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100
춘향전 (백범영 그림, 송성욱 옮김, 민음사)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어 대대로 어진 자손이 끊이지 않고 계승하시니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풍요로운 삶이 비할 데가 없도다. 든든한 충신이 좌우에서 보필하고 용맹한 장수가 용과 호랑이가 에워싸듯 지키는구나. 조정에 흐르는 덕화가 시골까지 퍼졌으니 굳센 기운이 온 세상 곳곳에 어려 있다. 조정에는 충신이 가득하고 집집마다 효자열녀로다. 아름답고도 아름답다. 비바람이 순조로우니 배부른 백성들은 곳곳에서 태평 시절을 노래하는구나.
이때 전라도 남원에 월매라는 기생이 있으니 삼남에서 이름난 기생이었다. 일찍이 기생을 그만두고 성가라고 하는 양반과 더불어 살았는데 나이 사십이 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었다. 이것이 한이 되어 길이 한숨 쉬며 근심하다가 그만 병이 되었구나. 하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옛날 성현들을 생각하고 남편에게 여쭈오되 공손히 하는 말이,
"들으시오. 전생에 무슨 은혜 끼쳤던지 이생에 부부 되어 기생 행실 다 버리고 예절도 숭상하고 여공도 힘썼건만 무슨 죄가 그리 많은지 자식 하나 없으니,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우리 신세에 조상 제사 누가 지내며 죽은 후 장사는 어찌 하리. 명산대찰에 기도나 하여 아들이든 딸이든 낳게 되면 평생 한을 풀 것이니 그대의 뜻이 어떠하오?"
성 참판 하는 말이,
"평생 신세 생각하면 자네 말이 당연하나 빌어서 자식을 낳을 진대 자식 없는 사람이 있으리오?"
하니 월매 대답하되,
"천하의 성현인 공자께서도 이구산에 비옵시고 정나라 정자산은 우형산에 빌어 태어나셨으니 우리나라 강산을 이를진대 명산대찰이 없으리고? 경상도 웅천의 주천의 주천의는 늦도록 자녀가 없어 최고봉에 빌었더니 명나라 황제가 나시어 대명천지 밝았다고 하오. 그러나 우리도 정성이 드려 보사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며 심은 나무 꺾일쏜가. 이날부터 목욕재계 정갈하게 하고 명산, 좋은 땅 찾아갈 제 오작교 썩 나서서 좌우 산천 둘러보니 서북의 교룡산은 술해 방향을 막아 있다. 동으로는 장림 수풀 깊은 곳에 선원사가 은은히 보이고 남으로는 지리산이 웅장하다. 그 가운데 있는 요천수는 큰 강 푸른 물결이 되어 동남쪽으로 둘렀으니 별천지가 바로 여기로다. 푸른 수풀 끌어 잡고 계곡물을 밟아 들어가니 지라산이 여기로다. 반야봉 올라서서 사면을 둘러보니 좋은 산 큰 강이 완연하다. 꼭대기에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차려 놓고 단 아래 엎드려 천신만고 빌었더니 산신님 덕이신지.
이때는 오월 오일 갑자시라. 한 꿈을 꾸니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서려 오색 빛이 영롱하더니 한 선녀가 청학을 타고 오는데 머리에 꽃 관을 쓰고 몸에는 색동옷을 입었다. 장신구 소리 쟁쟁하고 손에는 계화 한 가지를 들고 당에 오르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공손히 여쭈오되,
"저는 낙포의 딸이었는데 복숭아를 진상하러 옥황상제 계신 곳에 갔다가 달나라 궁궐 광한전에서 적송자를 만나 미진한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 바람에 늦은 것이 죄가 되어 옥황상제 크게 화를 내시며 인간세상으로 내쳤습니다. 갈 곳을 모르다가 두류산 신령께서 부인 댁으로 가라고 지시하기로 왔사오니 어여삐 여기소서."
하며 품으로 달려든다. 학의 울음소리가 높은 것은 목이 긴 때문이라. 학 소리에 놀라 깨니 남가일몽이라. 황홀한 정신을 진정하여 남편에게 꿈을 말하고 천행으로 아들을 낳을까 기다리더니 과연 그 달부터 태기가 있다. 열 달이 되자 하루는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고 오색구름이 영롱하더니 정신이 혼미한 중에 출산하니 한 명 옥녀를 낳았도다. 비록 아들은 못 낳았지만 오랜 세월 월매가 바라던 마음이 얼마간 풀리는구나. 그 사랑함을 어찌 다 말하리오. 이름을 춘향이라 부르면서 손에 든 보석같이 길러 내니 효행은 비할 곳이 없고 인자함은 기린처럼 빼어나구나. 칠팔 세 되자 서책에 맛을 붙여 예의, 정절을 일삼으니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 (p.9-13)
<비교 - 경판30장본>
화설,
우리나라 인조대왕 시절에 전라도 남원 부사 이등의 자제인 이 도령의 나이는 십육 세라, 얼굴은 관옥과 같고 풍채는 두보와 같고 문장은 이태백을 닮았더라. 항상 책방에 있으면서 부모에게 안부를 묻는 일 외에는 공부에만 힘을 기울이더니, 이때는 바야흐로 꽃 피는 춘삼월 호시절이라. 온갖 생물들이 절로 즐거워하며 너구리는 늦손자 보고 두꺼비는 새끼를 칠 대니라, (p.1897-188)
<춘향전-이상보 주해, 범우 사루비아 총서>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은 계계승승하사 금고옥적은 요순의 태평 시절이요, 의관과 문물은 우 임금과 탕 임금의 버금이라. 좌우 보필은 주석지신이요, 용양호시의 각위에는 간성지장이라. 조정에 흐르는 덕화 향곡에 펴졌으니 사해에 굳은 기운이 원조에 어리어 있더라. 충신은 조정에 가득하고 효자와 열녀는 가가재라. 미재미재라. 우순풍조하니 함포고복 백성들은 처처에 격양가라.
이때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 하는 기생이 있으되, 삼남의 명기로서 일찍이 퇴기하여 성씨라는 양반을 데리고 세월을 보내되, 바야흐로 나이 사십이 넘었으나 일점혈육이 없어 이로 한이 되어 장탄수심의 병이 되겠구나.
일일은 크게 깨쳐 옛사람을 생각하고 남편을 청입하여 공손히 하는 말이.
"들으시오. 전생에 무슨 은혜를 끼쳤던지 이생에 부부 되어, 창기 행실 다 버리고 예모도 숭상하고 길쌈도 힘썼건만 무슨 죄가 이리 많이 일점혈육 없으니, 육친 무족 우리 신세 선영의 향화 뉘 받들며 죽은 뒤의 감장을 어이하리. 명산 대찰에 불공이나 드리어 남녀간 낳기만 하면 평생의 한을 풀 것이니 당신의 뜻이 어떠하시오?"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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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야 나귀에 안장 지워라."
방자 분부 듣고 나귀 안장 지운다. 나귀 안장 지울 때, 붉은 가슴걸이, 자주색 고삐, 산호채찍, 금채찍, 옥안장, 황금굴레, 청홍실 고운 굴레, 갖은 수술 덤뿍 달고 층층한 다래, 은엽동자, 호랑이가죽 안장에 염불하는 스님 염주 매달듯 방울을 앞뒤에 걸고,
"나귀 등대하였소."
도련님 거동 보소. 옥안선풍 고운 얼굴, 치렁치렁 숱 많은 머리 곱게 빗어 밀기름에 잠재우고, 비단 댕기에 석황을 물려 맵시 있게 잡아 땋고, 성천 수주 접동저고리, 흰모시 박음질바지, 좋은 명주 겹버선에 푸른 비단 대님 차고, 남빛 비단 민소매 덧저고리에 밀화단추 달아 입고, 통행전을 무릎 아래 넌지시 매고, 두꺼운 비단 허리띠를 차고, 깁비단 둥근 주머니를 여덟 갈래 늘어진 끈으로 매듭지어 넌지시 매고, 소매 넓은 웃옷에 도포 받쳐 입고, 검은 띠를 가슴에 눌러 매고 가죽신을 끌면서,
"나귀를 붙들어라."
등자 딛고 선뜻 올라 뒤를 싸고 나오신다. 통인 하나 뒤를 따라 삼문 밖 나올 적에 금빛 나는 둥근 부채로 햇빛을 가리고 남쪽 넓은 길로 생기 있게 나아간다. 술에 취해 양주를 지나던 두목지의 풍챌런가, 거문고 잘못 타는 여인을 돌아보던 주랑의 모습인가. (p.16-1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아이반호 - 월터 스콧 (서미석 옮김, 현대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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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오월 단오날이렷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 이때 월매 딸 춘향이도 또한 시서음률이 능통하니 천중절을 모를쏘냐. 추천을 하려고 향단이 앞세우고 내려올 제, 난초같이 고운 머리 두 귀를 눌러 곱게 땋아 봉황 새긴 비녀를 단정히 매었구나. 비단 치마를 두른 허리는 힘없이 드리운 가는 버들같이 아름답다. 고운 태도 아장 걸어 흐늘 걸어 가만가만 나올 적에, 장림 속으로 들어가니 녹음방초 우거져 금잔디 좌르르 깔린 곳에 황금 같은 꾀꼬리는 쌍쌍이 날아든다. 버드나무 높은 곳에서 그네 타려 할 때, 좋은 비단 초록 장옷, 남색 명주 홑치마 훨훨 벗어 걸어 두고, 자주색 비단 꽃신을 썩썩 벗어던져 두고, 흰 비단 새 속옷 턱밑에 훨씬 추켜올리고, 삼껍질 그넷줄을 섬섬옥수 넌지시 들어 두 손에 갈라 잡고, 흰 비단 버선 두 발길로 훌쩍 올라 발 구른다. 세류 같은 예쁜 몸을 단정히 놀리는데 뒷단장은 옥비녀에 은죽절이요 앞치레 볼것 같으면 밀화장도, 옥장도며, 비단 겹저고리, 제색 고름이 모양이 난다.
