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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논 이야기 - 채만식 (글누림)

by handaikhan 2023. 5. 7.

글누림 한국문한전집 5

 

목차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논 이야기
낙조

작가 연보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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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 논 이야기 (1946년)

 

일인들이 토지와 그 밖에 온갖 재산을 죄다 그대로 내어놓고, 보따리 하나에 몸만 쫓기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한생원은 어깨가 우쭐하였다.
"거 보슈 송생원, 인전 들, 내 생각 나시지?"
한생원은 허연 탑삭부리에 묻힌 쪼글쪼글한 얼굴이 위아래 다섯 대밖에 안 남은 누-런 이빨과 함께 흐물흐물 웃는다.
"그러면 그렇지, 글쎄 놈들이 제아무리 영악하기로소니 논에다 네 귀탱이 말뚝 박구섬 인도깨비처럼, 어여차 어여차, 땅을 떠가지구 갈 재주야 있을 이치가 있나요?"
한생원은 참으로 일본이 항복을 하였고, 조선은 독립이 되었다는 그날 - 팔월 십오일 적보다도 신이 나는 소식이었다. 자기가 한 말(豫言)이 꿈결같이도 이렇게 와 들어맞다니…… 그리고 자기가 한 말대로, 자기가 일인에게 팔아 넘긴 땅이 꿈결같이도 도로 자기의 것이 되게 되었다니…… 이런 세상에 신기하고 희한할 도리라고는 없었다.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는 팔월 십오일, 그때는 한생원은 섬뻑 만세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어도, 이번에는 저절로 만세 소리가 나와지려고 하였다.
팔월 십오일 적에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설도를 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닭을 추렴하고, 술을 사고 하여 놓고 조촐히 만세를 불렀다.
한생원은 그 자리에 참례를 하지 아니하였다. 남들이 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으나 한생원은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는 것이 별양 반가운 줄을 모르겠었다. 그저 덤덤할 뿐이었었다.
물론 일본이 항복을 하였으니 전쟁은 끝이 난 것이요, 전쟁이 끝이 났으니 벼 공출을 비롯하여 솔뿌리 공출이야, 마초 공출이야, 채소 공출이야, 가지가지의 그 억울하고 성가신 공출이 없어지고 말 것이었다.
또, 열여덟 살배기 손자놈 용길이가 징용에 뽑혀 나갈 염려가 없을 터이었다. 얼마나 한생원은,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늙은 손으로 여태껏 길러 온 외톨 손자놈 용길이가 징용에 뽑히지 말게 하려고, 구장과 면의 노무계 직원과, 부락 담당 직원에게 굽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건사를 물고 하였던고. 굶는 끼니를 더 굶어 가면서 그들에게 쌀을 보내어 주기, 그들이 마을에 얼찐하면 부랴부랴 청해다 씨암탉 잡고 술대접하기, 한참 농사일이 몰릴 때라도, 내 농사는 손이 늦어도 용길이를 시켜 그들의 논에 모 심고 김 매어 주고 하기. 이 노릇에 흰머리가 도로 검어질 지경이요 빚(債)은 고패가 넘도록 지고 하였다.
하던 것이 인제는 전쟁이 끝이 났으니, 징용 이자는 싹 씻은 듯 없어질 것. 마음 턱 놓고 두 발 쭉 뻗고 잠을 자도 좋았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한생원도 미상불 다행스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직 그뿐이었다.
독립?
신통할 것이 없었다.
독립이 되기로서니,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별안간 나으리 주사 될 리 만무하였다.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남의 세토(貰土:소작) 얻어 비지땀 흘려 가면서 일년 농사 지어 절반도 넘는 도지(소작료) 물고, 나머지로 굶으며 먹으며 연명이나 하여 가기는 독립이 되거나 말거나 매양 일반일 터이었다.
공출이야 징용이야 하여서 살기가 더럭 어려워지기는, 전쟁이 나면서부터였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일년 농사 지어 작정한 도지, 실수 않고 물면 모자라나따나 아무 시비와 성가심 없이 내 것삼아 놓고 먹을 수가 있었다.
징용도 전쟁이 나기 전에는 없던 풍도였었다. 마음놓고 일을 하였고, 그것으로써 그만이었지, 달리는 근심걱정될 것이 없었다.
전쟁 사품에 생겨난 공출이니 징용이니 하는 것이 전쟁이 끝이 남으로써 없어진 다음에야 독립이 되기 전 일본 정치 밑에서도 남의 세토 얻어 도지 물고 나머지나 천신하는 가난뱅이 농투성이에서 벗어날 것이 없을진대, 한갓 전쟁이 끝이 나서 공출과 징용이 없어진 것이 다행일 따름이지, 독립이 되었다고 만세를 부르며 날뛰고 할 흥이 한생원으로는 나는 것이 없었다.
일인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도로 찾고, 그래서 우리도 다시 나라가 있게 되었다는 이 잔주도, 역시 한생원에게는 시뿌듬한 것이었다. 한생원은 나라를 도로 찾는다는 것은 구한국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밖에는 달리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생원네는 한생원의 아버지의 부지런으로 장만한, 열서 마지기와 일곱 마지기의 두 자리 논이 있었다. 선대의 유업도 아니요, 공문서(空文書:무등기) 땅을 거저 주운 것도 아니요, 버젓이 값을 내고 산 것이었다. 하되 그 돈은 체계나 돈놀이(고리대금업)로 모은 돈이 아니요, 품삯 받아 푼푼이 모으고 악의악식하면서 모은 돈이었다. 피와 땀이 어린 땅이었다.
그 피땀어린 논 두 자리에서, 열서 마지기를 한생원네는 산 지 겨우 오 년 만에 고을 원(군수)에게 빼앗겨 버렸다. (p.317-319)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갑오 을미 병신 하는 병신(丙申)년, 한생원의 나이 스물한 살 적이었다.
그 안 해 을미년 늦은 가을에 김아무라는 원이 동학란에 도망 뺀 원 대신으로 새로이 도임을 해 와서, 동학의 잔당을 비질하듯 잡아죽였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이듬해 병신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리고 여름…… 인제는 다 지났거니 하여 겨우 안도를 한 참인데, 한태수(한생원의 아버지)가 원두막에서 동헌으로 붙잡혀 가 옥에 갇히었다. 혐의는 동학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다.
한태수는 전혀 동학에 가담한 일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면, 동학 근처에도 가보지 아니한 사람이었다.
옥에 가두어 놓고는 매일 끌어내다 실토를 하라고, 동류의 성명을 불라고, 주리를 틀면서 문초를 하였다. 육십이 넘은 늙은 정강이가 살이 으깨어지고 뼈가 아스러졌다.
나중 가서야 어찌 될 값에, 당장의 아픔을 견디다 못하여 동학에 가담하였노라고 자복을 하였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불린 일곱 사람이 잡혀 들어와 같은 문초를 받았다. 처음에는들 내뻗었으나 원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복을 하였다.
남은 것은 처형을 하는 것뿐이었다.
하루는 이방이, 한태수의 아내와 아들(한생원)을 조용히 불렀다.
이방은 모자더러, 좌우간 살려 낼 도리를 하여야 않느냐고 하였다.
모자는 엎드려 빌면서, 제발 이방님 덕택에 목숨만 살려지이다고 하였다.
"꼭 한 가지 묘책이 있기는 있는데……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냐?"
"불 속이라도 뛰어들어가겠습니다."
"논문서를 가져오느라. 사또께다 바쳐라."
"논문서를요?"
"아까우냐?"
"……"
"가장이나 아비의 목숨보다 논이 더 소중하냐?"
"그 땅이 다른 땅과도 달라서……."
"정히 그렇게 아깝거던 고만두는 것이고."
"논문서만 가져다 바치면 정녕 모면을 할까요?"
"아니 될 노릇을 시킬까?"
"그럼 이 길로 나가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밤에 조용히 내아로 오도록 하여라. 나도 와서 있을 테니. 그러고 네 논이 두 자리가 있겠다?"
"네."
"열서 마지기와 일곱 마지기."
"네."
"그 열서 마지기를 가지고 오느라."
"열서 마지기를요?"
"아까우냐?"
"……"
"아깝거들랑 고만두려무나."
"그걸 바치고 나면 소인네는 논 겨우 일곱 마지기를 가지고 수다한 권솔에 살아갈 방도가……."
"당장 가장이나 애비의 목숨은 어데로 갔던지?"
"……"
"땅이야 다시 장만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냐?"
모자는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바칩시다."
"바치자."

