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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맨발로 글목을 돌다 - 공지영 (문학사상)

by handaikhan 2023. 3. 24.

2011년 제 35회 이상문학상 수상집

 

목차
제35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서

대상수상작
공지영 | 맨발로 글목을 돌다

대상 수상 작가 자선 대표작
공지영 | 진지한 남자

대상 수상 작가 공지영의 수상소감과 문학적 자서전
수상소감 | 백지 앞, 자유로운 희망
문학적 자서전 | 나의 치유자, 나의 연인 그리고 나의 아이들

우수상 수상작
정지아 | 목욕 가는 날
김경욱 | 빅브라더
전성태 | 국화를 안고
김 숨 |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김언수 | 금고에 갇히다
김태용 | 뒤에
황정은 | 描氏生

제35회 이상문학상 선정 경위와 총평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
김윤식 | 운명, 작가까리의 대화방식
윤후명 | 영장류의 길
권영민 | 작가의 내면 풍경,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소설적 변증법
윤대녕 | 고통과 운명에 대한 고백적 해석
김인숙 | 사적인 측면을 역사적으로 투영하고자 하는 진지함

공지영의 작품세계와 작가 공지영을 말한다
작품론 |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론 | 문학, 인간에 대한 책임의 다른 이름

'이상문학상'의 취지와 선정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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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 맨발로 글목을 돌다 (2011년)

 

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종일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아이를 재우고, 챙겨둔 트렁크를 점검했다. 비행기표와 여권 그리고 봉투에 든 엔화. 나는 H를 취재하러 가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신 기자가 내게 새로 펴내는 H의 책과 근황의 취재를 부탁했다. 신 기자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이 나오면 한국에서 어떤 형식이든 H가 낸 책의 홍보를 도와주어야 할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흔쾌히 그러마 했던 터였다. H는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정말 몇 안 되는 번역자였고 내 책 두 권을 이미 일본에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었다. 공항에 나가려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소주를 한 병 집어왔다. 창작으로 인해 온 신경이 고슴도치처럼 일어서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덮쳐올 때 과거의 아픔이 새삼 시큰거리며 몰려올 때 나는 언제나 투명하고 다정한 그 액체의 따뜻함을 빌려 교감신경을 가라앉히고 잠을 이루곤 했었다. 그런데 탁자 앞에 따라놓은 그 소주를 한 잔 마셔버리기도 전에, 내 가슴으로 이상한 통증이 지나갔다. 무언가가 나를 치고 자나갔던 것이었다. 더듬거리며 만져보니 완강한 갈비뼈의 감촉이 여전했는데 무언가가 내 속에서 왈칵 빠져나갔고 그리하여 그 갈비뼈의 안쪽 공간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배구공만 한 크기의 검고 서늘한 그 공간 속으로 내 삶이, 대부분은 고통이라고 기억되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부볐던 시간들이 찬바람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집 안은 따스했지만 등줄기가 섬뜩해져서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밤은 이미 깊어 전화를 걸 대상조차 없었다.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는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슴을 좀 웅크리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았는데,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 (p.11-12)

 

나는 그다음 말을 잇지는 않았다.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는 한때 북한에 납치당했었다. 그때 한국말을 익혔고 지금은 귀국해 그것으로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북한에 납치를? 참 안됐네. 그리고 그걸로 번역 일을 하며 생계를 잇다니. 역시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나 말고도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는 투의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사고였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일본 사람답지 않게 천연한 그의 미소를 대명하고 그의 북한 억양이 섞인 말투를 듣고 있는 동안 나의 생각은 점점 더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안다고 대답한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스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네이버의 지식검색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입력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이력과 기사와 이런 것들을 읽는 일이 다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나를 스쳐갔던 것이다. (p.13)

 

김승옥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삶이 '내 삶 속으로 끼어드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펐구요."

그러고 나서 나는 그의 삶과 내 삶이 이 지점에서 서로에게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해졌다. 아마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그랬을 것이다. (p.1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생명연습 - 김승옥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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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왜 이렇게 많은 일본 기자들에게 줄을 서게 했는지 아직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p.1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공지영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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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송 감독, 이해를 좀 해야 할 거 같아. H씨가 북한에 납치되었던 사람이래. M신문이 워낙 보수 꼴통 신문이고 저 기자가 북한 ㅎ며오주의자쯤 되는 모양인데...그래서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고 H씨에게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송 감독에게 속삭였다. 송 감독은 별로 이 자리를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고 그저 H와 신문사 부장 두 사람이 일본말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지루해서 싫었던 모양인지, 별 표정의 동요없이 그래? 하고 반문했다.

