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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2. 외국 문학

황금시대 - 케네스 그레이엄 (임보라 옮김, 달섬)

by handaikhan 2023. 2. 10.

달섬 세계고전 23

 

케네스 그레이엄 - 황금시대 (1895년)

 

인생의 문이 내 등 뒤에서 닫히기 전, 그러니까 나의 옛 시절을 되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가 말할 모든 일들이 부모라는 올바른 장비를 가진 어린애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을 거라고,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고작 이모나 삼촌뿐인 어린애는 조금 특별한, 조금 다른 마음 상태를 갖고 살기 마련이다. 이들은, 정말이지, 우리의 신체적 요구까지는 친절하게도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너머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생각컨대 그런 무관심은 모종의 멍청함이 빚어낸 결과이리라) 따라서 이 어린애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상당히 객관적이고 온화한 방식으로 그런 멍청함의 존재를 알아냈던 것을, 그리고 그 멍청함이 세상에 얼마나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가에 대해서도 알아챘던 것을 기억한다. 내 안에서는 고집스럽고 변덕이 죽 끓으며 변화 무쌍한, 어떤 강력한 힘에 대한 인식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었다. '뭐 그냥 그렇게 하기로 정했어'라고 지껄이는 어떤 힘 말이다. 그 힘은, 예컨대, 우리보다 능력도, 자질도 안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권세를 줬다. 사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훨씬 더 이치에 합당할 텐데도 말이다. 이 윗사람들, 그러니까 순전히 운이 좋아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자들에겐 어떤 존경심도 가질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의 운에 대한 질투와 그것을 제대로 이용도 못하는 무능함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감정만 느낄 뿐. 실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완전한 기회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은 이들이 지닌 안타까운 특성들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특성이었다. 이들의 습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긴 하지만 어쩌다 생각해 봤더니 그렇더라는 얘기다. 하루 종일 연못에서 물장구치며 놀거나 닭사냥을 하거나, 비싼 나들이 옷을 입고 나무에 오르거나, 대낮에 화약을 사거나, 진디밭에서 대포를 쏘거나 광산을 폭파시키는 놀이를 할 수도 있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이런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요일마다 이들을 성당에 붙잡아 놓는 저항불가의 힘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주 제 발로 성당에 갔다. 우리만큼이나 성당 가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p.7-8)

 

대체적으로 이 신들의 삶에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한정되어 있었고, 느려 터졌으며, 하나 같이 틀에 박힌 습관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도무지 볼 줄을 몰랐다. 이들이 보기에 과수원은 많은 양의 사과와 체리를 만들어 내는 곳이었따. 혹은 그렇지 않는 곳이었다. 대자연의 실패라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니 말이다. (p.9)

 

어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는, 실로 놀라운 무리들이었다. (p.9)

 

그가 목격했던 건 어른-신들의 습관이었다. 사과 한 마디면 끝날 것을, 끝끝내 어른들은 사과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p.12)

 

바람이 아침의 신처럼 고래고래 고함치며 높게 불어댄다. 포플라 나무는 이리저리 세차게 흔들린다. 죽은 나뭇잎은 떨어져서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은 거대한 하프마냥 음악에 몸을 떠는 듯.