"향단아 밀어라."
한 번 굴러 힘을 주며 두 번 굴러 힘을 주니 발밑에 작은 티끌 바람 쫓아 펄펄, 앞뒤 점점 멀어 가니 머리 위의 나뭇잎은 몸을 따라 흔들흔들, 오고 갈 제 살펴보니 녹음 속의 붉은 치맛자락 바람결에 내비치니, 높고 넓은 흰 구름 사이에 번갯불이 쏘는 듯 잠깐 사이에 앞뒤가 바뀌는구나. 앞으로 어른거리는 모습은 제비가 가벼게 날아 떨어지는 도화 한 점 찾으려 쫓는 듯, 뒤로 번듯 하는 모습은 광풍에 놀란 나비 짝을 잃고 가다가 돌이키는 듯, 무산의 선녀 구름 타고 양대 위에 내리는 듯 나뭇잎도 물어보고 꽃도 질끈 꺾어 머리에다 실근실근.
"이 애, 향단아. 그네 바람이 독하기로 정신이 아찔하다. 그넷줄 붙들어라." (p.22-23)
춘향이가 그제야 못 이기는 모습으로 겨우 일어나 광한루 건너갈 제, 대명전 대들보의 명매기 걸음으로, 양지 마당의 씨암탉 걸음으로, 흰모래 바다의 금자라 걸음으로, 달 같튼 태도 꽃다운 용모로 천천히 건너간다. 월나라 서시가 배우던 걸음걸이로 흐늘흐늘 건너온다. 도련님 난간에 절반만 비켜서서ㅓ 그윽이 바라보니 춘향이가 건너오는데 광한루 가까이 온지라, 도련님 좋아라고 자세히 살펴보니 요염하고 정숙하여 그 아름다움이 세상에 둘도 없는지라. 얼굴이 빼어나니 청강에 노는 학이 설월에 비친 것 같고, 흰 치아 붉은 입술이 반쯤 열렸으니 별도 같고 옥도 같다. 연지를 품은 듯, 자줏빛 치마 고운 태도는 석양에 비치는 안개 같고, 푸른 치마가 영롱하여 은하수물결 같다. 고운 걸음 단정히 옮겨 천연히 누각에 올라 부끄러이 서 있거늘, 통인 불러 말한다.
"앉으라고 일러라."
춘향의 고운 태도 단정하다. 앉은 거동 자세히 살펴보니, 갓 비가 내린 바다 흰 물결에 목욕재게하고 앉은 제비가 사람을 보고 놀라는 듯, 별로 꾸민 것도 없는 천연한 절대 가인이라. 아름다운 얼굴을 대하니 구름 사이 명월이요, 붉은 입술 반쯤 여니 강 가운데 핀 연꽃이로다. 신선을 내 몰라도 하늘나라 선녀가 죄를 입어 남원에 내렸으니, 달나라 궁궐의 선녀가 벗 하나를 잃었구나. 네 얼굴 네 태도는 세상 인물 아니로다. (p. 29-31)
"해가 져서 황혼 되고 달이 동에서 떠오릅니다."
저녁밥이 맛이 없고 전전반측 어이 하리. 퇴령을 기다리려하고 책상을 앞에 놓고 서책과 씨름한다. <중용>, <대학>, <논어>, <맹자>, <시전>, <서전>, <주역>, <고문진보>, <통감>, <십팔사략>, <천자문>, 이백과 두보의 시까지 내어 놓고 글을 읽을새,
"<시전>이라. 서로 소리를 주고받는 새는 물가에서 노니는도다. 아름다운 여인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대학>을 읽을새,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게 하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춘향에게 있도다. 그 글도 못 읽겠다."
<주역>을 읽는데,
"원은 형이고 정이고 춘향이고 딱 댄코 좋고 하니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등왕각>이라. 남창은 옛 마을이요 홍도는 새 고을이로다. 옳다, 그 글 되었다."
<맹자>를 읽을새,
"맹자가 양혜왕을 알현하셨는데, 양혜왕이 말하기를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으니 춘향이 보시러 오셨나이니까?"
<십팔사략>을 읽는데,
"태고 시절이라. 아득한 옛날 중국의 임금인 천황씨는 쑥떡으로 왕이 되어 섭제별에서 세상을 일으켰으니 자연스럽게 나라가 태평하였느니라. 또 형제 열두 명이 각각 일만 팔천 세를 누렸다."
방자 여쭈오되,
"여보 도련님. 천황씨가 목덕으로 왕이 되었단 말은 들었으되 쑥떡으로 왕이 되었단 말은 금시초문이오."
"이 자식 네 모른다. 천황씨는 일만 팔천 세를 살던 양반이라. 이가 단단하여 목떡을 잘 자셨거니와 세상 선비들은 목떡을 먹을 수 있겠느냐? 공자님께옵서 후생을 생각하사 명륜당에서 꿈에 나타나 세상 선비들은 이가 약해서 목떡을 못 먹기에 물컹물컹한 쑥떡으로 하라 하여 삼백육십 고을 향교에 기별하여 쑥떡으로 고쳤느니라."
방자 듣다가 말을 하되,
"여보! 하느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거짓말도 다 듣겠소."
또 <적벽부>를 펴 놓고,
"임술년 가을 칠월 십육일에 소동파는 손님과 더불어 적벽강 아래 배를 띄워 유람할새 맑은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고 물결은 잔잔하구나.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천자문을 읽을새,
"하늘 천 땅 지."
방자 듣고,
"여보 더련님 천자문은 웬일이오?"
"천자문이라 하는 글이 사서삼경의 기본이라. 양나라 때 벼슬 하던 주흥사가 하룻밤에 이 글을 짓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기로 책 이름이 백수문이라. 낱낱이 새겨 보면 뼈똥 쌀 일이 많지야."
"소인 놈도 천자 속은 아옵니다."
"네가 알더란 말이냐."
"알다 뿐이겠소."
"안다 하니 읽어 봐라."
"예 들어시오. 높고 높은 하늘 천, 깊고 깊은 땅 지, 홰홰 친친 검을 현, 불타다 누를 황."
"예 이놈. 상놈은 상놈이구나. 이놈 어디서 길거리에서 잡된 타령 하는 놈의 말을 들었구나. 내가 읽을 것이니 들어라.
하늘은 자시에 열려 생겼으니 태극이 광대하다 하늘 천
땅은 축시에 열렸으니 오행과 팰쾌로 땅 지
삼십삼천 공부공에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검을 현
스물여덟 별자리 청적황백흑 오색 중의 순한 색 누를 황
우주일월 거듭 빛나니 옥황상제 사는 곳 집 우
해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며 옛날이 가고 지금이 온다 집 주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고 기자가 홍범구주를 말한다 넓을 홍
태곳적 황제 삼황오제 돌아가신 후 간신악인 거칠 황
동방이 장차 밝아오기로 눈부신 하늘 빛나는 해 번뜩 솟아난다 날 일
억조창생 격양가에 강구연월 달 월
차가운 초생달 날마다 불어나 보름 밤에 찰 영
세상만사 생각하니 달빛과 같은지라 십오야 밝은 달이 보름날 다음부터 기울 측
스물여덟 별자리 하도낙서 벌여놓은 일월성신 별 진
애석하게도 오늘밤은 기생집에서 자는구난 원앙금침에 잘 숙
절대가인 좋은 풍류 쭉 늘어서서 벌일 렬
어렴풋한 달빛 한밤중에 온갖 회포 베풀 장
오늘밤 찬바람이 쓸쓸하게 불어오니 침실에 들어라 찰 한
베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이만큼 오너라 올 래
끌어당겨 질끈 안고 님의 다리에 드니 눈바람에도 더울 서
침실이 덥거든 서늘한 바람을 취하여 이리저리 갈 왕
춥지도 덥지도 않은데 어느 때냐 낙엽 지는 오동나무에 가을 추
백발이 장차 우거지니 소년 태도 거둘 수
낙엽 지는 찬바람 흰눈 오는 강산에 겨울 동
오매불망 우리 사랑, 규수 머무는 깊은 방에 감출 장
연꽃이 어젯밤 가랑비에 윤기가 흘러 부드러울 윤
이러한 고운 태도 평생을 보고도 남을 여
백년기약 깊은 맹세 만경창파 이룰 성
이리저리 노닐 적에 세월 잊을 해 세
조강지처는 쫓아내지 못해 박대 못하나니 <대전통편> 번 율
군자의 좋은 짝 이 아니냐
춘향이 입과 내 입을
한데다 대고 쪽쪽 빠니
풍류 려자 이것 아니냐.
애고애고 보고지고." (p.35-41)
춘향이가 처음 일뿐 아니라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 몸을 틀 제, 이리 곰실 저리 곰실 푸른 물에 붉은 연꽃이 잔잔한 바람을 만나 나부끼는 것 같다. 도련님 치마 벗겨 제쳐 놓고 바지 속옷 벗길적에 무한히 실랑이를 편다. 이리 굼실 저리 굼실 동해의 청룡이 굽이를 치는 듯한다.
