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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요한 시집 - 장용학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23.

삼성 주니어 문학 23

 

목차

 

장용학

요한시집

 

손창섭

비 오는 날

잉여 인간

 

오상원

유예

 

선우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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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학 - 요한 시집 (1955년)

 

한 옛날 깊고 깊은 산속에 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토끼 한 마리 살고 있는 그곳은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이었습니다. 토끼는 그 벽이 흰 대리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갈 구멍이라곤 없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게 땅속 깊이에 쿡 박혀든 그 속으로 바위들이 어떻게 그리 묘하게 엇갈렸는지 용히 한 줄로 틈이 뚫어져 거기로 흘러드는 가느다란 햇살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방 안에다 찬란한 스펙트럼의 여울을 쳐 놓았던 것입니다. 도무지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일곱 가지의 고운 무지개 색밖에 거기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그가 그 일곱 가지의 고운 빛이, 실은 천장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창문 같은 데로 흘러든 것이라는 것을 겨우 깨닫기는, 자기도 모르게 어딘지 몸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으면서 그저 까닭 모르게 무엇이 그립고 아쉬워만지는 시절에 들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깊은 땅속에도 사춘기는 찾아온 것이었고, 밖으로 향했던 그의 마음이 내면으로 돌이켜진 것입니다.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운 빛을 흘러들게 하는 저 바깥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개안이라고 할까, 혁명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렇게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던 그 돌집이 그로부터 갑자기 보잘것없는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올빼미가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바깥 세계로 나갈 구멍은 역시 없었습니다. 두드려도 보고 울면서 몸을 떼밀어도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는 돌바위였습니다. 차디찬 감옥의 벽이었습니다. 갇혀 있는 자기의 위치를 깨달아야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던가? (P.10-11)

 

해는 지붕 위에 있었다.

서산에 기울어 버린 햇발이었지만 이렇게 지붕 위로 보니, 내려앉으려던 황혼은 뒤로 밀려가고 하늘이 도로 밝아 오르는 것같다. 곳에 따라 시간이 이렇게도 느껴지고 저렇게도 느껴진다. 어느 시간이 정말 시간인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위치가 빚어내는 시간. 이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빈 터. 그것이 얼마만 한 출혈을 강요하든, 우리는 이러한 빈 터에서 놀 때 자유를 느낀다. 우리에게 두 개의 시간을 품게 한 이러한 빈 터가 결국은 '나'를 두 개의 나로 쪼개 버린 실마리였는지도 모른다.

공간 속을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인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공간이 분비되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붕 위에 앉게 된 해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 관계 위에 현재의 질서는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이 가령 그 벽을 뚫고 저쪽으로 뛰어 나가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시선이 그리고 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에서 반사된 광파가 망막에 비쳐 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진대, 마치 음속보다 빠른 비행기를 타면 사라진 소리를 쫓아가서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빛보다 더 빠른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면서 지상을 돌아다보면 우리는 거기에 과거를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비행기는 자꾸 날아오른다. 지상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과거 쪽으로 흘러가는 사건의 흐름이 보인다.

거기서는 밥이 쌀이 된다. 입에서 나온 밥이 숟가락엣 그릇으로 내려앉고, 그릇에서 솥으로, 그 솥이 끓어올랐다가 아주 식어진 다음 뚜껑을 열어 보면 물속에 가라앉은 쌀이다. 뚝배기에 옮겨져 헤엄치고 나오면 겨가 붙어서 가게에 있는 쌀처럼 된다. 싸전에서 정미소로 가서 껍질을 붙이고 밭으로 간다. 여럿이 모여서 벼 이삭에 달린다. 이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면 그들은 땅속 한 알의 씨가 된다....

이렇게 보면 거기에도 하나의 생성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역사가 생겨진다.

'어느 생성이 여물어 가는 열매인가? 쌀이 밥이 되는 변화와 밥이 쌀이 되는 변화...

어느 세계가 생산의 땅인가? 밤이 낮이 되는 박명과 낮이 밤이 되는 박명과..

어느 역사가 창조의 길이고, 어느 역사가 멸망의 길인가?

어떻게 되는 것이 창조이고, 어떻게 되는 것이 멸망인가?

어느 쪽으로 흐르는 시간이 과거이고, 어느 쪽으로 흐르는 시간이 미래인가?...'