바야흐로 한 해가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대지는 잠이 덜 깬듯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만물이 벌떡 일어나 요동치고 있었다. 휴일이자 생일이었다. 하지만 누구의 생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군가가 선물을 받고, 판에 박힌 좋은 말을 듣고, 이유 없는 영웅심으로 고무되는 날. 그러긴 했으나 휴일은 모두를 위한 날, 모두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날, 모두가 햇볕을 쐬며 물웅덩이 놀이, 울타리 부수기 같은 야외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말 새끼처럼 초원을 달리며 날 보며 미소 짓는 자연과 교감했다. 하늘은 그야말로 파란색을 뽐내고 있었고 겨울의 홍수가 남기고 간 널찍한 웅덩이는 하늘의 파란색을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게 반사하고 있었다. 어떤 손길 같은 것이 내 작은 몸속에 있는 무언가를, 그리고 구석에 피어있는 앵초꽃 안에 있는 무언가를 태우는 것 같았다. 나는 적어도 하루 동안만큼은 가르침이나 훈계에서 벗어나 햇볕 충만한 자연으로 뛰어 나갈 수 있었다. 내 다리는 알아서 달렸다. 비록 등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이 들리긴 했으나 나는 계속 달렸다. 해롤드인 것 같았다. 해롤드의 다리는 내 다리보다는 짧았지만 나보다 오래 더 잘 달리곤 했다. 잠시 후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번엔 좀 더 희미하게, 중간중간 끊기면서, 나는 멈춰 섰다. 샬롯이었다.

샬롯이 헐떡이며 내 옆에 있는 잔디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와 샬롯 어느 누구도 굳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완벽한 아침을 만끽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만족스러웠으니까. (p.13-14)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길에 등러서자 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다음엔 비명 소리, 으러렁 대는 소리, 총소리, 영우적인 행동이 등장했고 마침내 에드워드는 데굴데굴 구르더니 쓰러져 죽었다. 다 아는 얘기지만 곰 역할을 맡은 사람은 결국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온통 결투와 학살로 물들 것이고 미물의 시대가 인간이 힘들여 일군 문명을 몰아낼 테니까. 이 사소한 소요는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끝났고, 우리는 길을 걷다가 도중에 해롤드, 머핀 없는 해롤드를 만났다. (p.15-16)

 

제리는 일본에서 온 소년이었다. 머리털이 곧고 검은 제리는 광목으로 만든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애의 평판은 몹시 안 좋았다. 원래 이름은 제롬이었는데, 계단에 걸려있는 그림 속의 성인 (성 제롬)과는 비슷한 점이 없었다. 서양의 성인과 동양의 죄인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정수리에 머리털이 없다는 점뿐이었다. (p.53)

 

"자, 저번 이야기에 이어서 말하는 거다." 샬롯이 주먹으로 잔디를 쾅쾅 내리치며 말했다. "잘 들어. 너희들이 잠들기 전 내가 특별히 얘기해 주는 거다. 그러니까 말이지...음, 흰 토끼가 막 달려갔고 앨리스는 토끼가 다시 오길 바랐어. 왜냐하면 토끼는 조끼를 입고 있었고 앨리스의 홍학은 나무에서 날아갔기 때문이지. 아직은 이 얘기 할 때가 아니구나. 잠깐만 기다려봐. 어, 음...그리고...어디까지 얘기했지?"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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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루이스 캐럴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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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댁에서는 격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다들 마치 엘리자베스 여왕 마냥 우아하고 고상하게 행동했다. 천장이 낮고 오크나무로 장식이 된 응접실에는 케이크와 포도주가 차려져 있었고, 몇 마디 예의 차린 말들이 오고 갔다. 엘리자 숙모는 몹시 점잔을 빼면서 라킨 부인과 얘기를 나눴다. 라킨씨와 나는 변덕스런 날씨와 옥수수 가격 하락을 놓고 열심히 대화했다. 한편 사비나는 자신의 무릎에 <천로역정>을 펴 놓고 아름다운 삽화가 그려진 책장을 열심히 보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간간히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엘리자 숙모의 방해 때문에 나는 사비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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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 존 번언 (김창 옮김,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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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는 에드워드를 보더니 정말 정말 최고로 짜증 나게 혀를 내밀며 녀석을 조롱했다. 그러더니 휭하니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어깨는 팍 굳어진 채로 앙증맞은 머리통을 꼿꼿이 쳐들고 말이다. 남자는 사랑을 위해선 많은 것을 참을 수 있다. 가난도, 숙모도, 경쟁자도, 그 어떤 장애물도.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의 불꽃을 더 타오르게 할 뿐. 하지만 연인의 조롱은 급소를 찌르는 화살 같은 거다. (p.68)

