달관한 듯 살아가는 지식인들도 결국은 속세인과 한통속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네째, '속세인'들과 대립되는 '달관자'들의 유유자적한 세태를 풍자하고

다섯째, 금권이 지배하는 현실과 지식인들의 고답적인 세계 등 근대 사회의 비윤리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여섯째, 동물을 통해 인간 세계를 전개해 하는 색다른 구상과 번뜩이는 해학 등 소세키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해학 밑바닥에 감도는 인간사의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낀 고양이의 고독감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p.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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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란 족속과의 첫 대면

나로 말하면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도통 짐작이 안 간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습한 곳에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걸 보았다. 더구나 나중에 들은즉 그건 서생이라고 하는, 인간들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었다. 이 서생이라는 족속은 이따금 우리 고양이족을 삶아 먹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별반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의 손바닥에 얹혀서 쓰윽 치켜올려졌을 때, 어쩐지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손바닥 위에서 좀 진정하고서 그 서생의 얼굴을 본 것이, 이른바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첫 대면이었을 게다. 묘하게 생긴 것도 다 있구나 하는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털로 장식돼야 할 얼굴이 미끌미끌해, 꼭 주전자 같았다. 그 후 고양이들도 많이 만났지만, 이런 등신과는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다. 게다가 얼굴 한복판이 너무나 튀어나왔다. 그리고 콧구멍으로 가끔씩 뿌욱뿍 연기를 내뿜지 않는가. 어떻게 해도 코가 맵기만 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이 인간들이 피우는 담배라는 것은, 요즘 와서야 겨우 알았다.

이 서생의 손바닥 안에서 얼마 동안은 좋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대단한 속력으로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자가 움직이는 건지 나만 움직여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한정 빙글빙글 눈이 돌아간다. 가슴이 역겨워진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털썩 소리가 나면서 눈에서 번쩍 불이 났다.

거기까지는 기억하고 있으나, 그 후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내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생은 보이지 않는다. 숱하게 있던 형제자매가 한 마리도 안 보인다. 더구나 나의 어머니마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게다가 여태까지 있던 데와는 달리 무진장 밝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 좀 사정이 이상하군, 하고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가려 해보니, 몹시 따끔다끔하다. 나는 지푸라기 위로부터 갑자기 조릿대 숲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가까스로 조릿대 숲을 기어나오자, 저편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나는 연못 앞에 앉아서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이렇다 할 묘책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 있다가 야옹, 야옹 하고 울어대면 그 서생이 다시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옹, 야옹 하고 시험 삼아 울어보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 연못 위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배가 몹시 고프다. 울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별수없다. 무엇이건 좋으니 먹을 게 있는 데까지 가보자고 결심하고 어슬렁어슬렁 못가를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암만해도 몹시 고통스럽다. 고통을 꾹 참고 어거지로 기어갔는데, 얼마 안 가 인간 냄새가 나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듯했다.

여기로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어느 큰 저택의 대나무 울타리 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인연이란 기이한 것, 가령 이 대나무 울타리가 뚫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 몸은 마침내 길거리에서 아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옛말에 같은 나무 그늘 아래 사는 것도 전생으로부터의 인연이라더니, 과연 옳은 말이다. 이 울타리 구멍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몸이 이웃집 고양이 아가씨 미케를 방문할 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저택에 잠입하긴 햇지만,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날은 어두워지겠다, 배는 고프겠다, 춥기는 춥겠다, 비마저 오겠다, 그런 형편이어서 이젠 잠시도 주저할 수가 없게 됐다.

하는 수 없어 밝고 따스할 것 같은 데로만 골라서 걸어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땐 이미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서생 이외의 인간을 다시금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첫 번째로 만난 게 하녀 오상이다.이건 앞서의 그 서생보다 한층 더 난폭한 작자라, 나를 보기가 무섭게 느닷없이 목덜미를 움켜잡더니 바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이젠 글럿구나 싶어서 눈을 감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배고픔과 추위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다시금 오상의 방심을 틈타 부엌 쪽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랬더니 얼마 안 가서 또 한 번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내동댕이쳐졌다가 기어오르고, 기어올랐다간 다시 내동댕이쳐지고, 그렇게 같은 짓을 아무튼 네댓 번을 되풀이했던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오상이란 작자가 정말이지 싫어졌다. 요전에 오상이 먹을 꽁치를 훔쳐먹고, 앙갚음을 해주고서야, 겨우 가슴의 체증이 풀린 것 같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붙잡혀 내쫓기려 했을 때 이 집주인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무슨 일이냐"하고 말하면서 나왔다.

