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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X. 정리중

화인열전 - 유홍준 (역사비평사)

by handaikhan 2023. 2. 5.

화인열전 (유홍준, 역사비평사)

목차
[1권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 책을 펴내며 / 인간학으로서 미술사를 위하여
1. 연담 김명국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2. 공재 윤두서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3. 관아재 조영석­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4. 겸재 정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 부록 : 남태응의 '청죽화사'
- 도판목록

[ 2권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
- 책을 펴내며 / 인간학으로서 미술사를 위하여
1. 현재 심사정­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2. 능호관 이인상­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3. 호생관 최북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4. 단원 김홍도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 부록 : 이규상의 '화주록'·'서가록'
-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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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 화인열전

 

4. 겸재 정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1. 오해와 과장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 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황산도>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의 주장이 유효한 것이다. 

 

겸재의 벗인 조영석이 겸재의 <구학첩>에 부친 발문

겸재의 이 화첩은 먹을 씀에는 자취가 없고 번지기에는 법도가 있고, 깊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빼어남이 있다. 거의 송나라 미불과 명나라 동기창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만하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이와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16준법에 두었기 때문에 계곡이 여러 모양으로 흐르고 굽어내리는 모습을 똑같은 필치로 묘사하면서도 아직껏 이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여 있어도 오직 한 가지 수묵법으로만 표현되어 그 앞과 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 얕고 깊음, 그리고 토파와 돌의 평평하고 험한 세를 가려 표현하지 못했다. 물을 그려도 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 비켜서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겸재 또한 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렸다. 산의 주름을 그리고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나 보면, 다 쓴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니... (p.192-193)

 

2. 겸재의 신분에 대하여

한때 겸재는 화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겸재가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갈 중인 출신이 아니라 양반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주정씨세보>

자는 원백, 호는 겸재, 숙종 병진년(1676) 정월 3일생. 음사로 위수, 한성부 주부, 하양, 청하 2현의 현감, 을해년(1755) 사도시 첨정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 영조 기묘년(1759)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묵묘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도설경해>를 지었으며 유고 수십 권을 쓴 것이 있다. 부인은 연안 송씨. 부인의 아버지는 주부를 지낸 송규병이다. 묘소는 양주 해등촌면 게성리에 양죄합조했다.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p.194-195)

 

창암 박사해 <정 겸재가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된 것에 부친 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부귀와 함께 하다가 사라져 기록되지 못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 기예로라도 이름이 나야 한다고 했으니, 대개 후세에 초목과 함께 썩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름으로 마음을 삼겠는가. 기에가 극에 다다르면 이름은 저절로 오래 가니 총을 쏘는 것과 바둑이 이것이다.

겸옹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특히 그림으로 덮인 바 되었으니 이를 아는 이 없고, 다만 세상에 그 화명만 남으니 옹은 실로 불우하다 말해야 하겟으나, 옹 자신은 이로 번민하지 않았으니 옹을 일컬어 고고한 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옹은 산수화로 이름났고 산수화는 또 그림 세계 중 가장 격조 높은 것이어서 풍류문사나 은일지사들이 때때로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하는데, 이때인즉 삼연 김창흡과 사천 이병연이 있어 한묵을 주도해갔으므로 진실로 문사들이 술 마시는 모임이 있으면 옹은 일찍이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옹은 그런 까닭으로 평생 적적하지 않았고 명성은 더욱 무거워져 이름이 날로 쌓여가니, 이는 옹이 불우한 속에서도 불우하지 않은 것이다. 옹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지 않게 하고 공경이 되게 했다면 비록 한때의 부귀는 극할 수 있었겠으나 그 이름이 능히 이와 같이 이렇게 반드시 전해질 수 있었을까....

 

겸재는 이처럼 양반의 체통과 명예보다 그림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조차 그를 선비화가가 아닌 환쟁이(화원)로 곧잘 오해하고, 정술조 같은 이의 악의에 찬 비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그림으로 인해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 박사해의 이야기이다. 영조는 물론 그때 정술조의 상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열흘 뒤 정술조를 다른 일로 하여 파직시켜버렸다. (p.198-199)

 

3. 겸재의 유년 시절과 그림 입문

겸재는 1676년(숙종2) 1월 3일, 서울 북악산 아래 현재 경복고등학교가 잇는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겸재는 안동 김씨 6창 중 한 분인 삼연 김창흡의 문하생이 되었다.