망상에 사로잡혔던 내 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다. 쳐다보니 동체가 두 개인 수송기가 초여름의 저녁 하늘을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엉겁결에 그늘을 찾으려 했던 나는 그러나 경련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좀 울렁울렁해졌을 뿐이었다. 폭격에 놀랐던 가슴도 그동안 거의 그 건강을 회복한 것 같다.

하꼬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며칠 걸려 겨우 찾아낸 집이었지만 아까부터 주인을 찾는 것이 무서워졌었다. 귀찮았다. 발을 들어 조금 떼밀어도 말없이 쓰러질 것 같은 이따위 집에도 주인이 있어야 하기도 했다. 주인마저 없다면 벌써 언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저 성관 같은 큰 집에도 주인은 한 사람이라는 것은 좀 이해가 곤란하다. 우리는 무슨 숨바꼭질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올라오는 길에, 한 노인이 문간에 앉아, 쌀, 보리, 콩 같은 것이 뒤섞여 한 알 한 알 골라내고 있었다. 그 황혼 5분 전의 작업을 캔버스에 옮겨 놓는다면 그 제명은 '백발이 원색을 골라내다.'라고 하면 좋겠다. 지금 르네상스의 후예들이 자기들이 칠하고 칠한 근대화의 도료를 긁어 벗기는 데에 여념이 없다. 원색을 골라내는 연금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상의 발견'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지 않은가.

저 아래 거리에서 '내일 아침 신문'을 팔지 못해하는 어린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이 낭비의 20세기를 까마귀는 저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저렇게 황혼을 울고 있나 보다.

까악 까악.

나는 하꼬방을 두고 여남은 걸음이 되는 그리로 올라갔다. 돌을 주워 들었다. 까악, 까마귀는 그다지 대단해하지 않아 하면서도, 푸드덕 하늘로 날아오른다. 손에 들었던 돌을 버리려고 하다 말고 까마귀가 앉아 있었던 가지를 향하혀 힘껏 던졌다. 그래서 까마귀가 아주 산 너머로 날아가 버린 그 고목 아래에서 가서 내가 낮아 보았다.

수평선은 늘 저쪽이 그리워지는 무의 변주가 있었다.

그 저쪽에 뭐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와 같이 언덕이 질펀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겠는가. 거기서는 또 누가 이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인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무슨 시늉인가.....

그런 숨바꼭질하기에는 해가 다 저물ㄹ었다. 수평선을 들어서 옆으로 치우고 탁 트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담을 쌓아서 막아 버려야 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질펀한 것만이 태연해질 수 있는 오늘 저녁이 아닌가. 내일 아침이 올지 말지 하더라도 끝난 오늘은 끝난 오늘로써 아주 결딴을 내 버려야 한다. 우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여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진리를 버려야 한다. 그런 제스처 때문에 이 공기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계량해 낸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시시해질 것이다. (p.17-22)

 

나는 나의 일부분을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나는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p.24)

 

진실은 사실을 가지고 고칠 수 있지만, 사실은 천 개의 진실을 가지고도 하나 고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였다. 세계는 그렇게 바윗돌 같으면서 달걀처럼 취약하다. (p.25)

 

이마에 땀이 배었다. 손을 놓았다. 달걀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은 내가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깨어지는 날에는 내가 서 있는 이 세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야합한 것이다.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누가 벌써 내통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통 위에, 달걀은 그저 쥐기만으로는 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있는 모든 힘을 내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못 내게 되어 있다. 공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말' 속에 살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만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것은 '말'뿐이었다. 인간은 그 입에 지나지 않았다. 입으로서의 운동, 이것이 인간 행위의 전체였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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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 장 폴 샤르트르 (이희영 옮김,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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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용군이 아니고 이북에서부터 쳐내려 온 괴로군이었다. 그런데 수용소가 어수선해졌을 때에도 적기가는 부르려 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감시병들의 눈으로 볼 때, 수용소는 그저 까마귀의 떼들이 욱실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저류에는 방향을 잃은 충동이 밤이고 낮이고 굼틀거리고 있었다. 몇 세기 동안 자기의 전쟁을 가져 보지 못한 이 겨레였다. 근대적 의식이라고는 사벨과 지카다비 밖에 모르던 이 땅이 '민주 보루'니 '두 개의 세계'니 '만국 평화 어필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리얼리즘이 네이팜 탄의 세례와 함께 쏟아져 들어왔을 때, 농부의 옷을 채 벗지 못했던 그 시골내기들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어안이 벙벙해했다. 언제 도회인으로 출세한 것 같기도 하고 꼭두각시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최면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저 멋도 모르고, 나팔 소리에 죽어라 하고 뛰었다. 한참 뛰다가 우뚝 발을 멈추고 보니 주위는 쑥밭이었다. 내 집, 내 학교, 내 공장이 성냥갑을 철퇴로 두드려 부순 것 같은 폐허였다. 개화당 이래 조금씩 쌓아 올린 축적이 죄다 무너져 버렸었다. 알몸만 남았다. 세계의 거지가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좀도둑이 감옥소살이를 하는 사이에 소도둑이 되어 가는 투로, 포로 생활을 하는 사이에 뼈마디가 굵어져서 '제네바 협정'이니 '인도적 대우'니 하고 도사릴 줄 알게 되었다.

