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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마당깊은 집 -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by handaikhan 2023. 6. 26.

김원일 - 마당깊은 집 (1988년)

 

고향 정터거리의 주막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선례누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누나를 따라 대구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 심한 차멀미 탓도 있었겠지만, 풀죽은 내 ㅅ니세가 팔려가는 망아지 꼴이었다. 왠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생활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삼 년 동안의 전쟁이 멈춘 휴전 이듬해였으니, 1954년 4월 하순이었다. 나는 전쟁이 났던 해 겨울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으므로 삼 년만에야 비로소 식구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는 셈이었다. 대구시는 내게 낯선 도시였다. 누나를 따라 진영에서 대구시로 오니 이미 중학교 입학 시기는 끝난 뒤였다. 

우리집은 대구시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약전골목과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종로통을 낀 장관동이었다. 아니,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가족은 장관동 어느 한옥 아래에 방 한 칸에 사글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장관동은 번지수가 이백오십 정도에서 끝나는 작은 동으로, 손수레나 지나다닐 수 있는 좁장하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남북으로 삼백 미터 남짓 빠져나가면 양쪽 끝이 다른 동과 경계선으로 구획지어졌다. 골목길 가장자리에는 덮개 없는 하수구가 있어, 겨울 한철을 빼곤 늘 시궁창 냄새가 났고 여름이면 분홍색을 띤 장구벌레떼가 오골거렸다. 동을 마름모꼴로 잘라낸 사방은 포장된 대구시 간선도로에 싸여 있었다. 우리 가족이 새들어 있던 집은 장관동을 남북으로 비스듬히 뚫어 약전골목에서 종로로 빠져나가는 그 긴 골목 중간쯤에 있었다. 장관동은 일제 시대를 거치며 개수된 삼사십 평의 나지막한 디귿자형 기와집이 태반이었는데, 우리 가족이 세들었던 집은 장관동에서도 몇 되지 않는 칸수 많은 널따란 대갓집 중 하나였다. (p.9-10)

 

어머니 앞으로 등기된 우리집을 장관동에서 처음 마련한 1966년까지 우리가 그 부근에서 옮겨다닌 셋방만도 아홉 집이나 되었다. 짧게는 일 년을 못 채우고 오래 산 집은 삼 년 가까이 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대구시로 나왔을 때 살던 집을 다른 셋방 집과 구별하려 우리 식구는 그 너른 집을 말할 때 '마당깊은 집'이라 불렀다. 간난스럽던 지난 시절을 이야기할 적이면, 으레 "그 마당깊은 집에 살 적에..."란 말을 곧잘 쓰곤 했다. (p.10)

 

"길남아, 내 말 잘 듣거라. 니는 인자 애비 읎는 이 집안의 장자다. 가난하다는 기 무신 죈지, 그 하나 이유로 이 세상이 그런 사람한테 얼매나 야박하게 대하는지 니도 알제? 난리 겪으며 배를 철철 굶을 때, 니가 아무리 어렸기로서니 두 눈으로 가난 설움이 어떤 긴 줄 똑똑히 봤을 끼다. 오직 성한 몸뚱이뿐인 사람이 이 세상 파도를 이기고 살라 카모 남보다 갑절은 노력해야 겨우 입에 풀칠한다. 니는 위채에 사는 학생들과 처지가 다른 기라. 양친 부모 있고, 집 있고, 묵을 것 넉넉하이까 저들이사말로 머가 부럽겠노. 지만 열심히 공부하모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겠제. 돈 있고 집안 좋으니 남보다 출세도 빨리 할 끼라. 니가 위채 학생들보다 갑절로 노력해서 어른이 되더라도 그 차이는 하나 달라지지 않고 지금 처지와 똑같을란지 모른다. 그렇다고 가뭄 심한 농사철에 농사꾼이 하늘만 쳐다본다고 어데 양식이 그저 생기겠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늘 위채를 올려다보는 길밖에 더 있겠나. 내사 인제 너그 성제간 잘 크고 남한테 눈총 안 받으며 사람 구실 하고 사는 기나 바라보고 살아갈 내리막 인생길 아인가....."

어머니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머리 숙이고 있던 나는 눈을 조금 치켜떠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속눈썹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아직 마흔 살도 안 된 나이에 어머니는 노인 티를 내고 있었다. 사실 어머니는 전쟁이 나고 서너 해 사이 나이를 곱절로 먹은 듯 윤기 흐르던 탱탱한 살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손수건에 물코를 풀곤 말을 이었다.

