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디 - 테스 (1891년)
제1권
5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 한 중년 남자가 샤스턴에서 블레이크모어 또는 블랙무어라고도 부르는 인근 계곡의 말롯 마을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남자를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는 비틀거렸고 걸음걸이는 일직선에서 조금씩 왼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남자는 어떤 의견에 동의라도 하듯 이따금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곤 했지만, 사실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팔에는 텅 빈 달걀 광주리가 축 늘어진 채 걸려 있고 모자에는 보풀이 엉켜 있으며 벗을 때 엄지손가락이 닿는 챙의 헝겊 부분도 너덜너덜했다. 남자는 곧 회색빛 당나귀에 걸터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나이 지긋한 목사와 마주쳤다. (p.11-12)
실제로 행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젊은 처녀들이었다. (...)
그들 몸이 햇살을 받아 따뜻해지는 것처럼, 그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영혼을 덥혀 줄 자기만의 작은 태양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그것은 꿈이기도 했고 사랑이기도 했으며 때론 취미일 수도 있었다. 희망이라는 게 모두 그러하듯 요원하고 막연하여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지언정, 적어도 희망 하나 정도는 그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명랑했고 즐거워했다. (p.23)
그렇게 사건은 시작되었다. 만일 그녀가 이 만남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왜 그날 다른 남자,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올곧고 바람직한 남자가 아닌 하필이면 이렇게 나쁜 남자의 눈에 띄어 그의 탐욕의 대상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지 반문할 수도 있었으리라. 테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완벽에 가까웠던 그때의 그 남자에게는 반쯤 잊힌, 잠깐 머물렀다 사라진 인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잘 짜인 계획이 잘못 실행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부름조차 사람을 오게 하지 못하고, 사랑할 사람과 사랑할 시간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만나기만 하면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 순간에도 자연의 여신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 보라!>라고 말해 주는 일이 흔치 않다. 또한 이러한 숨바꼭질이 지루하고 지친 게임으로 이어질 때까지도 <어디에?>라는 인간의 외침에 <여기!>라고 대답해 주는 일도 드물다. 인간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시간의 어긋남으로 우리를 거칠게 흔들어 대며 끌고 가는 이런 모순이 더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기제와 더 섬세한 직관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하지만 그러한 완성은 예상될 수 없을 뿐더러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아무튼 지금 이 경우도 수많은 경우에서 그러하듯 완전한 하나를 이루는 두 개의 반쪽이 완벽한 순간에 서로를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족하다. 이렇게 일이 서툴게 지체되고 지연되면서 근심과 실망, 충격과 재앙 그리고 얄궂게 스쳐가는 운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p.72-73)
모이를 주는 관리인이자 병이 나면 돌봐주는 수의사, 거기에 친구의 임무까지 부여받은 테스가 돌봐야 할 닭의 무리는 이엉을 얹은 오래된 농가에 그들의 터전을 잡고 있었다. 농가는 한때 정원으로 쓰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닭들이 헤집어 놓은 모래로 뒤덮인 네모진 안뜰에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농가를 온통 휘감고 있었고, 겨우살이 나뭇가지로 몸피가 굵어진 굴뚝들은 저마다 폐허가 된 탑을 떠올리게 했다. 아래층에 있는 방들은 모두 닭들의 전용실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떼거리들은 이 집을 지은 이들이 교회 마당 이쪽저쪽에 묻혀 있는 농부들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인 양 거만하게 사방을 활개치며 다녔다. 더버빌 집안이 이곳에 들어와서 정착하기 이전에 이 집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스토크-더버빌 부인이 법적 소유권을 수중에 넣자마자 그들의 조상이 수 세대에 걸쳐 그렇게 많은 돈과 애정을 쏟았던 이곳이 아무렇지도 않게 양계장으로 용도 변경되는 처사를 보며 그들 집안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살아도 될 만큼 정말 훌륭한 집이었는데.> 이렇게 그들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때 수많은 갓난아이들이 젖을 달라고 보채며 울어 대던 방에는 이제 병아리들이 모이를 쪼아 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옛날 과묵한 농부들의 몸을 받쳐 주던 의지가 놓였던 자리는 지금 우리 안의 산만한 닭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굴뚝 모서리와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화덕에는 뒤집어 놓은 벌통들이 즐비했는데, 바로 여기가 암탉이 알을 낳는 장소였다. 대를 이어 여기에서 삶을 꾸려 왔던 주인들이 손수 삽질을 해서 알뜰살뜰 가꾸었던 문밖 뜰은 수탉들이 마구 파헤쳐 놓았다. (p.98-99)
<테스!> 더버빌이 그녀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칠흑처럼 어두워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발치에 희끄무레한 게 있어 자신이 낙엽 더미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흰 모슬린 옷을 입은 테스임을 짐작게 할 뿐이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똑같이 검정 일색이었다. 더버빌은 몸을 숙여 고르게 뒤는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좀 더 낮게 몸을 숙였다. 그녀의 숨결에 그의 얼굴이 따뜻해졌고, 어느 순간 그의 뺨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테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고, 속눈썹엔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
사위는 어둠과 침묵뿐이었다. 그 어둠과 침묵 위로 아주 오랜 엣날부터 체이스 숲에 있던 주목과 참나무가 하늘로 솟아 있었고, 그 안에 고요히 둥지를 튼 새들이 마지막 단잠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들 주위를 토끼들이 살금살금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하리라. 테스의 수호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가 소박하게 믿는 하느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쩌면 비꼬길 좋아하는 디스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신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누구를 쫓고 있었거나, 여행을 하고 있었거나, 혹은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리라.