하녀 오상은 나를 집어들고 주인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집 없는 고양이 새끼가 아무리 내쫓아도 글쎄, 부엌으로 올라오니 어쩔 수가 없어요."

주인은 코밑의 검은 털을 배배 꼬면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윽고 "그렇다면 우리 집에 두도록 하게"라고 말하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은 아주 말수가 적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하녀는 괘씸하다는 듯이 이 몸을 부엌에 내팽개쳤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침내 이 집을 내 거처로 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p.29-32)

 

이 집주인은 좀처럼 나와 얼굴을 맞댄 적이 없다. 그의 직업은 학교 선생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종일 서재에 틀어박힌 채 거의 나오는 때가 없다. 식구들은 그를 대단한 면학가인 줄 알고 있다. 그 자신도 면학가인 척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식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근면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가끔씩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의 서재를 엿보곤 하는데, 거의 낮잠ㅇ믈 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끔씩은 읽다 만 책 위에 침을 흘리기도 한다. (p.32)

 

나는 고양이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선생이란 실로 편안한 직업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선생이 되는게 제일 좋겠다. 이렇게 자고 있어도 제법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고양이라도 못할 건 없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래도 주인한테 말을 시키면, 선생만큼 힘든 건 없다고 하며 친구들이 올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내가 이 집으로 정착했던 당시는, 주인 이외의 인간들에겐 몹시 푸대접을 받았다. 어디로 가건 걷어차이기 일쑤고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별수 없기에, 가능한 한 내 몸을 받아주고 먹고 살게 해준 주인의 곁에 있으려고 애썼다. (p.32-33)

 

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들은 제멋대로 행세한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게끔 되었다. 더구나 내가 가끔씩 동침하는 어린애들의 경우는 가장 심하다. 저 좋은 때는 남을 거꾸로 치켜들기도 하고, 머리에 자루를 씌우기도 하고, 내팽개치는가 하면 부두막 속에 밀어넣기도 한다.

그런데 내 쪽에서 조금이나마 손찌검 발찌검이라도 할 양이면, 온 집안 사람들을 총출동시켜 몰아붙이며 못살게 군다. (p.33)

 

내가 존경하는 건너편 집의 흰둥이 고양이는, 만날 때마다 인간만큼 인정머리 없는 건 없다고 말씀하신다.

흰둥이는 며칠 전 옥 같은 새끼고양이 네 마리를 낳으셨다. 그런데 그 집 서생이 사흘때 되는 날, 그 네 마리를 뒤쪽 연못에 가지고 가서 모두 버리고 말았다지 뭔가.

흰둥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나서, 암만해도 우리 고양이족이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온전히 다하면서 아름다운 가족적 생활을 하려면, 인간들과 싸워서 이를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하나가 모두 지당한 말씀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웃집 암코양이 미케는 인간들이 '소유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크게 분개하고 있다.

원래 우리들 고양이 동족간에서는, 말린 정어리 대가리나 숭어 배꼽이라도 제일 먼저 발견한 자가 먹을 권ㄴ리가 있는 걸로 돼 있다. 가령 상대방이 이 규약을 안 지킨다면, 완력에 호소해도 무방한 정도다.

그런데 인간들은 추호도 이런 관념이 없는지, 우리들이 발견한 맛있는 음식물을 예외 없이 자기들을 위해 약탈해간다. 그들은 그들의 강력함을 믿고, 마땅히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을 빼앗고도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다.

흰둥이는 군인 집에 살며, 미케의 주인은 변호사다. 나는 선생네 집에 살고 있는 만큼, 이런 일에 관해선 오히려 낙천적이다. 그저 그날 그날을 그럭저럭 지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제아무리 인간인들, 그렇게 언제까지나 번영할 수는 없을 게다. 그래 마음을 느긋하게 잡고 고양이의 시절이 오기를 기다림이 좋으리라. (p.34)

 

그러면서도 뭘 시작하면 위도 나쁜 주제에 더럽게 열심이다. 후가(변소)에 들어가서도 우타이를 불러대, 근처 사람들이 '후가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태연자약하여, 아직도 "나는 다이라노 무네모리노라"하며, 처음 배운 우타이의 첫머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다들 "저것 봐, 저기 무네모리가 온다"고 웃음을 터뜨릴 지경이다. (p.35)

<참고>

우타니는 일본 특유의 기면 음악극인 노가쿠에 맞춰 부르는 가사이다.

