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김철곤 옮김, 민중출판사)

by handaikhan 2024. 3. 22.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 호밀밭의 파수꾼 (1951년)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가.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나는 데이비드 카퍼필드 식의 그런 시시한 이야기 따위는 늘어놓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그러한 이야기는 질색인데다, 부모님 모두가 아주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가 당신들의 신상에 관해 늘어놓은 것을 안다면 아마 기절하고 말 것이다. 특히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급하고 신경질적이다. 어머니 역시 그에 못지 않지만.

더구나 나는 자서전 따위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나는 다만 지난해 크리스마스 무렵 건강상 이곳으로 내려온 후 부터 최근까지 겪었던 엄청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할 뿐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D. B. 에게 한 바 있다. D. B. 는 다름 아닌 내 형을 말한다.

형은 지금 헐리우드에 있다. 헐리우드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형은 주말마다 나를 찾아 이곳으로 오곤 한다. 아마 다음 달 내가 집에 돌아갈 때에는 차로 데려다 줄지도 모르겠다. 형은 제규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영국제 소형차로 시속 2백 마일까지 달리 수 있다. 형은 꽤 부자로 그것을 사천 달러를 주고 샀다고 한다. (p.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 - 찰스 디킨스 (신상웅 옮김, 동서월드북)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아, 펜시 프렙을 그만두었을 때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다!

펜시 프렙이란 펜실베니아 주 에저스 타운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 학교이리라. 아니면 광고로라도 보았겠지. 잘생긴 청년이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넘는 사진의 광고를. 펜시 프렙은 원래 광고를 많이 내기로 유명한 학교이다.

광고를 보았다면 아마 펜시 프렙에서는 항상 포올 경기를 하고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말이라고는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또 그 청년의 사진 밑에는 언제나 '본교는 1888년 창립 이래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데 노력해 왔습니다' 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펜시 프렙에서 우수한 인재를 길러 내다니, 내가 보기는 절대 그렇지 않다. 혹시 펜시 프렙 졸업생 중 우수한 학생이 한두 명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펜시 프렙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수했을 것이다. (p.6-7)

 

참, 그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다.

사실 그때 나는 펜시에서 쫓겨났다. 학업에 의욕도 없었거니와 네 과목이나 낙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바로 퇴학으로 처리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휴가가 지나도 내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즉, 자퇴로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선생들은 나를 볼 때마다 학업에 전념할 것을 타이르곤 했다.

내가 얼마나 학과 공부를 소홀히 했으면, 우리 부모가 터어머 교장의 호출을 받고 올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펜시 프렙에서 쫓겨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펜시 프렙은 학생을 잘 내쫓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정말 가차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퇴학 결정은 내 인생에 도움을 주었으니, 그런 의미라면 펜시 프렙도 좋은 학교일 수 있겠다. (p.9-10)

 

솔직히 나는 펜시를 떠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싶었다. 결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떠나기는 싫었다. 괴로운 이별이건 못내 바라던 이별이건 떠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p.10)

 

우리는 그렇게 순간순간 이별을 하고 살아간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p.11)

 

정문 앞에서 잠깐 숨을 돌린 후, 나는 다시 204번 국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날씨는 정말 지독하게도 추웠다. 그런데 달려가면서도 나는 내가 왜 그토록 열심히 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뿐이었다. (p.11)

 

스펜서 선생 내외는 일흔 살이 훨씬 넘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삶에 기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스펜서 선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알 수 없었다. 허리는 굽을 대로 굽어 구부정한 상태였으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강의 때 분필이라도 떨어뜨리면 앞에 앉은 학생이 주워 주어야 했다. 그러나 언뜻 보아도 나름대로 삶에 기쁨을 느끼며 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 나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스펜서 선생 댁에서 하트 초콜릿을 대접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스펜서 선생은 내게 낡은 담요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예전에 사모님과 함께 인디언으로부터 산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는 스펜서 선생의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무리 늙은 사람이라도 작은 일에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p.15)

 

"그래. 자넨 기어코 학교를 그만둘 셈인가?"

스펜서 선생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려고 합니다만."

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스펜서 선생은 늘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만큼 고개를 잘 끄덕이는 사람도 없으리라. 항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늙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장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더냐?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네,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의 한두 시간 정도는 하셨으니까요."

"뭐라고 하셨는데?"

"인생은 경기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요."

"맞아, 인생은 경기야. 누구든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경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경기? 참으로 대단한 경기로군. 다들 웃기고 있네. 그래, 돈 많고 능력 있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멋진 경기겠지.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지. 빌어먹을!

"교장 선생님이 자네 부모님한테 편지는 보내셨는가?"

스펜서 선생은 내 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물었다.

"월요일에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넨? 부모님께 연락은 했나?"

"아뇨, 아직 못 했습니다. 아처피 수요일 밤에는 집에 갈 테니 가서 말씀드려도 됩니다."

"몹시 실망하실 텐데."

"아마 그러실 겁니다. 벌써 네 번째 학교니 말입니다."

말끝에 나는 머릴 흔들었다. 버릇이었다. 나는 또 '빌어먹을' 이라고 말하는 버릇도 있었다. 그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먼저 형편없는 내 어휘력에 있었다. 또 나이에 비해 유치한 행동을 하는 내 자신에 대한 비아냥거림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열세 살처럼 구는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키는 이미 6피트 2인치까지 자란 데다 흰머리까지 났는데 열세 살 짓이라니.

사실 내 머리 오른쪽은 온통 흰 머리카락 투성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런 내가 철부지 짓이나 일삼으니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저절로 잔소리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잔소리가 심했다. 당신 역시 항상 옳은 행동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당신 나이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내가 꼭 철부지 짓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영감같이 굴 때도 있었다. 몰라주어서 그렇지. (p.17-19)

 

훌륭하다는 것, 그것보다 혐오스러운 말이 또 있을까. (p.19)

 

스펜서 선생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오직 자기 말만 하면 되는 사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 말도 듣지 않을 수밖에. (p.21)

 

스펜서 선생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낙제시킨 것이 무척 가슴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허튼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선생님의 입장이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둥 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다픈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둥.....

그런데 우습게도, 그렇게 지껄이는 동안에 나는 줄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중앙 공원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곳 남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내가 돌아갈 즈음이면 연못이 얼까. 만일 언다면 오리둘은 다 어디로 갈까. 혹시 동물원에서 실어가지는 않을까...