비단결처럼 섬세하고, 아직 눈처럼 순수한 이렇게 아리따운 여자의 살결 위로 왜 하필이면 저주받은 운명과 같은 추잡한 무늬가 새겨져야 한단 말인가? 왜 나쁜 사람이 아름다운 이를, 이상한 남자가 여자를, 엉뚱한 여자가 남자를 차지하는 일이 너무도 잦은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분석 철학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지금 테스에게 닥친 불상사에는 어떤 복수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리라. 전쟁을 치르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귀향하던 테스 더버빌의 중무장한 조상들은 당시 시골 여자들을 상대로 똑같이, 아니 이보다 훨씬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으리라는 건 불 보듯 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의 죄가 그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것은 신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도덕이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외면당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이것 또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초는 아니었다.
테스의 구석진 시골 마을 사람들은 숙명론자들처럼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어>라며 지치지도 않고 숙덕거리곤 했는데, 이 사건이 안타까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트란트리지의 양계장에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보겠다고 다짐하며 집을 떠났던 테스와 지금 우리의 여주인공인 테스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볼 때 엄청나리만치 커다란 균열이 생겨 버린 것이다. (p.130-13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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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은 6월의 그날, 테스를 마차에 태운 더버빌이 말을 거칠게 몰아 아래로 질주하게 했던 그때와 변함없었다. 테스는 남은 비탈길을 쉬지 않고 올라 급경사를 이룬 가장자리에 서서 저 멀리 옅은 안갱에 반쯤 가려 이제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친숙한 녹색의 세상을 되돌아보았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저곳은 늘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저곳이 정말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저기를 바라보았던 그때 이후 그녀는 예쁜 새들이 지저귀는 곳에는 영락없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교훈으로 그녀의 인생관 역시 180도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이렇게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는 분명히 고향에 살던 예전의 그 순진하고 소박했던 처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파 더 이상 골짜기까지 멀리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p.136)
<당신의 속셈을 너무 늦게야 알았어요.>
<여자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더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속에 담아 두었던 노기를 밖으로 뿜어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 그는 다음에 이런 눈빛을 더 보게 되는데 - 그를 쏘아보며 소리르 질러 댔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당신을 마차 밖으로 내동댕이 칠 수도 있다고요! 모든 여자들이 하는 그런 말을 어떤 여자는 가슴 깊숙이 느끼기도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알았어.> 그가 껄껄거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인정할게.> 조금 후회스러운 말투로 그가 말을 계속했다. <다만 그렇게 날 볼 때마다 줄기차게 화를 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최대한 보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시 밭이나 목장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돼. 최고급 옷으로 단장할 수도 있어. 자기가 버는 돈으론 리본 하나도 사지 못하는 지나치게 수수한 지금의 차림새 대신에 말이지.>
천성이 관대하고 감정적이어서 좀처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테스였지만 그의 이런 말에 입술을 조금 비죽거리렸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어요. 그러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계속 그렇게 사는 건 당신의 소유물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의 이런 태도를 본다면 더버빌 가문 정도가 아니라 아마 공주라고 생각할 거야, 하하! 알아들었어. 더는 아무 말도 안 하지. 내가 나쁜 놈인 것 같소. 정말 나쁜 놈이야. 난 나쁜 놈으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죽을때도 그런 놈일 거야. 하지만 테스, 길 잃은 이 내 영혼을 걸고 맹세할게. 당신에게 다시는 못되게 굴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말인지 알지? 뭔가 조금이라도 필요하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내게 편지를 보내. 그러면 당신이 요구하는 건 뭐든 보내 줄게. 난 트란트리지에 없을지 몰라. 얼마 동안 런던에 가 있을 거야. 그 노인네를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모든 편지는 내 쪽으로 올 거야.>
테스는 더 이상은 말을 타고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래서 그들은 나무숲 아래에 마차를 세웠다. 마차에서 내린 더버빌이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내려 주었다.그리곤 그녀의 물건들을 그녀 옆에 내려놓았다.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그녀의 눈길이 잠시 그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돌아서서 짐을 들고 출발했다.
더버빌이 입에서 시가를 떼더니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전처럼 고개를 돌리지 않겠지, 테스? 자!>
<원하신다면.> 테스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 보시죠!>
그녀는 돌아서더니 그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반은 건성으로 반은 아직 열정이 식지 않은 듯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할 때 그녀는 대리석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키스를 받는 동안 그저 공허한 시선으로 가장 멀리 있는 오솔길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이젠 다른 뺨도, 엣정을 생각해서.>
그녀는 마치 미용사나 화가의 지시에 응하는 것처럼 시키는 대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고, 그의 입술이 근처 들판에 난 버섯처럼 촉촉하고 보드라우면서도 차가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답례 키스를 해주지 않는군. 스스로 키스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나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로 없겠지.>
<누누이 그렇다고 말했어요. 사실이에요. 당신을 진실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을 거예요.> 테스가 침통하게 덧붙여 말했다. <어쩌면, 지금의 나로선 그 어떤 것보다도 거짓말 한마디가 이로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미미하긴 하지만, 아직 내겐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의 자존심은 남아 있어요.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지금이 그걸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겠죠.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마치 이 상황이 자신의 마음이나 양심 또는 체면을 답답하게 만드는 듯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지나치게 우울해하는군, 테스. 이제 나도 당신에게 다정하게 굴어야 할 이유가 없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인근의 어떤 여자와 견주어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당해 낼 여자는 없어. 어떤 가문이든 말이야. 세상의 이치를 아는 남자로서 그리고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당신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지금 보다 더 많이 자신을 세상에 보여 줘야 할 거야....그렇지만, 테스. 내게 돌아와 주겠소? 정말이지 이렇게 당신을 보내고 싶진 않아.>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 절대로! 상황을 파악하곤 난 마음을 굳혔어. 진작 그전에 깨달았어야 했어요. 돌아가지 않아요.>
<그럼 잘 가. 넉 달 동안의 사촌이여, 안녕!>
그는 사뿐히 마차에 올라타더니 고삐를 조정했고, 빨간 열매가 달린 키 큰 울타리 사이로 이내 사라져 버렸다.