 

"내 생각에 우리는 공통점을 가진거 같군요. 나이 든 나는 꿈을 꾸고, 어린 당신은 상상의 세계를 보니까요. 나보다 당신이 더 행복한 사람이지요." (p.84)

 

우리 둘이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꾀죄죄한 부랑자가 지저분해 보이는 여인과 들개 한 마리와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징징대는 소리를 했다. 직업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동정을 구하며 내 친구를 바라봤다. 마사에게 들어서 알게 된 건데, 이 시간쯤이면 사람들은 분명 돈 한 푼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가 말하길, 자신은 아침엔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지만 저녁만 되면 빈털터리가 된다고 했다. 아저씨는 이 모든 것을 부랑자에게 아주 자세히, 예의 바르게, 그리고 미안해하면서 설명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돈이 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부랑자는 아저씨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저씨의 눈, 생김새, 팔다리, 직업, 가족 등등 하여간 모든 것을 들먹이며 욕을 해댔다. 구부정한 자세로 계속 악에 받쳐 씩씩대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들이 길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매우 지쳐 보이던 여인이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러자 부랑자는 여인의 짐을 대신 들더니 거칠지만 친절한, 심지어 온화해 보이는 태도로 자신의 팔에 여인이 기대게끔 하는 것이었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개가 여인의 손을 핥았다.

"보세요." 내 친구가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피어나고 있잖아요.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본 적 있어요? 모든 게 황량하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만물이 은빛 거미줄 속에 존재해요. 요 가느다란 실로 온 세계가 서로 엮여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세계가 신화에 나오는 무시무시하고 고압적인 신들의 공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신비하고, 신성한 뭔가가 있어요. 그러기에 세심하게 봐야 해요. 세심하게."

이슬이 내리고 있었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향했다. 사방에 외로움 뿐이었다. 금성만이 하늘에, 외롭게, 저 멀리, 순수한 자태로 떠 있었다. 금성은 외로움 속에서도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p.89-91)

 

다음 날 아침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그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어제 밤, 바람이 굉장했다. 바람은 부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부엌 바닥을 온통 눈으로 덮어놓았다. 그리고는 세상 요란하게 전진하며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해롤드는 무섭다고 달달 떨면서 요리사 아주머니의 커다란 가슴에 안겼다. 에드워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딕과 해리와 조처럼 의연하게 행동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해롤드와는 달리 도망치기엔 너무 덩치가 컸었고 에드워드와도 달리 이 마술 같은 자연의 힘에 압도당해 버렸다. 이 눈과 바람은 대체 어디에서 오기에 마치 군대와도 같이 우리를 덮친 것인가. 그런 한바탕 소동이 끝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요한 저녁 시간, 불에 밤을 구워 먹고 한데 모여서 유령 이야기를 듣는 그러한 고요한 시간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검은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적갈색 옷을 걸치고, 활과 화살을 지닌 채 손에는 거위를 들고 있는" 멀린에 대한 얘기를 듣거나, 아니면 마법의 땅으로 가는 길을 묻는 덴마크인 오기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혹은 종소리를 내면서 순록을 끌고 다니며, 열려 있는 문 앞에 갑자기 멈춰 선다는 눈의 여왕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여왕이 멈춰 설 때면 북극광이 창을 휘두르며 보초를 선다는 이야기. (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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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론 연대기 - 장 마르칼 (김정란 옮김, 북스피어)

북유럽 신화 -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서미석 옮김, 현대지성)