입으로는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도 상당히 낙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p.24-25)

 

솔직히 말해서 나는 스펜서 선생을 상대로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해도 그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더구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엘크톤 힐즈를 그만둔 이유는 그곳에 너무 많은 얼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얼간이란 그곳의 하아스 교장 선생 같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이제까지 만난 인간 중에 최악이었다. 터어머 교장보다도 열 배는 더 얼간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일요일에 차를 타고 학교에 오는 학부형들과 일일이 악수한다. 그때 하아스 교장이 떠는 아부라니,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었다. 특히 우리 반 한 아이의 부모에게 떠는 아부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 초라해 보이는 학부형에게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조금 뚱뚱하다거나 체구보다 큰 옷을 입었다거나 너절한 구두를 신은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약간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것을 어찌 참고 보아 줄 수가 있겠는가.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p.25-26)

 

"내가 자네 머릿속에 분별력을 심어 줄 수 있다면 좋게군. 난 자넬 돕고 싶네. 자네 힘이 되고 싶단 말일세."

스펜서 선생의 진정은 나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입장과 생각이 너무 틀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p.27)

 

"선생님,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냉정하게 돌아서서 나올 수가 없어 나는 다시금 인사를 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전 다만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입니다.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까?"

"글쎄."

"아닙니다. 다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p.27-2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죽은 시인의 사회 - 클라인바움 (한은주 옮김, 서교출판사)

................................................................................................

 

나는 고전도 많이 읽었다. 예를 들어 하디의 <귀향> 같은 것 말이다. 또 전기물이나 미스터리물도 읽었는데 그런 것에는 그다지 감동받지 못했다. 감동받는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작가가 아주 친한 ㅊ니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로도 걸고 싶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삭 다니엘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런 감동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링 라드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 역시 그런 감동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지난 여름에 읽었다. 그런데 서머셋 몸에게는 전혀 전화 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토마스 하디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나는 유스타이어 바이(<귀향>의 여주인공)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 (p.3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인간의 굴레 -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민음사)

귀향 - 토마스 하디 (정병조 옮김, 을유문화사)

...........................................................................

 

드디어 애클리가 나가고 나는 파자마와 목욕용 가운을 걸쳤다. 그리곤 사냥 모자를 쓰고 작문을 시작했다.

스트라드레이터가 부탁했지만 나는 집이나 방에 대한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나로서는 집이나 방에 그리 큰 흥미가 없었다. 대신 동생 앨리의 손가락 없는 야구 장갑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것은 작문하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앨리는 왼손잡이 야수의 장갑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묘사에 적당한 이유는 앨리의 특이한 행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손을 집어넣는 곳이나 손가락이 나오는 곳이나 아무 데나 시를 써 놓았다. 그것도 녹색 잉크로 써 놓았다. 그러면 그 시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물론 수비를 설 때도 읽을거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앨리는 죽고 없다. 백혈병에 걸렸던 것이다. 우리가 메인주에서 살던 1946년 7월 18일에 죽었다.

앨리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머리가 오십 배는 더 좋았다. 그의 선생들은 늘 어머니에게 편지 보내기를, 앨리와 같은 학생이 자기 반에 있다는 사실이 영광이라고 했다. 그것은 절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단지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성도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았다. 나는 그가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빨간 머리들이 다혈질이라고 하지만 그는 불같이 빨간 머리임에도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열 살 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열두 살 여름 어느 날 나는 골프를 치고 있었는데, 티에 얹힌 공을 치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뒤에 앨리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과연 앨리는 울타리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골프장 주위에 울타리로 죽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는 한 150야드쯤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멀리 있었는데도 그 빨간 머리로 인해 눈에 확 뜨인 것이었다.

아무튼 앨리는 좋은 아이였다.

앨리가 죽던 날, 나는 불과 열세 살이었다. 그때 나는 차고의 유리를 마구 때려 부수었다. 그 해 여름에 산 스테이션 왜웨이 차 유리까지 때려 부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손이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 뒤 사람들은 내게 정신분석이니 뭐니 받게 해야 한다고 온통 난리들이었다. 그러나 나를 야단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랬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 다친 손이 아플 때가 있다. 특히 비가 온다거나 주먹을 꽉 쥘 때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어차피 외과 의사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는 않을 테니.

작문 내용은 대충 그런 것이었다. 마침 앨리의 야구 장갑도 내 짐 가방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거기에 쓰인 시도 베꼈다. 물론 앨리의 이름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실 나는 앨리의 소재로 스트라드레이터의 숙제를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리 소재가 없었다. 또 앨리의 야구 장갑처럼 좋은 소재는 없었다. (p.60-63)

 

복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모두들 자고 있거나 외출했거나 집으로 가 있거나 했을 터였다. 리이와 호프만의 방문 앞에는 콜리노스의 빈 치약 껍데기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 빈 치약 껍데기를 발로 찼다. 그때 맬 브로서드가 생각났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의 방으로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대로 펜시를 떠나자는......

나는 더 이상 펜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외롭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면 수요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동안에는 뉴욕의 호텔에서 지내면 된다. 아주 비싼 방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수요일까지 편하게 있다 보면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퇴학당했다는, 터어머 교장의 편지는 수요일이나 지나야 집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모든 사실을 알기 전에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편지를 막 받았을 때는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무 신경질적이라 그대로 돌아갔다가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 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 나아질 테니 그때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불을 켜고 이것저것 챙겼다. 이미 큰 것들은 대강 챙겨 놓은 터라 별반 어려운 것이 없었다.

짐을 꾸리다 말고 나는 잠깐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2, 3일 전에 보내어 준 스케이트가 봉ㅆ다. 왠지 착잡했다. 어머니가 스폴링 가게 들어가 점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뒤 물건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나는 또 퇴학을 당했으니....

애초에 나는 경기용 스케이트를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하키용 스케이트를 사 보내셨다. 그 점도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며 종국에 가서는 슬프게 되고 말았다.

나는 잠깐 담배에 불을 댕겼다. 그런 다음 옷을 입고 여행용 가방 두 개에 짐을 챙겨 넣었다. 그러기까지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짐 꾸리기에 이력이 난 것이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에도 스트라드레이터는 눈도 떠 보지 않았다.

