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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간다 - 스콧 피츠제럴드 (공보경 옮김, 노블마인)

by handaikhan 2023. 2. 4.

 

[참고]

본 도서는 만화와 영어원서가 함께 수록되어 있음. 또한 페이지 번호가 없음

 

목차 - 

그래픽노블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원작소설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작품해설 - 도널드 G. 쉬이(에딘버러 대학교 영어학 교수)
옮긴이의 말 - 공보경

 

스콧 피츠제럴드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1922년)

 

오래전, 1860년에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출산을 했다. 오늘날에야 의학계의 지고한 시들께서 아기의 첫 울음은 반드시 마취제 냄새 풍기는 병원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선언해 병원 출산이 유행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1860년의 어느 여름날 로저 버튼 씨와 그의 부인이 병원에서 첫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것은 50년이나 시대를 앞선 선택이었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그 선택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놀라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호사를 다라갔다. 그들은 긴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멈춰 섰다. 그 방에서는 다양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훗날 '우는 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는 신생아실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흰 에나멜 칠이 된 흔들침대 여섯 개가 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고 침대 발치에는 각각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버튼 씨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애가 내 아기인지?"

"저 아기요!"

버튼 씨의 두 눈이 간호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작은 흔들침대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커다란 흰 담요를 덮고 앉은 일흔 살 정도의 노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성긴 머리카락은 백발에 가까웠고 턱 아래 드리워진 연기처럼 뿌연 색깔의 긴 턱수염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산들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며 괴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노인은 흐릿하고 기운 빠진 눈으로 버튼 씨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당혹스러운 질문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두려움이 분노로 변하며 버튼 씨는 고함을 쳤다.

"내가 미쳤나? 아니면 이게 병원에서 즐겨 하는 끔찍한 장난인가?"

간호사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따.

"장난 아니거든요. 선생님께서 미쳤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선생님 댁 아기 맞습니다."

버튼 씨의 이마에 식은 땀이 두 배는 더 많이 배어나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흔들침대 가장자리 너머로 두 발을 걸친 일흔 살짜리 늙은 아기가 앉아 있었다.

노인은 간호사와 버튼 씨를 찬찬히 번갈아 쳐다보더니 거칠게 갈라진 늙은이의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내 아버지세요?"

버튼 씨와 간호사는 크게 놀랐다.

노인이 투덜거렸다.

"그럼 날 좀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시든가...........간호사들에게 말해 이 방에 편안한 흔들의자라도 놔주세요."

버튼 씨는 극도로 흥분하여 소리쳤다.

"도대체 노인장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누구세요?"

노인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돼서 내가 누군진 나도 몰라요. 그저 내 성이 버튼이라는 것만 알지요."

"거짓말! 얻다 대고 사기를 쳐!"

노인은 지친 표정으로 간호사 쪽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갓 태어난 자식을 따뜻하게도 환영해 주시네요. 간소하, 사기 아니라고 말 좀 해줄래요?"

간호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버튼 씨. 선생님 아기 맞으니깐 알아서 보살피세요. 조속히 집으로 데리고 가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중으로요."

어안이 벙벙해진 버튼 씨는 간호사의 말을 되풀이했다.

"집으로?"

"예, 더는 여기 둘 수 없습니다. 절대로요. 제 말뜻 아시겠죠?"

노인이 끼어들며 주절거렸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네요. 여긴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아기가 지내기엔 적당하지 않아요. 하나같이 저렇게 악을 쓰고 울어대서 한숨도 못 잤습니다. 간호사에게 먹을 걸 좀 달라고 했더니...."

노인은 언성을 높이며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겨우 우유 한 병 주더군요!"

버튼 씨는 아들 옆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으며 양손에 얼굴을 피묻고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중얼거렸다.

"맙소사! 사람들이 뭐라겠어? 어쩌면 좋지?"

간호사는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집으로 데려가세요! 당장!"

고뇌에 빠진 버튼 씨의 눈앞에 괴기스러운 풍경이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펼쳐졌다. 바로 이 소름 끼치는 망령과 함께 인파가 가득한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버튼 씨는 신음하며 내뱉었다.