"아이고 놓아요, 좀 놓아요."
"에라, 안 될 말이로다."
실랑이 중에 옷끈을 풀어 발가락에 딱 걸고서 끼어 안고 진득이 누르며 기지개를 켜니, 발길 아래로 옷이 떨어진다. 옷이 활딱 벗겨지니 형산의 흰 옥덩인들 이에 비할쏘냐. 옷이 훨씬 벗어지니, 도련님 춘향의 거동을 보려 하고 슬그머니 놓으면서,
"아차차 손 빠졌다"
춘향이가 이불 속으로 달려든다. 도련님 왈칵 쫓아 들어 누워 저고리를 벗겨 내어 도련님 옷과 모두 함께 둘둘 뭉쳐 한편 구석에 던져 두고 둘이 안고 마주 누웠으니 그대로 잘 리가 있나. 한창 힘을 쓸 제, 삼베 이불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맞추어 청그렁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 등잔불은 가물가물, 맛이 있게 잘 자고 났구나. 그 가운데 재미있는 일이야 오죽하랴.
하루 이틀 지나가니 어린 것들이라 새로운 맛이 간간 새로워 부끄럼은 차차 멀어지고 그제는 희롱도 하고 우스운 말도 있어 자연 <사랑가>가 되었구나. 사랑으로 노는데 똑 이 모양으로 놀던 것이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동정칠백 월하초에 무산같이 높은 사랑
목단무변수에 여천창해같이 깊은 사랑
옥산전 달 밝은데 추산천봉 완월 하던 사랑
증경학무하올 적 차문취소하던 사랑
유유낙일 월렴간에 도리화개 비친 사랑
섬섬초월 분백한데 함소함태 숱한 사랑
월하에 삼생 연분 너와 나와 만난 사랑
허물없는 부부 사랑
화우동산 목단화같이 펑퍼지고 고운 사랑
연평 바다 그물같이 얽히고 맺힌 사랑
은하 직녀 직금같이 올올이 이은 사랑
청루미녀 침금같이 혼솔마다 감친 사랑
시냇가 수양같이 청처지고 늘어진 사랑
남창북창 노적같이 담불담불 쌓인 사랑
은장 옥장 장식같이 모모이 잠긴 사랑
영산홍록 봄바람에 넘노나니 황봉백접 꽃을 물고 즐긴 사랑
녹수청강 원앙조격으로 마주 둥실 떠노는 사랑
연년 칠월 칠석 야에 견우직녀 만난 사랑
육관대사 성진이가 팔 선녀와 노는 사랑
역발산 초패왕이 우미인 만난 사랑
당나라 당명황이 양귀비 만난 사랑
명사십리 해당화같이 연연히 고운 사랑
네가 모두 사랑이로구나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내 간간 내 사랑이로구나.
여봐라 춘향아 저리 가거라 가는 태도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도를 보자. 빵긋 웃고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도 보자. 너와 나와 만난 사랑 연분을 팔자 한들 팔 곳이 어디 있나. 생전의 사랑 이러하니 어찌 사후의 기약 없을소냐. 너는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글자 되어 땅 지 자, 그늘 음 자, 아내 처 자, 계집 녀 자 변이 되고, 나는 죽어 글자 되어 하늘 천 자, 하늘 건, 지아비 부, 사내 남, 아들 자 몸이 되어, 계집 녀 변에다 딱 붙이면 좋을 호 자로 만나 보자. 사랑 사랑 내 사랑. 또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물이 되되 은하수, 폭포수, 만경창해수, 청계수,옥계수, 일대장강 던져두고 칠 년의 큰 가뭄 때도 항상 넉넉하게 흐르는 음양수란 물이 되고, 나는 죽어 새가 되되 두견새도 되지 말고, 요지의 청조, 청학, 백학이며, 대붕조 그런 새가 되지 말고, 상상이 오가며 떠날 줄 모르는 원앙조란 새가 되어 푸른 물에 원앙처럼 어화둥둥 떠놀거든 나인 줄 알려무나. 사랑 사랑 내 간간 내 사랑이야.
“아니 그것도 나 아니 될라오.”
그러면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경주의 인경도 되지 말고
전주의 인경도 되지 말고
송도의 인경도 되지 말고
서울 종로의 인경 되고
나는 죽어 인경 치는 망치되어
시간마다 길마재 봉화 세 자루 꺼지고 남산 봉화 두 자루 꺼지면
인경 첫마디 치는 소리 그저 뎅뎅 칠 때마다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인경 소리로만 알아도
우리 속으로는 춘향 뎅 도련님 뎅이라 여겨 만나 보자꾸나
사랑 사랑 내 간간 내 사랑이야.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
그러면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방아 구덩이가 되고
나는 죽어 방아 공이가 되어
경신년 경신일 경신시에 강태공이 만든 방아
그저 떨구덩 떨구덩 찧거들랑
나인 줄 알려무나.
사랑 사랑 내 간간 사랑이야.
춘향이 하는 말이,
"싫소. 그것도 내 아니 될라오."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냐?"
"나는 항시 어찌 이생이나 후생이나 밑으로만 되라니까 재미없어 못 쓰겠소."
"그러면 너 죽어 위로 가게 하마. 너는 죽어 맷돌 윗짝이 되고 나는 죽어 밑짝 되어 이팔청춘 아름다운 젊은 여자들이 섬섬옥수로 맷대를 잡고 슬슬 두르면, 둥근 하늘 네모진 당처럼 휘휘 돌아가거든 나인 줄 알려무나."
"싫소. 그것도 아니 될라오. 위로 생긴 것이 성질나게만 생기었소. 무슨 원수가 졌기에 일생 한 구멍이 더하니 아무것도 나는 싫소."
그러면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명사십리 해당화가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나는 네 꽃송이 물고
너는 내 수염 물고
춘풍이 건듯 불거든
너울너울 춤을 추고 놀아 보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내 간간 사랑이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이 모두 내 사랑 같으면
사랑 걸려 살 수 있나.
어화 둥둥 내 사랑
내 예쁜 내 사랑이야.
방긋방긋 웃는 것은 꽃 중의 왕 모란화가
하룻밤 가랑비에 반만 피고자 한 듯
아무리 보아도 내 사랑 내 간간이로구나.
"그러면 어쩌잔 말이냐. 너와 나와 유정하니 정자로 놀아 보자. 소리를 함께 내어 정 자 노래나 불러 보세."
"들읍시다."
“내 사랑아 들어봐라. 너와 나와 유정하니 어찌 아니 다정하리. 출렁이는 장강의 물 아득히 멀리서 온 손님의 정, 다리를 사이에 두고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하고 강가의 나무만이 머금은 정, 남포에서 님과 이별하며 억누를 수 없는 애달픈 정, 한나라 태조 유방의 희우정, 고관대작 백관조정, 절이 청정, 각씨의 친정, 친구끼리 나누는 정, 난세평정, 우리 둘이 천년인정, 달 밝고 별 드문 소상동정, 세상만물 조화정, 근심걱정, 소지 원정, 주는 인정, 음식 투정, 복 없는 저 방정, 송정, 관정, 내정, 외정, 애송정, 천양정, 양귀비 침향정, 완산 팔경 기린봉에 달 뜨는 백운정, 너와 나와 만난 정, 작정하고 만난 진실한 정, 말하자면 내 마음은 원형이정, 네 마음은 일편탁정, 이같이 다 정타가 만일에 깨어지면 복통이 절정이라서 걱정되니 진정으로 고발하자는 그 정자다."
춘향이 좋아라고 하는 말이,
"정 속은 그만 하면 되었소. 우리집 재수 있게 안택경이나 좀 읽어 주오."
도련님 허허 웃고,
"그뿐인 줄 아느냐. 또 있지야. 궁자 노래를 들어 보아라."
"애고 얄궂고 우습다. 궁자 노래가 무엇이오?"
"네 들어 보아라. 좋은 말이 많으니라. 좁은 천지 교태궁, 뇌성벽력 풍우 속에 상서로운 기운이 풀려 있는 엄장한 창합궁, 성덕이 넓으신데 술로 연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 주지육림 웬 말인가 은임금의 대정궁, 진시황의 아방궁, 천하를 얻을 적에 한나라 태조의 함양궁, 그 곁에 장락궁, 반첩여의 장신궁, 당나라 현종의 상춘궁, 이리 올라서 이궁, 저리 올라서 별궁, 용궁 속의 수정궁, 월궁 속의 광한궁, 너와 나와 합궁하니 평생 무궁이라. 이 궁 저 궁 다 버리고 네 두 다리 사이에 있는 수룡궁에 나의 힘줄 방망이로 길을 내자꾸나."
춘향이 반만 웃고
"그런 잡담은 마시오."
"그게 잡담 아니로다. 춘향아 우리 둘이 업음질이나 하여 보자."
"애고 참 잡상스러워라. 업음질을 어떻게 하여요."
업음질을 여러 번 한 것처럼 말하던 것이었다.
"업음질 천하 쉬우니라. 너와 내가 훨씬 벗고 업고 놀고 안고도 놀면 그게 업음질이지야."
"애고 나는 부끄러워 못 벗겠소."
"에라 요 계집아이야 안 될 말이로다. 내 먼저 벗으마."
버선, 대님, 허리띠, 바지, 저고리 훨씬 벗어 한편 구석에 밀쳐 놓고 우뚝 서니, 춘향이 그 거동을 보고 삥긋 웃고 돌아서며 하는 말이,
"영락없는 낮도깨비 같소."