눈의 여왕 - 안데르센 (김양미 옮김, 인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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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인물이 됐건 우리들의 무리에 낯선 이가 등장하면 그 자는 곧 바로 의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여하튼 낯선 자가 나타나면 우리는 동굴로 숨거나 땅을 파고 들어가거나 잡목 숲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외양간으로 숨었다. 그러면 숱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귀신같이 알아내는 유모가 나타나 우리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신화 속의 영웅들을 처음 접했을 때 그들에게 별 흥미를 못 느낀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확신은 천천히 자라나는 거라고. 이 검은 머리털을 단 거대한 반신반인들은, 이름도 참으로 희한했거니와, 이미 탄탄하게 방어되고 있는, 적들의 성을 뺏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우리에겐 낯설기 짝이 없는 외국산 여신들은 우리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신들은 성질 더럽고 적의로 가득 찬 요정 아니면 북구의 마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p.107-108)

 

우린 신화에 등장하는 낯선 신들을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늙다리 농경신은 벼락부자쯤 되어 보였다. 하지만 낯선 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내 그들을 우리의 친구로 만들 수 있었다. 멋진 샌들을 신은 페르세우스는 오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폴로가 아드메토스의 문을 두드리는 방식은, 상당히 맘에 들었다. 프시케는 도움을 주는 새와 친절한 개미뿐만 아니라 마법의 궁전까지 대동했지. 율리시즈는 갖은 전술을 써서 최후의 방어막을 뚫고 결국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고야 말았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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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 - 토마스 불핀치 (박중서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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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에드워드가 엄하게 물었다.

해롤드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남자답게 돼지 밥통을 끼고 앉아서 대답했다. "나는 이아손이야. 이것은 아르고이고. 눈에는 안 보이지만 다른 선원들도 있어. 우리는 방금 헬레스폰트를 지났지. 신경 끄고 꺼져 줄래?" 녀석은 포도주처럼 어두운 바다를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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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호의 모험 -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김원익 옮김,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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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문제가 있긴한데. 만약 그 애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도덕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모험은 순레 여행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셀리나는 거절한 후 어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칠 가능성이 있는 애였다. 그 애는 양심이라는 기분 나쁜 물건을 키울 만한 나이였으니까. (p.110-111)

 

나는 이런 것을 전에 본 적이 있지만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요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이 요상한 물건의 정체에 대해 중지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나는 메데아가 집에서 나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머리 색이 검고, 날씬하긴 한데 창백하고 힘없어 보이는 그 여자. 난 그 여자가 메데아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롤드는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려는 고양이처럼 해시계 위에 오르려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녀석은 턱을 찧고 곡소리를 냈다.

메데아는 날쌘 제비처럼 달려 와서 무릎을 꿇고 해롤드를 달랬다. 그리고는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서 녀석의 턱에서 흙을 털어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녀석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가 에의 바르게 말했다. "울다가 곧 그칠 거예요."

내 생각이 맞았다. 마침내 해롤드는 마치 정각이 되면 시계 종이 울리듯 갑자기 울음을 그쳤다. 매번 그런 식인 녀석이었다. 그러더니 명랑 쾌활한 얼굴로 메데아의 품에서 빠져 나가더니 허락 없이 날아 들어온 새에게 돌팔매질을 하겠다고 돌을 찾으러 휭하니 달려가는 것이었다. (p.114-11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그리스 로마 신화 - 이디스 해밀턴 (장왕록 옮김, 문예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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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해적질은 시기 상조였다. 율리시즈도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던가. 율리시즈가 이곳에 있었다면 아마도 철수하라고 조언했을 거다. 에드워드는 내가 아주 형편없는 조언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시즈에 대한 녀석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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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박석일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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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의 모든 길은 유쾌하고 다정하며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다른 길과는 달랐다. 뭔가 진지한 목적을 갖고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풍긴다고 할까. 이 길을 걷다 보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다른 길은 주로 생울타리와 웅덩이 같은 것으로 관심을 끌었다. 멋진 풀과 들쥐와 개구리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 왜냐면 길 이쪽저쪽에서 조그만 손들이 당신의 눈길을 끌기 위해 쓱 하고 나타날 테니.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있는 이 특별한 길은 다소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둑과 울타리를 벗어나 탁 트인 들판으로 곧게 이어진 길이었지만 천박한 인간들이 그저 우연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실망감에 지쳐 허덕일 때, 혹은 오늘처럼 마음이 온통 ㅅ히커먼 지옥과도 같을 때, 나는 그 길 위에서 홀로 걷곤 했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리고 나 역시 그런 세상에 등을 돌린 어느 오후에도 난 그 길 위에 있었다.

