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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4. 서양 - 고전 희곡

시련 – 아서 밀러 (최영 옮김,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2. 3.

민음사 세계문학 286

아서 밀러 - 시련 (1953 첫공연)

 

패리스 목사의 집은 오느날에는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읍'에 위치해 있었다. 예배당에 면한 그 집의 바깥쪽으로는 매사추세츠의 혻독한 겨울에 맞서 창문이 작고 어두침침한 집들이 몇 채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세일럼은 세워진 지 사십 년도 채 안 되었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 매사추세츠 주 전체가 한 무리의 광신도들이 모여 사는 야만적인 변경 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신도들은, 차츰 양과 질이 향상되는 생산품을 배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그들 가운데 소설가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소설책이 있었더라도 그걸 읽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 신조는 극장을 비롯하여 '헛된 향락'이라 할 만한 그 어떠한 것도 용납지 않았다. 그들은 성탄절에도 즐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을 쉬는 날이란 더욱더 기도에 몰두해야 하는 날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같이 엄격하고 음울한 생활에 해방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농가가 세워지면 친구들은 '상량식'을 하러 모여들었고, 어쩌면 특별한 음식을 요리하거나 독한 사과주를 좀 돌리곤 했을 것이다. 세일럼에도 건달들은 꽤 있었으며, 이들은 브리지트 비숍의 선술집에서 셔플보드 놀이판을 놓고 빈둥거렸다. 아마도 이곳의 도덕이 더럽혀지지 않은 것은 종교적 신조 이상으로 가혹한 노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 주민들은 한 알의 곡식을 얻기 위해 마치 영웅처럼 대지와 싸워야 했으므로 빈둥대고 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태한 인간들도 있었다는 것은 2인조 순찰조가 편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이 순찰조의 의무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드거나 성찬식에 참여치 않고, 예배당 인근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집이나 밭에 있는 자들을 수색해 내서 이름을 적은 후 치안관에 제출해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향은 세일럼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이로부터 앞으로 닥쳐올 광란의 요인이 될 무수한 의혹이 탄생했던 것이다. 또한 내 생각에 이런 경향은 존 프록터 같튼 인물이 반발하게 될 것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무장을 갖추고 야영을 하던 시절이 거의 끝나 가고 비록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상대적으로 안전해지면서 이 지방의 낡은 규율들이 안에서부터 곪기 시작했던 탓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일이 으레 그렇듯이, 문제점은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위험이 닥쳐올 수 있었고, 또 단결은 여전히 안전을 보장하는 최선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삼림 지대의 경계선은 아주 가까웠다. 미국 대륙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 있었으며, 세일럼 주민들에게 그곳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어둡고 위협적인 이 삼림 지대는 밤낮 없이 주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이따금씩 인디언 부족들이 침략해 왔는데 패리스 목사 교구민 중에도 이 이교도들에게 친척들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이 인디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실패한 책임의 일부분은 그들의 편협한 속물근성에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기독교도에게서 땅을 빼앗는 대신 인디언에게서 땅을 빼앗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언은 극소수였고, 세일럼 주민들은 원시림이 악마의 마지막 남은 땅이며, 본거지이고,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한, 미국 대륙의 삼림 지대는 하느님께 경배드리지 않는 지상 최후의 장소였던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이런 연유로 이곳 주민들은 타고난 반항심, 심지어는 피해망상까지 품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조상들도 영국에서 박해를 당했다. 그래서 이제 이곳 주민들과 교회는 그들의 새 예루살렘이 사악한 방식이나 위선적 사상에 더렵혀지고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교파들의 자유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의 굳건한 손안에 이 세상을 밝힐 촛불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 신념을 물려받았으며, 이것은 한때 쓸모 있었찌만 이제는 상처를 줄 뿐이다. 세일럼 주민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규율로 이 신념에 의지했다. 그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이 선택했든, 아니면 여기서 태어났든 간에 이 나라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신념이 그들에게 값진 것이었다는 증거는 세일럼보다 훨씬 남쪽인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초기 정착민들의 정반대되는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버지니아에 상륙한 영국인들의 동기는 재물을 모으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신대륙의 부를 쓸어 모아서 부자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들은 이기적인 집단이었으며, 매사추세츠 주 사람들보다 더한 아첨꾼들이었다. 그렇지만 버지니아 주에서는 그들을 척결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도 청교도들을 없애려 했지만 그곳 청교도들은 힘을 합쳤다. 그들은 공동체 사회를 건설했다. 그 공동체는, 처음에는 전제적이고 매우 헌신적인 지도자를 가진 무장한 수용소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 사회는 합의에 의한 전제 체제였다. 왜냐하면 주민들은 꼭대기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이념 아래 뭉쳤기 때문이다. 공동 이념의 영속화는 이들이 고난을 견딘 이유였으며 또 그 고난을 정당화해 주었다. 따라서 이들의 극기심, 목적 의식, 허황된 추구에 대한 경계, 엄격한 공정성이 모두 합쳐져 인간에게 적대적인 이 땅을 정복하는 데 완벽한 도구가 됐다.

