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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모반 - 오상원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25.

큰 한국문학 413 (60)

 

목차

 

송병수

쑈리 킴

저 거대한 포옹 속에

 

오상원

유예

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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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 - 모반 (1957년)

 

4279년 늦가을, 해방 만 일 년의 환희가 혼돈된 갈등 속에 기울어져 가던 어느 날 저녁, 커다란 벽보가 신문사 게시판마다 나붙고, 가는 곳마다 커다랗게 쓴 먹글씨 위에 수없이 줄을 긋고 내려 간 붉은 잉크의 무질서한 자국이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벽보를 급히 읽어 내려가는 의문에 가득 찬 시민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리고 불안한 듯 서로 말없이 얼굴들만 마주 보고 있었다. 호외! 호회! 네모진 종잇장은 특호 활자를 싣고 가두에서 가두로 쏜살같이 퍼져 가고 있었다. (p.108)

 

"아까운 인물이 또 하나 죽었군!"

잠시 그들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긴장감이 그들의 얼굴을 가로 덮고 있었다.

"누가 쏘았을까?"

"물론 적대방이겠지. 알 수 있어. 결국 그자들일 거야."

그러나 잠잠히 생각에 잠겨 가던 눈이 가느다란 친구는 곧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드시 적대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거야. 암살이란 반드시 정적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가장 긴밀히 손잡았던 쪽일지도 모르지. 조건도 유리하거든. 자기네가 죽이고 나서도 표면적으로는 최대의 애도를 표시하고 나오는 거니까. 결국 민중만이 속는 거지.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것이거든." (p.113)

 

해방과 더불어 난립하는 정당, 무질서한 사상의 혼돈된 갈등 속에 청년들의 정치 의식은 더욱 강렬히 자극되고 범람하는 정쟁의 전위로 청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 들어갔다. 누구나가 조국을 위해서였다. 중학을 마치고 조그만 회사에 꾸준히 일하고 있던 그는 중학 동창인 세모진 얼굴에 여러 번 자극되어 비밀 결사에 가담하였다. 비애국자들에 의하여 조국은 늘 굴욕과타락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비애국자를 색출하여 사전에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이 비밀 결사의 목적이었다. 조국을 위해서다. 죽여야 할 자는 마땅히 조국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죽여야 하는 것이다. (p.123-124)

 

"너도 나를 배반자라고 생각하고 있니?"

민은 아무런 표시도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꿰둟듯이 노려보던 청년의 시선 속에 한 줄 그늘이 다시 스쳤다.

"나는 다만 반대 정당 친구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눴을 뿐이야. 물론 그들과의 접촉은 빈번했어. 그러나 그것은 '나'를 더 명확히 알고 싶어서였어. 내가 그들에게 기밀을 팔았다고? 제기랄!"

청년의 시선은 점점 저주스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핏물에 젖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정치 강령은 그야말로 근사했어. 그래 들어왔거든. 나만이 아닐 거야. 누구나 다 그럴 거야. 결국 우리 이십대가 너무도 정치 의식이 박약했던 때문이야. 정치적 훈련이 없었던 탓이거든. 조국, 조국 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조국이 무엇인지를 기실은 모르고 있어. 즉 맹목적인 정열뿐이지.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정치가들이거든. 나는 처음에는 몰랐어. 하지만 내 의지에 혼돈이 일어나기 시작했단 말이야. 우리만이 아니거든. 어느 정당 단체를 막론하고 그 강령은 다 멋진 바 있어. 내가 반대당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하게 된 게 뭔지 알어?"

청년은 피거품을 입가에 가득히 문 채 정치적 거물들의 이름을 죽 나열하였다.