"기사의 길". 우리 어린애들은 그 길을 그렇게 불렀다. 란슬롯과 그의 전사들이 멋진 군마를 타고 오게 된다면 바로 이 길로 오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 강인한 기사들은 미지의 장소에서 여전히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어른들은 종종 이 길을 "순례자의 길"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순례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p.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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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 제임스 놀스 (김석희 옮김, 비룡소)

캔터베리 이야기 - 제프리 초서 (김진만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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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 좋아할 거야." (p.13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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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 사람에겐 운명도 격려를 보내주는 법이다. 2부도 지나지 않아 나는 녹슨 단추 걸이를 발견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우리들의 놀이방에도 남녀 공용의 흔한 단추 걸이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이처럼 특별한 단추 걸이를 가진 애는 없었다. 나는 이 보물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다른 서랍의 뒷 편에는 오래된 외국 우표 세 개가 있었다. 나는 이른바 보물을 손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이후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서랍을 모조리 빼서 앞 부분부터 뒷 부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던 거다. 손잡이든 스프링이든 툭 튀어나온 뭐든 만져봤지만 헛수고였다. 아무런 소출도 내지 않는 그 낡은 책상은 비밀을 수호하면서 그렇게 굳건하게 서 있었다. 지킬 비밀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상당히 지치고 낙담하게 됐다. 토마스 삼촌은 실없는 소리를 해서 우리들은 이상한 모험으로 이끈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더 찾을 필요가 있을까? 더 수색하는 ㄱ넛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마음속에서는 실망감과 실패감이 들끓고 있었다. 인생은 실패와 불시착의 기나긴 기록 같았다. 완전히 실망해서 나는 수색을 그만두고 창문으로 향했다. 방에서 햇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밖을 보니 해가 지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토마스 삼촌이 에드워드를 거꾸로 붙든 채 패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실성한 듯 버둥대면서 삼촌의 배가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해 헛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녀석이 주머니에서 나온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잔디밭에 흩어져 있었다. 나 역시 한두 시간 전에 비슷한 일을 당했는데도 이제는 그런 광경이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졌다. (p.142-143)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거야. 마치 운명이 나랑 쓰잘데 없는 게임을 하면서 수치심을 느꼈던 것에 대해 뉘우치면서 다시 내게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책상에 손을 대자 비밀 서랍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비밀 서랍을 꺼내서 창문 쪽으로 가져왔다. 빛에 비추어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간 수색을 하면서 너무 낙담한 나머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금괴도, 돈도, 금화도, 나를 벼락부자로 만들어 줄 어떤 것도 그 안에는 없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피리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고, 금빛은 연노랑 색으로 변해 버렸으며, 모든 것이 다시 쓸쓸해지고 고요해졌다. 마음속 내 작은 성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내게 남은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다만 우울함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환멸의 서랍 안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뜨거운 감정이 밀려 오는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졌던 어떤 이의 존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군 제복에 달렸던 것 같은 두 개의 단추, 내가 모르는 왕의 초상화, 내가 모은 동전들보다 더 투박하고 두꺼워 보이는 외국 동전, 세 알의 목록 등이 들어 있었다. 담비의 주둥이와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냄새를 풍기는 콜타르 덩이도 있었다. 어떤 소년이 모아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 아이도 나처럼 비밀 서랍을 발견해서 자기의 보물을 차곡차곡 모아 놓았었으리라. 그리고 아무도 몰래 비밀스럽게 그것을 간직했으리라. 그래서 어쨌다고? 음...아무도 왜 이 물건들이 이곳에 여전히 있는지 절대 알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간의 긴 시간을 거슬러 나는 그 누군가의 손을 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서랍을 믿음직한 책상에 다시 넣어 두었다. 내용물을 하나도 손 대지 않고 말이다. 스프링이 기분 좋게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서랍이 다시 제 자리에 들어갔다. 나 말고 어떤 다른 아이가 이곳에 와서 어느 날 이 서랍을 다시 열어보겠지. 나는 그 아이 역시 나처럼 감사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방에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복도 맨 끝에 있는 놀이방에서 애들이 술래잡기 놀이를 하면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치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곰이나 강도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잠시 후면 나도 그 무리에 끼어 신나게 웃어 제끼며 놀고 있겠지. 이 오래된 방의 문지방에서 서성대고 있는 이 순간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얼마나 멀게 느껴질지. (p.143-145)

