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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고가 - 정한숙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30.

큰 한국문학 413 (54권)

 

목차

 

강용준

철조망

고향사람

 

정한숙

금방벽화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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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숙 - 고가

 

솟구쳐 흐르는 물줄기 모양 뻗어 내린 소백산 준령이 어쩌다 여기서 맥이 끊기며 마치 범이 꼬리를 사리듯 돌려 맺혔다.

그 맺어진 데서 다시 잔잔한 구릉이 좌우로 퍼진 한복판에 큰 마을이 있으니 세칭 이 골을 김씨 마을이라 한다.

필재의 집은 이 마을의 종가요, 그는 종손이다.

필재의 집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나서면 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금 느티나무 밑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넓은 시내가 5대조가 여기 자리잡을 때만 해도 큰 배로 건너야 할 강이었다고 했다. 필재의 5대조가 여기 자리잡았다는 것을 보면, 당당하던 장동 김씨의 세도도 부리지 못하고 낙향한 패임이 분명했다.

그 물줄기가 벌을 가로질러 흐르는 까닭에 김씨 마을은 번성했고 또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물론 필재는 일찍 아버지를 잃은 까닭에 이 모든 이야기는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말들이다.

할아버지가 항상 사랑방에 도사리고 앉아 장죽을 물곤 이것을 자랑했고 또 어찌 된 셈인지 근 40년래 이 물줄기가 줄어들어 지형이 점차 바뀐다고 걱정을 했다. (p.139-141)

 

필재의 어머니는 임진, 동학 양란을 거칠 때마다 이 집이 불 속에 묻혔어도 500년 묵은 싸리 기둥만이 남아 있었다는 안채에 들어앉아 밤이면 아주까리 등잔 앞에서 <사씨남정기>나 <임경업전> 같은 것을 읽던 기억이 필재의 머릿속엔 언제나 사라지질 않았다. (p.142-14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씨남정기 - 김만중 (문학동네)

임경업전 - 작자미상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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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재는 숙부님이 자기 머리칼을 내던지던 장소를 살펴봤지만 삼단같이 기름이 진 머리칼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이 그대로 못 속에 가라앉은 모양이다.

아직도 개구리라는 놈들이 마름 풀 그늘 밑에서 꾸르럭거릴 뿐이다.

맑은 못속엔 아무리 찾아도 필재의 머리털이란 한 오리도 보이지 않고 퍼런 개구리밥만이 여기저기 떠 흐를 뿐이다.

필재는 크게 무슨 소중한 것이나 잃어버린 것 같은 섭섭한 생각이 별안간 치밀어 좀처럼 못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파란 물 위엔 요전과 다름없이 필재의 그림자가 보이건만 필재의 머리칼은 보이질 않는다.

조금 전까지 반듯이 비쳐 보이던 필재의 얼굴이 무슨 까닭인지 물속에서 술래를 돌듯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필재는 그것을 본 순간 놀랐다. 

그늘이 있고 개구리밥이 흐르고 그리고 언제나 흐릴 줄을 모르는 이 푸른 물까지도 자기의 불찰을 꾸짖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필재의 얼굴이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소금쟁이란 놈이 무엇을 잡아먹느라고 정신없이 돌고 있던 탓이었다. (p.164-165)

 

필재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듯이 낡아 빠진 집을 둘러보곤 했다. 밤이면 황암정에서 원귀가 운다던 이 낡아 빠진 집...

필재는 어렸을 때 들은 소리였지만 원귀들이 밤마다 울어야 할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을이 수복되자 김씨 마을 사람들은 다시 고갯짓하고 이씨 마을 사람들은 기를 펴지 못해야만 했다.

필재에겐 그것이 싫었다. 서로 할퀴고 깎으려 드는 그런 싸움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말았다.

필재는 무슨 영문인지 골로 붙잡혀 갔다. 가서 보니 별일이 아니어서 필재는 쉬 풀려 나왔다.

식으로 인해 어떤 혐의를 받고 불려 갔을 뿐이었다.

그래도 필재는 거기서 근 일주일이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그의 눈에선 인젠 눈물이 고갈된 듯싶었다.

