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6. 인문, 교양, 역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정민 (김영사)

by handaikhan 2023. 2. 3.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정민 (김영사)

 

 

1. 단계별로 학습하라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적 지식경영
(1) 
파 껍질을 벗겨내듯 문제를 드러내라 _ 여박총피법(如剝蔥皮法)
(2)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_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
(3) 
기초를 확립하고 바탕을 다지라 _ 축기견초법(築基堅礎法)
(4) 
길을 두고 뫼로 가랴 지름길을 찾아가라 _ 당구첩경법(當求捷徑法)
(5) 
종합하여 분석하고 꼼꼼히 정리하라 _ 종핵파즐법(?爬櫛法)

2
. 정보를 조직하라 - 큰 흐름을 잡아내는 계통적 지식경영
(6) 
목차를 세우고 체재를 선정하라 _ 선정문목법(先定門目法)
(7) 
전례를 참고하여 새 것을 만들어라 _ 변례창신법(變例創新法)
(8) 
좋은 것을 가려뽑아 남김없이 검토하라 _ 취선논단법(取善論斷法)
(9) 
부분을 들어서 전체를 장악하라 _ 거일반삼법(擧一反三法)
(10) 
모아서 나누고 분류하여 모으라 _ 휘분류취법(彙分類聚法)

3
. 메모하고 따져보라 - 생각을 장악하는 효율적 지식경영
(11) 
읽은 것을 초록하여 가늠하고 따져 보라 _ 초서권형법(?書權衡法)
(12)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하라 _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
(13) 
되풀이해 검토하고 따져서 점검하라 _ 반복참정법(反覆參訂法)
(14) 
생각을 정돈하여 끊임없이 살펴보라 _ 잠심완색법(潛心玩索法)
(15) 
기미를 분별하고 미루어 헤아려라 _ 지기췌마법(知機?摩法)


4
. 토론하고 논쟁하라 - 문제점을 발견하는 쟁점적 지식경영
(16) 
질문하고 대답하며 논의를 수렴하라 _ 질정수렵법(質定收斂法)
(17) 
끝까지 논란하여 시비를 판별하라 _ 대부상송법(大夫相訟法)
(18) 
생각을 일깨워서 각성을 유도하라 _ 제시경발법(?警發法)
(19)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라 _ 절시마탁법(?磨濯法)
(20) 
근거에 바탕하여 논거를 확립하라 _ 무징불신법(無懲不信法)


5
. 설득력을 강화하라 - 설득력을 갖춘 논리적 지식경영
(21) 
유용한 정보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라 _ 피차비대법(彼此比對法)
(22) 
갈래를 나누어서 논의를 전개하라 _ 속사비사법(屬詞比事法)
(23) 
선입견을 배제하고 주장을 펼치라 _ 공심공안법(公心公眼法)
(24) 
단계별로 차곡차곡 판단하고 분석하라 _ 층체판석법(層遞判析法)
(25) 
핵심을 건드려 전체를 움직여라 _ 본의본령법(本意本領法)


6
. 적용하고 실천하라 - 실용성을 갖춘 현장적 지식경영
(26) 
쓸모를 따지고 실용에 바탕하라 _ 강구실용법(講究實用法)
(27) 
실제에 적용하여 의미를 밝혀라 _ 채적명리법(採適明理法)
(28) 
자료를 참작하여 핵심을 뽑아내라 _ 참작득수법(參酌得髓法)
(29) 
좋은 것은 가리잖코 취해 와서 배우라 _ 득당이취법(得當移取法)
(30) 
단계별로 다듬어서 최선을 이룩하라 _ 수정윤색법(修正潤色法)


7
. 권위를 딛고 서라 - 독창성을 추구하는 창의적 지식경영
(31) 
발상을 뒤집어서 깨달음에 도달하라 _ 일반지도법(一反至道法)
(32) 
권위를 극복하여 주체를 확립하라 _ 불포견발법(不抛堅拔法)
(33) 
도탑고도 엄정하게 관점을 정립하라 _ 독후엄정법(篤厚嚴正法)
(34) 
다른 것에 비추어 시비를 판별하라 _ 대조변백법(對照辨白法)
(35) 
속셈 없이 공평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_ 허명공평법(虛明公平法)


8
. 과정을 단축하라 - 효율성을 강화하는 집체적 지식경영
(36) 
역할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확대하라 _ 분수득의법(分授得宜法)
(37) 
목표량을 정해 놓고 그대로 실천하라 _ 정과실천법(定課實踐法)
(38) 
생각들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단련하라 _ 포름부절법(??不絶法)
(39) 
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 _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
(40) 
조례를 먼저 정해 성격을 규정하라 _ 조례최중법(條例最重法)


9
. 정취를 깃들여라 -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인간적 지식경영
(41) 
정성으로 뜻을 세워 마음을 다잡아라 _ 성의병심법(誠意秉心法)
(42)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성품을 길러라 _ 득승양성법(得勝養性法)
(43) 
나날의 일상 속에 운치를 깃들여라 _ 일상득취법(日常得趣法)
(44) 
한 마디 말에도 깨달음을 드러내라 _ 담화시기법(談話視機法)
(45) 
속된 일을 하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라 _ 속중득운법(俗中得韻法)


10
. 핵심가치를 잊지 말라 - 본질을 놓치지 않는 실천적 지식경영
(46) 
위국애민 그 마음을 한시도 놓지 말라 _ 비민보세법(裨民補世法)
(47) 
좌절과 역경에도 근본을 잊지 말라 _ 간난불최법(艱難不?)
(48) 
사실만을 기록하고 실용을 추구하라 _ 실사구시법(實事求是法)
(49)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라 _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50) 
‘지금 여기’의 가치를 다른 것에 우선하라 _ 조선중화법(朝鮮中華法)

 

.......................................................................................................................................................................................................................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음력 2월 22일)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

정선 목민심서 - 정약용 (다산연구회, 창비)

다산의 마음 - 정약용 (박혜숙 옮김, 돌베개)

다산의 풍경 - 정약용 (최지녀 옮김, 돌베개)

다산 산문선 - 정약용 (박석무 옮김, 창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