테스는 그의 모습을 좇지 않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태양의 아래쪽 몸체가 막 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무뚝뚝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그 햇살을 눈으로는 볼 수 있었으나 아직 살갗으로 온기가 전달 되지는 않았다. 근처에 인간의 그림자는 없었다. 애잔한 10월, 그리고 그보다 더 불쌍한 테스가 이 오솔길을 서성이는 유일한 존재였다. (p.138-141)
<그 남자의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으면, 좀 더 조심했어야지!>
<오, 어머니, 어머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어머니 쪽으로 갑자기 몸을 돌리면서 비탄에 빠진 어린 여자가 울부짖었다. <내가 무슨 수로 그런 걸 알았겠어요? 이 집 문을 나갈 때 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고요. 왜 남자들이란 위험한 존재라는 걸 말해 주지 않으셨나요? 내게 왜 주의를 주지 않았냐고요? 부잣집의 교양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의 그런 속셈을 알려 주는 소설을 읽으니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식으로 배울 기회도 전혀 없ㅎ었잖아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날 도와주지 않았어요!>
가라앉은 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만일 그 남자가 널 좋아하고 있고,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길 수 있을지 말해 주면 네가 우쭐해져 기회를 놓칠까 봐 그랬다.> 어머니는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면서 중얼거렸다. <자, 이제부터 잘해야 해. 결국 이게 다 운명이고 하느님의 뜻이란다.> (p.147)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이 예배가 진행되자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테스를 발견하자 저희들끼리 소곤거렸다. 그들이 뭐 때문에숙덕거리는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테스는 마음이 아팠고, 그래서 이젠 교회에도 나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과 함께 쓰는 방이 에전보다 더 자주 테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여기, 이엉을 얹은 작은 지붕 아래에서 테스는 발마과 눈을 그리고 비와 황홀한 일몰을 바라보았고 조금씩 풍만하게 몸피가 불어 가는 달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집 안에만 박혀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론가 떠났다고 생각했다.
이즈음 테스가 유일하게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땅거미가 몰려온 이후였다. 그녀가 가장 외로움을 덜 탈 때가 바로 그 수간, 숲 속으로 들어갈 때였다. 빛과 어둠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한낮의 압박과 밤중의 긴장이 서로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그래서 절대적인 정신적 자유만 남겨 놓는 저녁의 바로 그 순간을 그녀는 정확하게 짚어 낼 수 있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겪는 곤경이 숙어지면서 가장 여유로워지는 순간도 바로 이때였다. 그녀는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그녀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을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인 듯했다. 아니, 세상이라고 불리는 그 냉혹한 덩어리, 따로다로 있으면 불쌍할 정도로 보잘것없지만 하나로 뭉치면 끔찍할 정도로 무시무시해지는 그 집단을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한적한 언덕과 계곡으로 가만가만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그녀는 주위에 있는 것들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살포시 몸을 숙인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속해 있는 장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였다. 이따금 그녀의 엉뚱한 상상이 주변의 자연 현상들을 격렬하게 만들어 그 자연 현상들이 테스 본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보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며, 그래서 보이는 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겨울철 한밤중에 꽁꽁 동여맨 나뭇가지의 싹눈과 껍질 사이로 신음 소리를 내는 바람과 돌풍은 따끔하게 책망하는 소리였다. 비가 내리는 날은 어린 시절에 알고 있던, 하느님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딱히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어떤 윤리적 존재가 은근히 그녀의 나약함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테스를 싫어하는, 자잘한 인습의 조각들로 만들어진 망령과 목소리들이 가득한 생각의 감옥은 그녀 본인의 상상에서 나온 유감스럽고도 잘못된 창작물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는 도덕이라는 허깨비들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현실 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었지 결코 테스가 아니었다. 테스는 나무에서 잠들어 있는 새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달빛 어린 굴 위를 깡충거리며 뛰어다니는 토끼를 지켜보면서, 아니면 잔뜩 꿩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나뭇가지 아래에 서서, 스스로의 모습을 순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침입한 죄의 표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줄곧 그녀는 전혀 차이가 없는 데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 적대적 상황에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 그녀는 그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질서를 깨뜨릴 운명이긴 했지만, 그리하여 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정상에서 벗어난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자연이 알고 있는 자연의 질서를 어긴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p.151-153)
사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제 아무리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꽃을 닮은 입과 까맣지도 파랗지도 않은, 그렇다고 회색도 보라색도 아닌 크고 다정한 눈을 가지고 저기에 앉아있는 테스를 보고 있노라면 가여운 마음이 들 것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 주위의 홍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위의 모든 색들이 합쳐진 그리고 거기에 1백 가지나 되는 또 다른 빛깔이 더해져서 그림자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색조 너머에 또 다른 색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약간 조심스럽지 못한 점만 없었다면 거의 여성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처음으로 밭에 나와 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테스 자신에게도 놀라운 결정이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녀가 혼자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후회의 장치들을 작동시켜 애면글면 속만 태우다가 드디어 세상 이치에 눈을 뜨고 마음이 밝아졌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을 해서 홀로 서는 행복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기왕지사 지난 일은 지난일이고, 과거가 어찌 되었든 그 과거가 지금 그녀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가 낳은 결과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시간에 묻혀 버릴 것이다. 몇 해만 지나면 그 결과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고, 그녀 자신도 묻혀 버려 잊힐 것이다. 하지만 수목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낯익은 주변 모습은 그녀가 슬프다고 해서 어두워지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고개를 이토록 푹 떨구게 만든 세상이, 그리고 그 세상이 자신의 처지에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이 실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녀의 존재와 경험 그리고 열정 및 감각의 구조는 타인이 아닌 바로 그녀만의 것이며 오직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에게 테스는 그저 스쳐지가는 단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친구들에게조차 자주 생각나는 존재이긴 하겠지만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만일 그녀가 밤이고 낮이고 평생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여긴다 해도 그들은 <아, 그녀가 불행 하는 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스가 명랑해지려고 애쓰면서 모든 근심을 떨쳐 내고 한낮의 햇살과 꽃들 그리고 아기에게서 기쁨을 찾는다면 또 그들은 <아, 그녀가 잘 견대 내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만일 그녀가 무인도에 혼자 있었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그렇게 비참해했을까? 아마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서 자신이 남편도 없고 이름도 갖지 못한 아이의 어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 때문에 절망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녀는 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추구했을 것이다. 비참한 느낌은 대부분 그녀가 젖어 있는 인습에서 초래된 것이지 그녀의 타고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테스트는 뭔지 모를 기운이 났고, 그래서 에전처럼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추수할 일손이 절박한 이 시기에 들로 나왔던 것이다. 이는 그녀의 천싱이 기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기를 팔에 안고 있을 때조차도 가끔 사람들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곤 했다. (p.161-163)
가엾은 소로가 죄악과 세상 그리고 악마에 대항해서 벌인 싸움은 완전치 못한 빛을 발휘할 운명이었으니, 이는 소로의 출생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본인으로선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푸스름하게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병사 아니 종복은 그의 마지막 숨을 쉬었다. 잠에서 깬 다른 아이들이 엉엉 울어 대기 시작했고, 예쁜 아기를 하나 더 낳아 달라고 테스에게 떼를 썼다.