어머니의 한평생도 결국은 이 낡아 빠진 집을 위하여 희생물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자 필재는 가슴이 또다시 무너지는 것같이 뭉클거렸고 새로운 눈물이 쏟아져 흘렀다.

필재는 더 이 마을에 머물러 있기가 싫었다. 아무리 바빠도 며칠 더 근신하다 가야 한다는 종친들의 권하는 소리도 물리치고 마을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p.198-199)

 

밖은 그대로 어둡기만 했다. 이 어둠이 가시면 새 아침이 오듯이 종가도 종손도 허물어짐으로 하여 진정 길녀나 태식이나 자기 같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만 같다. (p.20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명문가 그 깊은 역사 - 권오영 외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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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해>

<고가>는 장동 김씨 가문의 종갓집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봉건 이념을 가진 할아버지는 근대적 사상을 가진 숙부의 가출과 죽음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6.25 전쟁이 터지자, 삼촌 태식과 길녀는 공산당이 된다. 북한군이 패하자 태식은 할머니 방에 불을 지르고 떠나고 길녀는 목을 맨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재는 집안의 모든 불행이 종가 의식에 있다고 생각하고 집과 봉토를 다 팔아버린다. 이 작품은 봉건적 제도와 관습이 민족끼리 싸우는 6.25와 같은 불행을 가져온 원이라고 보고 있다.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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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숙(鄭漢淑, 1922년 11월 3일 ~ 1997년 9월 17일)

시인과 극작가 활동하였던 대한민국의 소설가, 교육가이다

호는 일오(一悟). 평안북도 영변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교수 및 한국문예진흥원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전광용(全光溶)·정한모(鄭漢模) 등과 ‘시탑’·‘주막’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었던 1948년 단편 「흉가」가 『예술조선』 에 입선되고, 1952년 단편 「아담의 행로」·「광녀」를 발표하였다. 1953년 중편 「배신」이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5년 1월 『한국일보』에 발표한 단편 「전황당인보기」는 문방사우의 전통적인 미풍을 세속적인 이해와 대조하여 그린 작가의 초기 대표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전통적인 것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가는 인장 예술의 말로로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미풍과 양속 그리고 사라져 가는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애석함이 배어 있다. 정한숙은 이 작품을 고어투로 쓰고 있다. 이러한 문체상 특징은 이 작품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것과 고풍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세속적 현실에 대한 환멸을 시적 서정성으로 느끼게 하는 효과를 획득하게도 해준다.
이 작품이 고풍스런 운치와 암시적 효과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56년 7월 『문학예술』에 발표한 단편 「고가」는 6·25를 배경으로 종가 제도를 유지하려는 구세대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신세대와의 갈등과 대립의 비극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국의 당대 현실을 파헤치고 있는 가족사의 축소판이라고 평가된다. 이후에 발표한 「금당벽화」·「이성계」·「논개」 등은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시를 써 발표하기도 했다.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수법으로 여러 가지 구성상의 실험을 시도하는 정한숙의 작품세계는 그가 이상주의자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정한숙 소설의 궁극적 의도는 새로운 시대상황에서 살아 갈 새로운 한국적 인간상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에 드러나는 신구제도와 세대의 갈등, 현실에 대한 냉혹한 관찰, 끈질긴 이상의 추구 등에서 성실한 작가적 양심을 읽을 수 있다.
소설집으로 『애정지대』(1957)·『묘안묘심(描眼描心)』(1958)·『황진이(黃眞伊)』(1958)·『내 사랑의 편력(遍歷)』(1959)·『암흑의 계절』(1959)·『시몬의 회상』(1959)·『끊어진 다리』(1963)·『우린 서로 닮았다』(1966)·『조용한 아침』(1976)·『안개거리』(1983)·『말이 있는 팬터마임』(1985)·『대학로 축제』(1987) 등이 있다.
한국현대문학 관계 연구서로서 『현대한국소설론』(1973)·『소설기술론』(1975)·『현대한국작가론』(1976)·『해방문단사』(1980)·『현대한국문학사』(198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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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벽화 - 정한숙 (고려대출판부)

정한숙 작품집 (지만지)

전황당인보기 - 정한숙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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