짐을 다 꾸린 후 나는 돈을 세어 보았다. 얼마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꽤 많은 돈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전 주에 할머니가 용돈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돈을 아주 잘 썼다. 나이가 많아 다소 쭈그렁 바가지엿으나 일년에 네 번 가량 돈 보내 주는 일은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정도 돈이면 충분했지만 나는 조금 더 마련하고자 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복도 저쪽에 프레드릭 리트우드러프 방으로 갔다. 그리곤 다짜고짜 그를 깨워 타자기를 얼마에 사겠냐고 물었다. 바로 내 타자기를 빌려간 친구였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고 말았다. 90달러가량 주고 산 물건인데 20달러만 내라니 살 수밖에. 꽤 부자였지만 아마 자는 것을 깨워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 나는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저쪽 복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왠지 울고 싶었다. 나는 사냥 모자를 뒤로 쓱 돌렸다. 그리곤 힘차게 외쳤다.

"이 저능아들아, 잘들 자거라!"

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왔다. 어느 얼간이 같은 인간이 계단에 땅콩 껍질을 흘려 놓아 하마터면 모가지가 부러질 뻔했지만..... (p.80-82)

 

역에 도착하여 알아보니 10분 뒤에 오는 기차가 있었다. 재수가 좋은 경우였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눈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때까지도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밤에 타는 기차라면 더욱 좋다. 전등이 켜 있고, 창문은 시커멓고, 판매원이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커피나 샌드위치를 파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 밤 기차를 타면 나는 주로 햄 샌드위치나 잡지를 네 권정도 샀다. 밤 기차에서는 그런 잡지에 실린 소설이라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독자들도 알 것이다. 데이비드라는 턱이 긴 인간의 파이프에 린다니 혹은 마르시아니 하는 따위의 여자들이 불을 붙여 준다는 내용의 소설을 밤차 안에서라면 그런 유치한 소설도 얼마든지 낭만적으로 읽혔다.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읽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날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사냥 모자를 벗어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뿐이었다. (p.83-84)

 

부인의 아들은 펜시 전체에서, 펜시 창립 이래 최악의 학생이었다. 그는 샤워를 마친 다음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축축한 수건으로 사람의 엉덩이나 갈기는 아주 고약한 자식이었다.

"어머, 그래! 나중에 어니스트를 만나면 우리가 만났다는 얘기를 해야겠다. 그래, 이름이 뭐지?"

"루돌프 슈미트."

루돌프 슈미트란 우리 기숙사 수위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엉뚱한 이름을 댄 것은 처음 만난 부인에게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생은 펜시를 어떻게 생각해? 좋다고 생각해?"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천국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다른 학교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에요. 양심적인 선생님도 많고요."

"어니스트는 칭찬이 대단하던데?"

"그럴 거예요. 어니스트는 어디에든 잘 적응하는 편이니까요. 말하자면 순응하는 방법을 아는 거죠."

"정말?"

부인은 내 말에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럼요, 정말이고요."

부인이 장갑을 벗는 것을 보며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장갑을 벗자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손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릴 때 손톱을 다쳤어."

부인은 살짝 웃으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웃음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짝 웃지도 않지만 웃는다 해도 오히려 천하게 보일뿐인데 부인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집 양반이나 나나 그 애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해. 그 애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거란 생각 때문에 말야."

"무슨 말씀이세요?"

"애가 워낙 예민해서 말야. 그래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적극적이지도 못하고. 그 앤 나이에 비해 너무 심각한 것 같아."

예민하다니, 사람을 웃겨도 분수가 있지! 더구나 모로우 같은 인간이 에민하다니. 그에 비하면 차라리 화장실 변기가 더 예민하겠다.

나는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리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니 말이다. 아마 어머니들이란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다들 조금씩은 정신이 나가는 모양이었다. (p.86-87)

 

"그랬을 거예요. 그게 바로 어니예요. 그게 어니의 유일한 결점이죠. 너무 수줍어하고 너무 겸손한 거요. 때론 강한 것도 필요한데."

그때 마침 차장이 들어와 부인의 차표를 검사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그만 지껄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때 지껄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젖은 수건으로 사람들의 엉덩이나 후려갈기는 그런 인간은 한 번쯤 골려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모로우는 정말 지겨운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은 어렸을 때에만 쥐새끼 같은 것이 아니다. 일생을 두고 쥐새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부인은 내가 지껄인 허튼 소리를 고스란히 믿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이 모든 학생들이 반장으로 추천하려고 해도 거절하는 매우 수줍고 겸손한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그런 말에 의심을 하랴. (p.90)

 

펜 역에서 내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간 것이었다.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방은 바로 볼 수 있도록 전화 부스 바로 옆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걸려니 누구에게 걸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형인 D. B. 는 헐리우드에 있었고 누이동생 피비는 9시에 잠자리에 드니 그 애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피비는 깨우는 것은 별일 아니었지만 그 애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전화를 받는다면 그것은 곤란했다. 분명히 아버지나 어머니가 받을 테니까 말이다.

다음에 생각난 사람은 제인 갤러허의 어머니였다. 제인의 휴가 계획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썩 내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남의 집에 전화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 다음에는 샐리 헤이즈가 생각났다. 샐리는 당시 가장 자주 만나던 여자였다. 샐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라고 했다. 며칠 전에 보낸 편지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트리를 장식할 것이니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샐리에게 전화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샐리 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샐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아마 내가 전화를 하면 분명히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내가 뉴욕에 와 있다고 알릴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전혀 샐리 어머니와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언제인가 샐리 어머니는 내가 난폭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난폭한 데다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다고 샐리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샐리에게 전화하는 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후튼 스쿨에서 만났던 카알 루스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도 내키지 않았다. 썩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전화를 하지 못했다. (p.93-94)

 

"아저씨, 저 중앙 공원 남쪽에 있는 연못 말예요. 그곳에 오리가 있잖아요. 그 오리들은 연못이 얼면 어디로 갈까요?" (p.94-95)

 

벨 보이가 나가자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코트를 입은 채였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으니 아무렇게나 한들 어떻겠는가. 그런데 무심히 내다본 풍경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었다. 바로 건녀편 건물의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그 방에는 커튼도 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 남자가, 백발의 한 남자가 팬티 바람으로 그 방에 있었다. 그는 옷가방을 침대에 놓더니 옷을 꺼내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옷이란 것이 비단 양말에 굽 높은 구두에 브래지어, 끈 달린 코르셋 등 완전히 여자 옷들이었다. 그 위에 몸에 꽉 끼는 검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었다.