"일본인을 납치했단 말이지....어디서?"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거야....일본에서겠지."

송 감독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북한 애들..........쎄다!"

오십대 초반 M신문사 간부의 질문은 열을 띠고 있고, H는 점점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고 출판사 관계자들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우리 둘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역시 영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활자를 다루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가 없다. 비이성적이다. 선진국 일본,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시민을 납치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내가 소설에 표현해야 할 말을 그는 한 단어로 표현해버린 것이다. 쎄다!

"그런데 지네들은 몇백만을 끌고 갔었잖아."

송 감독이 다시 낮은 소리로 내게 물었다. 물론 내 머릿속으로 종군위안부 - 아아, 나는 이 단어도 싫다. 위안은 무슨 위안을, 대체 누가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쨌든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 그저 '책상은 책상'인 것을 - 들을 떠 올리고 있었다. 내가 잠깐 그들과 관게했던 것, 그들의 증언, 그들의 눈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위안부뿐이었는가, 소위 의용군과 징용자들 등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분노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지 마. 아까 일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깐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북측이 도무지 임진왜란까지 쳐서 너희는 몇백만이지만 우리는 겨우 몇십 명이다."

송 감독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p.15-1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일본군 성노예제 - 정진성 (서울대출판부)

책상은 책상이다 - 패터 빅셀 (이용숙 옮김, 예담)

칼의 노래 - 김훈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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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분명, "너 한국인이지? 너희 조선인들과 형제지? 그러니 너도 결국....그러니 ㅣ스스로 자복을 하지?" 뭐 이런 투의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절대! 열을 내지 말자. 저런 부류의 인간에게 송 감독의 말대로 "그래요? 그럼 당신들은 우리 위안부들, 징용자들, 살육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삿대질을 하며 물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역사는 우리들의 말장난으로 바로잡아지는 게 아니다. 나는 나를 달래고 있었다. (p.1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조선상고사 - 신채호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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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다. 어떤 이는 일 년을 보아도 낯설고, 어떤 이는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형테이든 마음에 와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H를 만난지 겨우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그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터뷰 중간중간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언제부터 아는 사이세요?"

우리는 오늘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고, 그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마 당사자인 H와 나 둘 다 혹시 이건 농담이 아닐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와 나는 말없이도 서로 통하고 있었다. 그건 연배가 비슷한 남자와 여자의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변명하듯 굳이 이야기하자면 오누이와 같은 감정이었다고나 할까? 이제와 돌이켜보면 운명의 손톱에 생을 할퀴어 본 상혼을 나누어 가진 오누이라고나 할까. 몽고반점처럼 시퍼런 멍을 가진 동족이라고나 할까. (p.19)

 

나는 신경과민증 환자냐 거짓말쟁이냐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나는 거짓말쟁이의 패를 뽑아들고 싶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뽑으면 패는 대개, 어쩌면 자주, 종내에는 모두 다, 신경과민증 환자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보다는 신경과민증 환자의 말을 더 믿지 않는다. 거짓말은 가끔씩, 그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경과민증 환자는 대개 그들의 것이 되기는 힘든, 희귀한 질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남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상식적인 진술을 하고 있었고 나는 비상식적인 진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당사자이고 증언자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진술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이야, 정말이라구!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차츰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친한 친구들까지도 그랬다. 설마, 하고 그들은 말한다. (p.20-21)

 

나는 더 일찍 도망칠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억압은 분명 존재했지만 창살도 없고 담도 없다. 대개의 경우 묶여 있지도 안핟.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벽은 매우 강력했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법적 종속....그리고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내 미래에 대한 종속이었다. 그 종속은 너무도 부드러웠고, 너무도 천천히 시작되었으며, 사랑이라는 명찰을 달고 서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도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 남자가 연출하는 그 역할을 맡았다. 한 막이 끝나면 내 역할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희망....희망이라는 가면을 쓴 집착 때문이었다. (p.21)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왜 착한 사람들에게만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H를 만나고 나는 어렴풋이 그들만이, 선의를 가진 그들만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긍지로 운명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지요." (p.24)

 