'내 살이 뜯겨 나가고 내 피가 흘러내린 이 전쟁이 과연 내 전쟁이었던가?'

한편에서 세계의 고아가 된 포로병들의 가슴속을 이렇게 거래하던 회의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다가 마침내 생에 대한 애착에 부딪혔다. 한 개의 나사못으로밖에 취급을 받지 못했던 자기의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 살아야 하겠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죽이기 시작했다. 싸움은 다시 일어났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 것 같았다. 남해의 고도에는 붉은 기와 푸른 기가 다시 바닷바람에 맞서서 휘날리게 되었다. 살기 위하여 그들은 두 깃발 밑에 갈려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쳤다. 철조망 안에서의 이 두 번째 전쟁은 완전히 자기의 전쟁이었다. 순전히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의 전쟁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존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법은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리 악하고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적이라 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독하고 악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이름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마지막 신앙이다! 죽음에는 생의 전 중량이 걸려 있다. 그의 죄는 그 생보다 더 클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이란 끝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간지러움도 아픔도, 피도 땀도, 선도 악도, 지상의 모든 약속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다. 마지막 위로요 안식이요, 마지막 용서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시체에서 팔다리를 뜯어내고 눈을 뽑고, 귀와 코를 도려냈다. 아니면 바위를 쳐서 으깨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서 변소에 갖다 처넣었다. 사상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름으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생이 장난감인 줄 안다. 인간을 배추벌레인 줄 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도리가 없었다. '인간 밖'에서 일어나는 한 에피소드로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기 가운데서 누헤는 여전히 하늘을 먹고살고 있었다. (p.44-47)

 

'타락한!', '반역자!', '인민의 적!' 이런 고함 소리가 쏟아지면서 몽둥이가 연달아 그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소 같은 줄 몰랐다. 말뚝처럼 서 있다. 몽둥이가 머리에 떨어졌다. 그제는 비틀거리면서 쓰러진다. 거기에 있는 발길이 모두 한 두 번씩 걷어찬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 가 보니 그의 눈은 하늘에  떠 있었다. 눈물이 가늘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러보니 여름날의 구름이 본토로 본토로 희게 떠가고 있다. 

나도 그의 곁에 누워 푸른 하늘로 눈을 떴다. 지상의 검은 그림자는 티 한 점 비치지 않은 거울같이 평화로운 하늘...

"저기다 곡식을 심어 봤으면 좋겠네..."

그를 위로하느라고 이렇게 말해 봤다.

"산두 없구 저렇게 너른데 그래도 풍년이 안 들까? 평화 시대가 안 올까..."

"곡식이 나면 사람은 저기에두 말뚝을 박는다."

"그럴까...." (p.48-49)

 

그 반역자의 시체에는 즉시 복수가 가해졌다. 그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복수를 받아야 할 까닭은, 그가 인민의 영웅이었다는 것과 그가 죽기 전에는 감히 그에게 더는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 이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더러 장난도 아니겠는데 그의 눈알을 손바닥에 들고 해가 동쪽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까지 서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엄살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누혜의 눈이 아닌가.

멀리 철조망 밖에서는 감시병이 휘파람을 불며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데, 나는 누헤의 눈알을 들고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눈알과 저 휘파람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인가. 무슨 오산을 본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슨 오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 휘파람이 그리워해야 할 것은 태평양 건너 켄터키의 나의 옛집이 아니라 이 눈알이었어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가 어째서 죽음의 장소로 철조망을 택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유서를 읽어 볼 때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내 눈에 보인 것은 내가 눈알을 손바닥에 들고 서 있어야 했던 안 세계와 감시병이 향수를 노래하고 있었던 밖 세계, 이 두 개의 세계뿐이었다. 세계를 둘로 갈라놓은, 따라서 두 개의 세계를 이어 놓고도 있는 철조망은 눈망울에 비쳐는 들었건만 보이지 못했었다. 그 철조망에 어느 날 새벽, 한 시체가 걸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의 돌파구가 거기에 트여짐이다. (p.52-53)

 

2차 대전이 끝났다.

