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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댈러웨이의 창 - 박성원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30.

 

큰 한국문학 413 (96권)

 

목차

 

김영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

 

박성원

댈러웨이의 창

하늘의 무게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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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 댈러웨이의 창

 

창은 진실을 엿볼수 있는 기회다.

만일 창이 없다면 사각의 벽 속에 갇혀 있는 진실을 어찌 구해 낼 수 있단 말ㅇ니가 - 댈러웨이 (사진작가)

 

내가 댈러웨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 층으로 새로 이사 온 젊은 사내 때문이었다. 이 층에는 그동안 내가 취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했던 암실과 작업실이 있었다. 하지만 살림 살기에도 충분한 공간을 취미 생활 때문에 놀리기에는 아까운 감도 없지 않았고 또한 경제적인 문제도 걸려 있었기에 나는 세를 놓기로 했었다. 암실과 작업실을 지하로 옮긴 나는 장판과 도배를 새로 했고, 세를 놓는다는 광고를 생활 정보지에 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주 간단한 이삿짐을 가진 한 사내가 들어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신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홀로 위치해 있었는데, 시내와 거리가 멀어서인지 방은 쉽게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장마 같지도 않던 장마가 끝날 무렵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야경이 멋지다는 이유로 한 사내가 이사를 온 것이다. 언젠가 사내는 이 부근에 왔다고 서울로 가는 길을 잃고 이곳을 헤맸는데, 길을 찾기보다는 야경에 반해 동틀 무렵까지 앉아 있다가 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이곳을 자주 들렀고, 그러다가 우연히 광고를 보았다고 했다.

사내가 가게약을 하고 간 그날 나는 사내를 배웅하면서 야경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사내가 감탄하는 야경을 찾을 수 없었다. 네온사인은 날을 잘 간 칼처럼 번뜩이긴 했지만 아래위로, 또는 좌우로 단조롭게 방전되고 있어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또 멀뚱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은 오징어잡이 배의 늘어선 전구처럼 하리망당 하게 보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발광을 찬양하며 아치랑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빛에 반사되어 허옇게 들뜬 얼굴 때문에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꼭 유령 같았다. 뭉청뭉청 잘려 나간 게시판의 광고지처럼 해진 옷을 입고, 어둠을 탈색시킨 강렬한 빛에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반사물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p.43-46)

 

나는 엄지와 검지로 눈을 지압한 뒤 그녀와 사내가 사라진 이층의 암갈색 벽돌을 응시했다. 내가 총총히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좇으며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한 것은 이상하게도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져 버린 암갈색의 벽돌이 나에게 묘한 단절감을 전해 주었고, 골목길에 아직도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진한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이빔에 잠시 눈이 멀어 나를 일으켜 주던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우울했고, 하다못해 집주인으로서 누굴 찾아왔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도 씁쓸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낡아서 이제는 초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확대기와 폐독극물처럼 방치된 정착액과 현상액 병들이 대신 눈앞을 오갔다. 나는 그들이 있을 사각 공간의 벽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다시 고정된 곳은 창문이었다. 이전에 내가 암실로 사용할 때 설치한 흡혈귀의 망토 같던 두꺼운 커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도배를 하면서 일꾼들이 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커튼이 없어서인지 창은 창다웠다. 언젠가 나는 이 층 작업실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도시 어느 것이 창이고 또 어느 것이 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두껍게 창을 가린 커튼 때문에 암갈색의 벽돌이나 창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커튼을 뗀 창은, 특히 불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창은, 마치 숨구멍을 틔워 주는 듯했다. 나는 그때 암갈색의 벽돌 사이에서 시원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창을 보면서, 창이란 게 사진기의 뷰파인더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만일 창이 없다면 벽돌의 시각 속에 갇힌 실제의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어쨌든 그날 나는 외로움 속에서 한동안 창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때 창을 통해 그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한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고, 이어 다른 그림자는 옷을 벗고 있었다. 신체적 특징이 그림자를 통해 한껏 드러났기 때문에 나는 옷을 벗고 있는 그림자가 내 엉덩이를 털어 주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p.49-50)

 

