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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옷자락은 깃발같이 - 송영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23.

문학의 탐정 한국문학 19

 

목차


이원수 

눈뜨는 시절
바닷가의 소년들
달나라 급행


송영 

쫓겨 가신 선생님
새로 들어온 야학생
옷자락은 깃발같이


최청곡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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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 옷자락은 깃발같이

 

가뜩이나 추운 북만주 벌판은 함박 같은 흰 눈발에 파묻히었습니다.

아득한 눈발 속에 날은 밝아 오고 또다시 저물어 가기를 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바람은 차서 눈보라는 치지만 차차로 눈발은 걷혀 갑니다.

그러자 며칠 만에 나타나는 빛나는 햇빛은 회색 구름을 쪼개고 나옵니다.

끝없는 벌판에는 온통 은 뚜껑을 덮어 놨습니다. 가끔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에 어울려 올라가는 한 뭉텅이 눈발만은 햇빛에 비쳐서 영롱한 은 기둥을 이루어서 보여 줍니다. (p.132-133)

 

<작품 이해>

운용이는 산적 떼의 침입을 알리려고 B마을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B마을로 가는 길은 운용이에게 매우 험난한 길이었지요. 눈은 그쳤지만 너무나 많이 쌓인 눈길을 구멍 난 버선을 신고 발가락이 나온 채 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세찬 바람은 얼굴과 몸을 얼어붙게 했지요.

하지만 운용이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겨 내며 서둘러 갔습니다. 자신이 늦게 가면 B마을 사람들이 산적 떼에게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결국 운용이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눈 위에 쓰러지고 말았지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운용이는 자신의 두루마기를 벗어 흔들었습니다. B마을 사람들에게 산적 떼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것이지요.

몸이 얼음처럼 꽁꽁 얼었는데도 운용이는 자신의 옷을 벗어 맨몸 상태로 두루마기를 힘차게 흔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우리 민족을 살려야 한다는 운용이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까지 와서 고생하는 것도 슬픈 일인데, 산적 떼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그 설움이, 거의 다 죽어 가면서도 자신의 두루마기를 벗어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 한 것이지요. (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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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宋影 1903년 5월 24일 ~ 1977년 1월 3일)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소설가이며 극장가.

본명은 송무현(宋武鉉)이지만 송영(宋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명으로 송동량(宋東兩), 은구산(殷龜山), 수양산인(首陽山人), 관악산인(冠岳山人), 앵봉산인(鶯峯山人)을 썼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산천실(山川實)이다.
1903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 오궁골에서 태어났다.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1919년 중퇴하였다. 희곡, 소설, 아동문학, 수필, 비평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는데 문학 활동하게 된 것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에서 유리공장 노동자로 6개월 정도 일하면서 재일조선노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한 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의 구성원으로서 극단 ‘염군’을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기관지 『염군』에 소설 「남남대전」과 희곡 「백양화」를 발표하였다. 1925년 7월 『개벽』 현상공모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맹원으로 가담하여 이후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면서 평양고무직공 파업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7년 카프 조직개편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카프 위원이 된 후 직속극단에서 대본을 집필하면서 1929년 『조선문예』의 인쇄를 책임졌다. 1934년 7월 전주사건(신건설사)으로 검거되어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5년 12월 17일 출소한 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1937년 극장에서 대본을 집필하는 극작가로 활동하였다. 동양극장에 수십 편의 멜로드라마, 사극의 대본을 제공하였다. 같은 해 박영호 등과 함께 극단 중앙무대를 결성하여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영의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각색해서 공연하려다가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상연이 취소되었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용광로」(1926)·「석공조합대표」(1927), 희곡 「정의와 칸바스」(1929)·「호신술」(1932)이 있다.
1942년 2월 미국과 서양 기독교를 규탄하는 「삼대」를 상연하는 데 힘을 더했다. 1942년 7월 일제의 관변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으로 「신사임당」과 「달밤에 걷던 산길」을 출품하였다.

해방 후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해방 후 첫 작품은 봉건 사회에 기초한 친일파의 몰락을 풍자한 희곡 「황혼」이었다. 1946년 조선문학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상무위원,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희곡 「자매」, 「나란히 선 두 집」과 봉건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풍자극 「금산군수」를 썼다. 한국전쟁 때는 작가로 참전하여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 역사극 「강화도」 등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내각 문화성 부상,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밀림아 이야기하라」는 1970년대 이후 집체작으로 재편되어 북한은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 송영은 월북 이후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9년에 북한에서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고, 1977년 1월 3일 사망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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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용궁 - 송영 (우리교육)

송영 소설전집 (현대문학)

석공조합대표 - 송영 (창비)

송영 단편집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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