그러나 1692년의 세일럼 주민들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 대륙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헌신적이지 못했다. 그동안 대대적인 계층 분리가 일어났으며 또 그들의 시대에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물러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눈에는 시대가 사개에 맞는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가 그러하듯이 당시에도 보통 사람들 눈에는 자기 시대가 해결 짓기 힘들고 복잡한 시기로 비쳤을 것이다. 대중들에게 은밀하고 어두운 세력이 혼란기를 초래했다고 믿게 하는 일이 얼마나 쉬웠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에 대한 암시도 법정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어느 시대나 사회적 혼란은 미신적인 의혹을 낳는 법이다. 그래서 세일럼에서처럼 사회의 심층으로부터 기이한 일들이 발생할 경우, 사람들이 좌절에서 비롯된 폭력으로 희생자들을 공격하지 않고 인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 것이다.

이제 다루게 될 세일럼 비극은 모순으로부터 자라났다. 그것은 우리를 손안에 쥐고 흔드는, 해결 전망은 아직 불투명한, 그런 모순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선하고 더욱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세일럼 주민들은 국가와 종교의 권력을 합친 신정체제를 발전시켰다. 이 체제의 기능은 공동체를 단결시키고, 물질적,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내부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 그 체제는 필요에 희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 목적을 완수했다. 하지만 원래 조직이란, 두 개의 물체가 동시에 똑같은 위치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배척과 금지 위에 세워지게 마련이며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뉴잉글랜드 지방에도 규율이 막아 주던 위험보다 그 규율이 갖는 억압이 더 무거워지는 때가 찾아왔다. 마녀 사냥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균형의 추가 옮겨 가지 시작했을 때, 사회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겨난 공포의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흔하고도 개인적인 악덕을 초월한 사람만이 모든 이를 동정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받게 될 그 동정 말이다. 억압없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며, 규율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마녀 사냥은, 그러나 단순한 억압이 아니었다.이것은 또한 중요한 부분인데, 희생자를 고발한다는 구실하에, 비행과 죄를 공공연히 저지르던 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랜 세월 미루어 둔 기회로 작용했다. 이제 어떤 남자가 한밤중에 마사 코리가 자기 침실로 찾아와 곁에 아내가 자고 있는데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타더니 '거의 질식시킬 뻔'했다고 하는 게 갑자기 말이 되는 이야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국적이고 또 신성한 일이 된 것이다. 물론 이 남자에게 찾아온 것은 마사의 혼령이겠지만, 이 일을 고백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은 진짜 마사가 찾아온 것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런 일은 공개할 만한 게 못 되었을 것이다.

이웃에게 품어 온 오랜 증오심은 이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고, 성경이 자비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지 경계선과 거래를 둘러싼 끝없는 말다툼으로 표출되던 땅 욕심은 이제 도덕적인 영역으로 승격되었다. 즉 이웃을 마녀라고 모함할 수 있었고 게다가 덤으로 정의감을 맛볼 수도 있었다. 해묵은 원한은 하느님과 악마의 대결이라는 천상의 차원에서 결론지을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자들을 향한 불행한 자들이 품었던 의심과 질시가 평범한 보복 행위로 터져 나올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p12-18)

  

아이들이란 때가 되면 못된 짓을 하느라고 악마처럼 안짱다리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는 법. 이 애도 장난에 싫증이 나면 깨어날 거랍니다. 아이들 기분이란 그야말로 아이들 같아서 잡겠다고 쫓아다녀도 별 수 없어요.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사랑해 주면 금방 돌아올 거예요. (p46)

 

