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학산문선 102
심노숭 - 눈물이란 무엇인가
다른 집들을 보면 남편이 꽃과 나무에 대한 벽이 심하여 어떤 이는 방에 들어와 비녀와 팔찌를 찾아 팔기까지 한다는데 당신은 이와 반대로 집이 낡았다고 꽃과 나무까지 팽개쳐 두고 계십니다. 집은 비록 낡았어도 꽃과 나무를 잘 가꾼다면 또한 집의 볼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p.41)
아! 이것은 참으로 오래된 계획이었다. 남원을 버리고 파주로 가겠다던 그 계획을 이제야 이루었는데 아내와 하루도 함께 거하지 못하였으니 뒤에 죽는 것이 다만 슬픔만을 더한즉 사람이 구구히 삶을 도모하여 스스로 오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또한 미혹된 짓이 아닌가! (p.43)
지난해 나는 관서 지역으로 나가
3개월간 그곳 강산 구경하며 천리 멀리서 노닐었찌.
돌아와 보니 그대는 병들었고 쑥 또한 다 시들어
그대 울면서 하는 말, "여행이 왜 이리 길어졌는지요?
그때의 물건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
우리네 인생은 그 사이에 하루살이 같은 것
제가 죽고 난 이듬해에도 쑥은 다시 나올지니
그 쑥 보면서 저를 생각해 주시겠죠?"
오늘 우연히 제수 씨가 차려 준 상 위에
부드러운 쑥이 놓여 있기에 문득 목이 메이네.
그때 나를 위해 쑥 캐주던 이
그 얼굴 위로 흙이 도톰히 덮이고 거기서 쑥이 돋아났다네. (p.48-49)
눈물이란 무엇인가(누원)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누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 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p.51)
몽산자는 말한다. 윤회설은 참으로 망령된 것이다. 저 노파의 이른바 '선과 악의 응보'는 우리 유가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명료한 변석은 없다.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죽어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보답을 베풀 곳이 없어 부득불 내세에서 구하니 그 말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현세의 고통이 전생의 악에 대한 보답이 아님을 알 수 없은즉, 이미 여기 현세에서 보상한 것이니 또 어찌 저 내세에서 구하리요? 안씨의 요절, 원씨의 가난, 등씨의 자식 없음이 수와 부를 누리고 많은 아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악을 저리르는 자에 비해 어떠한가? 즐거움은 선을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보답은 내세에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까닭에 선행 그것이 바로 선보요, 악행 그것이 바로 악보라고 말한다. 그러니 노파와 같은 이는 두터운 보답을 받은 이가 아니겠는가? (p.77)
..........................................................................................................................................................................................................................
심노숭(沈魯崇)
1762년(영조 38)∼1837년(헌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태등(泰登), 호는 몽산거사(夢山居士)‧효전(孝田).
조부는 심형운(沈亨雲)이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제주목사(濟州牧師)를 역임한 통훈대부(通訓大夫) 심낙수(沈樂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심낙수는 노론 시파로 벽파 공격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 이사질(李思質)의 차녀이고, 부인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의술(李義述)의 딸이다. 동생 심노암(沈魯巖)은 1795년(정조 19) 을묘식년사마시(乙卯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심노숭은 1783∼1784년을 전후로 성균관에 들어갔고 1790년(정조 14) 경술증광사마시(庚戌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몸이 몹시 허약하여 병에 시달렸으나 사대기서(四大奇書) 및 『서상기(西廂記)』 같은 중국 소설에도 탐닉하였고 부친의 임소를 왕래하면서 호색과 풍류를 일삼으면서 과거 공부와 시문 창작에 몰두하였다.
1797년에 정민시(鄭民始)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시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부친 심낙수는 관직이 추삭(追削)되었고, 심노숭도 ‘배치의리(背馳義理), 장해선류(戕害善類)’로 지목되어 1801년 2월에 경남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되었다. 1806년 정순왕후의 승하를 시작으로 벽파정권이 무너지자 그도 해배되었다. 그는 이 6년의 유배기간 동안 38책의 『효전산고(孝田散稿)』를 지었다.
1809년(순조 9)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으나, 1811년 아우 상과 이듬해 모친상을 연달아 겪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학의 동반자였던 아우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이후 5년간 시작(詩作)을 폐하였다. 1815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시작으로 논산현감(論山縣監), 천안군수(天安郡守), 광주판관(廣州判官), 임천군수(林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816년 논산현감으로 있을 때 연산현감(連山縣監)인 김려(金鑢)와 교유하면서 그의 야사 편찬에 크게 고무되어, 1821년(순조 21) 광주판관으로 있을 때 『대동패림(大東稗林)』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1825년(순조 25) 임천군수에서 파직된 후 파주에 우거하다 1837년(헌종 3) 1월 76세로 죽었다.
.................................................................
[태학 산문선]
누추한 내방 - 허균
곶감과 수필 - 윤오영
곶감과 수필 - 윤오영
[표지만 바꾸고 수필클래식으로 새로 나옴]
봄술이나 한잔하세 - 이규보
...................................................
'I. 한국 문학 > 4.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최순우 (학고재, 2002년 초판) (1) | 2023.02.02 |
---|---|
뜻을 세우고 삽시다 - 안병욱 (자유문학사) (0) | 2023.02.02 |
인연 이야기 - 법정 (동쪽나라) (2) | 2023.02.02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학고재) (0) | 2023.02.02 |
한국 고전 수필선 - 정진권 (범우사) (2) | 2023.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