편의상 미얀마 전선으로 끌려간 열네 살의 그녀를 순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순이에게도 이런 일들은 일어난다. 그들은 전선에 배치된 후, 칸막이로 겨우 가려진 방 속에 널브러진다. 순이의 증언은 이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하며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부산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몇 명의 일본 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 트럭에 실렸다.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다.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졸병, 장교가 섞여 왔다. 하루에 상대한 군인의 수는 삼사십 명쯤 되었으나 공일날에는 군인들이 팬티만 입고 밖에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은 팬티까지 벗고 다른 사람이 하는 도중에 커튼을 열고 드어오기도 했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문밖에서 안에다 대고 "하야쿠, 하야쿠"(빨리, 빨리)라고 외치기도 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둥 살둥 힘을 다해 하고, 어떤 사람은 울면서 하기도 했다. 자궁이 붓고 피고름이 나와 일을 할 수 없던 어느 날, 한 장교가 와서 일을 못하겠거든 대신 자신의 성기를 발라고 했다. 나는 "네 똥을 먹으면 먹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더니 마구 때리고 던지고 해서 나는 기절했다. 깨어나니 사흘이 지났다고 했다. (p.24-25)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끈질기게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세상의 밭에서 언어를 캐다가 다듬고 토막 내고 끓이며 맛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 궁극적으로 방해받는다. 사랑하는 남녀가 육체를 사용하여 하나가 되려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그 육체 때문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듯이....글을 쓴다는 것은 생갃이라는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아 하는 수 없이 핀으로 고정시키고 상자에 넣는 일, 죽어 핀으로 고정된 채 상자 속에 넣어진 나비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것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는 수 없이 생명을 빼앗아 핀으로 꽂은 나비를 다시 살려낼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나비를 잡아넣었다 한들 죽음과도 같은 딱딱한 사체만 만지게 될 테니까. 그럴 때 가끔 나는 영상이 부럽다.

.........아니다. 영상 또한 글과 같다.

모든 운명은 새벽처럼 우리를 덮치기도 하고 안개처럼 서서히 스며들기도 한다. 김승욱의 <무진기행>의 한 장면은 그래서 내게 오래 각인되어 있다.

처음 만나 몸을 섞고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묻는다.

"인숙이는 좋은 사람인가?"

여자가 대답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시면요."

작가 김승욱에게 이 구절은 어떤 나비였을까. 나는 이 구절을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데리고 살았다.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한쪽 날개를 찢긴 흰나비가 팔랑팔랑 삐뚜름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p.25-2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무진기행 - 김승욱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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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운명이란 것을 믿니? 어느 날 운전면허시험의 한 과정처럼 돌발 상황이라는 것이 생의 급브레이크를 밟게 하고 , 우리가 믿었던 질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상식을 비웃으며 단 한 번뿐인 우리 생의 모든 것을 똥창에 거꾸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난데없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류가 생긴 이래로 그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친 적이 없어. 여기 푸룬 별 지구 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과 서에서." (p.28-29)

 

나는 그녀에게 프레모 레비, 빅토르 프랭클같이 어느 날 갑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이들과 어느 날 갑자기 부두에 끌려가 성노예로 짓밟히는 순이, 혹은 가시와자키 해변에서 북한으로 끌려가 이십사 년 만에 일본에 돌아온 H 같은 사람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다. (p.2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이것이 인간인가 - 프레모 레비 (이현경 롬김,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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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은 어떠할까? 아벨은 죄가 없고 의로웠으나 죽었다. 요컨대 너의 종교나 희생 제사로도 이런 살해를 촉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약자가 아니요 무고한 자였지만 죽어 사라질 존재로 선고된 자였던 아벨의 족속이다. 우리 모두란, 권세, 무기, 통치권을 소유한 카인의 족속들을 포함한다. 카인과 아벨은 둘 다 헛됨의 내부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이다, 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어. 나는 두서없이 말했다. 그러나 나의 말들은 헛되고 헛되었다. (p.2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카인의 후예 - 황순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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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대학 2학년이었다. 그 무렵의 나도 대학 2학년이었다. 그 무렵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세계사와 인식론과 경제학들, 내가 밑줄을 그어가며 청춘을 지불했던 그 활자들은 내게 많은 것들을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의 도면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도 인지했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1차 대전은 교과서에 씌어 있던 대로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선발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 시장 다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 지식들은 내게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위력에 대해 알려주었으며, 교과서가 늘 바른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정군이 알려주고 싶은 말을 알려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아직도 1차 세계대전이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보이거나 정권에 적당히 기대고 싶어하는 보수 꼴통일 거라는 지레짐작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 나는, 돈이 없어도, 권력이나 직함이 없어도 세르비아 황태자의 암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믿는 부류들 보다 내가 훨씬 더 세상을 많이 안다는 오만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간은 옳았고 얼마간 옳은 것이 가지는 얼마간의 미덕이 늘 그렇듯이, 한동안은 빈 지갑을 가슴에 품고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데 쓸모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책들은 내가 깊은 밤, 슬픈 꿈에서 깨어나 아직도 귓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꾸었지,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아직도 남은 울음의 끝을 입 밖으로 쏟아내다가 스스로 내 입을 틀어막아야 할 때,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긴 했다. (p.30-3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변증법적 유물론 - 구스타프 베터 (강재륜 옮김, 명륜당)