옷을 다 입은 남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치 여자 걸음걸이를 흉내 내듯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러다 담배를 피워 물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나처럼 혼자였다. 화장실에 누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까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바로 위방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앉은 채 입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하이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잔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뿜었다. 그런 다음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뿜었다. 정물 볼만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도 하는 듯 깔갈거렸다.

정말이지 변태들의 집합소였다. 아마 그곳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으리라. 나는 스트라드레이터에게 전보를 쳐서 그곳으로 오라고 하고 싶었다. 스트라드레이터라면 에드몬트 호텔에서도 군림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너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 너절함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특히 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여자는 정말 미인이었다.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나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느꼈다. 단지 기회가 없어서 못 했을 뿐이지 나 역시 대단한 호색가였다. 그때도 나는 가장 저속한 경우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들처럼 서로 물을 뿜어대는 그런 것 말이다. 좀 지저분하면 어떠랴. 어차피 엉망으로 취한 상태인데 그런 짓 좀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랴.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만약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 한다면 그 냄새를 어떻게 참겠는가. 반대로 좋아하는 여자라면 어떻게 물을 뿜을 수 있을까.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일 텐데, 그 좋아하느 ㄴ얼굴에 어찌 함부로 물을 뿜을 수 있을까 말이다. 그런데도 그 지저분한 놀이가 재미있어 보이고 하고 싶어 미치겠으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p.96-98)

 

그녀는 정말 춤의 도사였다. 나는 그냥 그녀를 건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더구나 그녀는 회전할 때 그 작은 엉덩이를 멋지게 돌렸다. 그것이 내 혼을 쏙 빼 놓았다.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절반쯤 넋을 빼앗긴 상태였다.

여자란 그런 존재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똑똑한 여자는 물론 조금 어리석은 여자라도 일단 예쁜 짓을 하면 남자들은 혼을 빼앗긴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여자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 여자, 빌어먹을! 여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족속이었다. (p.114)

 

나는 또 마티와 래번에게 자매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화를 냈다. 무슨 모욕이라도 당한 듯 얼굴까지 붉혔다. 아마 상대방 못생긴 것은 알았지만 자신이 못생긴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었다. (p.116)

 

"중앙 공원에 있는 조그만 연못 말예요. 오리가 있는...."

"그런데요? 그게 뭐 어떻게 됐답니까?"

"오리가 있잖아요. 그 오리들이 봄에는 거기에서 헤엄을 치며 지내지만 겨울이 되면 어디로 가나 해서요."

"누가 어디로 간다구요?"

"오리 말예요. 누가 트럭 같은 것에 싣고 어디로 데려가는지, 아니면 저희들끼리 어디로 날아가는지 해서요. 남쪽이나 그 비슷한 데로요."

내 말에 호위쯔는 몸을 돌려 보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성질이 급한 것 같았다.

"그런 바보 같은 것을 내가 어찌 안답니까?"

"화내지 마세요."

나는 그가 화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화를 낸다고 그래요? 난 화내는 게 아니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무둑뚝했다. 나는 그와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을 시켰다.

"물고기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처음 있던 곳에 계속 있는단 말이오. 그 연못 속에 사는 물고기도 그래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보며 말했다.

'물고기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오리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다르긴 뭐가 달라요? 다 마찬가지지."

호위쯔가 말했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난 말투였다. (p.128)

 

"만일 학생이 물고기라면 자연이 돌봐 줄 것이오. 겨울이라고 해서 물고기가 다 죽는 것은 아니잖소." (p.130)

 

내가 그곳에 막 들어섰을 때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간 중간 역겨움이 느껴졌다. 고음을 칠 때 잔물결 소리를 넣는 것이 특히 그랬다. 그것이 청중을 얼마나 짜증스럽게 하는지 그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청중들은 연주가 끝나자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정말 구역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습지도 않은 장면에서 하이에나처럼 웃는 얼간이들과 똑같았다.

감히 맹세하겠다. 내가 만일 피아니스트나 배우나 그 비슷한 것이라면 나는 저런 얼간이 같은 인간들이 인정하는 것을 증오하 것이다. 박수를 보내는 것도 마다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박수를 보낸다. 따라서 내가 피아니스트라면 나는 벽장 안에서 연주할 것이다.

어니는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굉장한 피아니스트와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질 사기꾼이었다. 여기에서 사기꾼이란 속물이라는 뜻이다. 

나는 어니가 불상했다. 자신이 어떠한 연주를 했는지도 모르고 우쭐해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니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클럽 지붕이 날아갈 듯 박수를 쳐대는 그런 얼간이들의 잘못이 더 크다. 그런 인간들은 기회만 있으면 멀쩡한 사람을 망쳐 놓는다. (p.131-13)

 

나는 달리 할 일도 업고 해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그날 오후에 보았던 프로 축구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얼간이는 시합 내용을 일일이 다 설명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한심한 인간이 다 있다니! 

여자는 축구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못생겼으니 어쩌겠는가. 다소곳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그때 나는 못생긴 여자는 참으로 고달프겠구나, 생각햇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가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얼간이 같은 인간과 같이 있으니 오죽 불상하겠는가. (p.132-13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옴베르토 에코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

 

나는 그녀의 옷을 옷장 안에 걸어 주었다.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써니가 상점에 들어가 옷을 사는 것을 상상했다. 상점에서는 그녀가 매춘부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저 여느 여자처럼 옷을 사러 왔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p.150)

 

"이봐요, 사실 난 기분이 나지 않아요. 여러 가지 문제로 시달려서 좀 피곤하거든요. .돈은 주겠어요. 그러니까. 상관없겠죠."