"자, 봐요. 그들은 과거에 모두 애국자였어. 그러나 지금부터의 애국자는 그들 중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는거야. 과연 지금부터의 애국자가 그들 중의 누구라고 할 수 있겠어? 우리들이 그야말로 생명을 내걸고 따를 수 있는...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그 공적, 즉 과거에 애국자였다는 이름을 내걸고 지금 그들은 각자 자기 밑에 누구보다도 많은 당원을 흡수하여 자기 정권을 수립하려는 판국이거든. 그러나 우리 청년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정게에 투신한 건 아니야. 그야말로 우리들 손에 돌아온 조국을 순수한 입장에서 확립해 보자는 거였지. 그러나 그들은 그야말로 정권욕뿐이야. 하루해가 지기 무섭다고 무질서하게 난립하는 정당들의 동태를 보란 말이야. 그 속에서 우리들은 휩쓸려 들어가서 조종되고 있거든.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조국에 대한 순결한 정열이 더럽혀져 가고 있단 말이야. 청년 단체들의 충돌과 그 빈발하는 유혈극을 봐도 알 수 있는 거거든. 그 미묘한 배후와 배후에 얽히면서 충돌하는...."

그는 한입 물었던 피거품을 뱉었다. 그리고 핏덩어리 같은 것을 줄줄 흘리면서 그래도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처음 집에서부터 나를 고이 유인해 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어. 나는 이상 더 내 정열을 헛되게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나와 같은 동세대의 친구들과, 그것뿐이야.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오해했어!" (p.135-137)

 

"잘 들어 둬. 나는 평범한 인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해 보고 싶어졌단 말이다. 위대(?)한 하나의 일의 성공보다는 나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라도 더 소중스러워졌단 말이다."

"너는 아직 역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군."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러한 희생을 강요하는 역사를 요구치 않아."

"그럼 너는 의의라는 것을 부인한단 말이냐?"

"인간의 의의를 묻고 살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묻지 않고 살기를 원해."

"변절이야?"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아. 나는 돌아가겠어."

"어디로?"

"집으로."

"집?"

세모진 얼굴에 경멸적인 조소가 어두운 그늘을 깔며 스쳐 갔다.

"자수할 생각이냐?"

"그러첨 어리석진 않아." (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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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吳尙源 1930-1985)

대한민국 소설가

평안북도 선천 출생. 1949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53년 극협의 작품공모에 응모한 장막극 「녹쓰는 파편(破片)」이 당선되었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예(猶豫)」가 당선됨으로써 작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같은 해 「균열」이 『문학예술(文學藝術)』 8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단편 「난영(亂影)」(문학예술, 1959.9.)과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된 「모반(謀反)」, 장편 「백지의 기록」(사상계, 1957.5.∼12.), 그리고 중편 「황선지대(黃線地帶)」(사상계, 1960.4.)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피리어드」(지성, 1958) · 「내일쯤은」(사상계, 1958.7.) · 「부동기(浮動期)」(사상계, 1958.12.) · 「보수(報酬)」(사상계, 1959.5.) · 「표정(表情)」(사상계, 1959.8.) · 「현실(現實)」(사상계, 1959.12.) 등이 있다. 미완성의 장편으로는 「무명기(無明記)」(1961.8.∼11.)가 있다.
그 밖에 「훈장(勳章)」(세대, 1964.1.) · 「암류(暗流)」(세대, 1964.9.) · 「거리(距離)」(사상계, 1964.9.) · 「담배」(사상계, 1965.2.)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앙드레 말로와 행동주의문학」(문예, 1960.6.)이 있다.


문학적 특징은 6 · 25 전후 세태의 사회적 · 도덕적 문제를 다루어 전후 세대의 정신적 좌절을 행동주의적 안목으로 주제화한 데 있다. 잘 알려진 단편 「모반」은 광복 직후 사회적 ·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서, 정당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여 청년 당원들 사이에 자행된 테러를 주요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민이 “위대한 하나의 일의 성공보다는 나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라도 더 소중스러워졌단 말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주인공의 인간주의적 각성이 주제임을 알게 된다.


프랑스 행동주의문학과 실존주의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한국의 전후 세대의 풍토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을 이루어 1950년대의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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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 오상원 (문학과지성사)

유예 - 오상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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