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로버츠 - 내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다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 사는 일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 각자가 지닌 약점과 장점은 거의 비슷하게 마련이니까. (p.25)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을 초대치로 활용한다는 것은 곧 인생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선택을 최대한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선택에 대하여, 그리고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본질이다.
매순간 훌륭한 선택을 하길 원하는가? 그렇가면 먼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p.28)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중국이라는 대 제국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중국과 아무 관게도 없는 유럽의 휴머니스트에게 이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면?
짐작컨대, 우선 그는 불행한 중국인들에게 닥친 불운을 무척 애도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사람이 일궈 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다는 사실에 비통해 하며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것이다. 혹시나 그가 투기업자라면, 이 재앙이 유럽의 상업과 전 세계 무역 및 사업에 끼칠 영향까지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적절하게 표출하고 난 뒤, 그런 끔찍한 사건이 언제 일어났냐는 듯, 아주 편안하게 다시 하던 일을 하거나 놀거나 휴식을 취한 뒤 곤히 잠들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없어질 거란 사실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사고가 오히려 그에게 실질적인 불안감을 안겨줄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아마도 오늘밤 쉽사리 잠들지 못할 것이다. 반면 수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은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 사고를 직접 보지 않는 한, 그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코를 골며 잠들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 사건보다 자신의 작은 불운에 더 고통스러워한다.(p.34-36)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기본 바탕에는 이와 반대되는 선한 본성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 처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도 한다. (p.37)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았다 할지언정 자신의 작은 불운을 막기 위해 수억이나 되는 중국인 형제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시킬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본성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깜짝 놀라게 되는 법이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그런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p.38)
이기적인 인간은 어떻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게 된 것일까?
우리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타인이 답례로 무언가를 줄 거라고 전제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p.39)
어떤 종류든 상대에게 흥정을 붙이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 역시 원하는 것을 갖데 될 것이오. 이런 의미는 사실상 모든 거래에 내재되어 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과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다. (p.40)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위한다면, 다시 말해서 수억 명의 목숨과 자신의 손가락을 맞바꾼다면, 당신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인간이 이토록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데도, 어떻게 우리 행동은 종종 그렇게 관대하고 고상할 수 있을까? 인간이 남의 일보다 자신과 관련된 일에 훨씬 큰 영향을 받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본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기적인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단순히 자애심이나 동정심 때문은 아니다.
인간애의 여린 힘으로는 자기애가 일으키는 강력한 충동을 이겨낼 수 없다. 조물주가 심어놓은 자애심의 미약한 불꽃도 자기애를 태워 버릴 수는 없다.
인간의 행동은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즉,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이 인물과 얘기를 나눈다.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인간대 인간으로 나를 심판하는 사람. (p.43-45)
공정한 관찰자는 이성, 원칙, 양심, 가슴 속 동거인, 내부 인간, 우리 행동의 위대한 심판자이자 결정권자다. 그는 우리가 타인의 행복을 건드리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몰염치한 격정을 향해 깜짝 놀랄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친다.
당신 역시 먼지처럼 많은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잘나지 않았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추잡스러우리만치 이기적으로 군다면, 분명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것이다.
우리는 오직 공정한 관찰자를 통해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이 미미하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의 눈을 통해서만 잘못 발현된 자기애를 바로잡을 수 있다.
공정한 관찰자는 때로는 타인을 위해 나의 큰 이익을 양보하는 행위가 적절하다고 알려준다. 또한 아주 큰 이익을 얻는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아주 작은 피해를 주는 행위가 매우 잘못됐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p.46-47)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물론 그런 척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고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려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을 돌보는 감정은 고상하고 명예롭게 행동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정한 관찰자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p.50)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p.66)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한다. 또한 인간은 선천적으로 미움받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다시 말하면,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즉, 아무도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다고 해도 칭찬받을 자격을 갖추고 싶어한다. 인간은 비난받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즉,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p.69-70)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혹은 실행하지 않은 나의 동기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은 나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칭찬으로부터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다.
