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길 위의 노래 - 김시습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2)
나는 누구인가
내 말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에게
비 오는 밤
이 몸 또한 꿈일지니
소나무 엮어 오두막 짓고
온종일 잠에 빠져
몸과 그림자 1 - 몸이 그림자에게
몸과 그림자 2 - 그림자가 몸에게
뱀
새벽에 일어나
내 밭엔 잡초 무성하고
잔설
한 줄기 햇살 빌려다가
한잔 술에 취해 1
한잔 술에 취해 2
한잔 술에 취해 3
인간 세상에 떨어져
홀로 부르는 여섯 노래
밤에 부르는 노래
나의 일생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군자의 처신
군자와 소인
인재가 없다는 걱정에 대하여
나라 살림을 넉넉하게 하는 법
최선의 정치
나라의 근본
인민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길
귀신이란 무엇인가
태극을 말한다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마음을 토로하여 올린 편지
금오신화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내기하다
담장 너머 사랑을 엿보다
남염부주에 가다
해설
김시습 연보
작품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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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길
어떤 이가 내게 물었다.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마다 자기 본성대로 살도록 하는 겁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의 큰 덕을 생이라 한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을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것은 하늘과 땅의 큰 덕이요, 살고자 하는 것은 만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살고자 하는 본성을 따르고, 만물을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하늘과 땅의 큰 덕을 본받아, 세상 만물이 저마다 자기 본성대로 살며 깊고 두터운 사랑과 은혜 속에서 자라도록 할 따름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하기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과 만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함께 살고 있으니 '인민은 내 동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있다'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말대로 사람이 세상의 으뜸이며 만물은 그 다음이지요.
군자가 사람을 대해서는 사랑하되 어질게 대하지 않으며, 만물에 대해서는 어질게 대하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어질게 대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봅시다. '물고기를 잡을 때 촘촘한 그물을 쓰지 않는다', '나무를 벨 때 적당히 자란 것에만 도끼를 댄다', '길이가 한 자 되지 않는 물고기는 시장에서 팔 수 없다', 사냥하되 새끼나 알은 취하지 않는다', '그물을 쳐 놓고 새가 잡혀 들지 않기를 빈다', 낚시질은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는다', '활을 쏘되 잠든 새는 쏘지 않는다'라는 말이 모두 그런 뜻입니다. <시경>에 있는 이 노래도 같은 뜻이지요.
저기 무성한 갈대밭에
한 번 쏘아 돼지 다섯을 잡나니
어허! 어진 분이시도다.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순임금이 백익으로 하여금 산과 연못에 불을 지르게 하여 호랑이며 표범이며 무소며 코끼리를 내몰아 멀리 쫓아 버렸다', '봄,여름,가을,겨울에 철마다 사냥을 했다', '닭이며 돼지며 개를 기를 때에 그 시기를 잃지 않으면 나이 일흔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주역>에서 '그물을 만들어 사냥하고 고기를 잡는다'라고 한 말이 모두 그런 뜻입니다.
이 때문에 군자가 동물을 기르는 것은 늙고 병든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서이고,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것은 잔치와 제사에 쓰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그 적당한 정도를 짐작해서 일을 하는 것이며, 어질게 대한다고 해서 살생하지 않는것도 아니요, 살생하더라도 모조리 잡아들이는 것을 좋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백 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시경>의 기록은 태강이 방탕하게 사냥을 즐겼던 일을 원망한 것이요, '불이 타오르니 일제히 일어나네'라는 <시경>의 노래는 공숙단이 숲에 불을 질러 짐승을 한쪽으로 몬 뒤 사냥했던 일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하게 살상할 필요가 무엇 있겠습니까? 오직 인민의 어려움을 덜고 인민이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 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차례로 말하자면 '인민을 어질게 대하고, 만물을 사랑한다'라고 할 것이며, 그 중요함으로 말하자면 마을에 불이 났을 때 공자께서 '사람이 다치지 않았느냐?라고만 묻고 마구간의 말이 상했는지는 묻지 않으셨다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자가 만물을 사랑하는 뜻이지요."
또 이렇게 물었다.
"불교의 책에는 살생하지 않는 것을 계율로 삼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선한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인민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그 고기를 먹어 인민을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서로 물고 죽여 인육을 먹기에 이른 참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그저 '살생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p.144-14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시경 - 신동준 (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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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 생육신의 한 사람.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김시습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김시습은 서울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육경(六經)과 자사(子史)의 글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무량사(無量寺)였다.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원호(元昊)·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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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평전 - 심경호 (돌베개)
꿈꾸다 떠난 사람, 김시습 - 최명자 (빈빈책방)
금오신화 - 김시습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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