"길남이 니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창창한 세월이 남았잖아. 그러이 지금부터라도 악심 묵고 살아야 하는 기라. 내가 보건대 지금 우리 처지에서 니 장래는 두 가지 길밖에 읎다. 한 가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배운 바 실력이 남보다 월등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평양댁 정민이 학생 봐라. 아부지 읎이 저거 엄마가 군복장수해도 공부를 얼매나 잘하노. 위채 학생 둘 가르쳐서 번 돈을 가용해 보태고, 열두시 넘이까지 호롱불 켸놓고 자기 공부를 안하나. 그러이 반장하고 늘 일등이라 안카나. 갸는 반드시 판검사나 대학교 교수가 될 끼다. 또 한 가지, 니가 이 세상 파도를 무사히 타넘고 이기는 길은, 세상살이를 몸으로 겪어 갱험을 많키 쌓는 길이다. 재주 읎고 공부하기 싫으모 부지런키라도 해야제. 준호아부지는 한 팔이 읎어도 묵고 살겠다고 매일 아침에 집을 나서잖나. 남자는 그렇게 밥숟가락 놓자말자 밥상을 걸터 넘고 나서서 부랄이 요령 소리 나도록 뛰댕겨야 제 식구를 믹이살린다. 그러이 내 하는 말인데, 니도 이렇게 긴 해를 집에서마 보내기 오죽 심심하겠나. 그래서 내가 궁리를 짜낸 끝에 그 돈을 니한테 주는 기다."

"이 돈으로 멀 우째 하라고예?"

나는 어리둥절하여 손에 쥔 돈을 내려보았다.

"길남아, 그 팔십 환으로 신문을 받아서 팔아봐라. 신문 팔아 돈을 얼매만큼 벌는 기 문제가 아이라, 니 힘으로 돈벌이 해보모 돈이 얼매나 귀한 줄 알 수 있을 끼다. 이 세상으 쓴맛을 알라 카모 그런 갱험이 좋은 약이 될 테이께. 초년 고생은 돈 주고도 몬 산다는 속담도 있느니라...."

내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어머니의 옹이 박인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그 말씀은, 입학기가 지난 뒤 나를 대구로 불러올렸을 때 이미 에정해둔 계산임이 분명했다. 시골서 내놓은 망아지로 지내며 초등학교나마 근근이 마치고 올라왔으니 한 해 동안 도시 물정이나 익히게 하며, 제가 벌어 제 학기블 조달할 수 있는 길을 뚫게 해주자. 어머니는 그런 궁리를 해두었고, 내가 대구시로 나온 지 열흘쯤 지나자 드디어 실행의 용단을 내렸음에 틀림없었다. (p.31-33)

 

저녁밥을 먹을 때 어머니는, 물난리가 이렇게 심한데 아무리 팔자 좋은 한량이라도 누가 요릿집에 퍼질러앉아 상다리 부러질 술상 받게 됐느냐는 말만 했다. 이렇게 일거리가 없어서야 우리도 굶어죽겠다며, 어머님은 밥맛조차 없는지 밥을 반그릇도 못 비우고 숟가락을 상에 놓았다. 어머니가 남긴 밥을 보자 내 숟가락질이 더욱 빨라졌다. 내 밥을 어서 먹고 어머니가 남긴 반그릇을 내 목승로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길남아, 내 남긴 밥 니가 묵거라."

쪽마루에 나앉은 어머니 허락까지 떨어지자, 나는 어머니가 남긴 밥을 호박잎 넣고 끓인 내 된장국에 얼른 부어버렸다. (p.51-52)

 