그 칭찬은 우리에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큰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칭찬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반성을 하게 된다. 그 칭찬처럼 되지 못한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하여. (p.77)
가장 나약하고 가장 천박한 인간들만이 칭찬을 받으면 크게 기뻐한다. 자신이 절대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거짓 칭찬을 거부할 줄 안다. (p.78-79)
아첨에는 두 종류가 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보일 때 사용하는 사교적인 아첨과, 진실하지 못한 칭찬처럼, 숨겨진 이유가 존재하는 전략적 아첨이 그것이다. 전략적 아첨에는 그 답례로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상대가 과분하다고 느낄 만큼 전략적 아첨을 쏟아 붓는다. (p.80)
우리의 인생은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내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 때때로 그들은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또는 그냥 실수로 우리를 속이곤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p.82)
인간은 맹렬하고도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욕망에 압도당한 나머지, '가슴속 그 사람', 즉 공정한 관찰자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들을 저지른다. (p.91)
실제 이기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그 행동을 부추긴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서야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p.92)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건 매우 불괘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려 한다. (p.92)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즉, 자신을 실제 그대로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꿔 생각한다는 뜻이다. 자기기만은 솔직한 자기인식보다 훨씬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기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게 심적으로 훨씬 더 즐겁기 때문이다. 솔직한 자기인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다. (p.93)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자기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다. (p.94)
자기기만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혼란의 절반은 바로 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만 해도 자기기만이란 맹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기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우리는 거짓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p.98)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무엇이 적절하고, 적절하지 않은지 배운다. 세상을 통해 알게 되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원칙을 통해 우리는 어떤 행동은 존경을, 어떤 행동은 비난을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이기심으로 가득한 욕망을 잠재우고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다. (p.100)
조주주는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방치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이 완전한 착각 속에 빠져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다행히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깨닫게 만들었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의 옳은 행동을 인정할 줄 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역시 그 행동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걸 듣는다. 그 행동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표하고 보답을 하려 한다. 그 행동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강력하게 갈망하는 모든 감정들, 즉 사랑, 감사, 존겅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그 행동을 모방하려고 한다. (p.99 & 100)
나에게 좋아 보이는 일이 실제로 당신에게도 좋다.
사람들이 실제로 이기적인데도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타적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광고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바람을 이타적인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더욱 친절해 보이는 행동으로 은폐하는 것이다. (p.103)
우리가 이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이기심이 너무 커서도 아니다. 스스로 이상적 삶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자기기만의 베일 뒤로 숨길 뿐 아니라 미덕으로 바꾸어놓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를 마주보기가 힘들다. (p.104)
개인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스스로 납득시키기는 쉽다. (p.104)
확증편향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고 내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만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p.105)
사람들은 일상적인 행동에서만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세계관, 이념과 종교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세상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자신을 속인다. (p.105)
나와 경쟁 중인 상대는 사악한 사람이 아니다. 상대는 단지 세상을 다른 렌즈로 보거나,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평가할 뿐이다. 나에게는 결정적인 사실이나 연구 결과, 증거일지라도 상대는 얼마든지 이를 반박할 수 있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의 반박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득력 있어 보이는 증거까지 제시할 것이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어제의 주가가 왜 올랐는지, 혹은 내렸는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잘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p.110)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 철학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네. (p.114)
셰익스피어 - 햄릿 중에서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셰익스피어 - 햄릿
햄릿 -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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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은 절대로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바다는 계속 들어갈수록 깊어진다.' (p.115)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기나긴 여정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p.129)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루 유용하지도 않은 하찮은 것들에 돈을 써버리고 스스로를 파산시키고 있는가? 장난감 애호가들은 장난감의 효용이 아니라 장난감의 효용을 높이는 기계의 성능을 좋아할 뿐이다. 그들의 주머니는 작고 편리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이런 물건들을 더 많이 가지고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옷에서는 찾기 힘든 새로운 주머니들까지 고안해낸다. (p.137)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p.140)
무언가를 격렬하게 바라는 상황들 중 비교적 바람직한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신중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격정적인 욕망을 가질 만한 상황은 없다. (p.141)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은 뛰어난 '이성'과 지적 사고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로인한 이익과 손해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제력'이다. 자제력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참을 수 있으며, 미래의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이성과 지적 사고력, 자제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덕이 바로 '신중'이다. 신중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p.142)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혜와 미덕이 존경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경멸의 유일한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부자와 권세가들에게 존경심 가득한 눈길을 던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지 않는가. (p.143)
지위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의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를 대리만족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대중의 관심사가 된다. (p.147)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까지 사람들이 주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감동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격정과 기대감을 갖고 그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의 행동이 아주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p.148)
세인의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뒤따르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근심, 굴욕을 충분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관심을 얻는 순간 모든 자유와 편안함, 근심 걱정 없는 안전함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이다. (p.149)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인간 표본이 제시된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만들어간다. 그중 하나는 천박하고 화려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윤곽이 선명하고 우아하며 또 아름답다. 전자가 목적 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단긴다면, 후자는 열심히 배우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디. (p.160)
성공한 음악가로서의 삶이 1억 달러를 포기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1억 달러라는 돈이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주지 않았을까?
