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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체호프 - 단편집 (김순진 옮김, 일송북)

by handaikhan 2024. 7. 25.

 

체호프 단편선

 

슬픔

 

이오나가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하려고 몸을 돌린다. 그러자 그때, 곱사등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이제야, 겨우 다 왔군."

20코페이카를 받고 나서, 이오나는 한참 동안 어두운 입구로 사라져 가는 건달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시 혼자가 된 그를 정적이 감싼다.

잠시 잠잠했던 슬픔이 다시 살아나 아주 강하게 몰아붙인다. 이오나의 시선이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좇아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흔들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그의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도 그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삐 지나가고 있다....

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의 시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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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속의 사나이

 

이런 저런 얘기가 그들 사이에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장의 아내인 마브라가 화제에 올랐다. 그녀는 건강하고 꽤 영리한 여자지만 평생 단 한 번도 고향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을뿐더러 도시도, 철도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10년 전부터는 늘 난로 옆에 앉아 지내며 밤에만 거리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불킨이 말했다.

"뭐, 그리 놀랄 얘기도 아닌데요? 세상에는 꿀벌이나 달팽이처럼 천성이 고독하고 그저 자기 껍질 속으로만 들어가려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답니다. 어쩌면 그건 인류의 선조가 아직 사회적인 동물이 되지 못해 각자 자기 굴속에 틀어박혀 지내던 시대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단지 인간의 다양한 특성 중 하나인지도 모르고요. 저야 자연 과학자도 아니고 그런 문제를 잘 알지도 못합니다만, 그 마브라 같은 사람이 실은 드물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p.172-173)

 

장례식에서 관 속에 누워 있는 그를 보았는데, 오히려 아주 편안해 보이더군요.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상자 속에 들어가 다시는 밖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이 매우 기쁘기라도 한 듯이 보였어요. 그래요, 어쩌면 그는 최고의 이상향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르죠. 그가 평소 가장 원하던 것을 죽음으로 가지게 된 것예요. (p.194)

 

베리코프는 땅에 묻혔지만 그 사람처럼 상자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겠어요! 앞으로도 베리코프는 무수히 많이 나오겠지요. (p.195)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숨 막히는 도시에 살면서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서류를 작성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할 일이 없는 사람들, 툭하면 시비나 거는 사람들, 멍청하고 게으른 부인네들과 평생을 시시한 소리나 주고받으며 사는 생활은 어떨까요? 이게 상자 속 생활이 아니고 뭐겠어요." (p.19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 - 아빈저 연구소 (이태복 옮김, 물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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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어째서 펠라게야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예쁜 외모에 걸맞은 잘생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하필이면 제멋대로 생겨먹은 니카노르한테 반했을까요? 두 사람을 보면 사랑에 있어서 개인의 행복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정확한 답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나 봅니다.

사랑에 대한 얘기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아요? 그런 수많은 말들 중에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사랑은 위대한 신비'라는 거. 이 말 빼고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쓴 것 전부 사랑에 대해 물음표만 더할뿐, 사랑이 무엇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나 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어떤 설명이 잘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 설명을 다른 많은 경우에 적용시켜보면 금세 어긋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하나하나의 사랑이 그 자체로 소중할 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p.201)

 

저는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해온 사랑을 그녀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저는 정말 쓰라리게 '우리의 사랑을 방해했던 모든 것은 실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며, 거짓된 것이다'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흔히들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의 잣대로 당신들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라.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고귀한 것으로 당신들 사랑의 높이를 재어 보라. 그렇지 않다면 아에 판단하려 들지 말라.' (p.219)

 

대학생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 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산 위로 올라간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과, 차가운 자줏빛 노을이 가느다란 한 줄기 빛으로 빛나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동산과 제사상의 마당에서 인류의 삶의 방향을 제시한 정의와 아름다움이 끊이지지 않고 지금 이 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불멸의 진리가 분명히 인류의 삶과 이 지상 전체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을 형성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젊음과 건강과 힘의 감각 그리고 행복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행복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기다림이, 조금씩 그를 사로잡아 삶은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또한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지게 했다. (p.228-229)

 

개들 데리고 다니는 여인

 

오레안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둘은 말이 없었다. 새벽안개 속에 멀리 얄타가 어렴풋이 보이고, 산 정상에는 흰 구름이 걸려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파도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잠, 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래에서는 파도 소리가, 이곳에 아직 얄타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부터 울렸고, 지금도 울리고 있고, 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 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잇는지도 모른다. 바다와 산과 구름과 넓은 하늘이 펼치는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여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고 편안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구로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도 잊은 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