제3세계와 종속이론 - 염홍철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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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비슷한 스무 살을 보낸 친구와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고만고만한 여대생들이었다. 친구와 나는 세르비아 황태자와 암살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우리의 지적 허영심은 은밀하게 채워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가지고 함께 논문을 썼었다. (p.3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암흑의 핵심 - 조셉 콘라드 (이상옥 옮김, 민음사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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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라고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썼다. (p.3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심연으로부터 - 오스카 와일드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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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있는 인간들은 힘이 없는 인간들을 죽게 할 방법을 천 가지끔 가지고 있다. 가끔 정신과 물질을 모두 내게 의지하고 있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권력이 얼마나 악에 물들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내가 마음먹으면 나는 아이들을 때리거나 고문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거나 불구가 되게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할수록 그들이 나를 의지할수록, 나 이외의 것에 그들이 속수무책일수록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온놈으로, 온몬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행이라는 것이 생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늪 같은 운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리하여 어떤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과거의 어리석음이 고름처럼 악취를 풍기는 인생의 어떤 해안에 서 있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들 앞으로 너무도 다양한 방식의 불행을 동원해, 잔혹하고도 정확한 조준을 하며 각개 약진해오는 것이다. (p.36-37)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 내 속에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운명이 직접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과 불안의 저 밑바닥에서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운명을 접해보고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이가 프레모 레비였던가 아니면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빅토르 프랭클이었던가 아니면 나였던가. 나는 욕조으ㅟ 미지근한 물속에서 벌거벗고 웅크린 채로 운명의 부름에 답하겠다고, 내가 계획했던 모든 희망을 버리고 가보겠다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가 부르니까 내가 대답하겠다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바람이 불면 잎이 지듯 그렇게 단순하고 단순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p.4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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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뤼베크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도시였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넌 결국 쓰게 되겠지. '그럼ㅇ메도 불구하고' 말이야. 토마스 만의 말대로 "그야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 내일은 아우슈비츠로 떠난다. 잘 지내! (p.4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토니어 크뢰거 - 토마스 만 (안삼환 옮김, 민음사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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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신곡>에서 묘파해낸 지옥의 입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이 입가를 뱅뱅 돌았다. (p.4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신곡 - 단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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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고 상퀘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 이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이 구절을 난 이해할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이 평생 단 하나 이 구절만을 썼다 해도 나는 를 좋아했을 거야...라고, 라고 쓰다가 나는 문자메시지를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래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좋은 여행 되기를!" (p.45-4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이온화 옮김, 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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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자는 웃었다.

"어제 H씨에게 질문할 거 뽑으려고 하다가 선배랑 내가 인터뷰한 글을 다시 보았지. 선배가 그랬더라구.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했더라구." (p.47)

 

나는 신 기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는 어서 H가 보고 싶었다. (p.48)

 

<각주>

소설 제목에 쓰인 '글목'이란 말은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작가가 지어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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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孔枝泳, 1963년 1월 31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 작가이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창작과 비평]에 구치소 수감 중 집필한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89년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3년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다뤄 새로운 여성문학, 여성주의의 문을 열었다.
1994년에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잇달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명실공히 독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한민국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2001년 21세기문학상, 2002년 한국소설문학상, 2004년 오영수문학상, 2007년 한국가톨릭문학상(장편소설 부문), 2006년에는 엠네스티 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단편「맨발로 글목을 돌다」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2018년『해리 1·2』가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1·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즐거운 나의 집』, 『도가니』, 『높고 푸른 사다리』, 『해리1·2』, 먼 바다』 등이 있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2』,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딸에게 주는 레시피』, 『시인의 밥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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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공지영 (해냄)

도가니 - 공지영 (창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공지영 (해냄)

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해냄)

즐거운 나의 집 - 공지영 (해냄)

봉순이 언니 - 공지영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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