"오냐 네 말 좋다. 천지만물이 짝 없는 게 없느니라. 두 도깨비 놀아보자."
"그러면 불이나 끄고 노사이다."
"불이 없으면 무슨 재미 있겠느냐. 어서 벗어라 어서 벗어라."
"애고 나는 싫어요."
도련님 춘향 옷을 벗기려 할 제 뛰놀면서 어룬다.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이가 없어 먹지는 못하고 흐르릉 흐르릉 아웅 어루는 듯, 북해흑룡이 여의주를 입에다 물고 오색구름 사이를 뛰노는 듯, 단산의 봉황이 대나무 열매 물고 오동 속에서 뛰노는 듯, 한가로운 학과 두루미가 난초를 물고서 오동나무 소나무 사이에서 뒤노는 듯,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쏙 안고 기지개 아드득 떨며, 귓밥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발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오색당청 이불 안에서 쌍쌍이 날아드는 비둘기같이 꾹꿍 끙끙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쏙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 속옷까지 훨씬 벗겨 놓았다. 춘향이 부끄러워 한편으로 잡치고 앉았을 제, 도련님 답답하여 가만히 살펴보니 얼굴이 달아 올라 구슬땀이 송실송실 앉았구나.
"이야 춘향아 이리 와 업히거라."
춘향이 부끄러워하니,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이왕에 다 아는 바니 어서 와 업히거라."
춘향을 업고 추켜올리며,
"아따 그 게집아이 똥집 장히 무겁다. 네가 내 등에 업히니까 마음이 어떠하냐?"
"엄청나게 좋소이다."
"좋냐?"
"좋아요."
"나도 좋다. 좋은 말을 할 것이니 네가 대답만 하여라."
"말씀 대답하올 테니 하여 보옵소서."
"네가 금이지야?"
"금이라니 당치 않소. 팔 년이나 서로 싸웠던 초나라와 한나라 험한 시절, 여섯 번 신기한 게책을 내었던 진평이가 범아부를 잡으려고 항금 사만을 흩었으니, 금이 어이 남으리까."
"그러면 진옥이냐?"
"옥이라니 당치 않소. 만고영웅 진시황이 형산에서 옥을 캐내 명필 이사의 글씨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오래 살 것이며 길이 번창하리라'고 써서 옥새에 새겨 만세에 전해지니 옥이 어찌 되오리까."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해당화냐?"
"해당화라니 당치 않소. 명사십리가 아닌데 해당화가 되오리까.: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밀화, 금패, 호박, 진주냐?"
"아니 그것도 당치 않소. 삼정승 육판서며, 대신이며 재상이며, 팔도방백 수령님네 갓끈과 풍잠 다 만들고, 남은 것은 서울의 제일가는 명기가 가락지를 무수히 다 만드니 호박, 진주 부당하고."
"네가 그러면 대모, 산호냐?"
"아니 그것도 내 아니오. 대모로 큰 병풍 만들고 산호로 난간을 만들어 남해의 신 광리왕의 상량문에 수궁보물 되었으니 대모, 산호가 부당이오."
"네가 그러면 반달이냐?"
"반달이라니 당치 않소. 오늘 밤이 초생달이 아니거든 내가 어찌 푸른 하늘에 돋은 반달이리이까?"
"네가 그러면 무엇이냐. 날 홀려 먹는 불여우냐? 네 어머니 너를 낳아 곱도 곱게 길러내어 나만 홀려 먹으라고 생겼느냐? 사랑 사랑 사랑이야 내 간간 내 사랑이야. 네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생 밤, 삶은 밤을 먹으려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꼭지를 잘 드는 칼로 뚝 떼고 강릉에서 나는 좋은 꿀을 두루 부어 은수저로 붉은 점 한 점ㅁ을 먹으려느냐?"
"아니 그것도 내사 싫소."
"그러면 무엇을 먹으려느냐. 시금털털 개살구를 먹으려느냐?"
"아니 그것도 내사 싫소."
"그러면 무엇을 먹으려느냐. 돼지 잡아 주랴 개 잡아 주랴? 내 몸을 통째 먹으려느냐?"
"여보 도련님. 내가 사람 잡아먹는 것 보았소?"
"에라 요것 안 될 말이로다. 어화 둥둥 내 사랑이지. 이 애 그만 내리려무나. 온갖 일에는 다 품앗이가 있느니라. 내가 너를 업었으니 너도 나를 업어야지."
"애고 도련님은 기운이 세어서 나를 업었거니와 나는 기운이 없어 못 업겠소."
"업는 수가 있느니라. 나를 돋워 업으려 하지 말고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뒤로 젖힌 듯하게 업어다오."
도련님을 업고 툭 추켜 놓으니 몸이 뒤틀렸구나.
"애고 잡상스러워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내가 네 등에 업혀 놓으니 마음이 어떠하냐? 나도 너를 업고 좋은 말을 하였으니 너도 나를 업고 좋은 말을 하여야지."
"좋은 말을 하오리다. 들으시오. 은나라의 어진 재상 부열이를 업은 듯, 강태공을 업은 듯, 가슴속에 큰 생각을 품었으니 명망이 온 나라에 가득하다. 대신 되어 주석지신, 보국 충신 모두 헤아리니 사육신을 입은 듯, 생육신을 업은 듯, 일 선생 월 선생, 고운선생을 업은 듯, 제봉 고경명을 업은 듯, 요동백을 업은 듯, 송강 정철을 업은 듯, 충무공을 업은 듯, 우암 송시열, 퇴계 이황, 사계 김장생, 명재 윤증을 업은 듯. 내 서방이지 내 서방, 알뜰 간간 내 서방. 진사에 급제하고 곧바로 한림 학사 된 연후에 부승지, 좌승지, 도승지로 벼슬이 올라 팔도방백 지낸 후에 내직으로는 각신, 대교, 복상, 대제학, 대사성, 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규장작 하신 후에, 내직으로는 삼천 개요 외직으로는 팔백 개 다 맡은 주석지신, 내 서방 알뜰 간간 내 서방이지."
제 손수 진물이 나오게 문질렀구나.
"춘향아 우리 말놀음이나 좀 하여 보자."
"애고 참 우스워라. 말놀음이 무엇이오?"
말놀음 많이 해 본 것처럼 하는 말이,
"천하에 쉽지야. 너와 내가 벗은 김에 너는 온 방바닥을 기어 다녀라. 나는 네 궁둥이에 딱 붙어서 네 허리를 잔뜩 끼고 볼기짝을 내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이리 하거든 흐흥거려 한 발 들고 물러서며 뛰어라. 야무지게 뛰게 되면 탈 승 자 노래가 있느니라."
'타고 놀자 타고 놀자. 황제였던 헌원씨가 방패와 창 쓰는 법을 익히니 사방에 안개를 자욱하게 끼도록 하고, 싸움 좋아하던 치우를 탁녹야에서 사로잡고 승전고 울리면서 거룩한 수레에 높이 타고, 하나라 우임금이 구 년 동안 게속되던 홍수를 다스릴 제 수레에 높이 타고, 적송자는 구름 타고 여동빈은 백로 타고, 이태백은 고래 타고, 당나라 시인 맹호연은 나귀 타고, 하늘의 신인 태을선인은 학을 타고, 중국의 황제는 코끼를 타고, 우리 전하는 연을 타고, 삼정승은 네 명이 끄는 평교자를 타고, 육판서는 초헌 타고, 훈련대장은 수레 타고, 각 읍 수령은 말 한리가 끄는 독교 타고, 남원부사는 별연을 타고, 해 지는 강가의 고기잡이 노인은 일엽편주 도도히 타고, 나는 탈 것 없었으니 오늘 밤 깊은 시간 깊은 밤에 춘향 배를 넌짓 타고 홑이불로 돛을 달아 내 기계로 노를 저어 오목섬에 들어간다. 순풍에 음양수를 시름 없이 건너갈 제, 말이라고 생각하고 탈 것이면 걸음걸이가 없을쏘냐. 마부는 내가 되어 너의 고삐를 잡아 부산하게 건들건들 걸어라. 좋은 말이 뛰듯 뛰어라."
온갖 장난을 다 하고 보니 이런 장관이 또 있으랴. 이팔과 이팔 둘이 만나 미친 마음 세월 가는 줄 모르던가 보더라. (p.57-7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구운몽 - 김만중 (정병설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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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을 형틀에 올려 매고는 사정이 거동 봐라. 형장이며 태장이며 곤장이며 한아름 담쑥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내려 놓는 소리에 춘향의 정신이 아찔하다. 곤장 잡은 사령 거동 봐라. 이 놈도 잡고 능청능청, 저 놈도 잡고서 능청능청, 힘 좋고 빳빳하고 잘 부러지는 놈 골라잡고, 오른 어깨 벗어 메고, 형장 잡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제,
"분부 모셔라. 네 그년을 사정 보아 헛 때렸다가는 당장에 죽을 것이니 각별히 매우 쳐라."
집장사령 여쭈오되,
"사또 분부 지엄한데 저만한 년을 무슨 사정 두오리까. 이년! 다리를 까딱도 하지 말라. 만일 움직이다가는 뼈가 부러지리라."
호통하고 들어서서는 구호에 발맞추어 서면서 춘향에게 조용히 하는 말이,
"한두 대만 견디소. 어쩔 수가 없네. 요 다리는 요리 틀고 저 다리는 저리 트소."
"매우 쳐라."
"예잇, 때리오."