정말이지 나는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여자를 보고 흥분되기보다는 우울해졌다. 옷장에 걸려 있는 초록색 옷이라든가 그 밖의 여러 가지가 우울하게 했다. 더구나 하루 종일 영화간에나 앉아 있는 여자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p.151)

 

나는 앨리를 어디든 데려갔다. 다만 그날만 데려가지 않은 것이다. 그때 앨리는 결코 화내지 않았다. 그 애는 어떠한 일에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마다 앨리를 생각하곤 한다. (p.157)

 

사실 나는 무신론자읻. 예수는 좋아하지만 성서 안에 기록된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나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질색할 정도로 싫어한다. 예수가 죽은 뒤에는 그런 대로 괜찮게 처신했으나 살아 있을 때는 그저 예수의 밥이나 축내는 아가리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일은 오직 예수를 판 일뿐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오히려 성서에 나오는 다른 인간들에게는 정이 간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무덤 속에서 살면서 돌로 제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미치광이를 제일 좋아한다. 그 불쌍한 인간이 열두 제자보다 몇십 배나 마음에 든다. (p.15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람의 아들 예수 - 칼릴 지브란 (박지은 옮김, 동서출판사)

.................................................................................................

 

나는 샐리 헤이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멍청해서 그런지 나는 그녀가 꽤 독똑해 보이기는 했다. 샐리 헤이즈는 연극이나 문학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꼭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선입견으로는 작용했다. 따라서 샐리 헤이즈가 똑똑한지 우둔한지 판가름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 특히 여자를 판단하는 데 있어 내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껴안아 본 여자는 일단 똑똑한 여자로 단정한다는 것이었다. 그것과 똑똑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랬다. (p.167-168)

 

샐리와 약속을 한 후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옷을 갈아입고 짐을 꾸렸다. 문득 건너편 건물의 변태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건너다 본 그 방들은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아마 변태들은 아침에는 얌전해지는 모양이었다. (p.169)

 

수녀들은 바로 내 옆에 앉았다. 그들은 가방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나는 얼른 받아 옆에 놓았다. 아주 값싼 가방이었다. 가죽도 가짜였다. 나는 값싼 가방을 아주 싫어한다. 가방뿐 아니라 그런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까지 싫어한다. 돼먹지 않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엘크튼 힐즈에 있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딕 쉬래글이라는 친구와 한방을 썼다. 그런데 그는 아주 싸구려 가방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선반에 올려놓지 않고 침대 밑에 처박아 놓았다. 아마 내 것과 나란히 놓이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는 내 것을 버리든지 그의 것을 버리든지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것은 마크 크로스 사 제품으로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선반에서 가방을 내려 딕 쉬래글과 같이 침대 밑에 가방을 쑤셔 넣었다. 그래야 딕 쉬래글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 다음 날 그가 내 가방을 꺼내 다시 선반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 깨닫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는 내 가방을 제 가방처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이었다. 그는 그렇게 우스운 녀석이었다. 평소 딕 쉬래글은 내 가방에 대해 비난해 왔던 터였다. 너무 새것인데다가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는 부르주아라는 말을 즐겨 썼다.

가방뿐 아니라 내 물건은 모두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고 했다. 심지어 만년필까지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항상 빌려 썼으니 어찌 우습지 않다고 하겠는가.

우리가 함께 지낸 것은 고작 두 달간이었다. 두 달 후 우린 둘 다 방을 옮겨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방을 옮기고 나니 말할 수 없이 섭섭했다. 딕이 워낙 유머 감각이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딕도 나와 헤어지고 서운했을 것이다. 그가 내 물건에 대해 부르주아라고 했던 것도 다 농담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가 아무리 그래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실은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농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처지가 전혀 다른 친구와 한방을 쓴다는 것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상대가 똑똑하고 유머가 있다면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고 넘어가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라도 스트라드레이터와 같이 멍청한 인간하고 같이 지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적어도 내 것 이상으로 좋은 가방을 갖고 있었다. (p.171-173)

 

나는 레코드를 사 가지고 공원으로 갈 셈이었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일요일마다 피비는 롤러 스케이트를 타러 공원에 가곤 한다. 피비가 잘 다니는 곳을 알고 있엇기에 그곳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날은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해가 나지 않아서 신책하기에는 썩 좋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걸을 만은 했다. 특히 어느 가족이 산책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가족은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섯 살쯤 된 여자 아이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 넉넉한 집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고 싶을 때 주로 쓰는 회색이 도는 상아빛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그런데 아이가 아주 재미있었다. 그 아이는 인도가 아니라 차도를 걷고 있었는데, 인도와 차도를 경계 짓는 화강암턱 바로 옆이었다. 그 애는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그곳을 아주 똑바로 걸었다. 걸으면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나는 그 애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라는 노래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맑았다. 그 맑은 목소리로 아이는 노래를 아주 열심히 불렀다. 옆에서 차들이 요란하게 소리내며 지나가도, 브레이크를 마구 밟아도 노래만 불렀다.

아이의 보모는 아이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애 역시 차도를 따라가며 무심히 노래만 불렀다. 그 광경이 나를 아주 편하게 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p.184-185)

 

박물관에는 유리집이 참으로 많았다. 1층보다는 2층에 더 많았다. 어느 유리 집에는 물을 마시는 사슴이 있었고, 어느 집에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있었다. 그런데 인디언이나 에스키모와는 달리 사슴이나 새들은 모두 박제된 것이었다.

새들은 실제로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만일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본다면 아주 서둘러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모든 것이 항상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천 번 만 번을 본다 해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낚아 올리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는 중일 것이다. 또 사슴은 여전히 어여쁜 뿔과 날신한 다리로 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바뀐 것은 오직 관람객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변한다는 뜻이다. 지난번에는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든지 지난번 짝이었던 아이가 감기가 걸려 이번에는 다른 아이와 짝을 이루었다든지 또 에이글팅거 선생 대신 다른 선생이 인솔한다든지 하는 따위 말이다.

같은 아이일지라도 지난번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지독하게 싸우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이번에는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왔다든지, 아무튼 절대로 같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항상 그 무엇인가가 달라지고 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니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설명할 기분이 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p.193-194)

 

다양한 여자들이야말로 진짜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우울한 구경거리였다. 장차 그들에게 닥칠 일을 생각하면 특히 그랬다. 앞으로 저들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면 과연 어떤 일들을 하고 살게 될까.

대부분은 아마 속물 같은 인간들과 결혼할 것이다. 내 차는 휘발유 1갤런으로 몇 마일을 달릴 수 있어, 하는 말 따위나 하는 인간들과, 또 탁구나 골프 시합에서 지면 곧 화를 내는 속 좁은 인간들, 아니면 치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나 책이라곤 아예 들춰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이나 또는 따분한 놈들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196)

 

나는 천천히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때까지 그냥 그곳에 있는지도 궁금했다.