마당깊은 아래채가 꺼져 있다 보니 바람이 지붕 위로만 건너가는지 저녁밥을 먹고 쪽마루에 나앉으면 가슴패기로 땀이 고랑을 팠다. 더욱 장마 뒤끝에 모기떼가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날마다 방장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예닐곱 군데는 그놈들에게 쏘임을 당했다. 그럴 때, 바람이나 쐬러 종로나 약전골목 한길로 나서면, 수박 한 통에 새끼줄로 각진 얼음덩이를 묶어 들고 귀가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큰 양푼에 잘 익은 수박을 숟가락으로 퍼내어 담고, 거기에 얼음덩이를 조각내어 섞고 사카린을 풀어 식구가 한 그릇씩 나누어 먹는 생각만 해도 나는 절로 등줄기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면 대체로 남의 먹성에 무관심한 체하는 길중이까지 쪽마루에 나앉아 그쪽을 흘깃거리며 맹물로 고이는 침을 삼키곤 했다. 우리집은 그해 여름 그런 수박 잔치르 ㄹ한차례도 벌인 적이 없었다. 그 소원을 우리 식구가 풀어보기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수박 잔치는 고사하고, 우리 식구가 점심밥조차 굶으며 보낸 그해 여름에 관해서는 나조차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점심때면 복술이와 준호를 따라다닐 힘도 없는지 막내아우 길수는 위채 지대 아래를 앙가발이걸음으로 아장거렸다. 노마님과 식모 안씨가 마루에서 점심밥을 먹으면 사팔뜨기 눈으로, 마치 주린 강아지처럼 지내 아래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식사를 입맛 다시며 지켜보곤 했다. 어느 날 하루 길수는, "아이구, 점심 굶는 길수가 불쌍쿠나. 여게 온나. 내 밥 쪼매 주꾸마" 하는 노마님의 선심으로 점심 한 끼니를 얻어먹은 모양이었다. 신문팔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어머니는 길수의 저녁밥을 굶겼다. 거지 새끼마냥 위채에서 한 끼니를 얻어 처먹었으니 저녁밥은 굶어도 싸다고 어머니는 냉담하게 말씀하셨다. 길수는 어머니 말귀를 못 알아들어 왜 자기가 저녁밥을 굶는지 모르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맥빠진 소리로 울음만 질금거렸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길수는, 배가 고프다며 앓는 강아지처럼 내내 훌쩍였다. 어머니는, 거지도 아닌데 거지 새끼처럼 왜 위채에서 밥을 얻어먹었냐며 짗어구만 놓을 뿐 길수의 설움을 달래주지 않았다. 길수를 달래주는 방법은 오직 밥뿐인데, 그 애가 먹을 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삼베 홑이불을 둘러쓰고 우는 길수의 울음은 내가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제서야, 밥 안 얻어묵겠다는 말을 울음 속에 여러 차례 옹알거렸다. 다섯 살배기였지만 그날의 경험은 길수의 아둔한 머리로도 깨친 바 있었던지, 이튿날부터는 위채 축담 아래를 아장거리지 않았다. 전쟁 와중에서 겪은 쓰라린 체험은 어머니를 그렇게 정없이 메마른 여자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나 역시 그해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여름을 보내었다. 허기, 우울, 권태,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증오했고, 나는 고향에서의 주막 더부살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겼다. 나는 늘 가출할 생각만 했다. 허겁지겁 먹는 꿈이 아니면 길수의 유아기처럼 배들배들 말라 굶어죽는 꿈만 꾸었다. 거리를 걸을 때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였다. 나는 뼈 없는 낙지 꼴로 신문을 끼고 노란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낮이 유난히 긴 그해 여름 동안 나는 집을 떠나지 못했고, 허기로 길거리에 쓰러지는 불상사 없이 겨우 살아남았다. 차라리 길거리에 쓰러져, 어느 자식 없는 부잣집 마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으로 데려가 머슴으로라도 부려먹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루 세 끼니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쓰러진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왜무 같은 껑충다리의 길중이는 그해 여름 잘 넘어졌다. 그는 동무가 없어 놀러 다닐 줄을 몰랐고 애늙은이같이 늘 표정도 말도 없었다. 방에 있을 때는 바느질 일을 하는 어머니의 잔심부름을 하고, 쪽마루에 나앉아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은지 멍하니 하늘 바라기로 시간을 떼웠다. 시험지는 늘 백 점만 받아왔으나 결코 뛰어다니는 법이 없는 그가 걸핏하면 다리를 휘청하여 넘어져 무릎을 깨곤 했다. "아무리 점심밥을 굶는다지만 니놈 다리는 고무다린가. 제대로 서지도 몬하게." 어머니가 이렇게 퇴박을 해도 길중이는 겁먹은 댕그란 눈만 껌벅일 뿐 대답말이 없었ㄷ. 길중이가 그렇듯 선레누나 역시 야무졌다. 굶는 봉창이라도 하듯 누나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누나의 희망은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길이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아이들 가르치며 풍금 치며 그렇게 살고 싶어." 누나가 곧잘 하는 말이었다. 전쟁이 나던 해 누나는 초등학교 오학년이었고, 꿈 많은 소녀 시절에 전쟁의 참상을 혹독히 겪은 탓인지. '평화로운 가정'이니 '평화로운 시간'이니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란다'는 따위의, 평화란 말을 유독 즐겨 썼다. 