노가쿠(能楽)는 14세기에 무대예술로 정립되어 현대까지 약 650년간 전승되어온 일본의 고전 연극이며, 현재까지 상연되는 무대 예술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무대 예술이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헤이케 이야기 (오찬욱 옮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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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다를까,, 다음날부터 얼마 동안은 매일같이 서재에서 낮잠도 마다하고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그 완성했다는 걸 보면, 무엇을 그렸는지 도통 누구도 알아볼 수가 없다. 그 자신도 별로 신통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미학인지를 한다는 그의 친구가 찾아왔을 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어째 잘 그려지지 않는군. 남의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스스로 붓을 잡고 보면 새삼스레 어렵게 느껴지는걸."

이건 주인의 술회다. 솔직한 심정 토로다. 그의 친구는 금테 안경 너머로 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잘 그릴 수야 있나. 첫째, 방 안에서 상상만으로 그림이 그려질 수는 없는 법일세. 옛날 이탈리아의 대가 안들에아 델 사르토가 이런 말을 했지.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보다도 자연 그 자체를 그대로 묘사해라. 하늘에 성진이 있고, 땅에 이슬과 꽃이 있다. 날으는 새가 있고, 달리는 짐승이 있다. 연못에는 금붕어가 있고 고목에는 겨울  까마귀가 있다. 이렇게 대자연은 꼭 한 폭의 살아있는 커다란 그림인 것이다, 라고 말일세. 어때? 자네도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우선 스케치부터 해보면 어떤가."

"허, 안들에아 델 사르토가 그런 소릴 한 적이 있나? 금시초문인걸. 하긴 지당한 말씀이야. 참으로 그렇군"하고 주인은 무턱대고 감탄한다. 금테 안경 속 너머로 비웃는 듯한 웃음이 보였다. (p.35-36)

 

하지만 그 열성엔 감탄할 수밖에.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않고 있어주려 했지만, 아까부터 소피가 마려웠다. 온몸의 근육이 근질근질하다.

이젠 1분의 유예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되었으므로, 부득이 실례하여 두 다리를 앞으로 맘껏 뻗치고 목을 길게 빼며 아아, 하고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그래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젠 더 얌전을 빼고 있어도 소용없게 되었다. 어차피 주인의 스케치를 망쳐버린 셈인즉, 겸사겸사 뒤꼍에 가서 소피를 보리라 마음먹고 어슬렁어슬렁 기어나갔다.

그러자 주인은 실망과 노여움을 뒤섞어놓은 것 같은 소리로, 응접실 안으로부터 "이놈의 밥통 같으니"라며 냅다 호통을 쳤다. 이 주인은 남을 욕할 때는 반드시 "밥통 같으니"하는 것이 버릇이다. 달리 악담을 알지 못하니 하는 수 없지만, 이제까지 참은 고양이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밥통 같으니"라고 하는 건 실레가 아닌가 싶다.

그것도 평소 내가 그의 잔등에 올라탈 때 조금이라도 화녕하는기색이라도 보였다면 이런 이유 없는 욕지거리도 감수하겠지만, 이쪽 편리는 무엇이고 쾌히 응해준 적이 없으면서 소피 때문에 일어선 걸 "밥통 같으니"라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원래 인간이라는 건, 자기 역량만 믿는 나머지, 모두 다 오만해져 있다. 좀더 인간보다 강한 자가 나와서 바로잡아 주지 않고선, 앞으로 어디까지 오만해질는지 알 수 없다. (p.37)

 

"네 녀석은 이때껏 쥐를 몇 마리나 잡았지?"

지식은 깜둥이보다 앞선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완력과 용기 면으로는 도저히 깜둥이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해오던 차라 이 질문을 접했을 땐, 아닌게아니라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인 것이니 속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실은 이제 잡으리라 잡으리라 하다가, 아직도 잡은 적이 없네."

깜둥이는 그의 코끝에서 팽팽하게 뻗친 기 수염을 짜릿짜릿하게 떨치면서 심하게 웃었다. 원래 깜둥이는 제 자랑이 많은 만큼 어딘가 모자란 데가 있어서, 그의 기염을 감탄했다는 듯 목구멍을 꼬르릉 꼬르릉 울려가며 공손하게 듣고 있노라면, 지극히 제어하기 쉬운 고양이다.