나는 인민의 벗이 됨으로써 재생하려고 했다. 당에 들어갔다. 당에 들어가 보니 인민은 거기에 없고, 인민의 적을 죽임으로써 인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들어 내는' 것과 '죽이는 것' 것. 이어지지 않는 이 간극. 그것은 생의 괴리이기도 하였다. 생은 의식했을 때 꺼져 버렸다. 우리는 그 재를 삶이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데를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다른 데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식에만 선이 있다는 양식, 이 심연. 그것은 '10초간'의 간극이었고, 자유의 길을 막고 있는 벽이었다.

그 종을 뚫어 보기 위하여 나는 내 육체를 전쟁에 던졌다. 포로가 되었다. 외로웠다. 저 복도에서처럼 나는 외로웠다. 직원실로 내다보는 안경도 거기에는 없었다. 그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나는 생활의 새 양식을 찾아냈다. 

노예. 새로운 자유인을 나는 노예에서 보았다. 차라리 노예인 것이 자유스러웠다. 부자유를 자유의사로 받아들이는 이 제삼 노예가 현대의 영웅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 인식은 내 호흡과 꼭 맞았다. 오래간만에 생각해 보니 나의 이름이 지어진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나의 숨을 쉬었고, 나의 육체는 그 자유의 숨결 속에서 기지개를 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의 기만이었다. 흥분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역사는 흥분과 냉각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지동설에 흥분하고, 바스티유의 감옥에 흥분하고, '적자생존'에 흥분하고, '붉은 광장'에 흥분하고....늘 그때마다 환멸을 느끼고 했던 것이다.

그 노예도 자유인이 아니라 자유의 노예였다. 자유가 있는 한 인간은 노예여야 했다! 자유도 하나의 숫자, 구속이었고, 강제였다.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ㄷ이었다. '뒤'의 것이었다.

신, 영원....자유에서 빚어져 생긴 이러한 '뒤에 서 온 설명'을 가지고 '앞으로 올 생'을 잰다는 것은 하나의 도살이요, 모독이다. 생은 설명이 아니라 권리였다! 미신이 아니라 의욕이었다! 생을 살리는 오직 하나의 길은 자유가 죽는 데에 있다.

'자유,' 그것은 진실로 그 뒤에 올 그 무슨 '진자'를 위하여 길을 외치는 예언자, 그 신발끈을 매어 주고, 칼을 맞아 길가에 쓰러질 '요한'에 지나지 않았다! (p.58-6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생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전혜린 옮김,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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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범죄이다. 그 총목록이 세계이고, 세계는 범죄의 소산이고, 인생은 그 범죄자였다.

산다는 것은 죄짓는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여기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을 떼밀어 버리고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그들에게 밀려나갈지 모른다. 순간순간, 무수의 가능성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 앞에 떨고 있는 전율인 것이다. 이 전율을, 잠자고 있는 세계에서는, '자유'라고 한다. 그대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p.6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물과 공간 - 에드문트 후설 (김태희 옮김,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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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이 작품은 1955년 7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전쟁 포로 누혜가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기까지의 생애를 그린 이 작품은 사건보다는 등장인물의 의식 추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현대에 있어서의 '자우'의 의미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동굴 속에 갇힌 한 마리의 토끼가 빛을 찾아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 홍두깨같이 찌르는 빛의 충격에 눈이 멀어 버린다는 우회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토끼가 살고 있는 '굴'은 밝음과 어두움, 꿈과 현실, 열림과 갇힘을 연결해 주는 통로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 속에 살고 있는 토끼의 삶은 전혀 불행을 모르는 삶이지요. 여기서 동굴은 어머니의 태안과 같은 편안한 삶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아의식이 형성 되기 이전의 유아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자유를 위해 자아를 구속하는 동굴에서 탈출하고자 한 토끼가 홍두깨 같은 햇볕을 받자마자 눈이 멀었다는 것은 개념 자체에 대한 맹목성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토끼 이야기는 이후 전개되는 누혜의 삶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곧 동굴 밖으로 나와 눈이 먼 토끼의 운명과 이데올로기에 눈멀었던 누혜의 삶은 닮은 것입니다. 작가는 개인의 존재와 그 의미가 전쟁의 상황 속에서 사상, 인민, 계급과 같이 추상적이고 공허한 개념에 의해 훼손되어 버리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지요.

