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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4. 수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학고재)

by handaikhan 2023. 2. 2.

 

최순우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1994년)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의 원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화를 이루어 주는 데에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으로 빚어진 듯 머리 속이 저절로 맑아 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처림의 중생에게 내리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16)

 

바른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걸치고 바른손으로 가볍게 턱을 괴고 고요히 걸터앉아 명상하는 자세의 불상 양식의 유래는 원래 석가여래가 출가하기 전 아직도 왕자였던 시대의 모습을 연상한 것으로 인생의 번뇌 속에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젊은 석가의 자태를 표현한 것이었다고 한다. (p.118)

 

석굴암의 11면 관음상

 

나는 과거 외국을 여행하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동양 불상 조각들을 보게 될 때는 먼저 설명을 보지 않고 일부러 멀찍이서 어느 나라 불상인가를 내 나름으로 판단해 본 뒤 그 설명판을 보고 맞고 안 맞는 것을 밝혀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내 눈이 대단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나는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즉 내가 멀리 떼어 놓고 중국 불상이거니, 일본 불상이거니, 또는 이것은 한국 불상이거니 하고 판단한 것은 거의 들어맞았던 것이다. 나는 석굴암에 갈 때마다 그 자비롭고 원만한 본존 불상이나 보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잘생긴 한국인의 얼굴과 그 풍김을 다시금 그 모습들 속에서 되새겨 보면서 진실은 속일 수도 감출 수도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본존 석가여래불상 뒤에 숨어 서서 가냘프고도 깔끔한 모습으로 불타에 바치는 지성을 절절하게 표정짓고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신라 여성들이 지녔던 높은 절조와 청정한 풍김을 연상하면서 마음이 설레곤 했다. 이러한 아름다움이야말로 한국미의 본바닥에 흐리고 있는 선과 미의 음률이며, 비록 불상의 조상약식이 당나라 것을 따랐다 하더라도 당나라의 조각일 수가 없고,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얼치기 한국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절대로 없다는 점에 새삼스러운 흥겨움을 느끼는 것이다. (p.131)

 

백자 달항아리 (국보 제310호)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 미술에 표현된 둥근 맛은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이다. 따라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시대 박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어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외국 사람들은 곧잘 한국을 항아리의 나라라고도 부르지만 우리네의 집안 살림살이 세간 중에서 크고 작은 항아리 종류들을 빼 놓으면 집안이 허수룩해질 만큼 그 위치가 크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항아리들 중에는 잘생긴 작품이 매우 많다. 이 항아리들을 빚어 낸 사람들도 큰 욕심없이 무심히 빚어 내었을 것이고 이것을 사들여 아침 저녁 매만지던 조선시대 여인들도 그저 대견스러운 마음으로 무심하게 다루어 왔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남겨진 백자 항아리들이 오늘날 한국미의 가장 특색있는 아름다움의 한 가닥을 차지하게 되었고, 요사이는 잘생긴 백자 항아리 하나에 천만금이 간다고 해도 놀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의 작자들이 비록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작품화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항아리의 둥근 맛과 여기에서 저절로 지어지는 의젓한 곡선미에 남몰래 흥겨웠을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비록 작가 의식을 가지고 계산해서 낳아 놓은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도공들의 손길은 그들의 흥겨운 마음을 따라 움직였을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즉 모르고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 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 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들을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데들의 흰옷 입은 군상들이 생각나리 만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그들이 즐기는 색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백의민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불러 보기도 했는데, 우리네의 흰의복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같은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겠다. 이웃나라 중국 자기나 일본 자기들이 그렇게 다채로운 빛깔로 온통 사기 그릇을 뒤덥던 시대에 우리는 마치 산 배꽃이나 저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어린 흰빛의 조화를 유유하게 즐겨왔으니 과연 한국 사람은 백의민족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하면 혹시 심미에 대한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선 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리 만큼 신기스럽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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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학고재, 2008 개정판)

개정판 (2008)은 컬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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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崔淳雨,  1916년 4월 27일, 북한 개성 - 1984년 12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북동)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한국 미술사학과 미술평론의 토대를 다진 우리 문화사의 거목이었다.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대한 깊은 사랑에다 빼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장을 겸비했고, 이 땅이 순산한 아름다움을 성심으로 보듬어안은 ‘정 깊은 감식안’이었다. 그는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1943년 개성 부립박물관에 들어간 뒤 40년 동안 한결같이 ‘박물관 인생’으로 살았다. 1984년 작고할 때까지 10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 5천년전’ 등의 대형 해외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을 만방에 퍼뜨린 ‘한국미의 전도사’이기도 했다.
1946년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직하여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마쳤다.6·25사변 중에는 생명을 내걸고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였다. 1950년대 초반 서울 환도 등 혼란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세 번이나 이전, 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순직하였다.196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전시를 비롯하여 ‘한국미술2천년 전시’ 등 대소 규모의 특별 전시를 수십 차례나 주관하여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그리고 국외에서도 1950년∼1961년 사이 한국 미술의 미국·유럽 전시와 1976년∼1984년 사이 ‘한국미술5천년’의 일본·미국·유럽 전시의 주역으로 한국 미술 문화를 세계에 크게 선양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한국·동양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1945년부터 5년간 문학 동인지 『순수(純粹)』의 주간도 맡은 바 있는 그는 한국 미술에 대한 주옥같은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그의 감식안은 당대 제일로 고미술계가 혼란한 중에서도 옥석을 가리고 자신 있게 정론을 폈다. 그의 지론은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문화재위원회 위원(1967년∼1984년), 한국미술평론인회 대표(1962년∼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1965년∼1966년),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년∼1980년)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미술 연구와 문화재 보존에 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에게는 방대한 저서·논문보다는 국민을 폭넓게 이해시키기 위한 수많은 수필·논고가 있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최순우전집』(전 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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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이충렬 (김영사)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 최순우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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