그해 여름을 넘길 동안 내가 했던 비행 한 가지는 그뒤 오랫동안 내 마음을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그 추억만 떠올리면 괴로움과 연민으로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p.69-72)

 

"길남아. 니가 밤중에 우리 부엌으로 들어오는 거 안데이."

"아, 아지매가 봤다 말이지예?"

"내 누구한테도 그 말 안 할 테이 다시는 그런 짓 말거래이. 설령 점심밥을 굶어 배가 쪼매 고푸더라도 사나이 대장부가 될라카모 그 쭘은 꿋꿋이 참을 줄 알아야제. 너거 어무이는 물론이고 성제간도 그렇게 참으미 이 여름철을 힘겹게 넘기고 안있나. 내 아무한테도 이 말 안 하꾸마."

안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 빠뜨린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알았심더." 내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안씨 충고에는 도둑이란 말이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았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고개 빠뜨린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어느 사이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씨가 내 밥도둑질을 어머니한테 귀띔했다면 나는 숯포대 회초리로 종아리며 등줄기에 지렁이 자국이 나도록 매를 맞았을 테고, 몇 끼니 밥은 굶게 되었을 터였다. 또한 두고두고 어머니로부터, "집안으 장자가 남으 밥도둑질까지 하다니" 하는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씨는 내 행실을 왜자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그뒤부터 나는 남의 물건이라면 운동장이나 교실 바닥에 떨어진 동전, 도막 연필이라도 내 것으로 하지 않았으니, 그때 안씨의 그 따뜻한 충고 덕분이었다.

밥 훔쳐먹은 이야기까지 했으니 한마디 더 보탠다면, 세 끼니 먹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된 지 오래인 지금도 나는 배를 가득 채워야 숟가락을 놓는 식사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위장을 늘 칠 할쯤만 채워라.' '과식이 모든 성인병의 주범이다.' '허리둘레는 수명과 필연의 관계가 있다.' 모두 옳은 말인 줄 알지만 포식을 하지 않곤 밥을 먹은 것 같지 않고, 그렇게 맛 좋은 밥의 양조차 줄여가며 오래 살기보다는 차라리 수명이 얼마쯤 단축되는 쪽을 택하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고 깨면 아침 밥상을 빨리 받고 싶고, 아침밥 먹고 나면 점심 외식은 무엇으로 할까, 저녁 밥상에는 이런 찬이 올랐으면 좋겠다는 상상이야말로 하루를 살아가는 보람 중에 가장 중요한 일건의 하나요, 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당신 허리 둘레가 얼만지 아세요? 몇 년 전까지만도 삼십육이라더니 이제 삼십팔이잖아요. 애들이 손가락으로 아빠 부른 배 콕콕 찌르며 배불뚝이라 놀려도 부끄럽지 않아요? 제발 밥 양 좀 줄이세요. 이제 아침 식사 생략하는 집도 많대요. 밥을 줄이는 대신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으면 오죽 건강에 좋아요." 아내는 날마나 노래 삼아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다른 무엇은 절제할 수 있어도 밥 양은 줄일 수 없다. 찬을 많이 먹고 밥을 적게 먹어야 함이 좋은 줄은 알고 있으나 라면이나 빵 따위는 배에 차지 않고 오직 밥으로 배를 채워야 한끼를 때운 것 같다. 몇 년 전, 아내가 내 밥그릇을 주먹만한 공기로 대치했을 때 나는 벌컥 화를 내고 말았으니, 먹는 데 포원이 진 내 경우로서는 그런 수모를 참아낼 수 없었다. 집안 사정이 엔간히 피고 난 뒤부터 육류를 즐겨 자시던 과식이 원인이 되어 어머니는 결과적으로 고혈압을 얻었고, 예순 중반에 그 병으로 볈세하셨다. 그러나 그 사례조차 내게는 교훈의 되지 않았다. (p.74-75)

 

떨기나무들이 모두 잎을 떨구고, 가을이 깊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아무래도 따뜻한 절기가 살기에 수월했다. 나무들이 빈 가지로 서서 찬바람에 후두들기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또 엄동 한 시절을 어떻게 넘길꼬 하며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부터 추위로 옹송그려지게 마련이었다.

