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한국문학 413 (60)
목차
송병수
쑈리 킴
저 거대한 포옹 속에
오상원
유예
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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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수 - 쑈리 킴 (1957년)
바로 언덕 위, 하필 길목에 벼락 맞은 고목나무가 서 있어 대낮에도 이 앞을 지니기가 께름하다. 하지만 이 나무 기둥에다 총 쏘기나 칼 던지기를 하기는 십상이다. 양키들은 그런 장난을 곧잘 한다. 쑈리(키 작은shortly)는 매일 양키 부대에 가는 길에 언덕 위에 오면 으레 이 나무에다 돌멩이를 던져 그날 하루 '재수 보기'를 해 봐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세 번 던져 한 번도 정통으로 맞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인가 보다.
재수 더럽다고 침을 퉤 - 뱉고, 쑈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언덕 아래 넓은 골짝에 양키 부대 캠프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다. 저 맞은쪽 한길가에 외따로 있는 캠프는 엠피가 있는 곳이고, 그 옆으로 몇 있는 조그만 캠프는 중대장이랑 루테나(중위)랑 싸진(하사관)이랑 높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캡틴 하우스 보이인 딱부리 놈이 바로 게 있다.
이쪽 바로 언덕 아래에 여러 개 늘어선 캠프엔 맨 쫄뜨기 양키들뿐이다. 쑈리가 늘 찾아가는 곳은 이 쫄뜨기 양키들이 있는 곳이다. 거기엔 밥띠기[쿡], 빨래꾼[세탁부], 이발장이 찔뚝이랑 몇몇 한국 사람도 있지만, 쑈리는 그들보다 양키들하고 더 친했다. 저기 쫄뜨기 양키들은 몇 사람만 빼놓곤 그도 몇 번씩 따링 누나하고 붙어먹은 일이 있어, 아무 때고 쑈리가 가기만 하면 "웰컴 쑈리 킴'이다. '김'이란 멀쩡한 성을 양키들은 혀가 잘 안 돌아가 '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9-11)
이곳에 와서 처음에 저 건너 엠피한테 좀 혼나긴 했지만 곧 다른 양키들하고 친하게 사귄 것도 딱부리 솜씨로는 어림도 없다. 예 와서 얼마 동안 쫄뜨기 양키들하고 얼려, 그렁저렁 같이 얻어 먹고 자는 판에, 어찌어찌하다가 쑈리는 서울서 돈벌이 왔다는 양갈보(따링 누나)를 만나 같이 있게 됐고, 딱부리는 마침 캡틴 눈에 들어 하우스 보이가 됐고...그저 어찌어찌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뭐 자식이 더 잘나고 더 똑똑해서 자식만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다 그렇고 이런 자식이 별안간 부잣집 막내둥이나 된 것처럼 가죽 잠바에다 할로 모자를 쓰고 꼴사납게 뻐긴단 말이다. 언젠가 쑈리가 권총이든 칼이든 하나만 '프레젠트'하라니까 자식이 '오케이!'도 아니고 '노!'도 아니고 그저 뻐기기만 했다.
허나, 자식의 까짓거 요만큼도 부러울 거 없다. 따링 누나에게 맡겨 둔 달러를 몇 장 달래서 서울에 연락 가는 양키에게 주면 그런 것쯤은 피엑스에서 얼마라도 사다 준다. 그러잖아도 서울 가는 양키가 있으면 부탁할 셈이다. 같은 값이면 권총은 서부의(부대에서 가끔 돌리는 영화에서 본) 모젤식이 좋고, 잠바는 까짓 가죽 잠바보다 반질반질하고 날씬한 나일론 잠바를 살 셈이다. 모자도 챙이 달린 모자 말이다. 시계도 딱부리 따위 금딱지보다 밤에도 번쩍번쩍하는 야광 시계가 더 좋다. 그렇게만 차린다면 딱부리 이깟놈쯤이야(그리고 서울 가서 재고 다녀도 순경이 잡지 않을 것이고, 왕초 따위는 얼씬도 못할 것이 아니냐!)...쑈리는 딱부리를 훑어보며 피시시 웃었다. (p.18-19)
찔뚝이는 구덩이에서 뭣을 움켜쥐고 나오며 쑈리를 보자 씽긋 웃는다. 따링 누나가 꼭 가지고 오라던 그 800달러 뭉치를 움켜쥐고 있다. "남의 것 왜 훔쳐 가느냐."고 쑈리는 앞을 막아섰다.
"이게 양키 물건이지 네 것이냐?"고 비쭉이면서 놈은 달아나려 한다.
쑈리는 "이 도둑놈의 자식, 이리 내라."고 욕을 하며 놈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랬더니 놈도 눈을 부릅뜨며 "이 새끼가 왜 귀찮게 구느냐."고 주먹으로 내지르고는 찔뚝거리며 달아난다.
얻어맞은 코에서 금세 피가 주르르 쏟아져 쑈리는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딱부리가 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주며, "우리 함께 패 주자."고 외려 더 분해했다. 정말 둘이 덤벼 죽여 버리고 싶다.