 

이 우울함이 예견하는 바는 뭘까? 오늘 같은 날 내 마음을 검게 물들이는 이 우울의 정체는? (p.147)

 

아침 식사 때 스메들리 선생님은 평소처럼 짜증나게 행동하셨다. 애들의 잘못을 다스려야 하는 가정교사들에겐 울 권리가 없었다. 샬롯은 물론 울고 있었다. 하지만 별 일 아니었다. 샬롯은 심지어 돼지 코에 고리를 끼울 때조차도 울어 재끼는 애였으니까. 울게 만든 자는 우는 자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게 마련. 주피터가 울었을 때 역모를 괴한 인간들은 고통을 느끼면서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한니발이 울었다면 로마인들은 어땠을까. 역사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상상 조차 하지 않는다. 양 쪽 모두 규칙과 선례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법. 한쪽이 이 규칙을 어기면 다른 쪽은 당연히 피해 봤다고 느끼는 것이다. (p.148-14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리비우스 로마사 - 티투스 리비우스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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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우리는 이 우울한 기분과 싸우다가 선생님과 영원히 헤어져야 할 판이었다. 다 외우지 못해 절단된 시체마냥 우리에게 남은 구구단에 대한 증오를 품은 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나는 혼자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이 커져가는 우울함과 최선을 다해 싸우면서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모든 것은 변치 않고 그대로 흘러갈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변화라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예컨대 돼지도 우리 곁에 왔다가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

"총알이 발사되고

마침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자연은 변화를 명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빠른 속도로 후세를 안겨준다. 당신은 돼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결국 어른들은 당신에게서 돼지를 뺏어간다. 그래서 당신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새로운 새끼 돼지가 태어나면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돼지가 아니라 가정교사 선생님인 경우에는 대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않는 것 같다. 상황이 더 나아질 수도 있겠고,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지만 결코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애들이 타고난 보수성은 가난도, 부도 바라지 않는다. 어린애들은 다만 변화를 싫어할 뿐이다. (p.149-150)

 

해롤드는 한참 후에야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찔끔찔끔, 그것도 내키지 않아 하면서. 녀석은 이 사건을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 순간의 불행은 빨리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p.170)

 

차디찬 이성은 우리의 계획이 옳다고 말했지만, 난 본능적으로 우리가 바보 머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p.175)

 

어른들이 하는 수많은 어리석은 생각 중 최고봉은 이거다. 어른이니까 이름, 날짜, 그 밖의 것들을 언급하지 않는 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우리가 듣고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마치 2 더하기 2 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말을 하면 밥벌이를 해야 할지도 모르니 현명하게 말을 하지 않는 원숭이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숨기며 살았다. 그리하여 실망한 어른들은 우리를 매사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존재들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p.180)

 