세레식을 치른 후 침착함을 유지했던 테스의 태도는 아기를 잃었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테스는 한낮이 되자 아기의 영혼에 대한 자신의 공포가 조금은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거가 충분하건 아니건 이제 불안한 마음은 사라져 버렸고, 만일 하느님의 섭리가 그런 비슷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원칙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천국은 자신을 위해서나 또는 자신의 아기를 위해서나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구도 원치 않았던 아이, 소로는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불쑥 끼어든 존재, 사회 율법은 안중에도 없었던 뻔뻔한 자연의 사생아, 며칠 동안의 삶이 영겁의 시간이었던 아이, 여러 해 또는 여러 세기 같은 것들은 아예 몰랐던 아이, 오두막의 내부가 우주 전체였고, 한 주의 날시가 온갖 기후였으며, 갓난아기 시절이 인간으로서 존재한 전부였고 그래서 젖을 빠는 본응이 인간으로서 터득했던 유일안 앎이었던 아이. (p.169-170)
로저 애스컴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에 의해 오랜 방황을 거쳐 지름길을 발견한다>. 하지만 긴 방황이 이후의 여정에 걸림돌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으니 그렇다면 그 경험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테스 더비필드의 경험의 바로 이런 무용지물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되었지만 누가 지금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여 주겠는가? (p.173)
그렇게 테스는 한달음에 순박한 소녀에서 속 깊은 여인으로 변모했다. 깊은 사색의 상징들이 얼굴에 어른거렸고 목소리에는 이따금 구슬픈 음색이 스며들었다. 더 커다래진 눈에는 보다 풍부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외모는 아름답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그녀의 영혼은 지난 한두 해의 거친 경험으로도 타락시킬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간의 구설수만 없었다면 그런 경험들은 그저 교양 교육정도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부쩍 사람들을 멀리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가 겪은 고초가 파다하게 소문으로 떠돌지는 않았고, 말롯에선 거의 잊힌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 돈 많은 더버빌 가와 <친척지간>임을 내세워 꼼수를 스려다가, 특히 테스를 통해 좀 더 가까운 관게를 맺어 보려다가 완전히 낭패를 본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그 일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그녀의 기억이 긴 세월을 통해 지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테스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희망 찬 생명의 맥박이 따뜻하게 고동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무 기억도 없는 어느 구석진 곳에서라면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거와 과거에 속한 그 모든 것에서 빠져나오려면 그 과거를 완전히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여기서 멀리 떠나야 한다.
한 번 잃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거라는 말이 순결에도 해당되는 걸까? 그녀는 이렇게 자문해 보곤 했다. 만일 지난 일들을 덮어 가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런 말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자연 유기체에 스며 있는 회복력이 처녀성만 외면할 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아직 그녀는 새 출발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유난히 화창한 봄이 돌아왔고 봉우리에서 새싹이 움트는 소리가 올라오는 듯했다. 야생 동물들을 흔들어 놓은 이 게절은 떠나고 싶은 테스의 마음에 힘껏 부채질을 해댔다. 5월 초순의 어느 날, 드디어 어머니의 옛날 친구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오래전에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편지에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농장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젖을 잘 짜는 여자를 구한다는 것과, 농장 주인이 여름 한철 동안 그녀를 쓰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농장이 그녀가 원했던 만큼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활동 반경 및 소문의 범위는 상당히 좁은 편이니까 그 정도 거리면 충분할 것 같기도 했다. 활동 영역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일이라는 거리 단위는 지도에서나 볼 수 있는 크기이며 교규는 주를, 주는 지방이나 한 나라 전체에 해당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한 가지에 대한 결심만은 단호했다. 꿈에서든 실제 행동에서든 새롭게 맞이할 삶에 더버빌이라는 모래성을 더 이상 존재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녀는 젖 짜는 여자 테스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모녀 사이에 이렇다 할 말이 오간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어머니 역시 테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더 이상 기사 조상 타령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사란 모순덩어리여서 그 새로운 일터가 테스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는 그곳이 우연찮게도 그녀의 조상들이 살던 곳과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테스가 가려고 하는 탤벗헤이즈 농장은 더버빌 가문의 에전 영지에서 과히 멀지 않았고, 그녀의 귀부인 조상들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그들의 남편들이 묻혀 있는 근사한 지하 묘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테스는 그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바빌론처럼 더버빌 가문도 쇠락했으며, 미천한 한 후손의 순수함도 조용히 소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잠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테스는 혹시 선조들의 땅에서 살게 되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줄곧 들었다. 나뭇가지 속 수액처럼 뭔지 모를 기운이 그녀의 몸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불끈 치솟았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억제되었다가 새롭게 용솟음치는, 아직 소진되지 않은 젊음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을 구가하고 싶은 본능도 따라왔다. (p.175-177)
가장 미천한 존재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라면 어디서든 달콤한 즐거움을 찾아내고자 하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성향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성향이 마침내 테스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아직 성장 중에 있는 겨우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자에게 시간이 흘러도 자국을 남기는 사건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p.185)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p.187)