사실 댈러웨이의 사진을 처음 본 사람은 그가 왜 그렇게 유명한 사진작가인지 알지 못한다. 댈러웨이의 사진은 그림으로 치면 정물화와 인물화 같다. 정물화처럼 식탁 위에 있는 쟁반과 병, 그리고 과일을 찍은 사진이라든지, 인물화나 자화상처럼 사람의 두상을 찍은 사진이 대부분인데, 도저히 예술 사진이라고 볼 수 없는 사진들뿐이다. 더군다나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파사체들의 구도도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또한 인물 사진도 특별한 표정이나 위인을 찍은 사진은 없다. 오히려 댈러웨이가 찍은 인물 사진은 이력서 귀퉁이에 붙어 있는 증명사진보다 더욱 형편없이 보인다. 그래서 댈러웨이는 생전에 사진전 한 번 열지 못한 무명의 작가였다. 댈러웨이의 사진이 유명해진 것은 그가 죽기 바로 전, 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에 의해서여다. 매우 눈이 나쁜 그는 사진을 관찰할 때면 언제나 확대경을 가지고 관찰했는데, 어느 날 역시 확대경을 들고 한 사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진 속에 있는 피사체에서 어떤 모습이 반사되고 또 비쳐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댈러웨이 사진에 대한 첫 발견이었다.

가령 정물화 같은 '식탁 위의 세상'이라는 사진을 보면 어느 한 가난한 농가의 식탁을 그대로 찍은 듯하다. 아직도 뜨거운 김이 소락소락 올라오는 수프라든지, 막 베어 먹은 듯한 빵과 노랗게 잘 익은 감자를 보면 누군가의 식사 도중에 잠시 양해를 구하고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몇 컷의 사진 찍기가 끝나면 이내 자리에 다시 앉아 빵을 수프에 찍어 먹을 것 같은, 하지만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스푼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것을 확대하면 그 안에는 한 군인이 농부를 총으로 살해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댈러웨이는 그 사진을 유고 내전 당시에 시레로 찍었는데, 그는 그 순간에도 슬라브 족 민간인을 학살하는 정부군의 사진을 직접 찍기보다 반사되는 물체에 담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두 번 다시 식탁의 주인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또 막연히 평화롭고 한가롭게만 보이던 어느 농가의 식탁은 사실 죽음의 만찬과 같다는 공포감을 주게 만든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그런 것이다. 사진 자체보다는 스푼이나 병, 그리고 안경이나 눈동자처럼 사진 속에서 반사되는 또 다른 눈을 통해서 찍는다. 그래서 댈러웨이의 사진은 평범해 보이지만 고도의 기술과 주제 의식이 들어간 최고의 걸작이다. 댈러웨이의 사진을 볼 때면 가장 먼저 작품 전체를 보고 다음에는 항상 반사되는 물체를 찾아야 한다. 그것도 마치 숨겨져 있는 듯한 반사체를. 가령 안경알이라든지 유리라든지 아니면 스푼 같은. 댈러웨이는 그렇게 간접적으로 그리고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말하는 것이다.

댈러웨이의 사진 중에서도 '미치의 창' (이 제목은 댈러웨이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는 이 사진을 자신이 죽는 날까지 발표하지 않았는데, 댈러웨이가 죽던 날 그의 침대 머리맡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전까지 댈러웨이의 작품과는 달리 창이라는 반사체에 보이는 물체가 너무나 희미해 제대로 볼 수 없다.)은 아직까지 해독되지 않은 유일한 사진이다. 댈러웨이의 다른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피사체인 창 속에는 무엇인가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흐려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니 그것이 창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창에 비친 것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필름 회상인 아그파와 댈러웨이가 활동하던 나라의 사진작가 협회에서는 창 속에 있는 모습을 정확히 해독하는 사람에게 백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p.55-58)

 

'창은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만일 창이 없다면 사각의 벽 속에 갇혀 있는 진실을 어찌 구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창을 사진기에 있는 뷰파인더를 통해서 본다.' (p.59)

 

댈러웨이는 뷰파인더라는 창을 통해 사각의 벽 속에 있는 진실을 엿본다고 했는데, 내가 찍은 사진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 내가 찍으려는 의도는 고사하고 당시에 찍은 상황도 제대로 담겨져 있지 않았다. 진실이나 실제의 모습은 차라리 뷰파인더 밖에있던, 내가 찍으려고 마음먹던 그 순간뿐이었다. (p.59-60)