사흘 만에 한태수는 놓여 나왔다. 다른 일곱 명도 이방이 각기 사이에 들어 각기 얼마씩의 땅을 바치고 놓여 나왔다.
그 뒤 경술(庚戌)년에 일본이 조선을 합방하여 나라는 망하였다.
사람들이 나라 망한 것을 원통히 여길 때, 한생원은,
"그깐 놈의 나라, 시언히 잘 망했지."
하였다. 한생원 같은 사람으로는 나라란 백성에게 고통이지 하나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또 꼭 있어야 할 요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나라라는 것을, 도로 찾았다고 하여, 섬뻑 감격이 일지 아니한 것도 일변 의당한 노릇이라 할 것이었다.
논 스무 마지기에서 열서 마지기를 빼앗기고 나니, 원통한 것도 원통한 것이지만, 앞으로 일이 딱하였다. 논이나 겨우 일곱 마지기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하릴없이 남의 세토를 얻어, 그 보충을 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남의 세토는 도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라, 힘은 내 논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들면서도 가을에 가서 차지를 하기는 절반이 못 되는 것이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남의 세토를 소작 아니 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한생원네는 나라 명색이 망하지 않고 내 나라로 있을 적부터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경술년 나라가 망하고, 삼십육 년 동안 일본의 다스림 밑에서도 같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그리고 속담에, 남의 불에 게 잡기로 남의 덕에 나라를 도로 찾기는 하였다지만 한국 말년의 나라만을 여겨 그 나라가 오죽할 리 없고, 여전히 남의 세토나 지어 먹는 가난한 소작농이기는 일반일 것이라고 한생원은 생각하던 것이었었다.
일본이 항복을 하던 바로 전의 삼사 년에, 공출이야 징용이야 하면서 별안간 군색함과 불안이 생겼던 것이지, 그 밖에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지고서 일본의 속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경술년 이전 나라가 있어 가지고 조선 백성으로 살 적보다 별양 못 할 것이 한생원에게는 없었다. 여전히 남의 세토를 지어, 절반 이상이나 도지를 물고 그 나머지를 천신하는 가난한 소작인이요, 순사나 일인이나 면서기들의 교만과 압박보다 못할 것도 없거니와 더할 것도 없었다.
독립이 된 이 앞으로도, 그것이 천지개벽이 아닌 이상 가난한 농투성이가 느닷없이 부자장자 될 이치가 없는 것이요, 원․아전․토반이나 일본놈 대신에, 만만하고 가난한 농투성이를 핍박하는 ‘권세 있는 양반들’이 생겨날 것이요 할 것이매, 빼앗겼던 나라를 도로 찾아 다시금 조선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신통하거나 반가울 것이 없었다.
원과 토반과 아전이 있어, 토색질이나 하고 붙잡아다 때리기나 하고 교만이나 피우고, 하되 세미(稅米:납세)는 국가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받아 가면서 백성은 죽어야 모른 체를 하고 하는 나라의 백성으로도 살아 보았다.
천하 오랑캐, 애비와 자식이 맞담배질을 하고, 남매간에 혼인을 하고, 뱀을 먹고 하는 왜인들이, 저희가 주인이랍시고서 교만을 부리고, 순사와 헌병은 칼바람에 조선 사람을 개 도야지 대접을 하고, 공출을 내어라 징용을 나가거라 야미를 하지 마라 하면서 볶아 대고, 또 일본이 우리나라다, 나는 일본 백성이다, 이런 도무지 그럴 마음이 우러나지를 않는 억지춘향이 노릇을 시키고 하는 나라의 백성으로도 살아 보았다.
결국 그러고 보니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내 나라였건 남의 나라였건 있었댔자 백성에게 고통이나 주자는 것이지, 유익하고 고마울 것은 조금도 없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새 나라는 말고 더한 것이라도, 있어서 요긴할 것도, 없어서 아쉬울 일도 없을 것이었다. (p.320-324)