"안 돼. 그러 순 없어."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이.......일흔 살의 노인을 "오늘 이른 아침에 태어난 제 아들입니다"라고 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인은 몸에 두른 담요를 여미고 그를 따라 부산한 상점들과 노예시장 - 일순간 버튼 씨는 아들이 차라리 흑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 고급 주택가, 양로운을 지나 터벅터벅 걷겠지.

간호사는 권위적인 말투로 버튼 씨에게 말했다.

"자! 정신 차리세요."

그런데 노인이 별안간 간호사에게 선언했다.

"잠깐. 내가 이 담요를 두르고 집으로 갈 줄 알았다면 당신 단단히 착각한 거요."

간호사가 받아쳤다.

"아기들은 원래 담요를 둘러/"

노인은 작고 하얀 배내옷을 집어 들고 보란 듯이 흔들어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버튼 씨에게 고했다.

"이서 좀 보세요! 글쎄 이런 걸 입으라고 준비해 놓았더라고요."

그러자 간호사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아기들은 원래 그런 옷을 입는 거야."

노인이 말했다.

"당장 이 담요를 치우버려야겠어. 가려워서 원. 시트를 내주든가 했어야지."

버튼 씨가 다급히 말렸다.

"그러지 마! 덮고 있어!"

그리고 간호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소?"

"나가셔서 아드님 옷을 사오세요."

복도를 나간 버튼 씨의 등뒤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팡이도요, 아버지. 지팡이도 필요해요."

버튼 씨는 신생아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벤자민이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부모는 그에게 익숙해졌다. 습관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버튼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런 사실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말이다. 열두 살 생일이 지나고 몇 주 뒤의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던 벤자민은 놀라원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발견한 것 같았다. 눈이 착각을 일으켰나, 아니면 10여 년간 염색을 해온 희머리가 저절로 철회색으로 변한 건가? 얼굴에 자글자글하던 주름도 줄어들었고 피부엔 약간의 혈색이 돌며 건강하게 탄력이 생긴 게 아닌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등도 더는 구부정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전보다 좋아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러나 더는 감히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벤자민은 아버지에게 가서 결연히 말했다.

"저도 이제 컸으니 긴 바지를 입고 싶어요."

버튼 씨는 망설이는 투로 대답했다.

"글쎄다. 긴 바지는 열네 살에나 입을 수 있는데 넌 열두 살밖에 안 되었잖니.?

?제가 나이에 비해 몸집이 크잖아요."

벤자민의 항의에 버튼 씨는 억지를 썼다.

"흠, 잘 모르겠는데. 나도 열두 살 때 너만 했단다."

그 말은 물로 사실이 아니었다. 아들을 정상적인 아이로 여기고 싶은 고집에서 비롯된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국 합의가 이루어졌다. 머리 염색을 계속하고 또래 남자아이들과더 잘 어울려 놀며 거리에서 안경을 쓰거나 지팡이를 짚지 않는 조건으로 벤자민은 처음으로 정장용 긴 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전 선생님 나이의 남자들이 좋아요. 젊은 남자들은 바보 같거든요. 그들은 제게 대학에서 샴페인을 얼마나 많이 마셧는지, 카드놀이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잃었는지 따위의 얘기나 하죠. 하지만 선생님 나이의 남자들은 여자들을 제대로 대할 줄 알아요."

"선생님 정도, 그러니까 쉰 살은 참 낭만적인 나이에요. 남자는 스물 다섯엔 지나치게 처세에 능하고 서른엔 과로로 안색이 창백하고 마흔엔 시가 하나를 다 피우도록 긴 인생사를 풀어놓을 만큼 사연이 깊어지죠. 예순이면......아, 예순은 일흔에 너무 가까워요. 하지만 쉰은 알맞게 원숙한 나이죠. 전 쉰 살의 남자가 좋아요."

"제가 늘 하는 말이 있는데, 서른 살의 남자와 결혼해서 남편을 돌보며 사느니.......쉰 살의 남자와 결혼해서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싶어요."

힐데가드는 배우자의 조건으로 원숙함을 우선시했고 뜻대로 결혼을 했다..........

 

15년의 세월은 벤자민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혈관을 타고 활기 넘치는 새 피가 흐르는 느낌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부산하고 햇빛 찬란한 거리를 활기차게 걷는 것, 쉴새없이 망치 선적과 못 화물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즐거워졌다.