 

포로수용소에서 누혜는 '누에'라고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 쳐다보기만을 좋아하는 누헤의 모습이 '나비'로 변신하여 드넓은 세상을 날아다니기 이전인, 자기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누에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헤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자살은 누에에서 나비로 변신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혜가 '철조망'에 목을 매달아 죽은 것과 견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철조망은 토끼 우화에서의 '굴'과 같은 의미로 밝음과 어두움, 열림과 갇힘, 꿈과 현실의 경게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헤의 자살은 동물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향한 출구를 마련한 것으로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누혜의 죽음은 단순히 절망적인 죽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위와 자유 등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택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p.6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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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학(張龍鶴, 1921년 4월 25일 ~ 1999년 8월 31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함경북도 부령 출생. 1940년 경성중학(鏡城中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상과에 입학, 수학하였다.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였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청진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이듬해 1947년 월남, 한양공업고등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 초 한때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1962년 언론계로 옮겨 경향신문·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한양공업고등하교 교사 시절 처녀작 「육수(肉囚)」를 탈고하였고, 1949년 『연합신문』에 「희화(戲畫)」를 발표하였다. 1950년 단편 「지동설(地動說)」로 『문예(文藝)』지 1차 추천을 받았고 무학여자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1952년에 단편 「미련소묘(未練素描)」로 2차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사화산(死火山)」(1951, 발표는 1955) ·「무영탑(無影塔)」(1953)·「기상도(氣象圖)」(1954)·「부활미수(復活未遂)」(1954)·「비인탄생(非人誕生)」(1956)·「역성서설(易性序說)」(1958)·「현대의 야(野)」(1960)·「상립신화(喪笠新話)」(1964)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5년 『현대문학』에 「요한시집」을 발표한 이후부터이다. 이 때부터 관념적인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현대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1962년 『사상계』에 장편 「원형(圓形)의 전설」을, 그리고 1963년에는 중편 「위사(僞史)가 보이는 풍경」을 발표하였다. 그 후 10여 년간 아무런 작품활동이 없다가 1982년 장편 「유역(流域)」을 통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소설은 한자의 혼용, 건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 스토리보다는 관념에 치중하는 서술, 등장인물의 기이한 행위, 난삽한 내용 등으로 독자의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소설에 대한 일반의 견해를 뒤엎으려는 대담한 시도로 받아들여져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소설의 특이성을 단지 반복·대구되는 문체와 역설적 진술 때문에 야기된 난해함일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묘사체에 수필적인 요소를 혼합시킨 형식의 독창성과 작품의 지나친 상징성은 일반 독자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준다.

그의 소설은 사건의 진행이나 장면의 변화에 의해 전개되지 않고 작중인물의 관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체적으로 모든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며 철저히 허무주의적인 군상(群像)들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절망하고 존재의 허구에 구토하며 군중들 사이에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의 절망 속에서 참된 자유와 진실을 추구하지만 그들의 삶은 언제나 철저하게 비극적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은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유와 필연성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곧 작가의 태도가 ‘인간에 대한 모독 혹은 모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종래의 소설이 가치 있는 인간, 즉 이성적 인간의 탐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는 이성적 인간이라는 허구의 가면을 벗겨 놓은 인간의 초라함과 추함을 다룬다. 그의 소설은 6·25라는 충격적 현실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인 표현양식을 획득하고 있다.
특히 조금의 수식 없이 맨몸뚱아리로 드러난 인간존재의 모습은 낯설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독자에게 전달되기에 충분하며 그것은 당시 전후 지식인의 정신적 충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는 일상적 삶과 그 의미가 동떨어진 무의미의 세계를 낳는다.
장용학의 소설에 우화가 삽입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의미상실의 현실에 대한 허무의식의 한 표현이다. 그의 소설이 지닌 문학사적 가치는 대부분의 전후소설에 해당되는 두 가지 한계-전쟁에 대한 이야기 자체의 간접성과 지역성을 뛰어넘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의 부족-를 모두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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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시집 - 장용학 (창비)

요한 시집 - 장용학 (책세상)

청동기 - 장용학 (일신서적)

원형의 전설 - 장용학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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