5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도회지조차 가정용 연탄이 보급되기 전이라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전이 먼저 성시를 이루었다. 잘사는 집은 통나무를 트럭째 두세 차 분량을 한꺼번에 사서 담에 붙여 마당 가장자리에 높다랗게 쌓아두었다. 찬바람이 불 무렵부터 어느 집이든 그 집으로 나들이를 가면 담장 밑에 쌓아놓은 장작 양을 보고 그 집의 살림 규모가 어느 정도임을 측정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p.97)

 

그날 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 겨울에 쫓겨나게 되면 어쩌냐, 내 집 한 칸 없는 설움이 이렇구나 하며 한숨만 쉬셨다. (p.108)

 

준호아버지가 두 상이군인을 바깥마당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정태씨가 신문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박선생님, 오늘 무슨 모임이 있는 모양이디요?"

"낮에 종합운동장에서 '개헌안 통과 찬성 반공 궐기대회'가 있나보우. 지난 봄에두 그 비슷한 행사에 난 빠졌더랬는데 이번엔 꼭 나오라구 저렇게 성화구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신문에는 아딕 그 기사가 없어지디 않구먼요. 박선생님,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네까. 총 이백이 표 중 찬성이 일백삼십오 표, 부결이 육십 표, 기권이 칠 표라. 통과선 한 표가 모자라서 부결 처리 허구서는, 이틀 뒤 사사오입이란 소학생 산수놀음 잔꾀를 궁리해서 번복허더니 새로이 통과 가결을 선포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나요?"

정태씨가 신문 한 귀퉁이를 손가락질하며 흥분했다.

"잔꾀는 잔꾄데, 졸렬하다는 생각은 들더먼요."

"국회가 어디 그런 잔꾀나 부리라구 우리가 세금 내갔이요."

"이박사 그 양반이 대통령 더 하구 싶어 그렇게라두 헌법을 고친 게 아닙니까. 그런 높은 자리 앉으면 누군들 쉽게 내놓겠수. 무슨 욕망보다두 권력욕이 무섭다는 건 세계 정치사가 잘 말해주는데. 그 욕망이야말루 상위 개념이라 자잘한 다른 모든 욕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니깐요."

"박선생님은 그 궐기대회란 데 나가실 작정입네까?"

"문전박대나 당하는 병신들이 그런 대회에나 쫓아다닌다구 누가 우리 식구 생활을 보장해주우.

"오직 그 니유 때문에?"

"나두 성깔깨나 있었는데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습디다. 전쟁 뒤끝이라 그렇기두 하겠지만 이 자유주의란 세상은 사람을 사람으루 알아주지 않구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게 너무 심한 것 같긴 하우."

"말씀 잘허셨습네다. 사실이 그래요. 반공 궐기대회두 그렇디요. 돈으루 사람을 사서 억지 대회를 열다니. 반공? 쳇, 반공으루 인민을. 글티 안디, 백성을 꼼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구 평생 반토막 나라 제왕 노릇이나 하라지."

자기네 방으로 들어가려던 준호아버지가 정태씨의 빈정거림에 무슨 생각이 났던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분이 쪽마루에 정태씨와 나란히 앉았다.

"최형은 반공을 싫어하는가 보우. 반공이 왜 싫으우?"

어투는 시비조였으나 준호아버지 목소리는 차분했다.

"한쪽은 반공만 주장하고, 한쪽은 친공만 앞세우니 통일이 어려울 것 같아 해본 소리라요. 어느 쪽으루든 이 민족은 통일부터 이뤄놓구 봐야 허는데...."

"내 소견으루 반공을 앞세워 선량한 시민을 무작하게 다스리는, 이를테면 반공 제일주의으 처형이나 고문이나 테러가 아닌, 순수한 뜻에서으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승공 궐기대회는 전쟁 치른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하다구 생각하우."

"극우 반공주의자에게 그런 주문이 통할 것 같시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따지고 보믄 극좌 또한 얼마나 많은 인민을 반동이란 명목으로 처형했수."

"글쎄요. 반공이란 말을 너무 많이 들으니 이젠 식상해서 그런디 저로서는...."

"최형 같은 반골은 어느 체제든 쉽게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자유으 소중함을 깨워주기 위해서두, 또 총들구 직접 싸워보지 않은 최형 같은 이를 위해서두 반공 정신은 필요하다구 보우. 므슨 말인구 하니, 이 땅에서 전쟁과 폭력 혁명을 선봉하는 자들은 무조건 사라져야 한다구 봅니다. 우리 전우가 목숨 바쳐가며 어떻게 지켜온 자유입니까. 아직 참다운 자유주의를 제대루 실행해보지 못해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남한으 자유주의는 문제점이 없지두 않지만 말입니다."

"....."

정태씨는 준호아버지를 쏘아보기만 할 뿐 입을 꿰고 있었다.