처음에 그는 주로 다락방에 틀어박혀서 독서에 몰두하거나 염가로 구입한 낡은 하프를 타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쓸쓸한 기분이 들라치면 거리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연명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는 주인 내외와 젖 짜는 남녀 일꾼들과 기분 좋게 어울려 식당 겸 부엌으로 쓰는 아래층 방에서 식사를 하면서 사라들의 성격을 읽어 내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농장에서 기거하는 일꾼들은 거의 없었지만 식사 때에는 몇몇 사람이 주인 가족과 자리를 함께하곤 했던 것이다. 클레어가 이곳에 거주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마음은 줄어들고 그들과 공간을 함께 쓰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진정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정작 클레어 본인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던 시골 사람의 전형은 신문 지면에 촌뜨기로 나오는 가엾은 멍청이였는데 이곳에서 며칠 지낸 뒤 그런 생각은 말끔하게 지워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촌뜨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그와 정반대인 사회에 들어와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때는, 지금은 허물없이 어울리는 이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농장주의 식속들과 대등한 관계로 어울려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처음에는 격이 떨어지는 행동 같기도 했다.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방식 그리고 주변 환경도 퇴보적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생활해 감에 따라 에민한 이 손님은 그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이렇다 할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함이 단조로움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농장주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일꾼들은 클레어와 친밀한 사이가 되면서 마치 화학 작용이라도 일으키듯 자신들의 모습을 다양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파슬칼이 <지능이 높을수록 다른 사람에게서 각자의 다른 점을 이해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은 사람 사이의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틀에 박혀 있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촌뜨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촌뜨기들은 수많은 모습의 동료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많은 이들이 마음가짐을 평온하게 유지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행복해했으며 우울해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천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똑똑한 사람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엄격한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말이 없는 게 밀턴을 닮아쏙, 크롬웰이 될 성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촌뜨기 역시 서로에 대해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서로 칭송하거나 비난할 줄도 알았다. 또한 다른 사람이 가진 약점이나 악의를 떠올리며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티끌 같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뜻박에도 그는 자신이 뜻했던 직업과 관련되어서라기보다 일상에서 얻는 것 때문에 밖에서 일하는 걸 좋아했고 바깥 생활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그는 선을 베푸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문명인들을 장악하고 있던 그 고질적인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이는 그의 위치를 고려 해 보건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근래에 들어 그는 처음으로 직업상의 이유로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가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농경에 관한 몇 권 안 되는 책자들은 읽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알았던 것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면서 오히려 그는 삶과 인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여태까지 희미하게만 알고 있었던 현상들, 이를테면 나름의 분위기를 지닌 게절, 아침과 저녁, 밤과 정오, 저마다 다른 성격을 지닌 바람, 나무들, 물과 안개, 그림자와 고요함 그리고 생명이 없는 것들이 내는 목소리 등과 친밀한 관게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p.208-21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실낙원 - 존 밀턴 (조신권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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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왜 그렇게 달아나는 거죠?> 그가 말했다. <무서워서 그래요?>
<아, 아니에요, 선생님....밖에 있는 것들은 무섭지 않아요. 더구나 지금처럼 사과 꽃이 피고 만물이 푸르른 이런 때는요.>
<하지만 집 안에는 무서운 것들이 있나 봐요, 그렇죠?>
<그래요, 선생님.>
<뭐가 무서운데요?>
<딱히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우유가 상하는 것?>
<아니에요.>
<살아가는 일 모두가요?>
<네.>
<그렇군요. 나도 그래요. 자주 그렇죠. 이렇게 비틀거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하게 느껴져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당신처럼 젊은 아가씨가 벌써 인생을 그렇게 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녀는 망설이듯 침묵을 지켰다.
<자, 테스. 날 믿고 얘기해 보세요.>
사물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한 그녀가 수줍게 대답했다.
<나무에겐 뭔가를 캐내고 싶어 하는 눈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리고 강은 이렇게 말하죠. "너는 왜 그런 표정으로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드느냐?" 수없이 많은 내일이 한 줄로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중 첫 번째가 가장 크고 똑똑하게 보이고 다른 것들은 뒤로 가면서 점점 작아 보여요. 하지만 이 앞으로 올 날들이 모두 굉장히 사납고 잔인해 보여서,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내가 간다! 날 조심해! 조심하라고!..." 그러나 선생님은 음악으로 꿈을 키울 수 있으니까 그런 끔찍한 망상들을 쫓아 버릴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이 젊디젊은 여자가, 젖 짜는 여자에 불과하지만 한 집에 사는 다른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남다른 감각을 가진 이 여자가 이렇게 슬픈 상상을 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6년 동안 받은 초등 교육의 도움을 받아 이 시대의 감정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감정, 즉 모더니즘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진보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대부분은 수 세기에 걸쳐 막연하게 파악해 온 감정들을 ㅇㅇ학이니 또는 ㅇㅇ주의라는 낱말을 써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 것, 최신 유행에 따라 정의 내린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런 인식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젊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아니, 이상하다기 보다는 감동적이고 흥미롭고 그리고 애처롭기까지 했다. 테스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경험이란 깊이가 중요한 것이지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테스를 스치고 지나간, 육체를 말려 죽일 것 같았던 그 고통이 정신적인 결실을 맺은 것이다.