나는 그와 사귀게 되면서 이내 이 호흡을 익히게 되었으므로, 이 경우에도 굳이 자기 변호를 해서 더욱더 형세를 불리하게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 차라리 그에게 자신의 공로담을 늘어놓게 해서 어물쩍 넘김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순하게 선동해보았다.

"너 같으면 나이가 나이니만큼 퍽도 많이 잡았을 테지."

아니나다를까, 그는 장벽의 흠난 데로 돌격해오듯, 제법 공세를 취해왔다.

"만달 순 없지만 말이다. 3,40마리는 잡았을 게야." (p.4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삼국지 강의 - 위안텅페이 (심규호 옮김, 라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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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따분하다고, 아무리 애써서 쥐를 잡는다고 해도 - 도대체 인간만큼 뻔뻔스런 놈은 세상에 또 없더라고. 남이 잡은 쥐를 몽땅 빼앗아선 파출소러 갖고 가지 뭐야. 파출소에선 누가 잡은 건지 모르니까, 그때마다 5전씩 돈을 준다 그 말이야. 우리 집 바깥 주인은 내 덕분에 벌써 1엔 50전 정도나 돈벌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걸 먹여준 적도 없었어. 이것 봐, 인간이란 모두 빛 좋은 개살구, 아니 도둑놈들이라고." (p.41-42)

 

"그 따위 엉터리를 말했다가, 만일 상대방이 읽었다면 어떡할 작정인가?"

마치 남을 속이는 건 상관없고, 다만 속임수가 들통났을 때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투다. 미학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뭐 그땐 다른 책과 헷갈렸다고 하든지 하면 되거든."

하고 키득키득 웃고 있다. (p.45)

 

주인은 매일같이 학교로 간다. 돌아오면 서재에 틀어박힌다. 그러고는 손님이 오면, 선생 노릇이 싫어서 죽겠다고 한다.

수채화도 좀처럼 안 그린다. 다카디아스타제도 효능이 없다면서 그만 두고 말았다.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쉬지 않고 유치원에 다닌다. 돌아오면 노래를 부르고, 공놀이를 하고, 가끔씩은 나의 꼬리를 잡아 거꾸로 공중에 치켜들곤 한다.

내 몸은 맛난 음식도 먹지 못하므로 별반 살이 찌지도 않지만, 무엇보다도 건강하며, 절름발이도 되지 않은 채, 그날 그날을 지내고 있다.

쥐는 절대로 잡지 않는다. 하녀 오상은 아직도 싫다.

이름은 아직도 지어주지 않았지만, 욕심을 말하면 끝이 없으므로, 그럭저럭 만족해하며 평생 이 선생네 집에서 살다가 무명의 고양이로 생을 마칠 작정이다. (p.46)

 

2. 인간이란 왜 이 모양으로 생겼을까?

이름도 없던 나는 새해 들어서 다소 유명해진 덕분에 비록 고양이지만 좀 코가 높아진 것 같아서 흐뭇하다. (p.47)

 

주인은 그림엽서의 색채에 탄복했지만, 그려진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 아까부터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명치 않은 그림엽서인가 하고, 나는 자던 눈을 얌전히 반쯤 치켜뜨고, 제법 침착하게 보니 영락없이 나의 초상화가 아닌가.

우리 집 주인처럼 안드레아 델 사라토를 흉내낸 것도 아닐 테지만, 화가인 만큼 형체도 색채도 제대로 균형이 잡혀 있다. 누가 보든 고양이임에 틀림없다. 웬만큼 안목이 있는 자라면, 고양이 중에서도 다른 고양이가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게끔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 명료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저렇게 고심하는가 하고 생각하자, 어째 좀 인간이 가엾어진다. 되도록이면 그 그림이 내 모습임을 알려주고 싶다. 나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나마 고양이라는 사실만은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인간이란 건, 도저히 우리들 고양이족의 언어를 해득할 만큼 하늘의 은혜를 입지 못한 동물인즉, 유감스럽지만 그대로 뒀다.

잠깐 읽는 이들께 미리 말해두겠는데, 원래 인간들은 무슨 말을 하면, 고양이가, 고양이가 하고, 무심한 듯 경멸하며 모욕하는 투로 나를 평가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좋지 않다. 인간의 찌꺼기에서 소와 말이 나오고, 소와 말의 "동으로부터 고양이가 제조된 것처럼 생각하는 건, 자신의 무지를 알아채지 못하고, 교만한 얼굴을 하는 선생 따위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다지 좋은 건 아니다.