 

 

 

<절난 사람들>, 민중서관,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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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

일제강점기 소설가. 극작가·친일반민족행위자.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출생했다.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2년 졸업했다. 그해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1923년 중퇴했다.
그 뒤 조선일보사 · 동아일보사 · 개벽사 등의 기자로 전전했다. 1936년 이후는 직장을 가지지 않고 창작 생활만을 했다. 1945년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해 이리로 옮겨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 · 단편소설과 희곡 · 평론 · 수필을 썼다. 특히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장편으로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 「탁류 濁流」(1937) · 「천하태평춘 天下太平春」(1938. 1948년 동지사(同志社)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될 때 ‘태평천하(太平天下)’로 개제) · 「금(金)의 정열」(1939) · 「아름다운 새벽」(1942) · 「어머니」(1943) · 「여인전기」(1944)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레디메이드 인생」(1934) · 「치숙 痴叔」(1938) · 「패배자의 무덤」(1939) · 「맹순사」(1946) · 「미스터 방(方)」(1946) 등을 들 수 있다. 희곡으로는 「제향날」(1937) · 「당랑(螳螂)의 전설」(1940)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당시의 현실 반영과 비판에 집중되었다.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나게 그리면서 그 근저에 놓여 있는 역사적 · 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작품 기법에 있어 매우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특히 풍자적 수법에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행사에 참석하고, 그 결과로 『춘추』 등에 발표한 산문과 1943∼1944년에 『 매일신보』 등에 발표한 산문과 소설을 통해 징병, 지원병을 선전, 선동했다.
또한 1943∼1944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관하는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 , 보도특별정신대, 생산지 증산 위문 파견 등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채만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 · 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02∼63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는 그에 대한 연구가 드물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연구 업적도 급격히 많아졌다. 1970년대에는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 「과도기」, 희곡 「가죽버선」 등을 비롯한 많은 유작들이 발굴, 공개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쓴 「자작안내 自作案內」(靑色紙 5호, 1939)는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작품은 『채만식전집』(創作과 批評社, 1989)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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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문학과지성사)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애플북스)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열림원)

채만식 선집 (현대문학)

태평천하 -채만식 (민음사)

탁류 - 채만식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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