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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쫓겨 가신 선생님 - 송영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23.

문학의 탐정 한국문학 19

 

목차


이원수 

눈뜨는 시절
바닷가의 소년들
달나라 급행


송영 

쫓겨 가신 선생님
새로 들어온 야학생
옷자락은 깃발같이


최청곡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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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 쫓겨 가신 선생님

 

동무여! 어떻게 이런 일이야 나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 있으랴! 혼자서 운들 소용이 있고, 혼자서 '왜 그런가?'를 생각한들 해결을 얻을 수야 있겠으랴!

나는 나에 대한 것은 하나도 말하기가 싫다. 말할 필요도 물론 없으니까....다만 나는 내가 그중 믿고 지내던 선생님의 덕택으로 자꾸 세상이 이상스럽게 보이는 시골 소년인 것만을 알아라. 그리고 훌륭한 공립 보통학교 학생이 못 되고, 낡고 고요한 사립 학교의 학생인 것만을 알아 다오.

난들 책상이 번쩍번쩍하고 운동장이 네모반듯한 공립 보통학교가 싫지야 물론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 동네 가운데에서도 그중 첫째가는 가난뱅이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잘 가르치지도 못하는 (실상이 돈이 없어서) 우리 학교로 들어간 것이다.

이만하면 우리 학교 동무들이 어떠한 집 자제들인 것은 다 알 것이다. 그저 머리도 가위질을 하지 않으면 밤낮 덥수룩하고, 옷은 찢어지지 않았으면 걸맞지 않은 그러한 동무들이었다. (p.84-85)

 

"그러니까 너희들은 정신을 바짝 채려야 한다. 너희들은 얼른 생각하기에 큰 부자가 되었으면 세상에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거니 하겠지만, 실상인즉 그렇지 않다....그리고 더군다나 우리들은 다른 데 사람보다 한 겹 더 눌리고 있으니까..."

하신다. (p.89)

 

"자, 이번 시험은 대개 성적이 양호하였으나, 도덕 시험은 잘 치른 학생이 하나도 없다. 실상인즉 교실안의 개나리꽃은 너희들의 얼굴인 것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 그러나 너희들의 얼굴은 더 몇 갑절 노란 것이다. 왜 그런 것을 몰랐느냐?"

하시면서 잠깐 미소를 띠시고 나더니 다시 항용 모양으로 얼굴이 침통하여지신다. 우리들은 벌써 '또 이상스러운 말씀을 하려나 보다.' 하고 정신들을 반짝 차리었다.

"실상은 너희들의 얼굴은 희고 불그스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희고 붉지는 못하고 보기 싫은 병난 얼굴들을 하고 있느냐. 그것은 너희들의 집안이 가난한 까닭이다! 그러면 왜 너희들의 집안이 가난한 줄 아느냐? 그것은 너희들의 부모는 항상 쓸데없는 땀만 흘리고 지내시는 소작 농민이다. 즉, 헛애만 쓰시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너희들도 결국은 너희들의 부모님같이 '헛애만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여 보아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우리들은 또 울 것같이 되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이 우리 집안들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그저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논과 밭으로 나가서 온종일 일을 하고 나도 결국에는 가을철이 되면 아버지겠서는 화만 난다고 약주만 잡수시면서

"얘 이놈아, 너도 학교구 뭐구 다 그만두어라. 먹고 살 수도 없는데."

하시고 야단야단 치시다가는 얼마도 못 되어 다시 한숨을 쉬시고 우는 듯한 말씀으로

"얘, 애비면 자식들을 잘 입히고 잘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란다."

하신다. 우리들은 이런 때에 아주 마음이 슬퍼졌다. 이 같은 마음은 언제든지 우리 선생님의 말씀만 듣고 나면 용기로 변한다. '슬퍼할 것이 무엇이 있나. 나도 힘만 쓰면 그만이지.' 하고서 주먹도 쥐어진다. (p.90-93)

 

동무여! 실상인즉 '선생님의 생각이 좋지 못하다고 자격이 안 계시다.'고, '모두'들 의논들을 하고 내쫓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선생님도 성이 나셔서 대항은 하시었으나 아주 그 '모두'들은

"그러면 학교를 못 하게 할 테야."