테스 역시 목사 집안에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게다가 물질적으로도 부족할 게 없는 에인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처럼 행복하지 못한 삶의 순레자에게는 분명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시인 기질을 갖춘 이렇게 존경스러운 사람이 굴욕의 게곡으로 내려와, 그녀가 2-3년 전에 느꼈던 것처럼, 그리고 우스의 남자처럼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살 것도 아닌데 제발 좀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이 남자가 현재 자신의 신분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단지 배를 만드는 작업장에 있었던 표트르 1세처럼 그저 자기가 알고 싶은 걸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젖을 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승승장구하는 부유한 지주, 농업 경영자 그리고 목축업자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호주나 미국에서 수많은 가축과 하인을 소유한 아브라함이 되어 군주처럼 양 떼들, 얼룩무늬와 고리 무늬를 가진 소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거느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녀는 이렇게 책을 좋아하고 음악성이 풍부하며 생각이 많은 젊은 남자가 자기 아버지나 형들처럼 목사가 되지 않고 하필이면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p.219-22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월든 - 소로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사)
나이를 먹으면 얻는 것 보다 잃은 것이 많은 법이다. 따라서 단지 연륜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젊은이들에게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충고는 없다. 노인의 경험 역시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들의 삶도 개인적인 이유로 비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보았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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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가 물었다. <아, 그냥....저 자신 때문이에요.> 갑자기 <귀부인>의 껍질을 마구 벗겨 내면서 슬픔이 깃든 희미한 미소로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삶은 기회가 없어서 낭비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알고 계신 것이나 읽으신 것들 그리고 선생님이 지금까지 보고 생각하신 것들을 생각하면 제가 너무도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성경 속에 나오는 가엾은 시바의 여왕 같아요. 제겐 더 이상 힘이 없어요.> (p.223)
<나라는 존재가 기다란 대열에 끼인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배워 보았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옛날 책 어딘가에 나를 꼭 닮은 누군가가 있고 내가 그 여자의 역할을 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게 절 슬프게 해요. 그게 다예요. 우리의 본질과 과거의 행적들이 수천수만 명의 그것들과 같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수천수만 명의 삶과 같을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거예요.>
<그럼,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아요?>
<이유를 배우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어째서 태양은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롭지 못한 사람 위를 똑같이 비추는지 정도는 알고 싶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책은 그런 걸 말해 주지는 않아요.> (p.224)
동틀 무렵의 어슴푸레한 잿빛은 음영의 정도는 똑같다고 하더라도 하루가 마감될 때의 그 재빛과는 달랐다. 새벽 여명의 시간에는 빛이 적극적이고 어둠이 수동적이지만, 저녁 땅거미가 몰려올 무렵엔 어둠이 적극적으로 힘을 불려 가고 빛은 꾸벅꾸벅 졸면서 사그라진다. (p.229)
이 후미진 농장에서의 삶이 그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으로 다가온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새롭게 찾아든 사랑이 일부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삶의 의미란 외부 환경의 변화에서가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에서 온다는 ㄴ것은 에인절 말고도 이미 많은 이들이 터득해 온 바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가난한 농부가 신경이 무딘 왕보다 더 깊고 풍부하고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 법이다. 이렇게 삶을 돌이켜 보던 에인절은 그 무대가 어디이든 삶은 똑같은 비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는 정통을 벗어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실수도 많고 약점도 있었지만 양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테스는 쉽게 데리고 놀다가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소중한 삶을 꾸려 가는 여자이다. 자신의 삶을 견뎌 내고 누려 온 그녀에게 그 삶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테스에게 모든 세상은 그녀의 감각에 따라 달라질 뿐더러 그녀가 존재함으로써 동료 인간들도 존재하게 된다. 테스에게는 우주 자체도 그녀가 세상에 나온 그 시간에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P.273)
제2권
한편 그날 밤 그가 한없이 깎아내렸던 그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 위로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는 에인절 클레어가 느끼고 있던 것보다 더 짙었으니, 그건 바로 에인절 클레어라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생긴 그림자였다. 지난 25년의 세월이 훌륭하게 만들어 낸 이 진보적이고 호의적인 청년이 모든 일을 독립적으로 판단코자 기울였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뜻밖의 일에 놀라자 어릴 적의 배움으로 도망쳐 관습과 인습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의 젊은 아내는 악을 증오하는 다른 여인만큼이나 르무엘 왕의 칭송을 받을 자녁이 충분하며, 그녀의 도덕적 진가는 결과보다 성향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해 주는 예언자도 그에겐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스스로 이를 깨달을 수 있을 만한 예언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런 경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단점을 가려 주는 아무런 장치가 없으므로 그런 유감스러운 면들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반면 멀리 떨어여 있어서 희미하게만 보이는 인물들은 거리감이 그들의 얼룩을 예술적 미덕으로 승화시켜 주어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테스에게 없는 것들에 골몰하느라고 정작 그녀의 참모습을 간과해 버렸고, 그래서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능가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p.455-456)
<선생님이 제게 청혼했었다면 저는 흔쾌히 "네"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은 선생님을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셨을 테죠!>
<정말이오?>
<정말이고말고요!> 그녀가 강한 어조로 속삭였다. <세상에! 아직까지도 선생님은 그걸 모르고 계셨군요.>
이윽고 그들이 탄 마차가 마을 진입로에 이르렀다.
<내려야겠어요. 전 저기에 살아요.> 고백한 이후 아무 말도 없었던 이즈가 불쑥 말을 꺼냈다.
클레어가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반감으로 격분해 있었고, 사회의 관습이 몹시 혐오스러워졌다. 그 운명과 관습이 합법적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는 막다른 궁지로 그를 몰아넣은 것이다. 올가미를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훈계만 하려 드는 이런 관습의 회초리를 맞느니, 차라리 앞날의 가정사를 아렇게나 되는대로 꾸려 가면서 사회에 복수를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브라질ㅇ렌 혼자 가요, 이즈. 먼 나라로 떠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로 아내와 별거하는 거라오. 다시는 테스와 함께 살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테스 대신 나랑 떠나겠소?>
<진심으로 제가 함께 가길 바라세요?>
<그렇소. 난 너무도 가혹한 대접을 받아서 이젠 좀 쉬고 싶소. 그리고 적어도 당신은 아무런 사심 없이 날 사랑하잖소.>
<네, 가겠어요.> 잠시 멈칫했던 이즈가 대답했다.