"내가 반공 궐기대회에 안 나가는 건 이박사가 반공을 구실루 대통령 오래 하겠다는 점보다두, 내 생활이 여의치 않다 보니 그런 일에 짬을 내기두, 전우를 만나기두 면목이 없을 따름일 때문이라우."

"선량한 소시민이십네다. 나두 뭐 박성샌님 같은 분 앞에서 중뿔나게 내 주장을 펼 닙장이 못 됩니다만....어쨌든 이번 전쟁이 반공주의자와 친공주의자를 확실하게 갈라놓은 셈이웨다. 전쟁 전에는 사상적 주의자 외는 그렇게까지 동포를 서루 증오하지는 않았잖습네까."

"맞아유. 미국과 소련으 체면 살리는 대리 전쟁을 치르는 사이 녹아나기는 우리 민족과 이 강산뿐이었수. 양쪽 다 다른 나라가 만든 무기루 열심히들 싸웠수. 그래두 통일이나 됐다믄 모를까. 삼백만 넘어 희생자를 내구서두 이렇게 휴전이 되구 보니 말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증말 기막히는 엄층난 상처만 남기구, 명분을 그 어디서두 찾을 수 없는 전쟁이 되구 말았잖수. 허무한 생각두 들구, 안타까운 마음뿐이라우."

준호아버지가 자신의 쇠갈고릴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고향이 니북 땅이라 들었는데 전쟁 던에는 학교 교사를 하셨다면서요? 그럼 국군에는 언제 입대했수웨까?"

"강원동 평강에서 인민학교 교사를 지냈지요. 그러다 전쟁이 나자 문화공작대 요원으루 뽑혀 해방구 후방지로 내려왔다우." 하던 준호아버지가 갑자기 힘주어 말했다. "칠월, 경북 문경 지방 전투 때 국군에 귀순했다우. 간단한 심사 끝에 국군에 배속받아 포로 심문관으루 가을을 넘기구, 영천서 삼개월 단ㄱ니 교육을 받구 일선 소대장 배치를 받기는 이듬해 삼월이었다우. 귀순 용사루 편성된 소대였답니다."

"국군에 투항한 특별한 사정이라두 있읍네까? 전쟁 던 니북 살 때 재산이 적몰되어 배정된 지역으루 이주됐다던가..."

"공산 세상을 겪어봤지만 선친으루부터 유학을 익힌 탓인지 내게는 그 제도가 맞지 않습디다. 사람은 그 능력과 개성에 따라 상응하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두부모 자르듯 인간을 게급 평등이란 이름으루 재단하구선 획일적 통제 체제루 사회를 조직화시키니 영 갑갑두 하구, 늘 감시당하는 분위기에서 생도들 가르치기조차 불편합디다. 즈이네 사상을 밀구 나가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디다만."

"글쎄요. 해석은 하기 나름입네다만....미국 비행기 폭격을 피해 내려왔으나 이쪽 땅두 문제는 적지 않디요. 사회 구조가 복잡해선디 문제가 훨씬 더 많습네다."

"오십년 가을부터 중공군 참전 전후에 이북 땅은 미군 공습이 대단했다지요?"

"말두 마십시우. 니북 땅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처음은 군수 시설이나 큰 건물이 폭격 대상이었으나, 나중에는 무차별 융단 폭격이었디요. 폭격을 피해 인민학교 생도들이 뒷산으로 몰려 도망가던 그 산을 폭파해버리기까디 했쉐다. 노인과 아낙네가 비행기 소리에 놀라 논두렁으로 뛰니요. 그러믄 비행기가 몇 차례고 되돌아와 기어코 기총소사로 죽이구서는 떠났디 않갔시요. 미국 즈이 나라가 조선과 무슨 원쑤가 졌다구 그렇게나 처참하게 학살하구 철저히 파괴했는디 모르갔시오. 그런 보고두 있었다지 않습니까. 미 팔군 사령관이 즈희 나라 대통령에게 전쟁 상황을 보고헐 때, 니북 땅은 비행기루 철저히 파괴해버려 원시 사회루 만들어놓았다구...."

"전쟁 전에 부친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수.?"

"평양에서 사업을 했디요. 선교리에 농기구 생산 소규모 철공소를 자영했쉐다."

정태씨가 이렇게 말했을 때, 평양댁이 양키시장으로 나가려 군복 보퉁이를 들고 쪽마루로 나섰다. 군용 털목도리를 머리에서부터 귀쌈을 가려 턱 밑에서 졸라매었고, 담요로 만든 통 좁은 바지 앞에 전대를 차고 있었다.