그는 인생의 환락에도 점차 매료되었다. 삶의 즐거움에 대한 열정이 점점 달아오르면서 볼티모어에서 제일 먼저 자동차를 구입해 타고 다녔다. 거리에서 그를 만나면 사람들은 건강하고 활기찬 그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매년 젊어지는 것 같군."

 

그 무렵 힐데가드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그들 부부 사이에는 로스코라는 이름의 열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결혼 초기에 벤자민은 힐데가드를 숭배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벌꿀 같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루한 갈색이 되었고 푸른 에나멜 같던 눈동자는 싸구려 도기처럼 광채를 잃었다. 그녀는 따분할 만큼 안정된 생활을 하며 더없이 만족스러워했고 흥분하는 일도 없는 데다가 얌전하기 그지없는 취미 활동만 했다. 신혼 때는 힐데가드가 내켜하지 않는 벤자민을 무도회며 만찬회에 끌고 다녔는데, 이제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교 모임에 나가기는 해도 별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닥쳐와 죽는 날까지 머무는 삶의 타성에 완전히 젖어버린 것이다.

 

힐데가드는 커다란 비단 깃발을 흔들며 현관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면서 벤자민은 지난 3년의 세월이 야기한 변화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흔이 된 아내는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회색으로 세어 있었다. 벤자민은 착잡해졌다.

방으로 올라가자 익숙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걱정이 되어 거울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던 그는 참전하기 전에 군복을 입고 찍은 자신의 사진과 지금 거울에 비친 모습을 비교해 보고는 외쳤다.

"맙소사!"

세월을 거스르는 외모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분명했다. 지금 그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다. 계속 젊어진다는 점이 기쁘다기보다는 불안했다.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같아지면 그 시점부터 출생 시부터 이어진 괴이한 현상이 멈추기를 바랐건만. 몸서리가 쳐졌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가 계속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끔찍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힐데가드가 성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듯도 했다.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벤자민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그 문제를 거론하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있잫ㄴ아, 여보.......모두 나보고 더 젊어진 것 같다더군."

힐데가드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자랑할 일이에요?"

?자랑하자는 게 아니야."

벤자민이 거북스럽게 대답하자 힐데가드는 또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도대체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자존심이 있으면 그런 변화를 알아서 멈출 줄 알았어요."

"어떻게 멈추라는 거야?"

힐데가드는 쏘아붙였다.

"언쟁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올바른 처신과 그렇지 못한 처신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하잫아요. 당신이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작정한 거라면 내가 말려도 소용없겠죠. 하지만 그런 식의 변화가 사려 깊은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여보, 나도 멈출 수가 없어."

"멈출 수 있어요. 그저 젊어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분일 테죠. 다른 사람들도 당신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헛된 언쟁이기에 벤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들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여자의 어떤 매력에 사로잡혀 결혼을 한 것인지 벤자민은 새사므 의아해졌다.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면서 삶의 즐거움에 대한 벤자민의 갈망은 더 한층 커졌고 부부 사이는 더더욱 멀어졌다. 그는 볼티모어 시에서 열리는 파티라는 파티엔 다 참석하면서 젊은 부인들 중 제일 예쁜 이와 춤을 추었고 사교계에 처음 나온 여성들 중 가장 인기 높은 이와 대화를 나누며 매력을 뿜어냈다. 그동안 그의 아내는 불길한 기운을 품은 과부처럼 춤 신청 따윈 모두 거절하겠다는 듯 도도하게 샤프롱들 사이에 앉아 엄숙함과 곤혹스러움, 비난이 섞인 눈빛으로 남편의 모습을 좇았다.

사람들은 그들 부부를 놓고 수군거렸다.

"세상에! 불쌍해라! 저렇게 젊은 남자가 마흔다섯이나 된 여자에게 매여 살다니. 부인보다 20년은 더 젊어 보이는데."

늘 그렇듯, 사람들은 1880년에 자기네 부모들이 그 부부를 놓고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 보여 어울리지 않는다며 수군거린 사실을 잊고 있었다.

벤자민은 집에서 쌓이는 불만을 다양하고 새로운 흥밋거리로 해소했다. 골프를 시작해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수시로 무도회에 참석했다. 1906년 그는 보스턴 춤의 전문가가 되었고 1908년에는 머시셔 춤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1909년에 그의 캐슬워크 춤은 모든 볼티모어 젊은이의 부러움을 샀다.

