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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천하무적 - 김남일 (창비)

by handaikhan 2023. 7. 10.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5권)

 

목차

 

김남일
천하무적

김영현
포도나무집 풍경
벌레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고독

김하기
살아 있는 무덤

주인석
광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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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 천하무적 (1991년)

 

어린 시절 밤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저 우주에 끝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고,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밤하늘이다. 만일 저 밤하늘에 끝이 있다면 그 바깥은 무엇일까? 가령 하늘을 나는 돛단배를 타고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갑자기 툭 떨어지는 가파른 낭떠러지라도 나타나게 될 터인가? 아니면 우주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무궁한 미궁이란 말인지...그런 생각은 마침내 나이 어린 당신을 절망과 비슷한 미혹의 세계로 이끌고 갔을 텐데. 그쯤에서 당신은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사람은 왜 나고 또 죽는가, 죽으면 다시 그 세게는 무엇인가 하는 끝없는 의문을 던지게 마련이다.그런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간혹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때가 온다.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남들보다 무엇인가 조금은 나은 측면이 있기를 바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별쭝맞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리켜 세속의 때가 묻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차피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p.13-14)

 

나는,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이제 늙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증명할 수 있다. 가령 해를 더할수록 함진아비 노릇을 할 기회가 줄어듦에 따라 부의를 낼 퀘는 더 많아지는 것도 그 하나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문득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고, 내가 아는 아무개 시인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갑자기 "내가 마흔다섯 살이나 처먹어버렸네" 하고 말했다. 마흔다섯 살. 솔직히 아직까지 그런 나이는 어느 날 갑자기 '처먹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줄잡아서 에닐곱 달 전의 일인데, 그 바로 얼마 후 그는 다시 징역을 살러 들어갔다. 나는 그가 우리 앞으로 써 보낸 편지 속의 몇 구절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벗들! 세 번째의 징역살이가 두 달이 넘어 어언 세 달로 접어들었다....벗들! 그리고 나는 노자를 만났다.....벗들! 그렇듯 개뼈다귀 같은 화두를 눈병처럼 찾아온 노자가 풀어준 것이다.....벗들! 안심하시라. 나는 천하무적의 길로 가려 한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잘 먹고 잘 살자. 잘 있어라.

 

그 글자들은 봉합엽서 속지에 하이힐 자국처럼 또박또박 박혀 있었지만, 짙게 풍겨 나오는 술 냄새만큼은 여전히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술 냄새는 그것을 읽는 우리를 취하게 하기는커녕 맡을수록 우리의 정신 한구석을 잔뜩 긴장시키는, 말하자면 동시 상영하는 싸구려 홍콩 영화를 보다가 느닷없이 느끼는 <취권>의 감동 비슷한 것을 동반하고 있었다.

벗들! 안심하시라. 나는 천하무적의 길로 가려 한다.

감히, 그는 그렇게 썼고, 감히, 나는 그 말을 믿었다.그가 편지를 써 보낸 직후, 면회를 가서 그를 만났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천하무적의 길을 찾아낸 도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술에 찌든 우리 눈에, 그는 다만 한 사람의 초라한 죄수에 지나지 않았다.

"어때, 견딜 만한가?"

"이젠 아주 징그럽습니다, 형님."

내가 모시가 간 문단 선배는 그의 대답이 오히려 징그러운지 고개를 외로 틀었는데, 면회실의 두꺼운 유리벽을 뚫고 겨우 전달되어오던 그 목소리는 진종일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 표정! 사람은 참으로 쓸쓸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때 무서움을 느낀다. 유리벽을 다시 두 겹으로 가모막은 철창의 그물코 사이로 찢긴 채 들어오던 그의 얼굴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볼짱을 다 본 별 셋짜리 전과자의 체념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묘한 구석도 품고 있는 웃음이었다. 사실, 그는 그에게 들씌워진 거창한 죄목에도 불구하고 매우 허망한 빌미로 그 안에 갇히고 만 것인데, 세 번 모두 그랬다. 솔직히 말해 그가 도로교통법 위반이나 고성방가, 노상방뇨 따위로 하루 이틀 유치장 신세를 진다면 그를 아는 누구나 능히 그럴 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의 평소 언행에서 어렵잖게 경범죄 혐의를 느끼는 바로 그 사람들은 싫든 좋든 그가 벌써 세 번째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그것도 세 번다 국가와 체제의 안녕과 질서를 현저히 위태롭게 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음을 되새겨야 한다. 문제는 밖에 남은 우리들이다. 우리는 금방 그의 일을 잊어먹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술자리에서 그와 연관된 즐거운 일화들을 끄집어냈고 결국 다음 날 아침 내친김에 사당동 전철역 앞에서 모이자고 작정했다. 말하자면 피차 무심한 나날의 한 부분을 조개어 면회라도 가는 것이 기왕에 연을 맺은 자들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판단 때문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라기보다는 훗날 저자에서 있게 될 그와의 재회를 염두에 둔 체면치레였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이를 먹는 것이다. (p.14-16_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변신 - 프란츠 카프카 (김태환 옮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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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혁은 문득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은 양의 슬픔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꽉 막힌 연통처럼 답답하기만 하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듯했다.

돌아서는데, 문득 눈에 확 들어차는 것이 있었다. 액자였다. 구자혁은 늘 그 자리에 걸려 있었을 그것을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지내면 행복의 순간이 찾아오리니....그 순간, 구자혁은 딱딱한 물건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액자가 영등포 역전 그 여자의 어둠침침한 방 안에도 걸려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p.2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박형규 옮김, 써네스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겨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어라.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워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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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는 무엇인가 분명한 결론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써 내려오면서 나는 내게 그럴 만한 능력이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마무리를 어떻게 짓는단 말인가. 결론을 내릴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천하무적이라니! - 그런 길은 과연 있을까. 아니, 있더라도 과연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가치란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버릴 많날 때 생긴다. 그런데 어떤가. 지금, 바로 이 순간,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이곳은....아직 살아 잇는 사람으로서 나는 죽어보지 못해 잘은 모른다. 그렇지만 한 소년의 목숨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만일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서울 땅에 발을 디딘 지 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열여덟 살짜리 소년 제화공은 그런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도대체, 그 가공할 힘을 지닌 '가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소년. 도대체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다 죽은 소년 - 그의 죽음에 대해 나는 도 무엇인가.

여름밤은 붉은 십자가와 휘황한 장급 여관 간판들로 더욱 길고 무덥다. (p.41-42)

 

<문예중앙> (199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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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1957-)

대한민국 소설가.

195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네덜란드어를 전공했고,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 『청년일기』,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청소년소설 『모래도시의 비밀』, 『골목이여, 안녕』, 인물평전 『안병무 평전』, 산문집 『책』 등이 있다. 제2회 아름다운 작가상, 제비꽃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2012년 권정생 창작기금을 받았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과 ‘한국-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책임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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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 김남일 (고려원)

청년일기 - 김남일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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