<그럴래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어요, 이즈?>
<선생님이 거기에 계신 동안 저랑 산다는 걸 의미하는 거죠. 전 그걸로 충분해요.>
<이즈, 당신은 지금 내가 도덕적으로 신뢰할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요. 문명인, 즉 서구 문명의 시각으로 보면 이 일은 옳지 못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일러둬야 할 것 같군요.>
<상관없어요. 사랑이 고통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달리 헤어날 길이 없다면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여자는 없어요.>
<그렇다면 내리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요.> (p.462-463)
이즈의 고백으로 테스를 향한 그의 사랑은 확인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실들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의 처음 판단이 옳았다면 지금도 그 생각은 옳은 것이다. 그가 나아가려는 방향에 붙은 탄력은 그날 오후 그에게 일어난 일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힘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 방향을 틀어 놓지 않는 한 계속해서 그를 그 방향으로만 밀어낼 것이다. 에인절은 테스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닷새 후 배가 출발하는 항구에서 형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p.467)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얼굴이 서서히 진홍빛으로 어두워졌지만 아무런 대답은 없었다.
<내가 타락한 건 늘 당신 때문이었지.> 이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의 허리께로 팔을 뻗쳤다. <당신도 응당 책임을 져야 할거야. 그리고 당신이 남편이라고 부르는 노새처럼 고집스러운 그 인간을 영원히 버리는 거야.>
우유 케이크를 먹으려고 벗었던 가죽 장갑 한 짝이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장갑 목을 잡더니 그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세차게 휘둘렀다. 전사들이 쓰던 무겁고 두꺼운 장갑이 그의 입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면 그런 행동은 그녀의 무사 조상들이 실제로 써왔던 수법이 재연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알렉은 격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홍빛 피가 그녀의 장갑이 닿앗던 자리에서 비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의 입에서 짚단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고 침착하게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았다.
그녀도 발딱 일어났지만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자, 날 벌하세요!> 목이 비틀리기 직전 절망적으로 포수를 바라보며 반항하는 참새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테스가 말했다. <날 때려요. 무참히 짓밟으라고요. 낟가리 아래에 있는 저 사람들 눈치 볼 것 없어요! 울지 않을 거예요. 한번 희생당한 자는 늘 희생당하는 법이죠. 그게 법칙이니까요!>
<오, 아니오, 아니오, 테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당신의 이런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가오. 하지만 당신은 진짜 부당할 정도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 당신이 내게 그럴 수 있는 힘만 주었더라면 난 당신과 결혼했을 거라고. 내가 당신에게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분명히 청하지 않았소? 대답해 봐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결혼할 수 없다는 거잖아.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 둬!> 그는 청혼 당시의 자신의 진지했던 모습과 그녀의 고마워할 줄 모르는 행동이 떠오르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녀에게로 가서 어깨를 움켜잡았고, 그에게 어깨를 잡힌 그녀는 몸을 떨었다. <기억해 두란 말이야. 이 아가씨야! 난 한때 네 주인이었다고! 다시 난 네 주인이 될 거야. 네가 다른 남자의 아내라해도 넌 내 거야!>
아래쪽에 있던 인부들이 다시 움직이는 기미가 보였다.
<우리의 싸움은 이쯤으로 끝내지!> 그녀를 놔주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은 이만 가겠지만, 당신의 답을 들으러 오후에 다시 오리라. 당신은 아직 날 모르고 있어. 하지만 난 당신을 알지.>
그녀는 실신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밀단을 가로질러 멀어져 간 더버빌이 사다리를 내려갔다. 아래쪽에 있던 인부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고. 몸을 흔들어 그들이 마신 맥주가 내려가게 했다. 탈곡기가 새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바스락대는 밀단 한 가운데에 묻혀 다시 테스는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한 단 한 단 끊임없이 밀단을 풀어 가면서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드럼통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p.567-569)
수월하게 자립할 수 있다는 설명에 현혹되어 이 나라로 왔던 수많은 농업 인부들은 고통스럽게 지냈고, 날로 쇠약해져 갔으며 심지어 죽어 가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농장에서 건너 온 어머니들이 갓난아기를 팔에 안고 터벅터벅 힘겹게 발을 떼는 걸 보았고, 그 아이가 열병에라도 걸려서 죽게 되면 그 어머니는 발길을 멈추고 맨손으로 푸석푸석한 흙을 파내 구덩이를 만들고, 역시 똑같이 맨손을 도구 삼아 구덩이에 아기를 묻은 뒤,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았다.
에인절은 애초에 브라질로 이민 갈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의 북부 혹은 동부에서 농장을 경영할 생각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절망감에 빠진 탓이었고, 영국 농민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킨 브라질 이민 바람과 과거에서 도망치려는 그의 욕구가 우연찮게도 들어맞았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정신적으로 열두 살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삶의 가치는 삶이 지닌 아름다움보다는 비애감이었다. 오랫동안 신비주의의 낡은 방식을 불신해 왔던 그는 이제 도덕률이라는 낡아 빠진 평가 방식에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에 그 평가 방식들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었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누굴 말하는가? 좀 더 꼭 집어 말한다면 어떤 여자가 도덕적인 여자인가? 품성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그 인물의 행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지닌 목적과 욕구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인물의 진정한 역사는 과거에 이루어진 것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했던 것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스는, 어떨까?
이런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렸다는 후회가 밀려들면서 그의 마음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영원히 버린 것일까? 그녀를 영원히 밀어내지는 않은 걸까? 그녀를 영원히 밀어냈다곤 말할 수 없었고,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건 곧 그가 이제 정신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p.58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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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Thomas Hardy, OM, 1840년 6월 2일 ~ 1928년 1월 11일)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토머스 하디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조지 엘리엇의 전통을 잇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실주의 작가였던 하디는 자신의 소설과 시 모두에 있어 낭만주의, 특히 윌리엄 워즈워스의 영향을 받았다. 하디는 빅토리아 시대 사회 전반에 대해, 특히 자신의 고향인 사우스 웨스트 잉글랜드에서 볼 수 있었던 영국의 농촌 사람들이 몰락하는 상황을 비평했다.
