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우리 소설 7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 박희병, 정길수 편역 (돌베개)
조신전 - 작가미상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얼굴도 예쁘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곱고 깨끗했어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함께 먹었고, 약간의 옷감을 얻으면 당신과 함께 옷을 지어 입었지요. 50년을 함께 살며 깊은 정이 생겼고, 은의와 사랑이 간절하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할 만해요.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해가 갈수록 더욱 노쇠하여 병이 깊어지고, 날이 갈수록 굶주림과 추위가 더욱 혹독해지는군요. 이웃집에서는 마실 것조차 주려고 하지 않으며, 여러 집 문 앞에서 당한 수모가 산처럼 커요. 아이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도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니 부부간에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겨를에 생기겠어요?
젊은 날의 얼굴과 어여쁜 웃음은 풀잎 위 이슬처럼 덧없고, 난초처럼 고결한 약속은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처럼 부질없어졌어요. 당신에겐 내가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스러워해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난날 즐거웠던 시절이 모든 근심 걱정의 출발점이었어요. 당신과 내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새들이 무리 지어 함께 굶어 죽느니, 짝 ㅇㅀ은 난새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슬피 우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요? 형편이 좋으면 합하고 형편이 나빠지면 헤어지는 건 인정상 차마 못할 짓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고, 만남과 헤어짐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이에요. 이제 헤어지기로 해요.
아내와 헤어져 길을 떠나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꺼져 가는 등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밤이 끝나 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보니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하릴없어 속세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힘겨운 삶이 이미 진저리 나게 싫어져 백 년의 고생을 물리도록 맛본 것 같았다. 탐욕에 물든 마음이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조신은 관음보살 앞에 부끄러워하며 참회해 마지 않았다. (p.45-46)
[작품 해설]
<조신전>은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옛날 경주가 서울이던 시절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바, 고려 전기에 창작되지 않았을까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실린 다른 많은 작품들의 예에서 보듯, 오래 전에 창작되어 전하던 이 글을 <삼국유사>에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신전>은 <조신> 혹은 <조신몽>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신>이라는 제목은 <삼국유사>의 <낙산의 두 성인 관음, 정취와 조신>에서 취한 것이며, <조신몽>은 작품의 내용을 고려해 붙인 제목이다. 일연은 이 글의 뒤에 논평을 붙여 놓았는데, 그 첫머리에서 "이 전을 읽고 나서 책을 덮고 더듬어 생각해 보니"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작품의 원 제목은 <조신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신전>은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구도를 취했다. 비슷한 구도의 이른 시기 작품으로는 중국 당나라 때의 <침중기>가 대표적인데, <침중기>의 주인공은 꿈속의 현실에서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종국에는 가장 큰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게 된다. 반면 <조신전>의 경우 꿈속의 현실은 한순간의 기쁨일 뿐 일생 동안 극한의 고통이 가득하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은 꿈속에서 궁극적으로 극한의 고통에 도달하ㅏㄹ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겪은 뒤 꿈에서 깨어 인생무상을 깨닫는다.
'꿈'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 또한 <조신전>의 조신과 비교해 볼 만하다. 조신이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로부터 인생무상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양소유는 부귀영화의 절정에서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인생의 가치를 묻는 <조신전>의 주제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일찍이 춘원 이광수는 <조신전>에 윤색을 가해 1947년 <꿈>이라는 소설을 쓴 바 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오늘날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도 <조신전>과 <구운몽>의 연장선상에서 그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다. (p.152-15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꿈 - 이광수 (문학사상사)
구운몽 - 김만중 (문학동네)
구운몽 - 김만중 (민음사 세계문학)
구운몽 - 김만중 (돌베개)
삼국유사 -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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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우리 소설>
낯선 세계로의 여행
사랑의 죽음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인과 협객
세상을 흘겨보며 한번 웃다
끝나지 않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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