 

"겉멋, 겉멋 있잖아요. 그게 다 댈러웨이가 죽고 나서 유명해지니까 사람들이 겉멋이 들어서 그런다니까요. 댈러웨이에 대해 한마디라도 더 하면 자신이 똑똑한 줄 알고 말입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요. 제 주위에도 그런 인간들 많아요. 댈러웨이가 이랬지, 저랬니...하면서 말입니다. 댈러웨이이 사진을 특별한 장소에서 보고 왔다는 말은 모두 거짓일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댈러웨이의 사진은 특별한 전시장이 아닌 불특정 장소에서 전시된대요. 그것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곳에 말입니다. 사진 기법이 그렇듯이 사진 전시 또한 아주 평범한 장소에 있죠. 그러나 특별히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쉽게 찾지 못하죠. 그런 식으로 전시를 하는 이유는 허위의식에 길들여진 인간들을 혐오하기 때문이래요. 만일 광고나 설명을 듣고 전시장을 찾는다면 누구나 감탄을 하면서 댈러웨이의 진가를 알아보겠지만, 댈러웨이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작품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나 봐요.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답을 보여 주는 자신의 사진처럼, 각자 스스로 진실과 허위를 가려내라는 마지막 메시지인 것 같아요. 제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p.61)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댈러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돈도 되지 않는 그딴 이야기로 괴로워하는 나를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p.64)

 

사내는 더 이상 댈러웨이 사진을 해독하지 않았다. 대신 원본 사진에 없는 영상을 입히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고, 그래픽이나 몰핑 기법으로 자신이 합성시킨 사진을 보고 며칠씩 깔깔대며 웃는 것이었다. 나 또한 주말이면 사진기를 들고 나가 필름을 두어통 소비하고 왔지만 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무력감뿐이었다. 창도 없는 벽에선 외로움이 쏟아졌고, 나는 다른 댈러웨이 중독자들처럼, 그저 망연히 사진기를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그런 나를 보고 슬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위로한답시고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세상은 어차피 허위에 중독되어 있어요. 그것도 거대한 거짓에 말입니다. 그 거대한 거짓은 빈틈없이 잘 물려 돌아가는 바퀴와 같아 일부분이라도 마모되거나 닳아서 나달거리면 전체가 정지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누구도 거짓이란 걸 알지만 적당히 감추는 것이 미덕이 되어쏘, 이제는 거짓이 진실인지, 아니면 진실이 거짓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댈러웨이? 까짓것, 잊으세요. 어차피 댈러웨이가 상ㅍ훔화된 마당에 진정한 댈러웨이 정신은 죽었잖아요? 당신이 진정으로 댈러웨이를 아낀다면 차라리 그를 잊는 게 위하는 길일 겁니다."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내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화면에는 천사 날개를 단 원숭이가 사과를 맛있게 먹으면서 웃고 있었다.

"이 장면을 봐요. 실제는....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현실 세계는 차라리 이런 모습이에요." (p.65-66)

 

그날 나는 이 층 창이 보이는 어둠 속에 앉아서 사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져온 사진집을 펼쳤다. 책 안에 숨겨진 지폐를 찾는 것처럼 빠른 동작으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느 한 사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사내의 이름이 똑박 박혀 있었고 또한 사내의 증명사진이 아래편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증명사진 위에는 사내의 작품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댈러웨이 작품으로 알려진 사진이었다. 한 사내가 평범하게 웃고 있는 인물 사진이었고, 사진 속 남자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면 뭔가가 분명 비치고 있었다.

"가끔은 제 직업을 말하기가 부끄러워요.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게 제 직업이죠."

순간 사내가 이사 온 날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내가 집들이 때 댈러웨이 사진을 보면서 왜 그렇게 풀 죽은 표정을 지었는지 그때야 알 것 같았다.

