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세갱 영감의 염소 이야기 - 알퐁스 도데 (권지현, 손원재 옮김, 주변인의 길)

by handaikhan 2023. 5. 16.

알퐁스 도데 작품선

 

알퐁스 도데 - 세갱 영감의 염소 이야기 

 

그랭고와르! 자네는 늘 그 모양일 걸세. 못난 친구 같으니!

파리의 유명한 신문사에서도 기자로 와달라는데, 그걸 마다하다니. 참 배짱 한번 두둑하구먼.....제발 자네 그 몰골 좀 보게나, 이 불쌍한 친구야! 구멍 난 윗도리며 바지는 해져 가지고.....배고픔에 찌들어 삐쩍 마른 얼굴은 또 어떤가. 도통 시에만 매달리니 그리 된 게 아닌가! 지난 10년 간 시에만 전념한 대가가 고작 이건가? 대체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 말이야?

어서 그 일자리를 받아들이게, 이 친구야! 어리석게 굴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돈도 잔뜩 벌 수 있고, 일류 레스토랑에서도 자네를 위해 특별석을 마련해놓을 걸세. 그리고 연극 공연 첫날에는 모자에 새로운 깃도 꽂아 마음껏 뽐낼 수도 있을 테고....

뭐라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끝가지 자유롭게 살겠다 이거군. 좋네.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세갱 영감의 염소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어디 한번 들어보게나.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면 결국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깨닫게 될 걸세.

세갱 영감은 염소 기르는 일에 별로 운이 없었다네.

염소마다 한결같이 다 죽어버렸거든. 어느 날 아침이면 염소들은 고삐를 끊고 산으로 달아났어. 그리고는 늑대의 먹이감이 되었지. 영감이 아무리 보듬어줘도, 늑대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염소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어. 아마 독립심이 대단한 염소들이었나 보네. 숨통이 탁 트이는  자유를 어떻게든 누려보려 했으니 말이야.

세갱 영감은 염소들의 이런 성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화가 치밀었지. 그래서 이렇게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따네.

"이젠 끝이야. 내 집에만 오면 염소들이 싫증을 낸다고. 이젠 단 한 마리도 내 집에 들여놓지 않을 테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감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네. 매번 같은 식으로 염소를 여섯 마리나 잃고서도 한 마리를 또 사들였지. 대신 이번에는 아주 어린놈으로 골랐다네. 영감이 사는 곳에 익숙해지도록 할 심산으로 말이야. (p.28-29)

 

어느 날 염소는 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네.

'저 위에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조이는 이 밧줄 없이 떨기나무를 헤치며 마음껏 뛰어놀면 얼마나 신이 날까! 당나귀나 소는 사방이 막힌 이런 울타리에서 풀을 뜯어도 상관없지만....우리들은 드넓은 벌판을 뛰어다녀야 하는 법인데!'

이런 생각이 들자 염소는 곧 입맛이 떨어졌다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지겨워졌지. 염소는 야위어가기 시작했고 젖도 잘 나오지 않게 되었네. 하루 종일 줄을 있는 대로 잡아당기며 산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면서 슬프게 울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안쓰럽던지....

세갱 영감도 염소가 이상하다는 것은 눈치 챘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영감이 젖을 다 짜고 나자 염소가 갑자기 영감을 돌아보며 말했다네.

"영감님, 여기는 정말 심심해요. 산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뭐라고! 이럴 수가.....너마저!"

영감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네. 그 바람에 그만 우유통을 떨어뜨리고 말았지. 영감은 염소 옆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이럴 수가, 블랑케트. 이 집을 떠나고 싶은 게냐?"

그러자 블랑케트가 대답했지.

"그래요, 영감님."

"풀이 모자라서 그러니?"

"아니오."

"끈이 너무 짧아서 그렇구나. 좀 늘여줄까?"

"그럴 필요 없어요, 영감님."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 원하는 게 뭐니?"

"산으로 가고 싶어요."

"이런, 순진한 것. 산에는 늑대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게로구나. 늑대와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러니?"

"뿔로 받아버리죠, 영감님."

"늑대 놈이 네 뿔 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으냐? 너보다 더 힘센 뿔을 가진 염소들도 다 먹어치우는 놈이야. 작년에 내 집에 있던 르노드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니? 그놈은 수컷처럼 성질도 사납고 힘도 센 암컷 대장이었어. 그 녀석도 늑대와 밤새도록 싸웠지만 결국 새벽녘에 잡아먹히고 말았단 말이야."