아무리 고양이라지만, 그렇게 엉성하게 만들어진 건 아니다. 자기들의 눈에는 일렬 일체이며, 평등 무차별인 것이니, 어느 고양이고 고유의 특색 같은 건 없는 것 같지만, 고양이 사회에 들어가보면,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서 십인십색이라는 인간세계의 말ㅇ른, 그냥 그대로 여기서도 응용이 가능한 것이다.

눈초리나 코 모양이나, 털 색깔이나 발걸음이나, 모두가 다르다. 수염 뻩친 모양새로부터 귀가 뾰족한 형상 하며, 꼬리 드리운 정도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다. 용모가 잘생긴 것, 못생긴 것, 좋고 싫음, 세련되고 못되고의 갖가지를 다하여, 천차만별이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처럼 뚜렷한 구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눈은 오직 형상이니 뭐니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들의 성질은 물론이요, 얼굴 모습의 끝가는 데도 식별하지 못한다는 건 가엾은 일이다.

'동류는 상구라' 함은 옛부터 있어온 어휘라지만, 말 그대로 떡장수는 떡장수, 고양이는 고양이라, 고양이 일은 역시 고양이 아니고선 알지 못한다. 제아무리 인간이 발달했다고 해도 이것만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을 말한다면,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럼 위대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골치아픈 일이다. 하물며 동정심이 결핀된 이 집주인 같은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제일가는 의미라는 것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하는 수 없다. (p.47-49)

<참고>

동기상구(同氣相求)

기풍(氣風)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는 뜻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서로 찾아 친하게 모인다는 말이다.

리링의 주역 강의 - 리링 (차영익 옮김, 글항아리)

주역(周易)의 문언전(文言傳) 건괘(乾卦)
飛龍在天利見大人.
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各從其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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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하루를

책 읽고 춤도 추고

들뜬 고양이

(p.4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고양이 오솔길 - 호리모토 유우키 (최진선 옮김, 고양이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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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고리대금업자라도 뛰어들어온 양 불안한 얼굴로 현관 쪽을 본다. 세배하러 온 손님을 맞아 술 상대를 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괴팍도 이만하면 아주 가관이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외출을 하면 좋으련만, 그만한 용기도 없다. 끝끝내 껍데기 속에 틀어박힌 굴의 근성을 나타내고 있다. (p.50)

 

한참 동안 두 녀석은 서로 노려보고 있다가, 큰놈이 다시 숟가락을 들어 가득 자기 접시에 더 부었다. 작은 놈도 이내 숟가락을 들어 자기 분량을 언니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언니가 다시 가득 퍼올렸다. 동생 역시 질세라 다시 가득 퍼올렸다.

언니가 다시 항아리에 손을 댄다. 동생이 또 숟가락을 든다. 보고 있는 동안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이 거듭되니, 마침내는 두 놈의 접시에는 산더미같이 설탕이 수북해졌다. 단지 속에는 한 숟가락의 설탕도 남지 않았을 때, 주인이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면서 침실에서 나오더니, 모처럼 퍼낸 설탕을 아까처럼 다시 항아리 속에 쏟아넣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이기주의로부터 이끌어낸 '공평'이란 관념은 고양이보다 나은지는 몰라도, 지헤는 오히려 고양이보다 열등한 것 같다.

그렇게 산더미로 만들기 전에 얼른 빨아먹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내가 하는 소리 따위는 통하지 않으므로, 가엾지만 밥통 위에서 잠자코 구경만 하는 수밖에. (p.54)

 

주인은 에픽테토스라는가 하는 사람의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p.5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 - 에픽테토스 (김재홍 옮김,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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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심리만큼 이해하기 힘든 건 없다. 지금 주인의 심정은 노여워하고 있는지, 싱숭생숭하ㅐ하고 있는지, 또는 철학자의 유서에 한 가닥 위안을 찾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세상사를 냉소하고 있는지, 세상과 사귀고 싶은지, 쓸데없는 일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지, 세상사 모든 일에 초연해 있는지, 도통 짐작이 안 간다. (p.56-57)

 