사내의 그림자가 오가는 이 층의 창이 마치 사내가 말하는 컴퓨터 같았다. 없는 사실을 실제처럼 만들어 낸다는 커다란 컴퓨터. 창으로 사내의 그림자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내가 창으로 비칠 때 외에는 사내의 모습이 암갈색의 벽에 가려 있어 사내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창으로 비친 그림자가 사내라고 단정할 그 무엇도 내겐 없었다. 어쩌면 지금 비친 그림자는 사내가 아니라 사내의 여자 친구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내의 여자 친구는 창으로 볼 수 없는 암갈색의 벽돌 뒤에 숨어서 웃고 있는지, 아니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내의 여인이 방 안에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창으로 비친 그림자는 사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도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내의 남자 친구일 수도 있다. 아니, 아니, 어쩌면 창으로 보이는 그림자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만든 그림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에 창문 안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창을 통해서 사각의 벽 속에 있는 실제를 엿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 바로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진실이 창을 향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림자를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는 아직도 사각의 벽 안에 웅크리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창은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 실제는 사각의 벽 속에 온전히 있을 뿐이고, 창은 다만 진실을 향한 허망한 갈망일 뿐이다. 나는 어지러웠다. 지구의 위성이 되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내 몸이 허공에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왜 델러웨이라는 거짓의 인물을 만들었을까. 사내는 왜 자신의 사진 기술을 이름도 괴괴한 댈러웨이라는 가상 인물의 기술이라고 말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거짓을 진실로 알고 있고, 그것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제인 것을.

사내는 이사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간단한 짐만을 가지고 내려왔다. 사내는 게약 기간이었던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떠나는 사내에게 악수를 건넸고, 사내는 유쾌한 표정으로 악수를 받았다.

사내의 자동차가 컴퍼스처럼 선회하였고 이어 언덕을 내려갔다. 순식간에 사내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격발음 같은 디젤소리는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사내에게 댈러웨이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지어낸 것인지 물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하지만 후회하는 마음은 마술사가 숨기는 토끼처럼 이내 사라졌다. 나는 사내가 떠난 이 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불이 꺼져 있어 그림자 조차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저 아래에는 사내가 멋지다던 도시이 불빛만이 어둠을 탈색시킨 채 한가로이 감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내는, 아직도 똘똘 뭉쳐 거짓을 믿는 도시로 홀홀히 사라져갔다. (p.71-74)

 

<작품 이해>

<댈러웨이의 창>은 삶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소설의 진실에 천착한 작품이다.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댈러웨이라는 사진작가의 작품 세게를 접하게 되면서 그에게 몰입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댈러웨이는 사실 가공의 인물이었다. 박성원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세상은 거짓을 진실로 알고 있고, 그것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제'라고 삶의 역전된 현상을 들려준다. (p.155)

 

1. <댈러웨이의 창>은 현대 사회의 복제된 이미지 (시뮬라크르)를 담고 있어요. 복제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 현상에 대해 써 보세요.

'허위에 중독'된 세상은 복제된 이미지로 가득 찬 현대 사회를 정확히 지칭하고 있어요. '거짓이 진실인지, 아니면 진실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렇게 복제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여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어요. 현실을 대체하는 이미지의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생생하게 인식되는 복제물이에요.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부분이 그러하지요.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즐기는 것을 보면 요즘 실재와 복제품의 위치가 역전되었음을 알 수 있어요. 바로 '시뮬라크르'를 말하는 것이지요. 프랑스 어로 시늉, 흉내 등을 뜻을 지닌 시뮬라크르는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 어 '시뮬라크룸'에서 유래한 말이에요. 이 단어는 모조품, 가짜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고 있어요. 그처럼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체한 현상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시뮬라크르는 새롭게 창조된 자기 정체성을 갖고, 그 이면에는 어떤 기원이나 기초도 갖지 않는 외관들 그 자체를 말해요. 즉 현실을 대체한 거짓이기보다는 새로운 창조물로 인정하는 것이지ㅛ. 박성원이 <댈러웨이의 창>에서 전하려 했던 메시지 또한 그러하답니다. (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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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1969- )

대한민국 소설가.

박성원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94년 문학과 사회에 단편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영남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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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박성원 (문학과지성사)

나를 훔쳐라 - 박성원 (문학과지성사)

얼룩 - 박성원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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