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 샘깊은 오늘고전 14
목차
다모
검녀
억지 혼인을 물리친 길녀
몰래한 재혼
귀부인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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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모>의 원작은 낭산문고에 실려 있는 송지양의 <다모전>
2. <검녀>의 원작은 <삽교만록>에 실려 있는 안석경의 작품으로 원작에는 따로 제목이 없다.
3. <억지 혼인을 물리친 길녀>는 원작 불명으로 조선 시대의 여러 야담집에 실려 전해오며, 출처에 따라 "협박을 물리친 처녀의 바르고 매운 지조" 또는 "칼을 휘둘러 사또를 혼내고 억지 혼인을 물리치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4. <몰래한 재혼>의 원작은 <계서야담>에 실려 있는 이희평의 작품으로 원작에는 따로 제목이 없다.
5. <귀부인의 유언>의 원작은 <동야휘집>에 실려 있는 이원명의 작품으로 원작에는 따로 제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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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 - 송지양>
관비는 관청에 딸린 여성 노비다. 다모는 그 가운데서도 다과상이나 술상을 차리는 일을 맡은 관비다. 관청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들게 마련이다. 일하는 사람이나 방문한 사람을 위해 음료, 다과, 참 따위를 마련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 때문에 웬만한 관청은 대개 다모를 두고 있었다. 다모는 다과상이나 술상 차림 말고도, 여성이 할 만한 관청의 심부름도 맡아 했다. (p.18)
일을 마친 다모는 군졸들과 함께 한성부로 돌아가리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경복궁 근처의 싲바가를 지나가는데 양반 행색의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젊은이는 뒷짐을 진 채 십자가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포상금을 받기 위해 아전에게 밀주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쯤에서 일을 마치고 한성부로 돌아오는 아전을 기다리곤 했다. 다모의 눈에는 대번에 그 젊은이가 들어왔다. 젊은이를 주의해 살펴보니 그 생김새가 아까 주인 할미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뭔가를 결힘한 듯한 다모는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팔을 휘둘러 젊은이의 뺨을 휘갈겼다. 욕설도 퍼붓고 침도 뺕었다.
"니가 양반이냐? 양반이 병든 형님을 위해 술을 빚은 형수를 고자질하겠다고? 고자질해서 포상금을 받아먹겠다고?"
갑작스런 소동에 행인들이 크게 놀랐다. 십가가의 온 행인들은 다모와 젊은이를 담처럼 에워싸고 그들이 다투는 모습을 구경했다.
다모와 함께 나갔다 돌아오던 군졸들은 군졸들대로 화가 났다.
"다모 네가 주인 할미의 꼬드김에 넘어갔구나! 우리를 속이고 범죄를 속이고, 도리어 고발한 사람에게 욕질을 하고 행패를 부려?"
군졸들은 다모를 상관에게 끌고 갔다. 이들의 상관인 종6품 벼슬아치 한성부 주부가 다모에게 사실을 확인하니, 다모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파악한 상관이 짐짓 화가 난 체하며 말했다.
"범죄를 숨기려 하다니 용서하기 어렵다! 태형 스무 대에 처한다!"
이윽고 유시가 되어 관청이 일과를 마칠 즈음, 다모에게 태형을 내린 한성부 주부가 조용히 다모를 불렀다. 주부는 돈 열 꿰미를 주면서 말했다.
"너는 밀주 범죄자를 숨겨 주었다. 법을 집행하는 벼슬아치가 너를 용서하고 만다면 법이 제대로 설 수 없다. 내가 내린 태형의 뜻을 알겠느냐. 그렇지만 네게는 의로운 데가 있구나. 의로운 데만큼은 칭찬 받을 만하다. 이 돈은 그 상이다. 받아라."
돈을 건넨 상관은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따. 다모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무언가 결심했다.
밤이 되자 다모는 상으로 받은 돈을 들고 할미가 사는 남산 아래 양반집으로 갔다. 주인 할미를 만난 다모가 말했다.
"제가 상관을 속였어요. 당연히 태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금이 생겼습니다. 마님 댁에서 술을 빚지 않았다면 상금이 어디서 났겠어요. 이 돈을 받아주십시오. 보니까 마님네가 정말 가난하더군요. 이 돈으로 땔나무와 쌀을 사면 앞으로 겨울 나는 동안은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밀주를 비지 마시고요!"