피터 버핏은 1억 달러라는 많은 돈으로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정도 돈이라면 400만 달러짜리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보다 저렴하게 30만 달러짜리 페라리로 만족할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 살 수도 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그 돈이면 누구나 상상하는 저택을 살 수도 있다. 오나시스처럼 섬을 한두 개 사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즐거움이 그가 꿈꾸었던 음악인의 삶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을까?
나는 피터 버핏이 충분히 이익이 남은 거래를 했다고 확신한다. 그는 1억 달러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 즉 괜찮은 음악가의 삶을 얻었기 때문이다. (p.163-164)
(참고)
에르빈 니레지하치, Erwin Nyiregyhazi ( January 19,1903 – April 13,1987)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피아니스트 에르빈 니레지하치는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놀라운 음악 신동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아들의 명성을 이용해 부자가 되려했고, 매니저는 어머니보다 더한 흥행사로 돈벌이가 되면 어떤 무대라도 섭외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사기를 당해 지하철역에서 노숙하며 연주 여행을 할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생활에 지쳤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973년 5월 6일, 그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콘서트홀에 나타났다.
한때 음악신동이라고 칭송 받았지만 뉴욕 부두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하다 노숙자로 전락한 그가 그토록 오랜 침묵을 깨고 피아노 앞에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젊은 시절 단 한번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엘시 스완이라는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연히 재회한 그녀는 79세의 노파가되어 있었는데,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니레지하치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70세 노구를 이끌고 콘서트를 기획한것이다.
우연히 그 연주회에 들른 CBS 레코드사의 테리 맥네일은 그의 신들린 연주에 넋을 잃고 허겁지겁 카세트 녹음버튼을 눌렀다.
이 앨범에는 바그너의 <리엔치, Rienzi)>와 <로엔그린, Lohengrin>,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와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오텔로, Othello>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Eugene Onegin>과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Pagliacci>등 모두 7개의 오페라에 대한 니레지하치의 6곡의 paraphrases가 실려 있다.
Nyiregyhazi At The Opera - (piano) Ervin Nyiregyházi (VAI audio, 1978, SF reco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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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 처방전은 단순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된다. 이는 곧 존경받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칭찬받고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실제의 나와 같으면 된다. 한 마디로, 정직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으면 된다.
사랑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그중 두 번째 방법, 즉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p.167)
지혜와 미덕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맞게 행동하고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서로가 원하는 방식의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p.168)
인간에게는 악의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타인의 사소한 고민거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다. (p.189)
우리가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할 때, 그의 기쁨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기쁨이 된다. 아무리 인간이 천성적으로 진심을 다해 상대를 축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친구를 축하하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친구 못지않게 행복하다. 그 순간, 우리의 가슴은 부풀어 올라 진실한 기쁨으로 넘실댄다. 그 기쁨과 만족으로 우리의 눈이 빛나고 우리의 표정과 몸짓이 활기를 띈다.
반대로 고통을 당한 친구를 위로할 때, 우리는 친구가 느끼는 슬픔에 비하면 턱없이 얕은 슬픔밖에 못 느낀다. 우리는 친구 옆에 앉아서 그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친구가 자신의 불행한 일들에 대해 얘기할 때, 엄숙한 자세로 그 얘기를 주의 깊게 들어준다.
숨 막힐 정도로 흐느끼는 친구가 슬픈 감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쉽게 그의 슬픔에 젖어들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도 애써 '나였어도 그만큼 슬펐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난 왜 이렇게 감성이 메말랐지?
하며 자책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억지로라도 친구의 슬픔에 대한 공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나오면 그런 감정들은 금세 증발해버린다.
조물주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슬픔만 준다. 친구의 슬픔에 대해서도 위로와 연민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이상의 슬픔을 반복해서 느끼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191-192)
슬픔보다 기쁨에 더 많이 공감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부를 과시하고 가난을 감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우리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우리의 처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우리가 겪는 고통의 반만큼도 연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크나큰 비애다. 인간의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는 부를 추구하고 가난을 피하는 것이다. (p.194)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이다. 상대는 내 기대에 맞게 행동한다. 나 역시 상대의 기대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상대의 신뢰를 얻는다. 그렇게 주고받은 신뢰를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보이면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적절성만으로 사람들의 존경이나 축하를 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존경과 축하를 받으려면, 미덕이 필요하다. (p.195)
신중한 사람은 언제나 진지하고 열심히 연구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식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비록 그의 재능이 늘 훌륭한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진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신중한 사람은 교활한 사기꾼의 교묘한 계략으로 당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오만한 현학자의 건방진 태로도, 혹은 천박하고 경솔하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간결하고 겸손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대중의 관심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엉터리 홍보 기술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p.202-203)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을 때 느끼는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어떤 이유로도 우리는 이웃을 해칠 수 없다. 또한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남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없다.