하디는 1840년 6월 2일 도체스터 근방 스틴스퍼드(Stinsford)에서 석공인 아버지와 독서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62년부터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한때 미술 평론가가 되려 했었던 하디는 시 창작에 뜻을 두어 몇 작품을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하디는 1920년과 1925년에 각각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애버딘 대학교, 브리스틀 대학교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25년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을 접견하던 하디의 저택, 맥스게이트(Max Gate)에 왕세자가 방문하기도 했었다.
1867년 집필을 마친 하디의 첫 소설 《빈자와 숙녀The Poor Man and the Lady》은 출판사를 찾는데에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이자 소설가 조지 메러디스에게 이 소설을 보여주는데, 메러디스는 《빈자와 숙녀》가 정치적으로 큰 논란을 낳게 될 것이고 훗날 하디가 책을 출판하는 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디는 그의 조언에 따라 이 책을 더이상 출판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후 원고를 없애지만 훗날의 작품에서 이 책에서 선보였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첫 소설을 단념한 후 하디는 상업적으로 더 호응을 얻길 바라며 《필사적 수단Desperate Remedies》 (1871)와 《녹림 나무the Greenwood Tree》 (1872)라는 두 권의 새 책을 썼는데 두 권 모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될 에마 기퍼드를 만난 것은 후자의 작업을 하고있을 때였다. 에마와의 교제를 바탕으로 쓴 《두 파란 눈A Pair of Blue Eyes》는 1873년 하디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이 책의 줄거리상의 기교는 찰스 디킨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클리프행어cliffhanger”라는 단어는 틴슬리스 매거진에서 1872년 9월부터 1873년 7월까지 간행된 연재판 《두 파란 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헨리 나이트가 절벽에서 말 그대로 목을 매어 죽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다음 소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에서 하디는 웨식스를 배경으로 서 잉글랜드 지방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착상을 처음으로 내놓는다. 웨식스는 초기 색슨 왕국의 이름이며, 잉글랜드에서 대략적으로 그 왕국의 영역이었던 부분을 뜻한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하디에게 건축 일을 그만두고 문학 활동을 추구하게 하는 데에 있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 후 25년간 하디는 10권이 넘는 소설을 집필한다. 뒤이어, 하디가는 런던에서 요빌로, 이후 스터미니스터 뉴턴으로 이사하고 하디는 그곳에서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를 쓰게 된다.
하디는 1882년 천문학과 관련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 《탑 위의 두 이Two on a Tower》을 출판한다. 그 후 1885년 하디가는 하디가 설계하고 하디의 남자 형제가 지은 도체스터 근교에 위치한 맥스 게이트로 마지막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그는 《캐스터브리지의 시장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삼림인The Woodlanders》 (1887)와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1891)를 썼는데, 그 중 더버빌가의 테스는 책 속 “타락한 여인”의 초상을 동정적으로 묘사한 것에 대하여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 "순수한 여인: 충실히 표현된"은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끔 하고자 의도해서 쓰였다.
하디의 대표작으로는 웨섹스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란의 무리를 떠나》, 《귀향》, 《숲의 사람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더버빌가의 테스》, 《무명의 주드》 등이 있고, 장편 극시 《제왕들》 외에 많은 웨섹스 시편들이 있다. 하디의 작품들은 특정 지역, 즉 영국 남부 지역 농촌을 다루고 있어 지방색이 강하지만 결코 지역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그의 소설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적 가치들과 당대의 핵심적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 특출한 작가적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 남부의 웨섹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 도체스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당시 도체스터는 농촌 지구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긴 했으나 다소 외진 곳으로, 하디의 어린 시절에는 철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농촌 풍경, 농촌 사람들의 미신이나 풍습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은 훗날 그가 소설을 쓰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내용이 차차 어둡게 변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지내온 불안한 시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1928년 1월 11일, 하디는 아내 플로렌스 더그데일(Florence Dugdale)에게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시편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밤 9시경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심장은 스틴스퍼드 교회에 있는 사별한 첫 아내 에마 기퍼드(Emma Gifford)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하디는 1927년 12월 뇌졸증에 시달렸으며, 1928년 1월 11일 9시 직후 맥스 게이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임종하면서 아내에게 그의 마지막 시를 받아쓰게끔 했다. 사망증명서에는 그의 사인이 '심장성실신'와 '고령'으로 기재되어있다. 그의 장례식은 1월 16일에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치뤄졌다. 하디는 스틴스퍼드에 있는 첫번째 아내 에마와 같은 무덤에 묻히길 원했었는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거기에 동의했으나, 그의 유언 집행자인 시드니 칼라일 코커렐 경은 하디가 웨스터민스터의 명성있는 시인 코너에 안장되어야 한다며 주장했다. 결국엔 그의 심장은 에마와 함께 스틴스퍼드에 안장되고, 유해는 시인 코너에 안장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죽을 당시 하디의 재산의 가치는 95,418 파운드 (2015년 가치로 5,647,015파운드)로 측정되었다.
하디의 작품은 D. H. 로렌스, 존 쿠퍼 포위스와 버지니아 울프같은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그의 자서전 Goodbye to All That (1929)에서 1920년대 초 도싯에서 있었던 하디와의 만남과 하디가 그레이브스와 그의 새 처를 얼마나 따뜻하게 환영하고 그의 작품에 대해 얼마나 격려했는지를 회상한다. 도체스터 보크햄턴에 있는 하디의 생가와 도체스터에 있는 그의 집 맥스 게이트는 내셔널 트러스트가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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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 토마스 하디 (정종화 옮김, 민음사)
테스 - 토마스 하디 (유명숙 옮김, 문학동네)
테스 - 토마스 하디 (이종구 옮김, 문예출판사)
테스 - 토마스 하디 (박순녀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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