이것도 결코 오래 계속되진 못할 게다. 주인의 마음은 내 눈알, 고양이 눈깔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무엇을 하건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사내다. 게다가 일기에선 위장병을 이렇게 걱정 걱정하고 있는 주제에, 겉으로는 제법 아닌 척하니 우습다. (p.59)

 

주인의 얘기에 따르면, 프랑스에 발자크라는 소설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단한 사치꾼이었다고 한다 - 하긴 이 사람은 입으로 본 사치꾼은 아니고 소설가니만큼 사치를 한다고 해도 문장에서 사치를 했다는 것이다. (p.6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나귀가죽 - 발자크 (이철의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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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면 지금이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내년까진 떡이란 물건의 맛을 못 보고 그대로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찰나에 고양이이긴 하지만 한 가지 진리를 감득했다.

'얻기 힘든 기회에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끔 하느니라.' (p.61)

 

마지막으로 온몸의 중량을 공기 바닥에 떨구듯 하여, 앙 하고 떡의 모서리를 한 입 정도 물어듣었다.

이만큼 힘을 주어서 물어뜯었으니, 웬만한 것이라면 물어뜯겼을 법도 한데, 참 놀랍다! 이제 됐다 싶어서 이를 벌리려 했으나 벌려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고쳐 물어뜯으려 했으나 꼼짝도 않는다.

떡은 요물이구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늪에 빠진 사람이 발을 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쿨럭쿨럭 깊이 빠져들듯, 깨물면 깨물수록 입이 무거워진다. 이가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반응은 있지만, 반응이 있을 뿐, 아무래도 결판이 나지 않는다.

미학자 메이테이 선생이 일찍이 이 집주인을 평해서 "자넨 우유부단한 사내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꼭 맞는 말을 했구나 싶다. 이 떡도 주인처럼 아무래도 우유부단하기만 하다.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3으로 10을 나누듯 끝장날 때는 없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번민하는중에 나는 문득 제2의 진리에 봉착했다.

'모든 동물은 직감적으로 사물의 적부적을 깨닫느니라.'

이미 두 가지 진리까지 발견했지만 떡이 달라붙어 있으므로, 조금도 유쾌함은 못 느낀다. 이가 떡에 달라붙어 빠질 것같이 아프다.

어서 물어뜯고 달아나야지, 오상이 온다. 아이들의 노랫소리도 끝난 모양이니, 이제 부텈으로 달려올 것임에 틀림없다.

번민 끝에 꼬리를 빙빙 휘둘러보았으나, 아무런 효능도 없다. 귀를 세웠다 눕혔다 해봐도 틀렸다. 생각해보니, 귀와 꼬리는 떡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요컨대 휘둘러 손해고, 세워 손해, 눕혀 손해인 셈이라고 깨달았으므로 그만두기로 했다. 그제야 이건 앞발의 도움을 빌려 떡을 떼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났다.

먼저 오른쪽 발을 들어 입 둘레를 두루 쓰다듬는다. 쓰다듬은 정도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기가 없다.

이번엔 왼쪽 발을 뻗쳐 입을 중심으로 하여 급격하게 원을 그려본다.

그런 푸닥거리로도 이 요물은 안 떨어진다. 참는 게 장땡이다 싶어 좌우를 번갈아가며 움직여보았으나, 여전히 입은 떡 속에 늘어져 있다.

"에이 성가셔!" 하고 양쪽 발을 한꺼번에 사용한다. 그랬더니 요상하게도 이때만은 뒷다리 두 개로 서지지 않는가!

어쩐지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고양이건, 아니건, 이렇게 된 바엔 아랑곳할 게 무어냐, 어쨌든 떡이란 요물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기세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온 얼굴을 마구 긁어댔다.

앞발의 운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쓰러질 뻔할 때마다 뒷발로 균형을 잡아야 하므로, 한곳에만 있을수 없어 온 부텈 안을 이쪽 저쪽 뛰어다니게 된다. 나 스스로도 참 잘도 서 있구나 싶을 지경이다.

제3의 진리가 졸지에 눈앞에 나타난다.

'위험에 임하면 평소 하지 못하는 바도 해낼 수 있느니라. 이를 일컬어 천우라 한다.'

다행히 '천우'를 향유한 내가 떡이란 요물과 싸우고 있자니, 발소리가 나고 안쪽으로부터 사람이 오는 것 같은 기척이 난다.