헤일 목사와 무대 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는 악마에 대해 훌륭한 우주관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식한다. 우리의 세계는 양분된 왕국으로, 어떤 류의 이념이나 정서, 행동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고, 그것들의 반대는 사탄에게 속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죄가 존재하지 않는 도덕에 대한 생각은 하늘이 없는 땅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불가능하다. 1692년 이래로 거대하지만 피상적인 변화가 하느님의 수염과 악마의 뿔을 일소시켰으나, 이 세상은 여전히 두 개의 상반되는 절대자들 사이에 붙들려 있다. 긍정과 부정이 동일한 힘의 속성이라는 통일성(선과 악이 상대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언제나 동일한 현상에 결합한다는)의 개념은 여전히 자연과학, 그리고 사상사를 견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기독교 시대 이전까지는 하계가 결코 인간에게 적대적인 세계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모든 신들이 유용한 존재이고, 이따금 실수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리고 기독교가 인류에게 인간의 무가치함(구원받을 때까지는)을 꾸준히 조직적으로 주입해 온 사실을 보면, 악마란 인간을 채찍질하여 특정한 교회나 교회 국가에 굴복시키기 위해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고안되고 사용된 무기로서 필요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가 악마의 정치적인 감화력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악마가 대체로 우리 사회의 적대자들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이건 간에 우리 측에 의해서도 호출되고 저주받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종교 재판을 통해서 사탄을 하느님 최대의 적으로 장려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교회의 적들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그에 못지않게 사탄에게 의존했다. 루터 자신도 지옥과 결탁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루터도 그의 적들을 똑 같은 이유로 비난했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루터가 자신이 악마와 접촉을 가졌으며 신학적 논쟁을 했다고 믿었다는 데 있다. 나는 이 같은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한 역사학 교수는 대학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커튼을 친 후, 교실에서 에라스무스를 불러내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그 교수는 그런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당국자들이 아직까지도 악마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역사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로지 영국만이 현대의 악마 숭배에서 자유롭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나라에서는 약간이라도 중요한 저항 행위는 모조리 자본주의라는 사악한 마녀와 결부되어 있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 그러므로 정치적 반대는, 비인간성으로 도금된 다음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문명화된 교류 습관들을 철폐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정치적인 정책은 도덕적 권리와 동급이고, 그걸 반대하는 것은 악마적인 악의와 동급이 된다. 일단 이 같은 등식이 효과적으로 맺어지면, 사회는 책략과 대항의 집적으로 변하며, 정부의 주된 역할은 중재자에서 하느님의 응징으로 바뀐다.

이 과정의 결과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가끔 가해지는 잔인함의 수위가 달라지고 주관하는 곳 역시 항상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대로라면, 사회가 망설임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과 행위에 대한 것이 전부이다.

행동의 비밀스러운 의도는 목사나 사제, 랍비들이 다루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악마 숭배가 일어나면, 행동이란 인간의 진정한 품성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증거가 된다. 헤일 목사의 말대로 악마는 교활한 자이며, 타락하기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느님마저 천국에서 그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유추는, 옛날 마녀들에게 실체가 없었던 반면, 오늘날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는 실재하며, 각각의 진영에서 첩보원을 통해 상대를 전복시키려는 활동을 한다는 확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흔들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속물적인 반대일 뿐 사실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세일럼 주민들이 악마와 친교를 맺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숭배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이 사건에서 다른 경우들처럼 그 진상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기적이고도 관습적인 악령의 화의에 대해 알아내야만 한다. 이데 대한 확실한 증거는 첫 번째로 패리스 목사의 노예인 티투바의 자백이고 또 다른 것으로 티투바와 함께 마법을 행한 것으로 알려진 아이들의 태도이다. (p55-57)

 

부인이 결백하다면이라고요! 어째서 당신은 패리스와 애비게일이 결백한지는 결코 의심해 보지 않는 겁니까? 이제는 고소하는 자들만이 항상 거룩한 겁니까? 그자들이 하느님의 손가락같이 순결하게, 오늘 아침 태어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세일럼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드리겠소. 복수가 세일럼을 돌아다니고 있소. 세일럼에 있는 우리들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인데, 이제 미친 아이들이 천국의 열쇠를 쩔그렁거리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저열한 복수가 법을 만들고 있소! 이 영장은 복수입니다! 나는 내 아내를 복수에 넘겨주지 않겠소! (p117-118)

 

그것이 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내 평생 또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에 서명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수형을 당한 이들의 발바닥 먼지만큼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난 당신에게 내 영혼을 주었습니다. 내 이름만은 나에게 남겨 주십시오! (p210)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당신의 마법이 지금 이뤄졌소. 왜냐하면 나는 이제 존 프록터 속에 몇 조각의 선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깃발을 짤 수 있을 만큼은 아니지만, 저 개들로부터 선함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얗습니다. 저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마오! 눈물은 저들을 기쁘게 해 주는 거요! , 자존심을 보여 줍시다. 돌같이 차가운 마음을 보여 줍시다. 그것으로 저들을 침몰시킵시다. (p21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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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애셔 밀러(Arthur Asher Miller, 1915년 10월 17일 ~ 2005년 2월 10일)

미국의 극작가이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로서 국제펜클럽 회장을 지냈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미시간 대학에서 연극과를 전공했으며 졸업 후 극작에 전념하였다. 그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의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전쟁을 비판한 심리극 <모두 내 아들>로 평론가상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44년 《행운의 사나이》로 브로드웨이로 진출을 했다. 1947년에는 《모두 내 아들》이 히트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이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아서 밀러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 현대 희곡의 기수로 나서게 되었다.
1956년 마릴린 먼로와 결혼했지만 1961년에 이혼했다. 1962년 매그넘 사진가로 활약하고 있던 사진 작가 디트로이트 모라스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의 딸 레베카 밀러는 배우이자 극작가, 영화 감독이되어,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결혼했다.
2005년 89세의 나이로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암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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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 아서 밀러 (강유나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모두가 나의 아들 - 아서 밀러 (최영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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