주인 할미는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한성부의 다모로부터 동정을 받아 벌금을 면하게 되었구나. 참말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무슨 낯으로 남이 받을 상금을 받는단 말이냐?"
주인 할미는 한사코 사양하면서 한참이나 다모와 승강이했다. 그러나 다모는 결국 주인 할미에게 돈을 떠넘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p.30-33)
지금부터 이 글을 쓴 내 생각을 말해 보겠다.
선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성리학 교과서인 <소학집주>에 ".좋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은 덕을 지닌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실려있다. 한성부의 다모 김조이와 같은 사람은 어떤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모가 나라의 법을 어기고 몰래 술을 빚은 주인 할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조금이라도 친하거나 아는 사이여서가 아니다. 다모는 처음에는 죄지은 할미를 위해 범죄를 숨겨 주었다. 그 결과 태형이라는 치욕을 당했다.
나중에는 또 가난한 할미를 돕겠다고 많은 상금을 지푸라기처럼 내던졌는데, 이는 그 할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때문이다.
처음 벼슬길에 오른 선비가 다모와 같은 마음 씀씀이를 지닌다면 어느 사람인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이번에는 <논어>를 살펴보자. <논어>에는 아들이 양을 훔친 아버지의 빔죄를 고발한 일을 평가하는 장면이 있다. 한마디로 공자께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인정머리 없는 짓을 싫어하셨다.
저 젊은이가 시동생으로서 형수를 고발하려 했을 때, 그 마음은 나라의 법을 지키겠다는 "정직"에 가 있지 않았다. 그 마음은 범죄를 고자질해 "돈을 챙기는 데에" 가 있었다.
아, 이익만을 쫓는 폐단이 염치를 버리고 인륜을 멀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34-35)
<참고>
논어집주 (성백효, 전통문화연구회)
葉公(섭공)이 語孔子曰(어공자왈) 吾黨(오당)에 有直躬者(유직궁자)하니 其父攘羊(기부양양)이어늘 而子證之(이자증지)하니이다.
孔子曰(공자왈) 吾黨之直者(오당지직자)는 異於是(이어시)하니 父爲子隱(부위지은)하며 子爲父隱(자위부은)하나니 直在其中矣(직재기중의)니라.
섭공이 공자에게 “우리 동네엔 몸소 정직한 사람이 있으니, 아버지가 양을 훔치면 자식이 그걸 증언합니다.”라고 말했다.
공자께서 “저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는 다르니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숨기고,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숨기니,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조선후기 인물전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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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 - 안석경>
남장을 한 채로 3년을 더 떠돌아다녔답니다.
그런 끝에 이름 높은 선비로 선생님만 한 분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제 몸을 낮추어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휴, 가만히 선생님이 잘한다고 하는 바를 보니...그 잘하는 바라는 것이 글 쓰는 데서의 잔재주와 천문, 역술, 형법, 산수, 사주, 점보기, 부적 만들기, 도참 따위의 하찮은 잡술뿐입니다.
이는 마음을 닦고 몸을 지키는 큰 처방과 세상을 다스려 후세에 모범을 보이는 큰 도리에 까마득히 못 미칩니다. 빼어난 선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닙니까? 실제보다 지나친 이름을 얻은 사람은 비록 태평한 시대에 산다고 해도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라면 어떨까요? 이제부터 조심하신다 해도 선생님께서는 화를 당하지 않고 일생을 보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바르는 게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부터라도 깊은 산속을 벗어나 남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전주 같은 큰 도회지로 나가십시오. 그런데서 모나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사십시오. 아전이나 구실아치의 자제들을 가르치시면 입을 옷과 먹을 밥은 나올 테고, 분수에 맞지 않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세상의 화는 면할 수 있을 테지요. (p.49-5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조선의 위풍당당 여검객 - 안석경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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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경(1718-177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안중관(安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원주 등이 그 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하였다. 출세지향의 공부에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영조 28)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霅橋集)』·『삽교만록(霅橋漫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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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별집 - 안석경 (주니어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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