공원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런데 막상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피비에게 줄 레코드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레코드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종이봉투에 넣었는데도 무참히 부서졌다.

나는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그만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부서진 조각들을 봉투에서 꺼내어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울었다. 소용없는 짓인 줄 알았지만 그대로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p.245)

 

마침내 연못을 발견했다. 반은 얼어 있었고 반은 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연못을 빙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약간 불빛이 닿는 의자가 있어 나는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여전히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빨간 사냥 모자를 쓰고 있었음에도 머리에 얼음 덩어리를 이고 있는 듯했다.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 폐렴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그 나이에 죽어 버리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p.246)

 

다음에는 여러 사람이 내 시체를 무덤에 던져 넣고 묘비에 이름을 새기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렇게 되면 내 주위는 온통 죽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아, 내가 죽으면 부디 강물 같은 데 던져 넣기를!

나는 무덤 속에 갇히는 것이 싫다. 땅에 파묻힌다면 사람들이 일요일마다 찾아와 배 위에 꽃다발을 얹어 놓고 그럴 것이 아닌가. 그런 멍청한 짓을 죽어서까지 봐야 하다니, 정말 지겨운 노릇이다. 세상에 죽어서까지 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번들 생각해 보시라.

날씨가 좋으면 어머니와 아버지도 앨리의 무덤에 가서 꽃다발을 얹어 놓았다. 나도 같이 간 적이 있지만 나는 결코 꽃다발 따위는 얹어 놓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런 엉뚱한 곳에서 앨리를 보는 것이 싫었다. 죽은 사람들이니 비석이니 하는 것들에 앨리가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날씨가 좋을 때는 나왔다. 그런데 두 번인가 세 번 비를 만난 적이 있다. 너무 무서웠다. 앨리의 비석에도 비가 내리고 앨리의 무덤에도 비가 내렸다. 아니, 전체 무덤에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자 무덤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차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광경에 나는 울컥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차를 타고 사람들은 라디오를 틀고 어디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했다. 앨리만 빼놓고 말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덤에 있는 것은 앨리의 썩은 시신이고 그 영혼은 천국인가 어디인가에 있다는 시시껄렁한 소리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뿐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앨리가 그곳에 없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애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애를 안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아무튼 무덤은 날씨가 좋을 때는 괜찮다. 그러나 날씨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이다. (p.248-249)

 

하녀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녀는 한쪽 고막이 없어서 무슨 소리도 잘 듣지 못했다. 어릴 적 그녀의 오빠가 귀에다 지푸라기를 집어넣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대신 어머니는 사냥개처럼 귀가 밝았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 방을 지날 때는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걸었다. 숨소리조차 죽였다. 아버지는 벼락이 쳐도 일어날 리 없지만 어머니는 시베리아에서 하는 기침 소리에도 깨어날 것이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담배만 피울 때도 있다.

피비의 방에 도착하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나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피비는 방에 없었다. 형 D. B.의 방에서 잔다는 것을 까많게 잊은 것이었다. D. B.가 헐리우드에 간 뒤로 피비는 항상 그 방에서 잤다. 그 방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방이기 때문이었다. 그 방에는 D. B.가 필라델피아의 한 알콜 중독자로부터 샀다는 커다란 책상과 10마일이나 되는 침대가 있었다. 도대체 D. B.는 어디에서 그 침대를 산 것일까.

어쨌든 피비는 D. B.가 없을 때는 그 방에서 자기로 했고 D. B.도 허락했다. 피비가 그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우스웠다. 한 번 상상해 보라. 거의 침대만한 책상에 조그마한 몸집으로 앉아 있는 피비를. 얼마나 우습겠는가.

피비는 그 책상을 무척 좋아했다. 자기의 것은 너무 작아 싫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무엇이든 잔뜩 늘어놓기를 좋아한다나. 그때 나는 그만 고개를 저으며 웃고 말았다. 도대체 피비가 늘어놓을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p.253-254)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찾아 화장실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내내 거기에 서 있었어. 그 사람은 계속 우리에게 말을 시켰지. 펜시에 다닐 때가 그래도 가장 행복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말야. 또 장래에 대해 충고까지 해 주더군. 정말 따분한 사람이었어.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냐. 하지만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데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없거든. 오히려 착한 사람일수록 더 따분하게 할 수 있지. 아무튼 난 그때 알았아. 사람을 우울하게 하려면 화장실에 세워 놓고 계속 엉터리 같은 충고를 하면 된다고 말야. 아냐, 그 사람이 가쁜 숨만 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따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p.267)

 

"제대로 말을 해야지. 그렇게 하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아들어?"

"그러니까 오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 아니냐고!"

피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다.

"그거 아냐. 왜 그렇게 말하니?"

"사실이니까. 오빤 어느 학교든 다 싫다고 했잖아. 아마 오빠가 싫어하는 건 백만 가지도 넘을 거야. 안 그래?"

"아냐. 네가 잘못 안 게 바로 그거야 .도대체 너 왜 그러니?"

나는 안타깝게 물었다. 빌어먹을, 피비는 계속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내 말이 사실이잖아. 어디 오빠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한 가지만 말해 봐."

"한 가지? 좋아."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막상 대답하려니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 말야?"

나는 어쩔 수 없이 피비에게 되물었다. 피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 저쪽으로 가서 새침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애와 마치 천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대답할게. 그런데 정말 좋아하는 걸 말하는 거니. 아니면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걸 말하라는 거니?"

"정말 좋아하는 거."

"알았어."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런데 여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정신이 산란하여 도무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낡은 짚 바구니에 성금을 모으러 다니는 수녀들이 생각났다. 특히 안경 쓴 수녀가 생각났다.

앨크튼 힐즈에서 알게 된 친구도 생각났다. 제임스 캐슬이라는 친구였는데, 그는 필 스태빌이라는 아주 거만한 녀석에 대해 자신이 한 말을 끝가지 취소하지 않았다. 건방진 자식이라고 한 말을. 그런데 스태빌의 친구 하나가 가서 고자질을 했다. 그래서 스태빌은 여러 명을 이끌고 그의 방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스태빌은 문을 잠그고 제임스 캐슬이게 그 말을 취소하라고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결코 취소하지 않았다. 스태빌이 친구들과 함께 때려도 취소하지 않았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말하기 싫다, 너무 진저리쳐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임스 캐슬은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않은 채 창문으로 뛰어 내렸다. 그때 나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쿵, 하고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에 나는 라디오나 책상 같은 것이 떨어진 줄 알았다. 설마 사람이 떨어졌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생략)

그런데 학교에서 그들에게 취한 조치는 고작 퇴학이었다. 교도소로 보내야 할 놈들을 겨우 퇴학이라니.