"큰애야, 그런 좌우익 사상 얘기는 내 하디 말랬잖아. 피난 내래온  따라디치구 니북 살 때 못 산 사람 어딨구, 내무서원이나 당원들 행패 안 당했다는 사람 봤더냐. 여기 와서 살면 여기 사람 돼야디. 열심히 벌면 우리두 엣 고생 얘기하구 살 날 올 것이야. 남한 세상 좋다는 게 뭐 있갔어. 내 노력하면 남 부러디 않게 살게 된다는 이치 아니갔어."

"아주머니 말씀 맞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는 따라지야 이 낯선 바닥서 어디 크게 성공이야 하겠습니까. 휴전선 무너져 통일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해 고향 떠난 설움이나 풀 만큼은 살아야지요. 난 늘 내 한 팔을 고향 땅에다 묻어두구 왔다구 생각하우. 그 팔 찾아 다시 붙일 수는 없겠지만 말입네다. 그러나 은젠가 묻을 팔 찾으러 고향 갈 좋은 날이 오겠지요." 준호아버지가 말했다.

"전쟁이 사람들 다 버려놓았어요. 모두들 돈의 노예가 되어 왕도둑놈들 앞에서두 그저 발발 기는 체제 순응주의자가 되구 말았으니, 도둑질이든 뭐를 하든 날래 벌어 잘살겠다는 욕심 하나에 매달려 있디 않갔시요. 그렇다구 정직하게 힘써 버는 하층 게급이 잘살게 되느냐 허면, 이런 계산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기밖에 더 되갔시요." 정태씨 말이었다.

"그럼 넌 돈이 필요없다는 겐가. 모두들 잘살겠다는 꿈 아니구 이 마당에서 무슨 꿈이 더 중요하갔니?" 평양댁이 농구화를 발에 꿰며 아들에게 대거리를 놓았다.

"제깐 놈이 이 바닥서 꿈꾸어본들 이룰 게 뭐가 있갔시요. 하두 답답허니깐 해보는 소리디요."

"할 일 없이 자빠져 있으니 괜한 걱정을 만들어서 하누만. 그 개소리 치워라 마. 안 그렇던 아가 피란 오구부터 삐뚤어져두 많이 삐뚤어졌어. 피란 오기 싫달 때 그 땅에 두고 올걸. 끌구 온 이 에미 욕질을 안 하나 원. 자식이 원쑤라더니 네가 이 에미 복장 썩여 죽일 거디!"

평양댁이 팩 쏘아 말하곤 군복 보퉁이를 머리에 이더니 다리 긴 도마의자를 들고 활달하게 마당을 질러갔다. 정태씨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신문을 구겨쥔 채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문제가 많은 청년이야." 준호아버지가 정태씨 뒤꽁무니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p.127-133)

 

"길남아. 니도 위채 할매 말 들었제? 나무 패는 그 사람 말이다. 그래 부지런하이께 일감이 떨어졌잖나. 세상에는 공짜가 읎는 기라. 그 장정이 비 안 젖게 나무 덮어주로 왔을 때 그 통나무 패는 일감을 따내야지 하는 꿍심을 묵었는지 우쨌는지 모르지마는, 그기사 아무래도 좋다. 할매가 그 장정 보고 나무 패어달라는 말을 안 했으모, 비를 맞으며 그냩 털레털레 갔을 끼 아인가. 그러나 부지런케 남이 좋아할 일을 성심성의껏 해주이께 할매 눈에 들은 기라. 공자 일이 진짜 돈 벌리는 일로 둔갑한 기 아인가. 사람이란 모름지기 남으 눈에, 그 사람 행실 참 이뿌다, 이래 보여야 한데이. 그러자모 사람이란 모름지게 정직과 부지런을 제일로 앞세워야 하는 기라." 어머니 말씀이었다. 당신은 방문을 닫아놓은 채 일을 하고 있었으나 안마당에서 벌어진 사정을 원하게 알고 있었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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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金源一, 1942년 3월 15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