이판에 사람이 오면 큰일이다 싶어, 더욱더 필사적으로 부엌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온다. 아아 유감이지만 '천우'가 좀 모자란다. 마침내 어린애한테 들켜버렸다.

"어머, 고양이가 떡을 먹고 춤추고 있네" 하고 큰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게 오상이다. 하네 놀이를 하다 말고 뒷문으로부터 "어머나, 어머나" 하고 뛰어들어온다.

안주인은 가문이 새겨진 지리멘 차림으로 나타나서 "얄미운 고양이 같으니" 한다. 주인마저 서재에서 나와 "이 개 새끼 같은 놈!" 했다 (내가 왜 '개 새끼'인가, '고양이 새끼'지, 뭐).

재미있다 재미있어, 하는 건 어린애뿐이다. 그리곤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키득키득 웃고들 있다.

화는 나겠다, 고통스럽기는 하겠다, 춤은 그만둘 수 없겠다, 죽을 지경이다.

가까스로 웃음이 끝날 듯하자, 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엄마, 고양이도 보통이 아니넹" 라고 하며 키득댄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하고보자' 하고 흔들어댔더니, 다시 한 번 웃음바다가 됐다.

인간들의 동정심이 결핍된 행동을 퍽 많이 보고 듣고 했지만, 이때만큼 원망스럽게 느낀 적은 없었다. 드디어 '천우'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원래대로 네 발검음이 되어, 눈만 희번덕거리는 추태를 연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그런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싶었는지,

"아무튼 떡을 떼어줘라" 주인이 오상에게 분부한다.

오상은, '좀더 춤추게 내버려두죠' 하는 눈빛으로 안주인을 본다.

안주인은 춤은 보고 싶지만, 고양이를 죽이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잠자코 있다.

"떼어주지 않으면 죽는다니까, 어서 떼어줘라."

하고 주인은 다시금 하녀를 돌아다본다. 오상은 맛난 음식을 먹는 꿈을 꾸다 누군가의 방해로 깨워진 것마냥, 시무룩한 얼굴로 떡을 움켜쥐곤 쑥 잡아당긴다.

간게쓰 군은 아니지만, 앞니가 모조리 부러지는가 싶었다. 아프다 안아프다 정도가 아니라, 떡 속에 단단히 들어박힌 이를 인정 사정 없이 잡아당겨대니 어찌 견딘담.

'무릇 모든 안락은 곤고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제4의 진리를 경험하고 껌벅껌벅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집 사람들은 이미 안방에 들어가버린 후였다.

이런 실수를 했을 땐, 집에 있으면서 오상 따위한테 얼굴을 보이는 것도 어쩐지 겸연쩍다. 차라리 기분 전환으로 신작로의 이현금 선생의 암코양이 미케코라도 방문할까 하고, 부엌으로 해서 뒤꼍으로 나섰다. (p.62-64)

 

미케코는 이 근처에서 유명한 미모를 자랑한다. 나는 고양이임엔 틀림없지만 물정은 그런대로 대충 알고 있다. 집에서 주인의 씁스레한 얼굴을 보거나 오상한테 얻어맞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반드시 이 이성 친구를 방문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그러면 어느새 가슴이 후련해지며, 여태까지의 근심 걱정이나 고생살이도 모조리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여성의 영향이란 건 실로 막대한 것이다. (p.64-65)

 

나는 얌전히 세 사람의 얘기를 차례차례 들었지만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것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굳이 입을 운동시켜, 우습지도 않은 것을 웃기도 하고, 재미도 없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는 것 밖엔 별 재주가 없는 것들이라고 느꼈다.

우리 집주인이 고집스럽고 편협하다는 건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평소엔 말수가 적으므로 어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싶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점에서 얼마간은 두렵다는 느낌도 있었으나, 지금의 얘기를 듣고서는 갑자기 경멸하고 싶어졌다. 그는 어째서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들을 수가 없단 말인가. 질세라 시시콜콜한 얘기를 지껄여댄들 무슨 소득이 있을까. 에픽테토스의 책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단 말인가.