딱 붙이니 부러진 형장 막대는 푸르르 날아 공중에 빙빙 솟아 대뜰 아래 떨어지고, 춘향이는 아무쪼록 아픈 데를 참으려고 이를 복복 갈며 고개만 빙빙 돌리면서,
"애고 이게 웬일이여."
곤장 태장 치는 데는 사령이 서서 '하나 둘' 헤아리건만 형장부터는 법장이라. 형리와 통인이 닭싸움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드려서 하나 치면 하나 긋고 둘 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 없는 놈 술집 담벼락에 술값 긋듯 그어 놓으니 한 일 자가 되었구나.
춘향이는 저절로 설움 겨워 맞으면서 우는데,
"일편단심 굳은 마음은 일부종사하려는 뜻이오니 일개 형벌로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 가서 잠시라도 변하리까?"
이때 남원부 한량이며 남녀노소 없이 모두 모여 구경할 제 좌우의 한량들이,
"모질구나 모질구나. 우리 골 원님이 모질구나. 저런 형벌이 왜 있으며 저런 매질이 왜 있을까. 집장사령 놈 잘 보아 두어라. 삼문 밖 나오면 패 죽이리라."
보고 듣는 사람이야 눈물 아니 흘릴 자 있으랴. 둘째 매를 딱 붙이니,
아황과 여황 두 왕비의 절개를 아옵는데
두 지아비 못 섬기는 이내 마음
이 매 맞고 영영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
샛째 매를 딱 붙이니,
삼종지도 지엄한 법 삼감오륜 알았으니
갖은 형벌에 귀양을 갈지라도
삼청동 우리 낭군 이 도령은 못 잊겠소.
넷째 매를 딱 붙이니,
사대부 사또님은 백성들을 살피잖고
위력에만 힘을 쓰니
사십팔방 남원 백성
원망함을 모르시오.
사지를 가른대도 사생동거 우리 낭군
사생 간에 못 잊겠소.
다섯째 매 딱 붙이니,
삼강오륜 엄연한데
오륜 중의 부부유별 맺은 연분
올올이 찢어 낸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온전히 생각나네.
오동추야 밝은 달은 님 계신 곳 보련마는
오늘이나 편지 올까 내일이나 기별 올까.
무죄한 이 내 몸이 죄지은 일 없사오니
잘못 처결하여 죄수 만들지 마옵소서.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여섯째 매 딱 붙이니,
육육은 삼십육으로 매마다 죄를 묻고
육만 번 죽인대도
육천 마디 어린 사랑 맺힌 마음
변할 수 전혀 없소.
일곱째 매를 딱 붙이니,
칠거지악 범하였소?
칠거지악 아니거든 이런 형벌 웬일이오.
칠척검 드는 칼로
동동이 토막 내어 이제 바삐 죽여 주오.
'쳐라' 하는 저 형방아!
칠 때마다 헤아리지 마소.
고운 얼굴 나 죽겠네.
여덟째 매 붙이니,
팔자 좋은 춘향 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 방백 수령님네
치민하러 내려왔지
악형하러 내려왔소.
아홉째 매 딱 붙이니,
구곡간장 굽이 썩어
이 내 눈물 구년지수 되겠구나.
아홉 구비 청산의 장송 베어 묶어
배 만들어 훌쩍 타고 한양성중 급히 가서
구중궁궐 임금님께 구구한 억울함을 주달하고
구정 뜰에 물러나와 삼청동을 찾아가서
우리 사랑 반가이 만나
굽이굽이 맺힌 마음 조금은 풀리련만.
열째 낱 딱 붙이니,
십생구사 할지라도 팔십 년 정한 뜻은
십만 번 죽인대도 변함없으니 어쩌겠나?
십육 세 어린 춘향 장하원귀 가련하오.
열 치고는 그만 할 줄 알았더니 열다섯째 매 딱 붙이니,
십오야 밝은 달은 띠구름에 묻혀 있고
서울 계신 우리 낭군 삼청동에 묻혔으니
달아 달아 보느냐.
님 계신 곳 나는 어이 못 보는고.
스물 치고 그만 할까 여겼더니 스물다섯째 매 딱 붙이니,
이십오현탄야월에
원한 못 이기는 저 기러기
너 가는 데 어드메냐,
가는 길에 한양성 찾아들어
삼청동 우리 님께
내 말 부디 전해 다오.
나의 형상 자세히 보고
부디부디 잊지 마라
온 하늘에 어린 마음
옥황전에 아뢰고저.
옥 같은 춘향 몸에 솟는 것은 유혈이요 흐르는 것은 눈물이라. 피 눈물 한 데 흘러 무릉도원에 흘러 내리는 붉은 물이 되었구나. 춘향이 점점 약을 쓰며 하는 말이.
"소녀를 이리 말고 능지처참하여 아주 박살내어 죽여 주면, 죽은 후 원조라는 새가 되어 두견새와 함께 울어 적막강산 달 밝은 밤, 우리 이 도련님 잠든 후 꿈이나 깨게 하여이다."
말 못하고 기절하니 엎드렸던 통인은 고개 들어 눈물 씻고, 매질하던 저 사령도 눈물 씻고 돌아서며,
"참 못할 일이로다."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과 거행하는 관리들이 눈물 씻고 돌아서며,
"춘향이 매 맞는 거동 사람 자식은 못 보겠다. 모질도다 모질도다 춘향 정절이 모질도다. 하늘이 낳은 열녀로다."
남녀노소 없이 서로 눈물 흘리며 돌아설 때 사또인들 좋을 리가 있으랴.
'네 이년 관아에서 발악하고 맞으니 좋은 게 무엇이냐? 다음에 또 관장 명을 거역할까?"
반생반사 저 춘향이 점점 악을 쓰며 하는 말이,
"여보, 사또 들으시오. 여자가 한번 한을 품으면 생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이 그리 모르시오. 계집의 모진 마음 오뉴월에 서리 치네. 넑이 되어 하늘에 떠돌다가 우리 임금 앉은 곳에 이 억울함을 아뢰오면 사또인들 무사할까. 덕분에 죽여 주오."
사또 기가 막혀,
"허허 그년 말 못할 년이로고, 큰칼 씌워 하옥하라."
하니 큰칼 씌워 봉인하여 사정이 등에 업고 삼문 밖 나올 제 기생들이 나오며,
"애고 서울댁아 정신 차리게. 애고 불쌍하여라."
사지를 만지며 약을 갈아 먹이며 서로 보고 눈물 흘릴 제, 이 때 키 크고 속없는 낙춘이가 들어오며,
"얼씨고 절씨고 좋을씨고. 우리 남원에도 열녀 현판 달 일 생겼구나."
왈칵 달려들어,
"애고 서울댁아. 불쌍하여라."
이리 야단할 제 춘향 어미가 이 말을 듣고 정신없이 들어오더니 춘향의 목을 안고,]
"애고 이게 웬일이냐. 죄는 무슨 죄며 매는 무슨 매냐. 장청의 집사님네 길청의 이방님네. 내 딸이 무슨 죄요. 장군방 두목들아 집장하던 사정도 무슨 원수 맺혔더냐.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칠십 나이 늙은 것이 의지 없이 되었구나. 무남독녀 내 딸 춘향, 규중에 은근히 길러 내어, 밤낮으로 서책만 놓고 가사 공부 일삼으며 나 보고 하는 말이, '마오 마오 설워 마오. 아들 없다 설워 마오. 외손봉사 못하리까.' 어미에게 지극정성 곽거와 맹종인들 내 딸보다 더할쏜가. 자식 사랑하는 법이 상중하가 다를쏜가. 이 내 마음 둘 데 없네. 가슴에 불이 붙어 한숨이 연기로다. 김 번수야 이 번수야, 상관의 말이 지엄하다 하지만 이다지도 몹시 쳤느냐? 애고 내 딸 장처 보소. 빙설 같은 두 다리에 연지 같은 피 비쳤네. 명문가 부인네들 눈먼 딸도 원하더라. 그런 데 가 태어나지 기생 월매 딸이 되어 이 경색이 웬일이냐. 춘향아 정신 차려라. 애고 애고 내 신세야."
며,
"향단아. 삼문 밖에 가서 삵군 둘만 사오너라. 서울에 쌍급주 보내련다."
춘향이 쌍급주 보낸단 말을 듣고,
"어머니 그리 마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만일 급주가 서울 올라가서 도련님이 보시면, 층층시하에 어찌할 줄 몰라 심사 울적하여 병이 되면 그것인들 아니 훼절이오. 그런 말씀 마시고 옥으로 가사이다."
사정의 등에 업혀 옥으로 들어갈 제, 향단이는 칼머리 들고 춘향 어미는 뒤를 따라 옥문 앞에 당도하여,
"옥졸, 문을 여소. 옥졸도 잠들었나?"
옥중에 들어가서 옥방 형상 볼작시면 부서진 죽창 틈에 살을 쏘는 것은 바람이요, 무너진 헌 벽이며 헌 자리에 벼룩 빈대 온몸을 침노한다. 이때 춘향이 옥방에서 장탄가로 울던 것이었다.
이내 죄가 무슨 죄냐?
국곡투식 아니거든 엄형중장 무슨 일고.
살인조인 아니거든 항쇄 족쇄 웬일이며
삼강오륜 어긴 죄인 아니거든 사지결박 웬일이며
간통 죄인 아니거든 이 형벌이 웬일인고.
삼강수는 벼룻물이 되어
푸른 하늘은 종이가 되어
나의 설움을 하소연하여
옥황상제 앞에 올리고저.