1942년 3월 15일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경상북도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생계가 곤란하게 되어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6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1964년에 전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년 뒤인 1965년 영남대학교 국문학과 3년에 편입하였고, 이후 1968년에 영남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이후 1984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 소설 〈알제리아〉가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한 후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과 강》, 《마당 깊은 집》 등을 집필하게 된다. 1967년 《어둠의 축제》가 《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는 등 주목받는 소설가가 되었다.
김원일은 일곱 살에 겪은 한국전과 월북한 아버지로 인한 결손가족의 애환을 이후 40여 년에 걸친 그의 소설사를 관통하는 문학적 화두로 작용시켰다. 담담한 문체에 절제된 감정으로 6.25의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김원일은 굴곡진 현대사를 몸으로 겪은 한글세대의 문학이고 궁핍한 농촌에서 한국전쟁과 4.19 혁명을 체험하고 산업화를 이룩한 우리세대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줄 아는 작가로 열등의식에 사로잡혔던 사춘기와 가난에 대한 원망 등으로 초기 소설은 지나칠 정도로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했으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중편이 많아지고 분위기도 대립에서 화해로 바뀐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다룬 초기의 실존적 경향의 소설 《늘푸른 소나무》(1993)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보였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파헤쳐 대표적인 '분단작가'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분단 현실을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빼어난 소설로 승화시키며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작가의 어린 시절과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주제로 한 대표 작품으로 《어둠의 혼》(1973), 《노을》(1977), 《연》(1979), 《미망》(1982) 등이 있다. 특히 《어둠의 혼》은 당시 비평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장편 《노을》에서는 한국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적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작가의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본 아버지의 이야기인 《연》과 고부간의 갈등을 분단의 비극적 상황과 관련시켜 파악한 《미망》으로 이어지며, 장편 《불의 제전》(1983)과 《겨울골짜기》(1986)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분단소설을 통하여 그는 분단의 논리적 해명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단의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추적하고 있다.

<마당깊은 집>, <깨끗한 몸>이 특히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김원일의 소설에 있어서 피난살이 모티프는 억세고도 끈질긴 생명력을 일러주고 있다.
김원일의 작품들 중 온전히 회상의 방법에 의거한 <마당깊은 집>, <깨끗한 몸>, <불망> 등이 90년대 의 한국인들에게 가져다준 울림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면 기억과 회상의 기능 및 방법을 긍정적으로 헤아린 논리를 가볍게 떨쳐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원일은 회억은 인간의 감상벽과 순수에의 본능을 가장 잘 자극하는 것이라는 이치를 <마음의 감옥>에서도 적절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감옥>에서는 김원일이 그 이전의 소설들에서 반복해서 취한 중요한 모티프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전쟁 통에 아버지가 죽었다든가 젊어서부터 아버지의 역할까지 떠맡았던 어머니는 강한 느낌을 주었다든가 형제간이 서로 다른 이념이나 편에 선다든가 하는 반복모티프들이 있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모티프에 대한 김원일의 애착은 남다르다. 그의 소설들에 있어서 아버지의 죽음, 그로 인한 부성의 상실이라는 모티프는 가장 원인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서 어머니는 강하고 엄하다는 모티프와 동생을 향한 형의 뜨거운 연민이라는 모티프가 빚어지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대리부의 역할을 해내는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이념과 행동방식을 모성애라는 용광로 속에서 다 녹여 버리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우리 시대의 비극적 단면을 헤아리게 된다.
김원일의 소설은 그 특수한 배경으로 인해 분단문학이라는 독특한 지평을 획득하며 많은 연구가 논의되었지만 그러한 분단 상황의 중심에 성장하는 인물이 등장했음은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성장하는 인물은 일인칭 유년기 화자로 설정되었으며 이는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껴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성장 주체의 소통과 정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 혹은 유년기 서술자에게 ‘이상적이지 않은’아버지상을 정리하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된 어머니의 모습을 살폈다. 이때 어머니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복합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부장 중심의 가정에서 사라진 아버지 역할은 곧 장남인 유년기 화자에게 넘겨지고, 장자로의 역할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술자의 성장을 살필 수 있었다.
김원일의 작품은 그동안 주로 분단문학, 가족사 소설 등으로 다루어져 왔다. 6.25 전쟁이라는 일관된 소재로 탄생한 그의 작품은 분단문학이라는 독특한 지평을 획득했으며 전쟁과 연결된 시대적 배경 안에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가족들의 이야기는 특히 작품 내 등장인물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때 화자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즉 어린소년은 분단의 시대에 가족의 틀 안에서 성장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특정으로 인해 그의 작품세계는 흔히 ‘성장’이라는 모티프에 의해 일관된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도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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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깊은 집 - 김원일 (문학과 지성사)

노을 - 김원일 (문학과 지성사)

마음의 감옥 - 김원일 (문이당)

미망 - 김원일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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