"에구머니, 불쌍한 르노드! 하지만 상관없어요, 영감님. 그래도 산으로 가게 해주세요."

"맙소사...!"

세갱 영감은 소리쳤지.

"도대체 내 염소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이지? 또 늑대의 배만 채워주게 생겼구먼. 안 돼, 절대 안 돼....! 네 놈이 뭐라고 해도 네 목숨만은 구해줘야겠다, 이 말썽꾸러기 녀석아! 줄을 끊을지도 모르니 아예 우리에 가둬놓아야겠군. 이제부터 거기서 지내거라."

영감은 햇빛도 들지 않는 우리에 염소를 가두고는 문을 이중으로 꼭꼭 잠가버렸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감은 그만 창문 닫는 것을 깜빡했지. 그래서 영감이 나가자마자 염소는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어.

새하얀 염소가 산에 오르자 모두들 즐거움으로 북적대기 시작했네. 노송들은 산에 올라온 이 새끼 염소처럼 귀여운 것은 여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마치 여왕처럼 대접해 주었다네. 밤나무도 몸을 숙여 새끼 염소를 쓰다듬어주었지. 금작화들은 한껏 향기로운 꽃내음을 뿜으며 염소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고, 온 산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지. (p.30-33)

 

그랭고와르, 우리끼리 하는 얘기인데, 영양들 중 까만 털이 빛나는 수컷 한 마리에게 블랑케트 요 녀석이 마음을 주었다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한두 시간 정도 숲 속 이곳저곳을 거닐었지.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면 푸른 이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시냇물에게 가서 물어보게나. (p.34)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스산해졌네. 산도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저녁이 된 게야.

"아니 벌써!"

염소는 말했네. 그리고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지.

산 아래쪽 평원이 안개에 뒤덮여버린 게야. 세갱 영감의 울타리도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영감의 집 굴뚝밖에 없었지. 산에 풀어놓은 염소들을 불러들이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염소는 갑자기 자신이 처량해졌다네. 게다가 둥지로 돌아가던 매 한 마리가 지나가다 살짝 건드리는 바람에 염소는 소스라쳤지. 그때 산 가득히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네.

"우우우....우우우..."

그제서야 문득 염소는 늑대 생각이 난 게야. 하루 종일 까불거리고 노느라 늑대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지. 때마침 계속 저 밑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어. 집 나간 염소를 불러들이려는 마음씨 좋은 세갱 영감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지.

"우우우...우우우..."

늑대는 계속 울어댔고...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고!"

나팔도 소리를 질러댔네.

불랑케트도 한편으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말뚝과 밧줄, 울타리를 떠올리니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산에 머물기로 마음먹었지.

이제 나팔도 울음을 멈췄고....

그때였네. 뒤쪽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 짧은 귀 두 개가 쫑긋 서 있는 게 아닌가. 번뜩이는 눈동자와 함께 말이지. 

바로 늑대가 나타난 것일세.

어마어마한 몸집의 늑대는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꿈쩍도 안 했다네. 새하얀 아기 염소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고 있었지. 먹어치울 수 있다고 자신했는지 서두르지 않았던 게야. 염소가 뒤를 돌아보자 그때서야 흉악하게 웃어대기 시작했어.

"흐흐흐! 세갱 영감의 염소 아씨 아니신가."

늑대는 흉측한 입 밖으로 시뻘건 혀를 날름거렸네.

블랑케트는 당황했지. 그러다 갑자기 밤새도록 늑대와 싸우다가 새벽녘에 잡아먹힌 르노드가 떠올랐네. 차라리 바로 잡아먹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블랑케트는 마음을 고쳐먹고 곧바로 싸울 자세를 취했네. 자기가 르노드라도 되는 양 뿔을 곧추세우고 머리를 숙였지. 그렇다고 자기가 늑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네. 염소가 늑대를 죽인 일은 없었으니까. 블랑케트는 자신도 르노드만큼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걸세.

드디어 늑대가 앞으로 다가왔고 염소도 작은 뿔을 휘둘러대기 시작했어.