김창흡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었고, 그가 추구한 시의 세계는 진경시였으니 겸재의 진경산수는 스승의 예술정신을 그림 세계에서 구현한 것이기도 했다. (p.200)

 

겸재가 화법을 익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천 이병연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연은 훗날 시에서 대가가 되어 당대에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으로 병칭되었다. (p.202)

 

조영석 <겸재정동추애사>

공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었고 나 역시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대략 그 삼매경을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매달리려 하지 않았고 공은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화6법과 화6요를 정밀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는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옛 그림을 널리 보고 공부 또한 독실히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내놓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이 날로 무거워지고 비단도 날로 쌓여서 스스로 한가할 틈이 없었는데 예찬, 미불, 동기창을 배워 대혼점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화법을 삼았다. 세상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다만 공의 중년 이후 거칠게 휘두르는 권법만을 보고 그림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하며 다투어 흉내내려 하니, 이는 찡그린 것만 흉내낸 셈이다. 그러한즉 그들은 공의 저 그윽하고 윤택한 멋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즉 겸재는 이와 같이 철저한 화법을 거친 다음에 거친 듯 스스럼없는 개성적인 필법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겸재에게는 이런 장인적 수련과 연찬의 과정이 있었다. (p.204-205)

 

4. 금강행과 <신모년 풍악도첩>

겸재는 36세때인 1711년에 1차 금강산 유람을 했고, 또 이듬해인 1712년에 2차 금강산을 유람했다.

 

초년작의 생리와 특징

<신모년 풍악도첩>의 그림은 겸재의 노년작 금강산 그림과 비교할 때 구도와 필치가 매우 미숙하여 겸재의 대표작에 눈이 익은 사람에게는 예술적 감동이 덜할 것이다. 겸재 그림을 기년작 중심으로 볼 때 겸재다운 필치가 구사되는 것은 59세에 그린 <금강전도> 이후이다. 특히 64세 때 그린 <청풍계도>와 65세 때 그린 <시ㅏㅁ승정도>, [경교명승첩]에 이르러야 겸재다운 멋이 혼연히 배어나오며, 그의 노숙한 필치는 76세에 그린 <인왕재색도>에서 구사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대기만성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p.208)

[신묘년 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신묘년 풍악도첩]의 형식

첫째, 부감법에 의한 시각 구성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구도의 틀을 만들어낸 점이다. 겸재가 금강산 글미에서 사용한 시각은 대관적 구도를 위한 부감법이다. 그는 결코 낱낱의 대상을 눈앞에 보이는 대로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옆산에 올라 내려다본 듯한, 또는 새가 날면서 공중에서 내려다본 듯한 부감법을 사용했다.

둘째, 금강산 그림에서 대상 자체는 실재에 육박하게 그렸지만 분위기를 잡아내는 주변 요소에는 화본에서 익힌 남종화법을 주저없이 구사하여 회화미를 높이고 이른바 속기를 떨쳐버렸다는 점이다.

셋째, 수지법과 점경인물에서 조선 산수화의 가능성를 열었다는 점이다. 나무를 그리는 수지법에도 역시 화본의 교과서적 지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지만 줄기가 굽어 오른 좃너 소나무와 솔밭의 표현은 가히 '겸재의 소나무 표현법'이라 할 만하다.

넷째, 화면상에서의 여유와 유머의 표현이다. 겸재 그림에는 이따금 바위 등의 표현에 슬쩍 유머가 들어가 있곤 한다. 내금강 향로봉의 사자바위, 법기봉의 부처바위, <해산정>에서 거북바위 등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것은 화면속에서의 농담이다. 농담은 없으면 재미없고 지나치면 본론이 죽는데, 겸재는 이것을 보일듯 말듯 집어넣는 뛰어난 유머 감각이 있었다. (p.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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