낭군 그리워 가슴 답답 불이 붙네,
한숨이 바람 되어 붙는 불을 더 붙이니
속절없이 나 죽겠네.
홀로 섰는 저 국화는 높은 절개 거룩하다.
눈 속의 청송은 영원한 절개 지켰구나.
푸른 솔은 나와 같고 누른 국화 낭군같이
슬픈 생각 뿌리나니 눈물이요 적시느니 한숨이라.
한숨은 청풍 맑은 눈물은 가랑비 삼아
청풍이 가랑비를 몰아다가
불거니 뿌리거니
님의 잠을 깨우고저
견우직녀성은 칠석날 상봉하올 적에
은하수 막혔으되 기약 어긴 일 없었건만
우리 낭군 계신 곳에 무슨 물이 막혔는지
소식조차 못 듣는고,
살아 이리 그리느니
아주 죽어 잊고지고
차라리 이 몸 죽어
공산의 두견이 되어
이화월백 깊은 밤에
슬피 울어 낭군 귀에 들리고저.
청강에 원앙 되어 짝을 불러 다니면서
다정코 유정함을 님의 눈에 보이고저,
삼월 봄날 나비 되어 향기 묻은 두 나래로
봄빛을 자랑하여 낭군 옷에 붙고지고,
청천에 명월 되어 밤이 되면 돋아 올라
밝디밝은 밝은 빛을 님의 얼굴에 비추고저
이내 간장 썩는 피로 님의 화상 그려 내어
방문 앞에 족자 삼아 걸어 두고
들며 나며 보고지고.
수절정절 절대가인 참혹하게 되었구나.
문채 좋은 형산백옥 진흙 속에 묻혔는 듯,
향기로운 상산초가 잡풀 속에 섞였는 듯,
오동 속에 놀던 봉황 가시 속에 깃들인 듯.
자고로 성현네도 무죄하고 궂기시니
요, 순, 우, 탕 임금네도
걸주의 포악으로 함진옥에 갇혔다가
다시 나와 성군 되시고
밝은 덕으로 백성 다스리신 주나라 문왕도
상주의 해를 입어 유리옥에 갇혔더니
도로 나와 성군 되고
만고셩현 공부자도
양호의 해를 입어 광야에 갇혔더니
도로 나와 대성 되시니
이런 일로 볼작시면
죄 없는 이내 몸도
살아나서 세상 구경 다시 할까.
답답하고 원통하다 날 살릴 이 뉘 있을까.
서울 게신 우리 낭군 벼슬길로 내려와
이렇듯이 죽어갈 제 내 목숨을 못 살린가.
여름의 구름은 빼어난 봉우리에 가득하니
산이 높아 못 오던가.
금강산 상상봉이 평지 되거든 오려신가
병풍에 그린 황제 두 나래를 툭툭 치며
새벼녘에 날 새라고 울거든 오려신가.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죽창문을 열치니 밝고 맑은 달빛은 방안에 든다마는 어린 것이 홀로 앉아 달에게 묻는 말이,
"저 달아, 보느냐? 님 계신 곳 밝은 기운을 빌려라. 나도 보게야. 우리 님이 누웠더냐 앉았더냐? 보는 대로만 네가 일러 나의 수심 풀어 다오." (p.114-130)
분부하여 각기 나누어 출발시킨 후에, 어사또 행장을 차리는 데 모양 보소.
뭇사람을 속이려고 모자 없는 다 떨어진 헌 갓에 굵은 줄 총총 매어 질 낮은 명주 갓끈 달아 쓰고, 윗부분만 남은 헌 망건에 아교관자, 노끈당줄 달아 쓰고, 어수룩한 헌 도복에 무명실 띠를 가슴 가운데 둘러매고, 살만 남은 헌 부채에 솔방울을 매달아 햇빛을 가리고 내려온다. 통시암을 거쳐 삼이에서 잠을 자고 한내, 주엽쟁이, 가린내, 싱금정 구경하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서호강남이 여기로다. 기린봉 위에 솟는 달이며, 한벽당 주변의 맑은 연기, 남고사의 종소리, 건지산 위에 솟는 보름달, 다가산에 비껴 뿌리는 빗발, 덕진의 연꽃캐기, 비비정을 날아오르는 기러기, 위봉산의 폭포 등 완산의 팔경을 다 구경하고 차례차례 암행하여 내려온다.
각읍 수령들이 어사 온다는 말을 듣고 민정을 가다듬고 이미 한 일을 염려할 제 아랫사람인들 편하리오. 이방, 호장 넋이 달아나고 공사회계하는 형방, 서기 여차하면 도망가려 준비하고, 허다한 각 관리들이 넋을 잃어 분주하다. 이때 어사또는 임실 구화뜰 근처를 당도하니 이때는 마침 농사철이라. 농부들이 <농부가>를 부르며 이러할 제 야단이었다.
여여로 상사디야
넓고 넓은 세상천지 태평할 때
도덕 높은 우리 성군
태평세월 노래하는 동요 듣던
요임금 성덕이라
어여로 상사디야.
순임금 높은 성덕으로 내리신 그릇
역산에 밭을 갈고
어여로 상사디야.
신농씨 내신 따비
천추만대 전해지니
어이 아니 높으던가
어여로 상사디야.
하우씨 어진 임금
구 년 홍수 다스리고
어여라 상사디야
은왕 탕왕 어진 임금
칠 년 가뭄 당하였네
어여라 상사디야
이 농사를 지어 내어
우리 임금께 바친 후에
남은 곡신 장만하여
부모 봉양 아니하며
처자 부양 아니할까
어여라 상사디야
온갖 풀을 심어
계절을 짐작하니
믿음직한 게 풀이로다
어여라 상사디야
부귀영화 좋은 호강
이 업을 당할쏘냐
어여라 상사디야.
못 쓰는 땅 개간하여
배불리 먹어 보세
얼럴럴 상사디야.
한참 이리 할 적에, 어사또가 지팡이 짚고 저만큼 서서 <농부가>를 구경하다가,
"거기는 대풍이로고"
또 한 편을 바라보니 이상한 일이 있다. 중년이 넘은 노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서서 등걸밭을 일구는데, 갈멍덕을 숙여 쓰고 쇠스랑 손에 들고 <백발가>를 부른다.
등장가자 등장가자
하느님 전에 등장갈 양이면
무슨 말을 하실는지
늙은이는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게
하느님 전에 등장가세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이 원수로다
오는 백발 막으려고
오른손에 도끼 들고
왼손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 끌어당겨
청실로 결박하여
단단히 졸라매되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때때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 되니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이라
무정한 게 세월이라,
소년 시절 즐거움 깊은들
왕왕이 달라가니
아니 세월인가
천금준마 잡아타고
장안대도 달리고저
만고강산 좋은 경치
다시 한 번 보고지고
절대가인 곁에 두고
온갖 교태 놀고지고.
꽃 피는 아침 달 밝은 저녁
사시사철 좋은 경치
눈 어둡고 귀가 먹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네
할 수 없는 일이로세
슬프다 우리 벗님
어디로 가겠는고
가을 단풍잎 지듯이
차츰차츰 떨어지고
새벽하늘 별 지듯이
삼삼오오 쓰러지니
가는 길이 어드멘고
어여로 가래질이야
아마도 우리 인생
일장춘몽인가 하노라
한참 이러할 제 한 농부 썩 나서며
"담배 먹세. 담배 먹세."
갈멍덕 숙여 쓰고 두던에 나오더니, 곱돌로 만든 좋은 담뱃대 넌짓 들어 꽁무니 더듬더니, 가죽 쌈지 빼어 놓고 침을 세차게 뱉어 엄지손가락이 자빠지게 비비적비비적 단단히 넣어, 짚불을 뒤져 놓고 화로에 푹 질러 담배를 피운다. (p.147-154)
"천지지신 일월성신은 한마음이 되옵소서. 무남독녀 춘향이를 금쪽같이 길러 내어 외손봉사 바라더니 무죄한 매를 맞고 옥중에 갇혔으니 살릴 길이 없삽니다. 천지지신은 감동하사 한양성 이몽룡을 벼슬 높이 올려 내 딸 춘향 살려지이다."
빌기를 다한 후,
"향단아 담배 한 대 붙여 다오."
춘향 어미 받아 물고 후유 한숨 눈물 흘릴새, 이때 어사 춘향 어미 정성 보고,
"내가 벼슬 한 게 조상의 음덕으로 알았더니 우리 장모 덕이로다."
"그 안에 뉘 있나?"
"뉘시오?"
"내로세."
"내라니 뉘신가?"
어사 들어가며,
"이 서방일세."
"이 서방이라니. 옳지 이풍헌 아들 이 서방인가."
"허허 장모 망령이로세. 나를 몰라, 나를 몰라."
"자네가 누구여?"
"사위는 백년지객이라 하였으니 어찌 나를 모르는가."
춘향 어미 반겨하여,
"애고 애고 이게 웬인인고. 어디 갔다 이제 와. 바람이 거세더니 바람결에 날려 온가. 구름이 봉우리에 걸리더니 구름 속에 싸여 온가. 춘향의 소식 듣고 살리려고 와 계신가. 어서 어서 들어가세."
손을 잡고 들어가서 촛불 앞에 앉혀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걸인 중에 상걸인이 되었구나. 춘향 어미 기가 막혀,
"이게 웬일이오?"
"양반이 그릇되매 형언할 수 없네. 그때 올라가서 벼슬길 끊어지고 가산 탕진하여 부친께서는 훈장질하러 가시고 모친은 친정으로 가시고 다 각기 갈리어서, 나는 춘향에게 내려와서 돈이나 얻어 갈까 하였더니 와서 보니 두 집안 꼴이 말 아닐세."
