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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파노라마섬 기담 - 에도가와 란포 (김단비 옮김, 문학과지성사)

by handaikhan 2023. 12. 9.

대산 세계문학 총서 151

 

에도가와 란포 - 파노라마섬 기담 (1926년)

 

같은 M현에 사는 사람도 대부분은 모를 겁니다. 태평양 쪽으로 I만이 펼쳐진 S군 남단에 다른 섬들과는 뚝 떨어진 작은 섬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요. 직경 8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그 섬은 꼭 초록색 만두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입니다. 지금은 무인도나 마찬가지라 근처 어부들이 이따금 올라와볼 때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게다가 곶의 돌출부로 몰아치는 거친 바다에 고립되어 있어서 물결이 웬만큼 잔잔하지 않으면 조그만 고기잡이배로는 접근하기조차 위험 천만합니다. 물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갈 만한 곳도 아이지만요. 주민들은 흔히 '먼바다섬'이라고 부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 섬 전체는 M현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T시의 고모다 가문 소유였습니다. 예전에는 고모다 가문이 부리는 어부들 중 호기심 많은 무리가 오두막을 지어놓고 살기도 했고, 그물을 말리거나 헛간처럼 쓰기도 했는데, 몇 년 전 그것들이 남김없이 철거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섬에서 심상찮은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몇십 명에 이르는 토목 인부와 정원사들이 전용 모터보트를 타고 날마다 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온갖 기암괴석과 정원수, 철골과 목재, 어마어마한 숫자의 시멘트 통 따위를 끊임없이 섬으로 날랐습니다. 그리하여 거친 바다 위의 왼딴섬에서 토목 공사인지 정원 공사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목적 불명의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p.9-10)

 

그런데 간질이 그런 위험을 수반하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히로스케는 어째서 그렇게 분명히 기억했을까요. 히토미 히로스케 자신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인간의 심리는 여간 무서운 요물이 아닙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쌍둥이 반쪽이라고 불릴 만큼 자신을 빼다 박은 겐자부로가, 그것도 엄청난 부자 겐자부로가 역시 간질을 앓는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의식했다고 봐야 옳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걸핏하면 온갖 망상에 빠져드는 타고난 몽상가 히토미 히로스케가 비록 확실히 의식하진 못했어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건 당연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 해 전에 히로스케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뿌리내린 씨앗이 겐자부로의 죽음을 알게 된 지금에야 비로소 확실히 형체를 드러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밤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하얗게 지새우는 동안 처음에는 마치 동화 속 이야기나 꿈처럼 여겨졌던 그 가공할 흉계가 조금씩 현실의 빛깔을 띠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나와 그 녀석이 닮았기로서니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니....터무니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인류 역사상 이렇게 얼빠진 생각을 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흔히 추리소설 같은데서 쌍둥이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으로 변장해서 1인 2역을 한다는 이야기는 읽었지만, 그조차 실제 세계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하물며 지금 내가 생각하는 흉계는 얼마나 미치광이 같은 망상인가. 히로스케,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워. 너는 네 분수에 맞게 평생 실현될 리 없는 유토피아나 꿈꾸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며 무시무시한 망상을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처럼 손쉽고 완벽한 계획이 또 있을까. 조금 힘들고 위험하기는 해도 만에 하나 성공만 한다면 네가 그토록 열망하고 오랜 세월 바라마지않던 너의 몽상 세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단숨에 손에 넣을 수 있어. 그 쾌감과 환희를 어디에 비할까. 어차피 질릴 대로 질린 세상이잖은가. 희망도 없는 인생이고, 설사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것 하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목숨을 잃기는 커녕 누구를 해치거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행도 아니잖아" 그저 나라는 존재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고모다 겐자부로의 대역 노릇만 하면 돼. 그다음에는 지금껏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한 적 없는 일을 하는 거야. 자연을 개조하고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일을. 입이 떡 벌어지게 커다란 예술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상낙원을 창조하는 것이다. 거리낄 이유가 뭐 있겠어? 게다가 겐자부로의 유족 입장에서도 죽은 줄 알았던 가장이 살아 돌아오는데 백번 반길 일이지 결코 원망할 일이 아니잖아? 너는 고약한 악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결과를 따져보면 악행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이라고.'

그렇게 꿰어 맞추고 보니 과연 논리 정연해서 실행 중 파탄에 이를 염려도 없거니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습니다. (p.23-2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죄와 벌 - 도스토옙스키 (홍대화 옮김, 열린책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 도스토옙스키 (김연경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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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일본어: 江戸川 乱歩, えどがわ らんぽ, 1894년 10월 21일 ~ 1965년 7월 28일)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히라이 다로로, 필명인 에도가와는 미국의 문호인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로서 일명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이지만 에드가 앨런 포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을 평생 사용하였다. 1894년 미에 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번안된 추리 소설을 읽어준 것을 계기로 추리 소설에 빠졌다. 1914년 처음으로 에드거 앨런 포와 코난 도일의 소설을 접하고 심취하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서점 경영과 잡지 출간에 실패한 뒤 1923년 신청년에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하며 추리작가로 데뷔했다.
1925년 일본을 대표하는 탐정 캐릭터 ‘아케치 고고로’를 탄생시킨 추리 소설 및 괴기, 환상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했다. 전쟁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한 검열이 거세지자 [소년 탐정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다. 눈부신 걸작 단편들을 다수 발표하여 일본 추리소설계의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한때 붓을 꺾고 방랑하기도 하고 반전 혐의로 검열에 걸려 전면삭제를 당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일본탐정작가클럽을 창설하고 잡지를 발간하며 강연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추리소설의 발전과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1947년 ‘추리 작가 클럽’을 만들고, 1954년 추리 소설 문학상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만드는 등 일본 추리 소설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그의 환갑을 맞아 탄생한 에도가와 란포상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추리소설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며, 추리작가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은 고단샤講談社가 출판하고 있으며, 38회부터는 후지TV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고 있다. 일본 추리소설 문단의 중심적인 인물로서 추리소설의 부흥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5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작품으로 『빨간 방 赤い部屋』, 『D언덕 살인사건(D坂の殺人事件)』(1925), 『심리시험(心理試)』(1925), 『음울한 짐승(陰)』(1928), 『황금가면(金面)』(1930) 및 소년 탐정이 활약하는 시리즈물 『괴도 이십가면(怪人二十面相)』(193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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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섬 기담 - 란포 (박용만 옮김, 시간의물레)

란포 단편집 1-3 (김은희 옮김, 두드림)

란포 결정판 1-3 (권일영 옮김, 검은숲)

인간의자 - 란포 (안민희 옮김, 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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