아무튼 내가 생각해 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아침 식사 때 만난 수녀들과 제임스 캐슬이라니, 웃기는 일 아닌가. (p.268- 271)

 

피비는 다시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오빤 한 가지도 생각하지 못하잖아!"

"아냐, 할 수 있어."

"그럼 해 봐."

"난 앨리가 좋아."

나는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좋아. 너랑 얘기하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리고...."

"앨리 오빤 죽었어.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건 실제로..."

"앨리가 죽은 건 나도 알아. 그래도 좋아할 순 있잖아. 죽었다고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어.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 그래."

나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 같은 상황을 좋아해. 너하고 이렇게 앉아 있는..."

"그건 실제가 아냐."

"아냐, 실제야. 분명히 실제야. 사람들은 실제를 실제로 여기지 않는데, 난 그게 구역질 나. 빌어먹을!"

"또 상스런 말 쓴다."

피비가 질색을 했다.

"그럼 이젠 오빠가 되고 싶은 거 말해 봐. 과학자라든가 변호사 같은 거 말야."

"과학자는 될 수 없을 거야. 과학하곤 담을 쌓았으니까."

"그럼 변호사는 어때? 아빠처럼."

"변호사라면 괜찮지. 하지만 별로 끌리진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변호사가 꼭 죄 없는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ㄱ너야. 그런 일보다는 돈을 모은다든지 골프를 친다든지 브릿지 놀이를 한다든지 차를 산다든지 마티니를 마신다든지 명사인 체한다든지 그런 짓을 더 많이 한다는 거지. 더구나 사람을 구해 주고 싶어 변호사가 된 게 아니라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됐다면 좀 더 문제겠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면 신문기자나 여러 사람에게 유치한 영화에서처럼 칭송을 받는 그런 변호사가 되겠다는 야망 말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기가 엉터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니?"

나는 내 말을 피비가 알아듣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피비는 심각한 표정을 듣고 있었다.

"아빤 오빠를 죽이고 말 거야."

피비는 다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미처 못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어빠진 놈이었다.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나는 내가 다른 곳을 보며 실없이 물었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말야..."

"뭐가 되고 싶은데?"

"너 그 노래 알지?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잡는다면' 하는 노래 말야."

"틀렸어.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야."

피비가 정정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즈가 쓴 시 말야."

"알아."

그러나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잡는다면' 이 아니라 '만난다면' 이겟구나 아무튼 난 그 노랠 들으면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어린아이들이 노는 것이 떠올라.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고 어른은 아무도 없는 거지. 그러니까 어린아이들과 나만 있는 그런 풍경. 그런데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어린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야. 어린아이들은 놀다 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그럴 때 내가 있다가 얼른 붙잡아 주는 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그러니까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인 셈이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그런 거야.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인 줄은 알아."

나는 꿈을 꾸듯 말했다.

피비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다시,

"아빤 오빨 죽일 거야."

하고 되는 것이다.

"죽여도 좋아."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엘크튼 힐즈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앤톨리니 선생은 뉴욕에 살고 있었다. 엘크튼 힐즈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뉴욕 대학의 영어 교수로 와 있었던 것이다.

"전화 좀 걸고 올게." (p.272-275)

<참고>

Comin' Through the Rye -  Robert Burns

 

O, Jenny's a' weet, poor body,
Jenny's seldom dry:
She draigl't a' her petticoatie,
Comin thro' the rye!

Chorus:
Comin thro' the rye, poor body,
Comin thro' the rye,
She draigl't a' her petticoatie,
Comin thro' the rye!

Gin a body meet a body
Comin thro' the rye,
Gin a body kiss a body,
Need a body cry?

(chorus)

Gin a body meet a body
Comin thro' the glen,
Gin a body kiss a body,
Need the warl' ken?

(chorus)

Gin a body meet a body
Comin thro' the grain;
Gin a body kiss a body,
The thing's a body's ain.

(chorus)

Ev'ry Lassie has her laddie,
Nane, they say, have I,
Yet all the lads they smile on me,
When comin' thro' the rye.

...............................................................................

 

"아마 네 교장 선생한테서 편지가 온 모양이더라. 네가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는 그런 내용 말이다. 수업은 빼 먹기 일쑤고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대체로 그런 내용인가 보더라."

"전 수업을 빼 먹지 않았어요. 출결 사항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니까요. 가끔 연설법 수업에는 빠진 적이 있지만요. 그렇지만 다른 수업은 절대 빼 먹지 않았어요."

사실 그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마셔도 머리가 여전히 아팠기 때문이었다. 앤톨리니 선생은 담배에 불을 댕겼다. 그리곤 아주 길게 들이마셨다.

"홀든, 솔직히 말해서 할 말이 없구나. 네게 뭐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그러실 거예요. 저도 제가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대란 건 알아요."

"내 생각으로는 네가 지금 인간에 대해 몹시 갈등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어떤 식의 갈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홀든, 내 말 잘 듣고 있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나가다간 혹시 이렇게 될지 모르겠다. 서른 살쯤 되어서 말이다. 어느 바에 앉아 있으면서 대학시절에 축구를 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증오의 눈길을 보내는 그런 인간 말이다. 아니면 '이건 그 사람과 나만의 비밀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그런 인간이나, 아니면 또 회사에 근무하면서 옆에 앉은 속기사에게 서류나 집어던지는 그런 인간이다.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내가 말하는 취지는 알겠지?"

"네,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는 앤톨리니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제가 사람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오해예요. 제가 많은 사람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대부분 순간이에요. 이를 테면 펜시에서 스트라드레이터라는 놈이나 로버트 애클리 같은 놈을 잠깐 싫어한 거 같은 거예요. 하지만 대부분 전 금방 잊어요. 한동안 만나지 않으면 오히려 그리워할 정도라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이 내 방에 오지 않거나 식당에서 두세 번 못 마주치거나 그러면 섭섭하기까지 하다구요."

