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30
목차
최인호
타인의 방
깊고 푸른 밤
오탁번
굴뚝과 천장
한수산
타인의 얼굴
박범신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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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 깊고 푸른 밤 (1982년)
그는 약속대로 오전 여덟 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뻣뻣한 팔을 굽혀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각 아침 여덟 시였다. 누가 깨워준 것도 아닐 텐데 그처럼 곤한 잠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정확한 시간에 자명종 소리를 내어 깨워준 셈이었다.
낯선 방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디서 잠들어 있는가를 아직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 헤아려보았다. 그는 눈이 몹시 나쁜 사람이 안경도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이는 것은 모두 흐릿했고 머리는 죽음과 같은 잠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갈피마다 낀 듯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집안은 조용했고, 닫힌 커튼 사이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비비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따. 한 삼십 분 더 잠을 잘 수 잇는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p.32-33)
"잘됐습니다. 우리도 모처럼 피티를 벌일 참이었는데 실컷 노세요."
그들은 이미 전주가 있었는지 다들 눈이 풀어져 있었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었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 두 시까지 그들은 떠들고 웃고 그리고 춤을 추었다. 취한 여인 중의 하나가 풀장에 들어가 옷을 입은 채로 수영을 했다. 그는 취한 김에 그 여인을 따라 팬티만 입고 물속에 뛰어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홉 시부터 밤 두 시까지 무려 다섯 시간을 그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마시고 먹고 춤을 추고 나중에는 몹시 다투기도 했지만 잠들어 있는 그들의 얼굴은 전혀 낯이 설었다. 그들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가 그들과 싸웠는지, 옷을 입은 채 풀장에 뛰어든 여인은 누구인지, 준호의 안경을 찾으며 거실을 샅샅이 돌아다니는 그의 마음은 두터운 암벽과도 같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간밤에 그토록 지루한 여행 끝에 마침내 이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초인종을 누르자 불빛 아래에서 나타나는 얼굴들을 보며 이상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쓴 사람처럼 보였다. 몸은 지치고 피로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제 마악 임종을 한 뒤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 거칠고 황량한 어두운 벌판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우연히 만나 아직 이승에서 방황하는 죽은 자들의 혼령들처럼 보였다.
이제 다시는 잠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며 또다시 그들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여행을 떠나고 나서부터 아름다운 풍경이나 거대한 사막, 선인장, 눈 덮인 요세미티 공원의 절경을 볼 때면 언제나 그런 감상적인 비애를 느끼곤 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시속 칠십 마일의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차창에 잠시 머물다 스러지는 저 풍경은 또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의 만남이 영원한 과거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 저 끝 간 데를 모르는 벌판, 초록의 융단 위에 구름에 가리어진 빛의 그늘이 대지 위에 이따금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날 우린 흐린 저녁불 아래에서 두 손으로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보곤 했었지. 여우, 토끼, 개의 그림자를 손가락을 구부려 벽에 만들어보곤 했었지.
짖궂은 구름은 이따금씩 하늘의 햇빛을 가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어떤 때는 여우비를 뿌리고 어떤 때는 얽힌 대지의 머리칼을 빗질하듯 슬며서 쓰다듬고는 사라지곤 했다. 그러한 것. 잠시 보이는 구름의 장난으로 여우비를 내리고 심심풀이 장난으로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찰나적인 어둠도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저 구름도, 햇빛도, 먼 벌판에 민머리로 빛나는 구름도. 가끔 거웃처럼 웃자라 있는 몇 그루의 나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나온 5번 도로도, 101번 도로도, 죽음의 계곡도, 사막도, 베이커즈필드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웃음소리는 영원히 기억됮 ㅣ않을 것이며, 그들은 이제 이 한 번만의 해후로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p.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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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崔仁浩, 1945년 10월 17일~2013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1945년 10월 서울에서 변호사였던 아버지 최태원과 어머니 손복녀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가족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서울로 돌아와 이후로는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1958년 덕수국민학교(현 덕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대 말 이후 1970년대에는 청년적인 감수성으로 현대사회의 모순을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독특한 주제의 소설로 주목받았으나, 다수의 대중소설을 통해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1974년에는 세계 14개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1975년 이후에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감독을 하는 등 영화 관련 활동도 병행하였다. 1980년대 이후 2000년대에는 여러 장편역사소설을 통해 대중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 시기 발표된 많은 소설이 영화 또는 TV드라마로 각색되었다. 1993년과 1994년에는 역사장편소설의 취재를 위해 일본과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1975년 이후 월간잡지 『샘터』에 34년 6개월 동안 인기리에 연재한 연작 수필 「가족」은 최인호의 종교(가톨릭) 및 가족사와 연관된 사항을 잘 알려주는 작품이다. 2000년대에도 대중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이었던 그는 2008년 침샘암이 발병한 이후 수년의 투병 끝에 2013년 9월에 운명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였으며, 대학 재학 중이던 1967년에 단편 「견습환자」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0년대에는 「모범동화」(1970), 「타인의 방」(1971), 「전람회의 그림」(1971), 「무서운 복수」(1972), 「기묘한 직업」(1975) 등의 단편소설로 산업화 과정에서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 병리 현상을 기발한 착상과 우의적 서사 전개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별들의 고향』(1972), 『바보들의 행진』(1973), 『천국의 계단』(1978), 『불새』(1979), 『겨울나그네』(1984) 등의 장편소설로 대중적인 인기는 얻었으나 퇴폐주의 또는 상업주의 작가라는 비판을 들으면서 평단의 주목에서 멀어져갔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걷지 말고 뛰어라」를 감독하였으며, 군부독재와 급격한 산업화에 시달리는 청년세대의 아픔을 희극적으로 다루는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의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종교나 역사를 다루는 장편소설에 주력하여 『잃어버린 왕국』(1984), 『왕도의 비밀(제왕의 문)』(1991), 『상도』(1997), 『해신』(2001), 『유림』(2005)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작품들이 TV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투병 중이던 2011년에는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로 그동안의 대중적인 경향을 넘어 현대사회를 성찰하는 새로운 소설 창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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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 최인호 (문학동네)
상도 - 최인호 (여백)
몽유도원도 - 최인호 (열림원)
잃어버린 왕국 - 최인호 (열림원)
해신 - 최인호 (열림원)
견습환자 - 최인호 (문학동네)
타인의 방 - 최인호 (민음사)
겨울나그네 - 최인호 (열림원)
달콤한 인생 - 최인호 (문학동네)
별들의 고향 - 최인호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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