요컨대 주인도 간게쓰도 메이테이도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백성으로, 그들은 호로박처럼 바람에 불려도, 초연한 척하지만 실은 역시 세속적이며 욕심도 있다. 경쟁의 관념, 이기자 이기자 하는 마음은 그들의 일상 담소 중에도 언뜻 언뜻 풍기며, 한걸음 나아가면 그들이 평소에 매도해 마지않는 속골들과 한통속의 동물이 되고 마는 것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아 불상하기 그지없다 하겠다. 다만 그 언어 동작이 여느 얼치기처럼 판에 박은 것 같은 언짢은 냄새를 띠지 않은 건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한 점이리라.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세 사람의 담화가 재미없어졌으므로, 미케코의 동정이나 보고 올까 해서, 이현금 훈장님의 마당으로 간다. 설날을 위해 어린 소나무로 만든 장식들은 이미 철거되고, 정월도 벌써 초열흘이 되었으며, 화창한 봄날은 한 점의 구름도 보이지 않는 깊은 하늘로부터 사해 천하를 한꺼번에 비추어, 열 평도 못 되는 마당 표면도 새해 첫날의 서광을 받았던 때보다도 선명한 활기를 띠고 있다. (p.102-10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엥케이리디온 - 에픽테토스 (김재홍 옮김,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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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기만 하고 사람의 기척도 없으므로, 흙 묻은 발 그대로 툇마루에 올라 방석 한복판에 털썩 드러눕고 보니 그 기분좋기란! 그만 꾸벅 꾸벅 하며, 미케코 일도 잊어버리고 선잠ㅁ을 자고 있자니까, 갑자기 장지문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p.103-104)

 

"세상사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미케 같은 잘난 고양이는 요절을 하겠다. 못난 떠돌이 고양이는 건강하게 장난치고 있겠다...."

"누가 아니랍니까요. 미케 같은 귀염둥이 고양이는 종치고 북치고 하면서 찾아다녀도, 어디 두 사람이나 또 있을라고요?"

'두 마리'라는 대신에 '두 사람'이라고 했다. 하녀의 생각으로는, 고양이와 인간은 동일 종족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하녀의 얼굴은 우리들 고양이 족과 매우 유사한 것 같다.

"될 수 있었으면 미케 대신...."

"저 학교 선생네 떠돌이가 죽었더라면, 일이 제대로 됐을 걸 그랬네요."

일이 제대로 되었다간, 좀 곤란하다. 죽는다는 건 어떤 건지 아직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가타부타 말할 수도 없지만, 일전에 어찌나 추웠던지 재통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하녀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위에서 뚜껑을 덮은 일이 있었다.

그때의 괴로움이란, 생각만 해도 무서울 정도였다. 시로 군의 설명에 따르면, 그 괴로움이 거기서 조금만 더 계속되면 죽게 된다고 한다. 미케코 대신 죽는다면 불평도 없겠지만, 그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선 죽을 수가 없다면, 누구를 위해서도 죽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고양이라도 스님이 독경해주시고, 또 계명을 지어 주셨으니 미련은 없을 거야."

"그렇고말고요. 참말로 행복한 사람, 아니 고양이었죠. 다만 욕심을 말하자면, 그 스님의 독경은 너무 짧았던 것 같아요."

"그래, 너무 짧은 것 같길래, 대단히 빠르네요 하고 물었더니, 겟케이지의 그 스님은, 예, 효력이 있을 만한 대목을 조금 읽었습니다. 뭐 고양이니까 그 정도 해도 충분히 극락 세계로 갈 수 있답니다, 그러지 않겠니."

"어머 어머! ......그렇지만 그 놈의 떠돌이 고양이 따위는....."

나는 이름은 없다고 자주 자주 말해두는데도, 이 하녀는 '더돌이' '떠돌이' 하고 불러댄다. 실례도 유만부동한 놈, 아니 년이다. (p.105-106)

 

요즈음은 외출할 용기도 없다. 어쩐지 세상사가 뜨악하게만 느껴진다. 이 집주인에 못지않은 나태한 고양이가 되었다. 주인이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는 걸 남들이 실연했다, 실연했다고들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여기게끔 되었다.

쥐는 아직도 잡아본 적이 없으므로, 한때는 오상한테서 추방론마저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주인은 내가 보통 고양이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여전히 핀둥핀둥 이렇게 이 집에 기숙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선 주인의 은혜에 깊이 감사함과 동시에, 그 활안에 경복의 뜻을 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바이다. (p.106)

 

3. 가관인 주인님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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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1월 11일 ~ 1916년 1월 9일)

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市ヶ谷学校)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和三郎)의 아내 도세(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雑司ヶ谷霊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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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김난주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장현주 옮김, 새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김영식 옮김, 문예 세계문학)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서은혜 옮김, 창비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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