아마 저놈이 이럴려고 엠피에게 따링 누나를 잡아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 진짜 총만 있다면 놈을 쏴 죽이고 싶도록 분하다. 문득 즈봉 주머니에 아까 던질까 말까 하다가 넣어 둔 돌멩이 생각이 난다. 쑈리는 냉큼 돌을 꺼내 저만치 가는 놈에게 힘껏 던졌다. 바로 뒤통수에 정통으로 맞았다. 놈은 그 자리에 풀썩 고꾸라진다. 그거 쌤통이다, 했더니 고꾸라졌던 놈이 이내 목덜미랑 피투성이가 된 상판을 해 가지고 "이놈 죽인다!" 하며 덤벼든다. 피투성이가 된 상판이 도깨비같이 무섭다.
도망쳐야겠다. 그러나 웬 셈인지 다리가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리기만 하고, 뛴다는 게 겨우 엉금엉금 기어지기만 하여 이내 놈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놈은 덜미를 잡아 메어꽂고는 사정없이 차고 잣밟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뭣인지 땅바닥에서 버쩍 쳐든다. 큼직한 돌덩이다. 아! 놈이 정말 이것으로 내려칠 셈인가...이젠 죽나 보다고 쑈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외려 놈이 먼저 "으악!" 소리치며 나자빠진다. 똑똑히 보니까 놈의 잔등에 자개 무늬가 박힌 뾰족한 칼이 꽂혀 있다. 딱부리 솜씨였다. 놈이 내려치려던 돌덩이는 힘없이 옆에 떨어지고, 놈이 움켜쥐었던 달러 뭉치는 벌겋게 피가 배어 발발이 흩어져 가랑잎마냥 바람에 날아가고 있다. 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자빠진 채 눈을 희멀겋게 까뒤집으며 꿈틀거리기만 한다.
이것이 죽으려고 기를 쓰는 건지 지랄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쑈리는 겁이 덜컥 났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니까 딱부리놈도 겁이 났는지 "이 새끼야, 너 혼자만 도망가지 마, 이놈이 살아나면 난 어떻게 해." 하며 언젠가 고아원에서처럼 울먹울먹하며 따라온다.
그래서 자식을 앞세우고 그냥 내달렸다. 어디로 뭣 하러 가는것인지도 모르지만, 찔뚝이가 자꾸 덜미를 잡는 것만 같아 발걸음은 마냥 빨랐다. 찔뚝이가 영 살아나지 못하게 돌덩이로 놈의 대갈통을 아주 바수어 놓고 가고도 싶었으나, 사방에 보이는 게 다 쩔뚝이 같이만 보여 빨리 도망쳐야 했다.
이젠 이곳 양키 부대도 싫다. 아니, 무섭다. 생각해 보면 양키들도 무섭다. 부르도크 같은 놈은 왕초보다 더 무섭고, 엠피는 교통순경보다 더 미웁다. 빨리 이곳을 떠나 우선 서울에 가서 따링 누나를 찾아야겠다. 그 마음 착한 따링 누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야 까짓 달러 뭉치 따위, 그리고 야광 시계도 나일론 잠바도 짬방 모자도 그따윈 영 없어도 좋다. 그저 따링 누나를 만나 왈칵 끌어안고 실컷 울어나 보고, 다음에 아무 데고 가서 오래 자리 잡고 '저 산 너머 해님'을 부르며 마음 놓고 살아봤으며..
찔뚝이가 죽지 않고 살아날까 봐 걱정이다. 그놈이 살아나기만 하면 아무 데를 가도 아무 때고 그놈의 손에 성해 나진 못할 것이다. 쑈리는 왜 그놈의 대갈통을 으스러 버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p.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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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수(宋炳洙, 1932년 3월 7일 ~ 2009년 1월 4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1932년 3월 7일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다.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를 다니던 중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였다. 1955년 군대를 제대한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7년 『문학예술』의 신인 특집 공모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작가로 활동하였으나, 방송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창작 활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1977년 문화방송 제작위원을 거쳐 1984년에는 MBC 라디오 보도제작부에 근무하였으며, 1988년에는 울산문화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2009년 1월 4일 타계하였다.
1957년 『문학예술』 신인 특집 공모에 양공주와 떠돌이 소년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미군을 둘러싼 당시 풍속 변화를 충격적으로 제시한 단편 「쑈리 킴」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같은 해에 단편 「22번지」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잠성」(1958), 「환원기」(1959), 「인간신뢰」(1959), 「탈주병」(1963), 「잔해」(1964), 「피해자」(1965) 등을 발표하면서 1950~60년대의 주요한 단편 소설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단편들은 휴머니즘 옹호의 관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거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성 상실을 풍속이나 개인들의 가치관 변화를 소재로 삼아 다루는 경향을 주로 드러내었다. 이후에도 단편 「구릉행」(1966), 「돼지아범」(1967), 장편 『빙하시대』(1968), 『대한독립군』(1971) 등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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쑈리 킴 - 송병수 (창비)
송병수 단편집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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