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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4. 수필

오두막 편지 - 법정 (이레)

by handaikhan 2023. 2. 2.

법정 - 오두막 편지

 

오두막 편지 (1998년)

 

절기로 오늘이 하지다. 여름철 안거도 어느새 절반이 되었구나. 그동안 아주 바쁘게 살았다는 생각이 어제 오늘 든다. 모처럼 산거의 한적한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별밭에 눈길을 보내고,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보았다.

그토록 머리 무겁게 생각해 오던 방 뜯어고치는 일을 감행했다. 이 궁벽한 산중에서 방을 뜯어고치는 일은 여간 힘들고 머리 무거운 일이 아니다. 미친 바람이 불어오면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보다 아궁이로 내뿜는 연기가 더 많을 정도로 불이 들이지 않았다. 아랫목은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프라이팬처럼 뜨거워도 윗목은 냉랭하고 습해서 집을 비워두면 곰팡이가 슬었다.

이번에는 아예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를 바구고 방구들을 다시 놓았다. 다행히 불이 잘 들이고 방이 고르게 덥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성실한 일꾼과 나는 온돌방의 묘리를 제대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소 겪는 체험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몇 차례의 실패를 겪으면서 구조적인 원리와 확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일은 비단 방 고치는 일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반에 걸쳐 해당될 것이다. 실패가 없으면 안으로 눈이 열리기 어렵다. 실패와 좌절을 거치면서 새 길을 찾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애의 과정에서 볼 때 한때의 실패와 좌절은 새로운 도약과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 딛고 일어서야 할 디딤돌이다.

며칠 전에 도배를 마쳤는데, 아직 빈 방인 채 그대로 있다. 방석이나 경상, 다구 등 아무것도 들여 놓지 않았다. 나는 이 빈 방의 상태가 좋다. 거치적거릴 게 없는 텅 빈 공간이 넉넉해서 좋다. 얼마쯤의 불편과 아쉬움이 오히려 즐길 만하다. 물론 언제까지고 빈 방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그 기간을 자꾸만 연장하고 싶다.

내 이야기는 이만하고 이제는 그쪽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집 짓는 일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는지, 이엉은 덮었는지 궁금하다. 장마철이 오기 전에 지붕을 덮어 놓아야 나머지 일은 그 안에서 진행할 수 있다. 나 같으면 벌써 일을 마쳤을 텐데 아직도 끝내지 않았다니 그 저력이 대단하구나. 상량을 한 지도 벌써 달포가 지났는데 두 칸 방 집을 짓는 그 진행이 너무 더디다.

물론 날씨와 그럴 만한 현장의 사정이 있을 줄 안다. 일을 하면 서도 즐겁게 해야 그 일의 결과도 좋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자원봉사 명분으로 불러다 쓰는 공양주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의 은혜와 신세를 그렇게 오랫동안 져도 좋을까 하는 생각이다. 시은을 많이 입게 되면 그 타성에 젖어 정진이 소홀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방 두 칸 지으면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력과 시간과 시은을 들이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상량문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그 두 칸 흙집이 진정한 수행자의 거처가 되기를 바란다. 야유몽자 불입(夜有夢者不入) 구무설자 당주(口無舌者當住). 밤에 꿈이 있는 자 들어가지 못하고, 입에 혀가 없는 자만이 머무를 수 있다.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절박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밖으로 흩어져 안으로 여물 기회가 없다. 침묵의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

나는 그 두 칸 흙집 자체가 질박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모습이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들은 편리한 문명의 연장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넘치는 물량을 받아 쓰느라고 순간순간 수행자의 덕이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라.

이 기회에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나, 그 수행자의 집에는 아예 전기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말아라. 전기가 들어가면 곁들어 따라 들어가는 가전제품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전화도 필요없어야 한다. 편리함만을 따르면 사람이 약아빠진다.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것이 곧 도 닦는 일임을 알아라.

둘, 수도를 끌어들이지 말아라. 수도가 들어가면 먹고 마시는 일이 따라가고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듥 된다. 마실 물은 바로 지척에 있는 암자의 샘에서 물병으로 길어다 쓰면 될 것이다. 그 집에는 차 외에는 마실 것도 두지 말아라. 찻잔은 세 개를 넘지 않아야 한다. 많으면 그 집에 어울리지 않고 소란스러워 차의 정신인 청적에 어긋난다.

셋, 그 수행자의 거처를 서전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위치가 암자의 서쪽에 있다는 뜻도 되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의 청정한 생활규범인 서래가풍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수행자의 집에는 여성들의 출입을 금해야 한다.

넷, 그 수행자의 집에 거처하는 사람은 반드시 새벽 세 시에 일어나고 밤 열 시 이전에는 눕지 말아라. 새벽 예불은 수도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이므로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잔소리가 길어졌구나. 그러나 요즘에는 이런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점점 사라져가는 세태다. 여러가지로 불비한 여건 아래서 집짓느라고 고생한 그 공덕은, 그 집을 의지해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두고두고 회향될 것이다. 집 짓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일찍이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상에 당부한 사항을 지키는 수행자라면 우리는 한 부처님의 제자로 같은 길을 가는 길벗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뜻은 십만팔천 리가 될 것이다.

끝으로 옛사람의 말을 안으로 새기면서 이 사연을 마친다.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처음 세속의 집을 등지고 출가할 때 그 첫마음을 잊지마라. (14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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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무소유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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