라고까지 하기 때문에 선생님도 어쩔 수 없이 나가시었단다. 이렇게 선생님이 가신 뒤에는 우리 학교가 여간 쓸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 시간이 일주일에 다섯 시간이나 더 늘게 되고,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조선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온종일 벌을 서게 되었다. (p.96)

 

<작품 이해>

선생님은 이상한 도덕 시험 문제를 내셨습니다. "교실 안에는 언제든지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있다."라는 말이 어떤 뜻에서 나온 것인지 우리가 아는 대로 답하라는 문제였지요. 나중에 선생님은 우리가 모두 이 시험 문제에 답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서 '교실 안 개나리꽃'은 '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먹지 못해 얼굴이 노랗게 보이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잘 먹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모님은 온종일 힘들게 일을 하시지만,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기 때문에 일하신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해 가난한 것이지요. (일제 강점기에 소작 농민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땅 주인과 일본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것을 바치거나 빼앗기고 나면, 정작 그들에게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이러한 점을 깨달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 그와 같은 시험 문제를 내신 것입니다.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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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宋影 1903년 5월 24일 ~ 1977년 1월 3일)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소설가이며 극장가.

본명은 송무현(宋武鉉)이지만 송영(宋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명으로 송동량(宋東兩), 은구산(殷龜山), 수양산인(首陽山人), 관악산인(冠岳山人), 앵봉산인(鶯峯山人)을 썼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산천실(山川實)이다.
1903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 오궁골에서 태어났다.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1919년 중퇴하였다. 희곡, 소설, 아동문학, 수필, 비평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는데 문학 활동하게 된 것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에서 유리공장 노동자로 6개월 정도 일하면서 재일조선노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한 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의 구성원으로서 극단 ‘염군’을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기관지 『염군』에 소설 「남남대전」과 희곡 「백양화」를 발표하였다. 1925년 7월 『개벽』 현상공모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맹원으로 가담하여 이후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면서 평양고무직공 파업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7년 카프 조직개편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카프 위원이 된 후 직속극단에서 대본을 집필하면서 1929년 『조선문예』의 인쇄를 책임졌다. 1934년 7월 전주사건(신건설사)으로 검거되어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5년 12월 17일 출소한 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1937년 극장에서 대본을 집필하는 극작가로 활동하였다. 동양극장에 수십 편의 멜로드라마, 사극의 대본을 제공하였다. 같은 해 박영호 등과 함께 극단 중앙무대를 결성하여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영의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각색해서 공연하려다가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상연이 취소되었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용광로」(1926)·「석공조합대표」(1927), 희곡 「정의와 칸바스」(1929)·「호신술」(1932)이 있다.
1942년 2월 미국과 서양 기독교를 규탄하는 「삼대」를 상연하는 데 힘을 더했다. 1942년 7월 일제의 관변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으로 「신사임당」과 「달밤에 걷던 산길」을 출품하였다.

해방 후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해방 후 첫 작품은 봉건 사회에 기초한 친일파의 몰락을 풍자한 희곡 「황혼」이었다. 1946년 조선문학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상무위원,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희곡 「자매」, 「나란히 선 두 집」과 봉건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풍자극 「금산군수」를 썼다. 한국전쟁 때는 작가로 참전하여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 역사극 「강화도」 등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내각 문화성 부상,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밀림아 이야기하라」는 1970년대 이후 집체작으로 재편되어 북한은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 송영은 월북 이후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9년에 북한에서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고, 1977년 1월 3일 사망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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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용궁 - 송영 (우리교육)

송영 소설전집 (현대문학)

석공조합대표 - 송영 (창비)

송영 단편집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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