사교 활동이 지나쳐 사업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벤자민은 지난 25년간 철물도매상사를 열심히 경영해 왔으니 이제 그만 최근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아들 로스코에게 사업을 물려줄 때가 되었다 싶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종종 벤자민과 그의 아들을 착각했다. 그럴 때면 벤자민은 기분이 좋았다. 미서전쟁에 참전했다 귀향했을 때 엄습하던 두려움은 잊힌 지 오래였고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외모에 그저 흡족해 했다. 아내는 그의 흥을 깨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공식석상에 아내를 동반하고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렸다. 쉰이 다 된 아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졌디......

 

5년 뒤, 로스코의 아들은 보모의 보살핌 아래 벤자민과 게임을 하며 놀 나이가 되었다. 로스코는 같은 날 그 둥를 유치원에 데려갔다. 그 무렵 벤자민은 작은 색종이 조각을 가지고 받침과 고리, 그 밖에 흥미롭고 아름다운 모양을 만드는 놀이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한번은 말썽을 피워 구석에서 혼자 벌을 서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그래도 유치원 생활은 대부분 무척 즐겁고 유쾌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좋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이따금씩 쓰다듬어주는 베일리 양의 다정한 손길도 좋았다.

 

하루하루가 단조롭게 흘러갔다. 유치원에 3년째 다니게 된 벤자민은 생각이 너무 어려져서 예쁜 색종이 조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꼬마들이 자기보다 덩치가 더 커져서 겁이 난 벤지만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이 달래느라 무슨 말을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벤자민은 더 이상 유치원을 다닐 수 없었다. 이제 벤자민의 작은 세상은 풀 먹인 격자무늬 원피스를 입은 보모 나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의 꿈에 괴로운 기억은 머물지 않았다. 용감한 대학 시절과 수많은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 넘치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아용 침대를 둘러싼 희고 안전한 벽, 나나, 가끔 그를 보러 오는 한 남자, 그리고 해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나나가 창밖을 가리키며 "해"라고 부르던 커다란 오렌지색 공이 있을 뿐. 해가 사라지면 졸음이 와 눈이 스르르 감겼다.........어지러운 꿈같은 건 꾸지 않았다.

과거 - 부하등를 이끌고 산후안 언덕 위로 돌격한 그때, 사랑하는 힐데가드를 위해 바쁜 도시에서 여름에도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한 신혼 초의 5년간, 먼로 거리에 있던 예전 버튼 가문의 음울한 저택에서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밤이 깊도록 담배를 피우던 시절, 그 모든 기억이 마치 일어난 적도 없는 듯 벤자민의 머릿속에서 실체 없는 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먹은 우유가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삶에는 요람과 나나라는 익숙한 존재뿐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배가 고프면 울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밤낮으로 숨을 쉬었다. 부드럽게 웅얼웅얼 중얼중얼 하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들렸고 공기에서 뭔가 다른 냄새가 났으며 빛과 어둠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러다가 온통 어두워졌다. 하얀 요람과 눈앞에 어른거리던 희미한 얼굴들, 따뜻하고 달콤한 우유의 향기마저 모두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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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 도널드 G. 쉬이(에딘버러 대학교 영어학 교수)]

'재즈 시대의 이야기들'에 부치는 조롱 투의 글에서 피츠제럴드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인물의 탄생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네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맨 처음에 오고 최악의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받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간다>를 집필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한 남자의 인생만을 놓고 행한 실험인지라 공정한 시도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피츠제럴드는 앨버트 비글로 페인의 ,마크 트웨인의 전기>를 읽던 중 마크 트웨인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을 접했다.

"트웨인은 노년의 노쇠함을 인생에서 불필요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주 이런 말을 했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적에 내가 그분을 보조할 수 있었으면 인간이 지금과는 정반대로, 즉 늙은 몸으로 삶을 시작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늙은 몸으로 태어나 노년의 비탄과 무분별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진다면 나이 먹는 것을 꺼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젊어지는 삶을 살게 되니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여든이 아니라 열여덟 살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맞습니다. 신께서는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한 겁니다. 지금이라도 내 도움을 받아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죠."