춘향 어미 이 말 듣고 기각 막혀,
"무정한 이 사람아. 한번 이별 후로 소식이 없었으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뒷날을 바랐더니 어찌 이리 잘되었소. 이미 쏜 화살이 되고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할까마는 내 딸 춘향 어쩔라나?"
홧김에 달려들어 코를 물어뜯으려 하니,
"내 탓이지 코 탓인가. 장모가 나를 몰라보네. 하늘이 무심해도 풍운의 조화와 천둥벼락의 기운이 있느니."
춘향 어미 기가 차서,
"양반이 그릇되매 희롱조차 들었구나."
어사 일부러 춘향 어미가 하는 거동을 보려고,
"시장하여 나 죽겠네. 나 밥 한 술 주소."
춘향 어미 밥 달라는 말을 듣고,
"밥 없네."
어찌 밥 없을까마는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이때 향단이 옥에 갔다 나오더니 저의 아씨 야단 소리에 가슴이 우둔우둔 정신이 울렁울렁 정신없이 들어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에전의 서방님이 와 계시는구나. 어찌 반갑던지 우루룩 들어가서,
"향단이 문안이오. 대감님 문안이 어떠하옵시며 대부인 안부 안녕하옵시며 서방님께서도 원로에 평안히 행차하시니까?"
"오냐. 고생이 어떠하냐?"
"소녀 몸은 무탈하옵니다. 아씨 아씨 큰 아씨. 마오 마오 그리 마오. 멀고 먼 천릿길에 누구 보려고 오셨는데 이 괄시가 웬일이오. 애기씨가 아시면 지레 야단이 날 것이니 너무 괄시 마옵소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먹던 밥에 풋고추, 절인 김치, 양념 넣고, 단간장에 냉수 가득 떠서 밥상에 받쳐 드리면서,
"더운 진지 할 동안에 시장하신데 우선 요기하옵소서."
어사또 반겨하며
"밥아 너 본 지 오래로구나."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붓더니 숟가락 댈 것 없이 손으로 뒤져서 한편으로 몰아치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하는구나.
춘향 어미 하는 말이,
"얼씨구 밥 빌어먹기는 이골이 났구나."
이때 향단이는 저의 애기씨 신세를 생각하여 크게 울지는 못하고 훌쩍이며 우는 말이,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도덕 높은 우리 애기씨 어찌하여 살리시려오. 어쩌꺼나요 어쩌꺼나요."
미친 듯 우는 꼴을 어사또 보시더니 기가 막혀,
"여봐라 향단아.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너의 아가씨가 살지 설마 죽을 쏘냐. 행실이 지극하면 사는 날이 있느니라."
춘향 어미 듣더니,
"애고, 양반이라고 오기는 있어서 대체 자네가 왜 이 모양인가?"
향단이 하는 말이,
"우리 큰아씨 하는 말을 조금도 쾌념 마옵소서. 나이 많이 노망든 중에 이 일을 당해 놓으니 홧김에 하는 말이라. 조금이라도 노하리까. 더운 진지 잡수시오."
어사또 밥상 받고 생각하니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마음이 울적, 오장이 울렁울렁. 저녁밥이 맛이 없어,
"향단아, 상 물려라."
담뱃대 툭툭 털며,
"여보소 장모, 춘향이가 좀 보아야제?"
"그러지요. 서방님이 춘향을 아니 보아서야 인정이라 하오리까?"
향단이 여쭈오되,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통금이나 풀리면 가사이다."
이때 마침 통금 해제하는 종을 뎅뎅 치는구나. 향단이는 미음상이며 등불을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에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옥졸도 간 곳 없네.
이때 춘향이 비몽사몽간에, 서방님이 오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이요 몸에는 홍삼이라. 오로지 사랑만을 생각하며 목을 안고 온갖 회포에 젖어 있던 터라.
"춘향아."
부른들 대답이 있을쏘냐.
사또 하는 말이,
"크게 한번 불러 보소."
"모르는 말씀이오. 여기서 동헌이 마주 있는데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가 염문할 것이니 잠깐 지체하옵소서."
"뭐가 어때. 염문이 무엇인고? 내가 부를게 가만있소. 춘향아."
부르는 소리에 춘향이, 깜짝 놀라 일어나며,
"허허 이 목소리 잠결인가 꿈결인가. 그 목소리 괴이하다."
어사또 기가 막혀,
"내가 왔다고 말을 하소."
"왔단 말을 하게 되면 기절해서 간 떨어질 것이니 가만히 게시옵소서."
춘향이 저의 모친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어머니 어찌 오셨소. 몹쓸 딸자식을 생각하와 천방지축으로 다니다가 낙상하기 쉽소. 다음부터는 오실라 마옵소서."
"날랑은 염려 말고 정신을 차리어라. 왔다."
"오다니 누가 와요?"
"그저 왔다."
"갑갑하여 나 죽겠소. 일러 주오. 꿈 가운데 님을 만나 온갖 회포 나누었더니 혹시 서방님께서 기별 왔소? 언제 오신단 소식 왔소? 벼슬 띠고 내려온단 공문 왔소? 답답하여라."
"너의 서방인지 남방인지 걸인 하나가 내려왔다."
"허허. 이게 웬 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꿈결에 보던 님을 생시에 본단 말인가."
문틈으로 손을 잡고 말 못하고 기겁하며,
"애고 이게 누구시오. 아마도 꿈이로다. 그토록 그린 님을 이리 쉽게 만날쏜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네. 어찌 그리 무정한가. 박명하다 나의 모녀. 서방님 이별 후에 자나 누우나 님 그리워 오래도록 한이더니, 내 신세 이리 되어 매에 감겨 죽게 되는 날 살리러 와 계시오."
한참 이리 반기다가 님의 ㅎ여상 자세히 보니 어찌 아니 한심하랴.
"여보 서방님. 내 몸 하나 죽는 것은 설운 마음 없소마는 서방님 이 지경이 웬일이오."
"오냐 춘향아. 설워 마라. 인명이 재천인데 설만들 죽을쏘냐."
춘향이 저의 모친 불러
한양성 서방님을 칠년대한 가문 날에
큰 비 오기를 기다린들 나와 같이 맥 빠질쏜가.
심은 나무가 꺽어지고 공든 탑이 무너졌네.
련하다 이내 신세 하릴없이 되었구나.
어머님 나 죽은 후에라도 원이나 없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입던 비단 장옷 봉황 장올 안에 들었으니
그옷 내어 팔아다가 한산모시 바꾸어서
물색 곱게 도포 짓고
흰색 비단 긴 치마를 되는 대로 팔아다가
관, 망건, 신발 사 드리고
좋은 병과 비녀, 밀화장도, 옥지환이 함 속에 들었으니
그것도 팔아다가 한삼 고의 흉하지 않게 하여 주오.
금명간 죽을 년이 세간 두어 무엇 할까.
용장롱, 봉장롱, 빼닫이를 되는 대로 팔아다가 좋은 진지 대접하오.
나 죽은 후에라도 나 없다 마시고 날 본 듯이 섬기소서.
서방님 내 말씀 들을시오.
내일이 본관사또 생신이라.
술에 취해 주정나면 나를 올려 칠 것이니
형장 맞은 다리 장독이 났으니 수족인들 놀릴쏜가
치렁치렁 흐트러진 머리 이럭저럭 걷어 얹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들어가서 곤장 맞고 죽거들랑
삯군인 체 달려들어 둘러업고
우리 둘이 처음 만나 놀던 부용당
적막하고 고요한 데 뉘어 놓고
서방님 손수 염습하되
나의 혼백 위로하여 입은 옷 벗기지 말고
양지 끝에 묻었다가
서방님 귀히 되어 벼슬에 오르거든
잠시도 지체 말고 육진장포로 다시 염습하여
조촐한 상여 위에 덩그렇게 실은 후에
북망산천 찾아갈 제
앞 남산 뒤 남산 다 버리고 한양성으로 올려다가
선산발치에 묻어 주고 비문에 새기기를
수절원사춘향지묘라 여덟 자만 새겨 주오
망부석이 아니 될까.
서산에 지는 해는 내일 다시 오련마는
불쌍한 춘향이는 한번 가면 언제 다시 올까.
맺힌 한이나 풀어 주오.
애고 애고 내 신세야
불쌍한 나의 모친 나를 잃고 가산을 탕진하면
하릴없이 걸인 되어 이집 저집 걸식타가
언덕 밑에 조속조속 졸면서 기운 다해 죽게 되면
지리산 갈가마귀 두 날개를 떡 벌리고
둥덩실 날아들어 까옥까옥 두 눈을 다 파 먹은들
어느 자식 있어 '후여' 하고 날려 주리.
애고 애고 설워 울 때,
어사또
"울지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느니라. 네가 나를 어찌 알고 이렇듯이 설워 하느냐."
작별하고 춘향 잡에 돌아왔지. (p.160-171)
"여봐라 사령들아. 너의 사또에게 여쭈어라. 먼 데 있는 걸인이 좋은 잔치에 왔으니 술과 안주나 좀 얻어먹자고 여쭈어라."
저 사령의 거동보소.
"우리 사또님이 걸인을 금하였으니, 어느 양반인지는 모르오만 그런 말은 내지도 마오."
등을 밀쳐내니 어찌 아니 명관인가. 운봉 영장이 그 거동을 보고 본관사또에게 청하는 말이,
"저 걸인의 의관은 남루하나 양반의 후예인 듯하니 말석에 앉히고 술잔이나 먹여 보냄이 어떠하뇨?"
