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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by handaikhan 2023. 8. 31.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 마음 (194년)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p.16)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네. 그렇게 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고 나서 깜짝 놀랐네. 그리고 굉장히 두려워졌지."

나는 좀 더 앞으로 같은 길을 더듬어 가고 싶었다. 그런데 장지문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부르는 사모님 목소리가 두 번 들렸다. 선생님은 두 번째에 "왜?" 하고 대꾸했다. 사모님은 "잠깐만요" 하고 선생님을 옆방으로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볼일이 생긴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상상할 여유도 주지 않을 만큼 선생님은 이내 응접실로 돌아왔다.

"아무튼 날 너무 믿으면 안 되네.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속은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선생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p.49-50)

 

"제가 보기에 사모님을 좋아해서 세상이 싫어진 것 같으니까요."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입에 발린 말을 꽤 잘 하네요. 알맹이도 없는 이치를 능숙하게 가져다 쓰는 것이요. 세상이 싫어져서 나까지 싫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 않나요? 같은 이치로요."

"둘 다 맞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제가 맞을 겁니다."

"논쟁은 싫어요. 남자들은 툭하면 논쟁을 벌인다니까요. 재미있다는 듯이요.. 빈 잔으로 어쩌면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술잔을 잘도 주고 받을 수 있는 건지."

사모님의 말은 좀 따끔했다. 하지만 그 말은 듣기에 아주 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두뇌가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인식시키고 거기서 일종의 자긍심을 찾아낼 만큼 사모님은 현대적이지 않았다. 사모님은 그런 것보다 좀 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p.55)

 

"자네 집에 재산이 있다면 지금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거네. 쓸데없는 참견이겠지만 자네 아버님이 건강하실 때 받을 건 제대로 받아 두는게 어떻겠나? 만일의 일이 있고 나면 가장 말썽이 되는 건 재산 문제니까 말이야."

"예에."

나는 선생님의 말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버지든 어머니든 한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선생님이 하는 말이 너무 ㅎ녀실적인 것에 약간 놀랐다. 하지만 연장자에 대한 평소의 존경심이 입을 다물게 했다. 

"자네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말해서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하게.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법이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니까 말이야."

선생님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씁쓸하게 들렸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둘러댔다.

"자네 형제는 몇이나 되나?" 선생님이 물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우리 가족이 몇 명인지, 친척이 있는지, 숙부나 숙모는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다들 좋은 분들인가?"

"특별히 나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니까요."

"왜 시골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추궁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대답을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친척들 중에 이렇다 하게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p.81-83)

 

이대로 사람들 속에 남겨진 미라처럼 존재할 것인지, 아니면....(p.148)

 

그의 지향점은 나보다 훨씬 높은 데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나도 그걸 부정하지 않네. 하지만 눈만 높고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간단히 불구가 되지.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네. 그의 머리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지. 그를 사람답게 만드는 첫 번째 수단으로 일단 그를 이성 옆에 앉힐 방법을 강구했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분위기에 노출시켜 녹슨 그의 혈액을 새롭게 하려고 시도 한 거지.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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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1월 11일 ~ 1916년 1월 9일)

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市ヶ谷学校)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和三郎)의 아내 도세(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雑司ヶ谷霊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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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현암사 14권)

마음 - 소세키 (오유리 옮김, 문예세계문학)

마음 - 소세키 (양윤옥 옮김, 열린책들세계문학)

마음 - 소세키 (유은경 옮김, 문학동네세계문학)

마음 - 소세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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