단순히 내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행복을 해친다면, 절대로 공정한 관찰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나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 정말 유용한 것을 빼앗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공정한 관찰자의 공감을 절대 얻지 못한디. (p.207)
사람들은 부와 영예, 그리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한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을 밀치거나 넘어뜨린다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일제히 분노할 것이다. 시합의 규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의 자기애는 고려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에게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피해자가 느끼는 분노에만 기꺼이 공감하고, 가해자에게는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결국 가해자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의 증오와 분오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분노들이 머지않아 사방에서 터져 나오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p.208-209)
선행의 원칙들에 있어 애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선하게 사는 일이 무척 힘들 수 밖에 없다. 무엇을 할지 확신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주 정확하게 지킬 수 있는 선행의 원칙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기적인 일을 하고도 자신이 이타적인 일을 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p.218)
'아이가 나의 도움 없이 숙제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스스로 숙제하게 놔두는 것이 자립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아닐까? 아이가 의지할 사람 없이 숙제를 풀면, 그 내용을 더 잘 기억하지 않을까?
숙제를 돕지 못한 아빠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를 위한 정당한 아빠의 논리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것이 상대에게 더 이로운지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행의 원칙들을 지키는 일은 정말 어렵다. (p.220-221)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 하고 ㅅ하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동의해줄 때 기뻐하고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실망한다. 이렇듯 사람들로부터 동의와 명예를 얻고 비난과 불명예를 피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우리 안에 단단히 박혀 있는 본성이다. 이런 본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떤 행동이 고결하고 고상하며 친절한지 스스로 자연스럽게 결정을 내린다. (p.245)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주면 기쁨을 느끼고, 타인이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p.246)
공손함, 친절함, 사려 깊음, 동정, 명예, 진정성의 미덕들은 사람들이 축하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설명하기 힘들고, 모호하고, 쉽게 규정할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미덕이 우리 인생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덕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꽤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이렇게 선행의 범주에 속하는 미덕은 강요하거나 처벌하도록 법으로 정할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의 상호교류만이 이 미덕들을 가장 잘 복돋우고 혹은 좌절시킬 수 있을 뿐이다. (p.248)
아무리사소한 행동이라도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행동을 조심하면서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한다. (p.251)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시스템에 갖힌 몽상가는 그 일에 몰두해버린 채,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p.265-266)
시스템에 갖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결과 또한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p.266-267)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모순되는 욕구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간섭받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첫 번째 욕구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도 좋아한다. 이것이 첫 번째와 부딪히는 두 번째 욕구다. (p.271)
세상은 복잡한 곳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말자. 내가 손잡이를 힘껏 돌린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문이 다 열리는건 아니다. (p.272)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시간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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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1월 12일)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1월 14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애덤의 부친은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 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스미스의 부친은 연합조약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해안에 밀수가 급증한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을 지켜본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거짓됨의 참람함을 깨닫고 정부의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방법 즉, 관세보호 등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국부론>을 쓰는 계기가 된 것이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스경의 후원하에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여,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 최초의 체계적 저서로 그 후의 여러 학설의 바탕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778년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고, 1787년 글래스고 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영국 정통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윤리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시장의 가격은 공정한 룰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시장의 적절한 가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점이나 제3자의 개입에 의한 어떤 것도 반대하였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이 왕이나 군주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반해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위정자들, 범법자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큼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의 '노동 가치설'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 일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가치척도 수단으로서의 노동 가치에 주목했다. 애덤 스미스는 금가치가 불안정한 시대여서 각국 간 생산물 가치를 금같이 불안정한 측정수단보다는 안정적 척도인 노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고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판 노동가치설을 주창하였고 결과적으로 애덤 스미스가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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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 - 애덤 스미스 (박세일 옮김, 비봉출판사)
도덕감정론 - 애덤 스미스 (김광수 옮김, 한길사)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유인호 옮김, 동서문화사)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최임환 옮김, 올재클래식)
대학, 중용 - 이기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대학, 중용 강의 - 김충렬 (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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