신은 트웨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으나, 피츠제럴드는 위 글을 읽고 멋진 이야기를 구상해 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간다>는 늙어가는 대신 젊어지는 삶이 트웨인이 언급한 것처럼 그리 즐거운가에 대한 생각을 확장해서 쓴 작품이며, 그러한 삶의 한층 광범위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 트웨인과 대화를 나눈 과정이라 하겠다. 트웨인과 마찬가지로 피츠제럴드 역시 판타지를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참여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피츠제럴드는 판타지적 배경에 현실적인 요소를 배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과장법과 부조화를 이용하는 한편, 유머를 통해 풍자의 날을 완화했다. 피츠제럴드는 본질적으로 도덕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트웨인과 많이 닮았다. 미국의 도금 시대를 살아가는 벤자민 버튼의 삶을 기술하면서 그 시대의 위선과 사회적 부패를 은근히 비난하면서도 그 시대의 활기와 힘, 근면함을 칭송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860년 일흔 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부모를 욕되게 하고 점잖은 남부 사교계를 대경실색하게 한 벤자민 버튼은 1930년 영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의 삶에서 특히 인상적인 점은, 특이한 벤자민을 세상이 얼마나 두려워했는가가 아니라 벤자민이 얼마나 철저하게 세상 적용에 성공했는가다. 존 게리가 깊은 통찰력으로 관챃하듯, 벤자민 버튼의 삶은 '흥미로운 매력'으로 넘쳐난다. 벤자민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소외되는 대신 대단히 성공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세상의 다수를 이루는 이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그들의 기주에 맞춰 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벤자민 버튼은 가문의 철물 도매 사업을 크게 번창시켰고, 1898년에는 산후안 언덕에서 세운 공로로 훈장을 받았으며,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당대 유행하는 춤의 달인이 되었다. 1910년에는 하버드 풋볼 팀의 일원으로 경기에 출전하여 예일대 풋볼 밈에 대항, 터치다운 일곱 번과 필드 골 열네 번을 기록했다.  광범하게 나이를 먹어간 동시대인들은 그런 벤자민을 지켜보며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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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년 9월 24일 ~ 1940년 12월 21일)