본관사또 하는 말이,
"운봉의 소견대로 하오마는."
'마는' 하는 끝말을 내뱉고는 입맛이 사납겠다. 어사또 속으로,
"오냐. 도덕질은 내가 하마. 오라는 네가 받아라."
운봉 영장이 분부하여,
"저 양반 듭시라고 하여라."
어사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좌우를 살펴보니, 당 위의 모든 수령 다과상을 앞에 놓고 진양조가 높아 가는데, 어사또의 상을 보니 어찌 아니 통분하랴. 모서리 떨어진 개상판에 닥나무 젓가락, 콩나물, 깍두기, 막걸리 한 사발 놓았구나. 상을 발 길로 탁 차 던지며 운봉 영장의 갈비를 가리키며,
"갈비 한 대 먹고지고."
"다리도 잡수시오."
하고는 운봉이 하는 말이,
"이러한 잔치에 풍류로만 놀아서는 맛이 적사오니 차운 한 수씩 하여 보면 어떠하오?"
"그 말이 옳다."
하니 운봉이 운을 낼 제 높을 고 자, 기름 고 자 두 자를 내어 놓고 차례로 운을 달아 시를 짓는다. 이때 어사또 하는 말이,
"걸인이 어려서 한시깨나 읽었더니 좋은 잔치 당하여서 술과 안주를 포식하고 그냥 가기 민망하니 차운 한 수 하사이다."
운봉 영장이 반겨 듣고 필연을 내어 주니, 좌중 사람들이 다 짓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글 두 귀를 지었으되,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본관사또의 정체를 감안하여 지었겄다.
금준미주(金樽美酒)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漏落時)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라.
이 글 뜻은,
금동이의 아름다운 솔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이렇듯이 지었으되 본관사또는 몰라 보는데 운봉 영장은 글을 보며 속으로,
"아뿔사. 일이 났다."
이때 어사또가 하직하고 간 연후에 각 아전들을 분부하되,
"야야. 일이 났다."
공방 불러 돗자리 단속, 변방 불러 역마 단속, 관청색 불러 다과상 단속, 옥형방 불러 죄인 단속, 집사 불러 형구 단속, 형방 불러 장부 단속, 사령 불러 숙직 단속. 한참 이리 요란할 제 사정 모르는 저 본관사또가,
"여보 운봉은 어디를 다니시오?"
"소피 보고 들어오오."
본관사또가 술주정이 나서 분부하되,
"춘향을 급히 올리라."
때에 어사또 부하들과 내통한다. 서리를 보고 눈길을 보내니 서리, 중방 거동 보소. 역졸을 불러 단속할 제 이리 가며 수군, 저리 가며 수군수군. 서리, 역졸 거동 보소. 외올망건 공단모자 새 패랭이 눌러 쓰고, 석 자 감발 새 짚신에 한삼고의 산뜻하게 차려 입고, 육모방망이 사슴가죽끈을 손목에 걸어 쥐고,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남원읍이 우글우글. 청파역졸 거동 보소. 달 같은 마패를 햇빛같이 번쩍 들어,
"암행어사 출도야."
외치는 소리에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듯 초목금수인들 아니 떨랴. (p.173-177)
춘향의 높은 절개 광채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좋을쏜가. 어사또 남원의 공무 다한 후에 춘향 모녀와 향단이를 서울로 데려갈새, 위의가 찬란하니 세상 사람들이 누가 아니 칭찬하랴. 이때 춘향이 남원을 하직할새, 영귀하게 되었건만 고향을 이별하니 일희일비가 아니 되랴.
놀고 자던 부용당아.
너 부디 잘 있거라
광한루 오작교며
영주작도 잘 있거라.
'봄풀은 해마다 푸르건만
떠난 객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른 시는
를 두고 이름이라.
다 각기 이별할 제
길이길이 무고하옵소서
다시 보기 기약 없네.
이때 어사또는 좌도와 우도의 읍들을 순찰하여 민정을 살핀 후에, 서울로 올라가 임금께 절을 하니 판서, 참판, 참의들이 입시하시어 보고서를 살핀다.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즉시 이조참의 대사성을 봉하시고 춘향으로 정렬부인을 봉하신다. 은헤에 감사드리고 물러나와 부모께 뵈오니 성은을 못 잊어 하시더라. 이때 이조판서 호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다 지내고 퇴임한 후에 정렬부인으로 더불어 백년동락할 새, 정렬부인에게 삼남삼녀를 두었으니 모두가 총명하여 그 부친보다 낫더라. 일품 관직이 대대로 이어져 길이 전하더라. (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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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작자, 연대 미상)>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소설의 이본이 120여 종이나 되고, 제목도 이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일 작품이 아닌 ‘춘향전군(春香傳群)’이라는 작품군으로 보아야 한다.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정착되었으리라고 보이는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이나, 문장체 소설로 바뀐 것도 있고, 한문본도 있다.
이본으로는 판본 9종이 있는데, 경판본(京板本)이 4종, 완판본(完板本)이 3종, 안성판본(安城板本)이 1종이다. 이들은 대개 1850년 이후의 판본이다. 사본으로는 영조 30년(1754) 유진한(柳振漢)의 한시(漢詩) 「춘향가」를 필두로 하여 한문본이 5종, 한글 사본이 약 30여 본이나 되어 앞으로도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그 중 자수가 많은 것은 「남원고사(南原古詞)」로서 「춘향전」 문학의 압권을 이루고 있다. 신문학기의 활자본으로는 이해조의 「옥중화」(1912), 최남선(崔南善)의 「고본춘향전(古本春香傳)」(1913)을 비롯하여 38책이 있으며, 활판본·한문본 4책, 번역본(일본·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독일) 등을 합하여 16종이 있고, 희곡 몇 본 등이 있다.
이 중 사본 판본에는 판소리계 본이 많으며, 또 이 계통을 제외하고는 행문(行文)이 같은 사설로 나가는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춘향전」 문학의 민속예술적 측면을 드러내 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이 중 계통을 따진다면, 완판의 「별춘향전(別春香傳)」 병오판(丙午板)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은 상호 적층관계(積層關係)를 명확히 할 수 있어 특이하며, 경판·안성판 계통은 「남원고사」와 한 계통을 이루고 있다. 신분관계로 따지면 춘향의 신분이 기생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고형이고, 신재효의 「춘향가」에서는 성천총(成千摠)의 서녀로 나와 중간형을 이루며, 「열녀춘향수절가」의 성참판(成參判)의 서녀로 나와 있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의 신분상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후기본적인 색채가 짙다.
이해조의 「옥중화」는 박기홍조에 의거하여 고쳐 지은 것으로 보여지며, 활판본 계통은 대개 이 「옥중화」에 의거하고 있다. 이들 이본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유진한의 「춘향가」이며, 이의 정착이 1754년이므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여기에 “騷翁爲作打令辭好事相傳後千祀(소옹위작타령사호사상전후천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춘향전」의 판소리 생성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춘향전」은 숙종 말이나 영조 초에 광대의 판소리에서 비롯된 이후, 판소리뿐만 아니라 소설·희곡·오페라·영화 등 다양한 예술양식을 통하여 현대적 변모를 계속하고 있는 성장하는 고전이다.
민족고전의 대표격인 「춘향전」에 대한 연구는 1920년대의 단편적 비평에서부터 1980년대의 본격 연구에 이르기까지 60년에 걸친 연구사가 있다. 이들 연구는 소설 「춘향전」 연구가 주대상이 되어 장르론적 측면, 작품론적 측면과 소설사적인 측면이 주로 검토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연구 업적은 조윤제(趙潤濟)의 『교주춘향전(校註春香傳)』이 박문서관에서 나오면서 본격화 되었고, 이때부터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연구의 주요대본으로 선택되기 시작하였다.
또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학술 논문과 함께 김동욱(金東旭)의 『춘향전연구(春香傳硏究)』와 같은 통합론적 업적이 단행본으로 출판됨으로써 연구가 심화(深化)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앞 시대에 주요 관심사였던 발생론에 대한 관심을 극복하면서, 서사구조나 문체에 대한 연구들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구조주의 방법과 역사주의 방법 등 새로운 비평 방법에 근거한 업적들과 함께 「춘향전」 주제론이 연구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남원고사」라는 새 이본이 발견됨으로써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로만 쏠리던 관심이 보다 다양한 대본을 통한 연구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김동욱 등이 내놓은 「춘향전 비교연구」는 이본의 체계적 비교를 통하여 「춘향전」을 기생계(妓生系) 춘향전과 비기생계(非妓生系) 춘향전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남원고사」는 기생계에 속하고 「열녀춘향수절가」는 비기생계에 속함을 밝혀 「춘향전」의 문학본질 탐색을 위한 새 바탕을 마련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는 새로운 이본 발견이 주춤한 반면, 「춘향전」의 작품 분석에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는 연구가 눈에 띤다. 또한 지금까지의 자료를 총정리하여 제시하는 노력이 있었는데, 총 8책으로 이루어진 『춘향예술사자료총서』(설성경 편, 국학자료원, 1998)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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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심경호 옮김, 문학동네)
열녀 춘향 수절가 (조령출 옮김, 보리)
이고본 춘향전 (성현경 옮김, 열림원)
춘향전 (이상보 옮김, 범우 사루비아총서)
춘향전 (김선아 옮김, 현암사)
춘향전 - 조경남 (설성경 옮김,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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