아! 맹랑한 염소 같으니. 그렇게 순진한 생각으로 덤벼들다니! 그랭고와르,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염소가 너무 치열하게 싸우는 바람에 늑대도 숨을 돌리려고 열 번은 족히 물러섰다네. 잠시 싸움이 멈춘 사이에도 먹성 좋은 염소는 급히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뜯어먹었지. 그리고 다 씹지도 못한 풀을 한 입 가득 문 채 다시 싸웠어. 이렇게 싸움은 밤새 계속됐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염소는 계속 생각했지.

"아! 새벽까지만 견딜 수 있으면..."

곧 별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네. 블랑케트는 뿔에 더욱 힘을 주어 늑대를 공격했고, 늑대는 이빨의 힘을 배로 늘렸지. 드디어 저 너머 지평선에서 반가운 손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네. 바로 빛이었어. 농가에서도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네.

"이제 됐다!"

가여운 염소는 말했지. 염소는 죽기 전,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던 게야. 결국 염소는 힘을 잃고 쓰러져버렸네. 아름다운 하얀 털을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인 채 말이야.

동시에 늑대가 달려들어 염소를 날름 먹어치웠다네.

잘 지내게, 그랭고와르!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네. 프로방스 지방에 들를 기회가 생기면, 이곳 농부들에게 염소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될 걸세.

"세갱 영감의 염소가 밤새도록 늑대와 싸우다가 새벽녘에 잡아먹혔어요."

알겠나, 그랭고와르?

"새벽녘에 늑대에게 잡아먹혔다고." (p.35-37)

 

<작품 해설 - 민병식>

이 이야기는 염소 블랑케트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만을 좇는 사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위험 속에서도 자유를 택하여 포기하지 않고 부딪치는 미래에 대한 열정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블랑케트라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담보로 산으로 뛰어들 것인가. 죽음 대신에 안정되고 정해진 틀 안에서 분수를 지키며 살 것인가. 염소 블랑케트는 외양간에서의 안정적인 삶이 행복하지 않았으니 뛰쳐나왔을 것이다. 안정된 울타리 속에서 사는 염소는 어쩌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삶을 그대로 또 반복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블랑케트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죽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용기 있게 나아간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블랑케트는 감사와 만족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자유도 소중하지만 무분별한 자유가 얼마나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원할 것이다. 적어도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할 것이다. 나 역시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의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왜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족하고 불평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이다.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답은 없다.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도 없고 반대로 아무것도 원치 않고 포기하고 살 수도 없다. 감사와 만족, 도전과 포부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다.

 

..................................................................................................................................................................................................................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년 5월 13일 ~ 1897년 12월 16일)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이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방의 님(Nîm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뱅상 도데는 비단 제조업을 하고 있었지만 불운을 부르는 사람이었고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알퐁스 도데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다. 알퐁스 도데는 자라서 리용(Lyon)을 떠나 알레스(Alès)로 가서 교사 생활을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1년여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었으며 후에 그의 회고로는 "알레스를 떠난 몇 달 뒤에도 나 자신이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 가운데 서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사 생활을 그만둔 뒤 3살 연상의 형과 함께 살았는데 형은 파리에서 기자가 되고 싶어했다. 알퐁스도 형을 따라서 시를 썼는데 쓴 시들을 모아 <사랑하는 여자들>을 출판했다. 이는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르 피가로지>가 도데를 기자로 기용했고, 2~3편의 희곡을 써서 장래성을 주목받았다. 한편으로 나폴레옹 3세의 대신이자 입법회의 의장인 샤를 드 모르니 후작의 후원을 받아서 모르니 후작이 사망하는 1865년까지 모르니 후작의 비서로서 활동했다.
1866년, 첫 소설을 써서 크게 성공하게 된 그는 이후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1868년에 <Le Petit Chose>라는 첫 자전적 장편 소설을 썼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밝은 타타린>과 3막짜리 희곡 <아를의 여인>을 썼지만 역시 흥행에 실패한 뒤, 집필한 희곡 <프로몽과 리제르>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어권에도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로 <나바브> 등의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쓰는 등 작가로서의 위상은 뚜렷해졌다. 1867년에 쥴리아 아라드와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883년 도데는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쓴 기자와 결투를 벌였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안좋은 기사를 쓴 기자와도 결투를 신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약을 잘못 쓴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897년 1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

알퐁스 도데 단편선 - 알퐁드 도데 (김사행 옮김, 문예 세계문학)

별들 - 알퐁스 도데 (김명섭 옮김, 새움)

알퐁드 도데 (임희근 옮김, 현대문학 세계단편선)

별 - 알퐁스 도데 (최복현 옮김, 인디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