미국의 소설가이며 단편 작가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프랜시스 스콧 키란 이름은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를 작곡한 프랜시스 스콧 키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1896년 9월 24일 아버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와 어머니 몰리 매퀼런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가톨릭을 믿는 상류층이었다. 주로 스콧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주로 뉴욕의 버펄로에서 살았고 2년 정도 시라큐스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0살 때 아버지가 P&G에서 실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이런 가난은 훗날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네소타로 다시 이주해 고향인 세인트폴의 세인트폴 아카데미를 다니며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이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하는 식으로 13살부터 작가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16살 때 퇴학당하고 뉴저지의 예비학교인 뉴먼스쿨에 입학했다. 1913년엔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프린스턴에서 여러 동아리나 학회 같은 활동을 하며 글을 썼고 유니버시티 코티지 클럽이란 곳은 아직도 스콧이 썼던 책상을 전시해놓았다고 한다. 1917년 졸업했는데 가난했던 탓에 미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한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이 와중에 컨트리클럽에서 앨라배마 몽고메리 출신의 젤다 세이어를 만나게 되는데 돈이 없단 이유로 약혼이 파토가 난다. 그러다가 〈로맨틱 에고이스트〉란 작품을 개작해 《낙원의 이쪽》을 썼고 1919년 가을에 스크리브너에서 출판하기로 결정하자 다시 약혼한다. 1920년 3월 26일 소설은 출판되고 히트를 친다. 젤다와 스콧은 결혼한다.
1920년대 미국의 황금시대인 재즈 시대가 열린다. 재즈 시대의 사교적이고 강한 주체성을 보이는 여성들인 플래퍼를 다룬 소설을 써낸 스콧은 공전의 인기를 누린다. 당시 그의 단편소설들은 잡지들에 연재됐다. 1925년에 쓴 《위대한 개츠비》는 플래퍼나 재즈 시대를 다룬 작품 중에 최고로 친다. 스콧은 젤다와 파리로 건너가 여러 문화적인 활동을 벌이는데 이때 사귄 사람들 중 하나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헤밍웨이는 젤다한테선 그다지 좋은 인상을 못 받은 것 같은데 젤다가 스콧에게 술이나 왕창 먹여 글을 못 쓰게 한다고 생각했고 정신 나갔다(insane)고 평가했다. 그리고 스콧을 딱하게 생각하면서 정신적으로 건강한 정상인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단편들이 연재된 잡지들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갔던 잡지였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 에스콰이어(Esquire),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 등이었다.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의 후기에 따르면 고급손목시계 하나를 사려고 하루 만에 써내려 간 소설도 있다.
무수히 많은 단편소설을 써냈지만 뉴욕의 명사로서 부부가 써낸 돈이나 젤다의 치료 비용 등에 돈이 많이 들어 스콧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쪼들리게 된다. 당시 부부의 기행을 들어보면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 감이 올 법도 하다.
1920년대 말이 되자 장편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재정적인 여건으로 계속 단편소설을 써야 했고 1930년에는 젤다가 정신병에 걸리면서 사정은 악화된다. 1932년에는 젤다를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 요양보낸다. 스콧은 메릴랜드의 투손에 땅을 빌려 거기서 소설을 쓰는데 유망한 정신의인 딕 디버라는 청년이 니콜 워런이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얘긴데 초고와 판본들이 여럿 나온다. 평론가들은 자신의 자전적인 문제를 이 소설에 투영한 것으로 본다. 한편 젤다는 유럽 생활을 바탕으로 비슷한 소설을 쓰는데 스콧은 여기에 빡쳐서 작품을 손질하고 젤다의 담당의한테 글 못 쓰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부부 생활은 거의 파경상태였던 듯. 1934년에 위의 과정을 거쳐 써낸 《밤은 부드러워》가 출판된다. 젤다가 이 소설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출판 당대에는 잘 안 팔렸는데 훗날의 평가는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이 작품도 보통 영미권 100대 소설을 뽑을 때 들어가는 편이다.
1930년대 후반엔 돈이 쪼들리자 할리우드로 건너가 MGM을 위해 시나리오를 쓴다. 여기서 마지막 소설이자 다섯번째 장편인 《마지막 거물의 사랑》(The Love of the Last Tycoon, The Last Tycoon으로 부르기도 한다)을 쓴다.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 중역인 어빙 솔버그를 원형으로 삼은 이 소설을 쓰던 중에 찌라시 신문기자인 실라 그레이엄과 연인이 된다. 그가 서부에 있는 동안 젤다는 동부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때 스콧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고 하루에 맥주를 30캔이나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1939년 금주에 성공했고 가장 행복하다 평한 1년을 살고 1940년에 동맥경화로 죽었다. 그 해 12월 20일 애인인 실라와 영화 시사회에 참여한 뒤 돌아오던 중 어지럼을 호소했다. 다음 날 잡지를 보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벽난로 선반을 잡더니 숨을 쉬지 못 하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실라가 매니저를 불렀지만 매니저가 보곤 이미 죽었다고 했다.
안치된 그의 시신을 봤던 도러시 파커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죽었을 때 올빼미 눈의 사나이가 했던 유명한 대사인 "The poor son-of-a-bitch"란 말을 그의 장례식에서 누군가 중얼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위대한 개츠비》와 그의 인생은 여러모로 겹치는 바가 많다. 그의 시신은 메릴랜드로 운구되어 베세다란 곳에서 그의 자식인 스코티 피츠제럴드(당시 19세)의 참관 아래 2,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볼티모어의 록빌 유니언 묘지에 묻혔다. 1948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애슈빌에서 일어난 정신병원 화재로 젤다가 죽자 딸인 프랜시스 스코티는 볼티모어의 대주교구에 항의해 비가톨릭으로 죽은 피츠제럴드를 가톨릭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해달라고 요구해 가톨릭 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원래 피츠제럴드는 가톨릭 집안이긴 했다. 본인은 냉담이었던 것 같지만. 1975년엔 두 사람을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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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피츠제럴드 (박찬원 옮김, 펭귄 클래식 11)

피츠제럴드 단편선 - 피츠제럴드 (김욱동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199)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간다 - 피츠제럴드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피츠제럴드 1 - 피츠제럴드 (허창수 옮김, 현대문학 세계단편선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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