나는 그만 자고 싶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날 아침에 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앤톨리니 선생은 이미 나와의 대화에 흥이 나 있었다. 앤톨리니 선생은 원래 상대가 시큰둥 할수록 더욱 열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들어 봐라. 네가 공감할 만한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들어 봐라. 하루 이틀 안으로 네게 다시 편지를 보내겠지만 일단은 들어 봐라."

앤톨리니 선생은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난 지금 네가 아주 특수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경험은 아주 무서운 경험 같구나. 대부분의 갈등에는 그 끝이 있지만 네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 그러니까 무서운 거지. 이 세상에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같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생각해 봐도 아무래도 못 찾을 거 같으니 그냥 단념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는 찾으려고 노력도 해 보지 않고 말이다. 내 말 알겠니?"

"네."

"정말?"

"정말입니다."

앤톨리니 선생은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널 나무라고 싶지 않다."

얼마 만에 앤톨리니 선생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넌 아무 가치도 없는 일에 목숨을 내놓으려 하는 게 분명해. 내가 뭘 좀 써 줄 테니 읽어 보겠니? 그리곤 항상 잊지 않고 지낼 수 있겠니?"

"물론이죠.'"

나는 분명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때 앤톨리니 선생이 준 글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앤톨리니 선생은 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그대로 서서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이건 시인의 글이 아니라 뷜레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하자가의 말이다. 듣고 있니?"

"네, 듣고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명하지 못한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바치고자 하나 현명한 인간은 겸허한 삶을 살고자 한다.'" (p.295-297)

 

"머잖아 네가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텐데." (p.298)

 

"그래, 빈슨 선생이었지. 아무튼 그 빈슨 선생과 그와 비슷한 선생들 과목에서 네가 학점을 딴다면 넌 훨씬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을 거야. 물론 거기에는 네 스스로 그것을 바라고 기대하고 기다린다는 조건이 따르지만 말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염증을 느낀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점에서 넌 혼자가 아냐. 사실 네가 겪고 있는 고통은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겪은 거야. 그 중 몇몇 사람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지. 한번 사서 읽어 봐라. 아마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런 다음 너도 남에게 뭔가 줄 게 있다고 생각되면 네가 그들에게 배운 것을 다른 사람이 네게서 배우게 하는 거지. 그야말로 상부상조 아니겠니? 그런데 이건 교육이 아니라는 거야. 역사이고 시지."

앤톨리니 샌생은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말하는 데 이미 열이 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말을 가로채지 않는 것을 아주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는 건 아냐. 내가 말하는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의력까지 겸비했다면,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물지만, 단지 재능과 창의력만 있는 사람에 비해 훨씬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사람은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더 겸손하다는 거야. 알겠니. 내 말?"

(p.298-29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쇼펜하우어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

 

그때 저쪽에서 피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피비를 맞으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비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5번가를 횡단하여 오고 있었는데 여행용 가방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오는 것이었다. 가가이 가 보니 그것은 내 낡은 여행용 가방이었다. 후튼에 다닐 때 쓰던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피비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피비!"

나는 피비에게 뒤어가며 소리쳤다. 피비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 오는 줄 알고 있었어."

내가 가방을 보며 말했다.

"가방 속에 뭐가 들은 거니? 난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역에 맡겨둔 가방도 안 가져 갈 거야."

"이건 내 옷이야."

피비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오빠랑 같이 갈 거야. 괜찮지?"

"뭐?"

나는 기절할 뻔했다. 안 그래도 조금 어지러웠는데 피비가 너무 충격을 준 것이었다. 나는 내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찰린한테 들키지 않게 뒤쪽 엘리베이티로 내려왔어. 무겁지 않아. 겨우 드레스 두 벌과 모커신과 양말 정도야. 들어 봐. 정말 하나도 무겁지 않아. 같이 가도 되지?"

"닥쳐!"

그때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피비에게 그런 말을 하디나! 스스로 말해 놓고도 나는 정신이 멍했다.

"왜 안 돼? 부탁이야, 오빠. 성가시게 안 할 테니 따라 가게만 해 줘. 옷도 가져가지 말라면 안 가져갈게. 난 그냥..."

"닥쳐! 절대로 안 돼!"

"부탁이야, 오빠. 난 꼭 가야 돼. 난 조금도 오빠한테..."

"안 돼! 제발 가만 좀 있어. 그 가방은 이리 내놔."

나는 피비에게 가방을 뺏다시피 했다. 안 그랬으면 한대 갈기기라도 했을 것이다. 피비가 울기 시작했다. (p.323-324)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년 1월 1일 ~ 2010년 1월 27일)

미국의 작가이고 예비역 미국 육군 하사이다.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맨해튼에서 자란 그는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하였다. 몇몇 단편들은 그가 아직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이었던 1940년 초에 출판되기도 하였다. 1936년에 뉴욕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중퇴하였다. 1939년에 컬럼비아 대학교 창작문학 과정에 입학하여 휘트 버넷(Whit Burnett)이 가르치는 야간 수업을 수강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중퇴 직후 미국 육군 군대에 징병되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2차 대전이 종전되는 것을 목도하였으며 2년 후 1947년 봄에 미국 육군 하사 예편하였다.
그는 1948년 《뉴요커》에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출판한다. 그의 후속 작품의 발상지가 된 이 단편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 후 계속하여 장·단편 소설 수십 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1951년에 발표한 첫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이 곧바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청춘기의 소외감과 순수함의 손실에 대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서술은 특히 청춘기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이 소설은 한 해 약 250,000부가 판매되는 등 매우 널리 읽히게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대중의 큰 관심과 감시 속에 그는 은둔적으로 변하고 새 작품을 출판하는 것도 드물어지게 된다. 1965년 이후로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1980년 이후로는 인터뷰도 가지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 다음으로 그가 발표한 작품으로는 세 단편집 《아홉가지 이야기》(1953), 《프래니와 주이》(1961),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1963)가 있다. 그의 가장 최근 출판된 작품은 1965년 《뉴요커》에 실린 중편소설 《Hapworth 16, 1924》이다.
2010년 1월 27일, 뉴햄프셔주 코니시에 있는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정영목 옮김, 민음사)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김욱동, 염경숙 옮김, 범우사)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윤용성 옮김, 문학사상)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가형 옮김, 동서월드북)

호밀밭의 파수꾼 - 재롬 데이비드 샐린저 (조용남 옮김, 하서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