우리에게 학교라는 것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것이 진짜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울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고 우리 중 한 녀석에게 그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는 형편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물론 토마스 삼촌이 답을 줄 수도 있을 거다. 삼촌은 아주 옛날에 학교에 다닌 적이 있으니. 하지만 삼촌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그러니까 같이 얘기하기에 무척 지루한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학교를 맘껏 노는 곳, 해방의 공간, 성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 대부분이 그렇게 말하지만 - 지옥 같은 곳이라고 했다. 에드워드가 가슴을 내밀고 신나게 으스대며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녀석이 자신의 미래를 하나의 측면에서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녀석이 풀이 죽고 온순하며 누이들이랑 놀려고 하는 걸 보면 녀석의 마음속에서 다른 측면에 대한 인식이 슬슬 올라오고 있는구나 싶었다. 그럴 때면 나는 위로 차원에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칠 수 있어." 그 말을 들으면 에드워드는 이네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지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하지만 곧 내 위치와 환경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 음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가진 나는 대부분 명령에 복종하며 살았다. 내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나는 에드워드의 명령에 따랐었다. 왜냐하면 에드워드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책임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성가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말이지 새로운 취지를 갖데 되면 그에 따른 책임도 따르는 법이었다. (p.181-183)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단호하게 나는 천박한 급진주의자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이 괴물같은 이미지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 이미지를 벗고 다시 세상과 맞설 수 있게 된 거다.

하지만 그것을 얻는게 무슨 소용인가. 잃을 것들이 눈에 환히 들어오는. 이제부터 나는 어른들과 아이들의 완충 역할을 해야 했다. 에드워드에게는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꿈쩍하지 않고 어른들의 영향력을 버텨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평화와 조용함을 위해 중재하고, 타협해야 하는데, 그건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일이 아닌가. 계속 그러다간 결국 한 점 나무랄 데 없는 도덕 군자가 되는 건 아닐까. 난 내 생각을 여기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고 싶진 않다. 그 옛날 행복했던 시기엔 막연한 생각들을 단어라는 부정확한 매체로 질서 정연하게 옮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섬세함을 요하는 직책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밀려왔던 건 사실이다.

새 옷을 입은 에드워드를 보니 뭔가 대단한 후광이 에드워드의 주위를 감싸는 것 같았다. 게다가 녀석의 거동은 더 책임감 넘치고 훌륭해 보이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가방과 준비물이 도착하자 미래에 속한 녀석과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등교를 위한 준비물에는 큰 글씨로 그의 이름이 써 있었다. 이후 에드워드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자기의 짐 주위를 돌아다녔는데 그럴 때면 얼빠진 듯 "에드워드..."라고 중얼대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행동은 그의 약해 빠진 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인쇄된 것을 보았을 때 경험했던 강렬한 느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녀석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재빨리 지나가고 점점 우리 주위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부자연스럽기 짝이없는 예의라는 것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점점 "죄송한데요." 라든지, "미안하지만 공 좀 갖다 주실래요"와 같은 말을 사용해서 우리를 당황시켰다. 우린 녀석이 원래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애들은 에드워드 앞에서 굽신대기 바빴다. 어른들 역시 자신들이 지금껏 에드워드를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전반적으로 상황은 긴장과 거짓으로 가득 찼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끝이 왔을 때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우리 모두 역으로 나갔다. 그 당시만 해도 누군가를 배웅하러 나가는 것은 웃기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에드워드는 무리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걷고 있을 때 나는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라르킨 씨에게 에드워드가 휴일에 올 때까지 돼지를 더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녀석은 내게 제대로 된 새총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새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애들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로 치명적인 무기다. 우리가 반쯤 왔을 때 갑자기 여자애 중의 한 명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배멀미를 하는 사람을 보고 감히 비웃을 수 있는, 축복받은 소수의 인간들 중 하나라 해도 눈앞에서 동료 여행자가 고꾸라지는 것을 보게 되면 서둘러 못된 자만심을 접고 이후에는 좀 더 겸손하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에드워드 역시 그랬다. 녀석은 여자 애가 우는 걸 보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마치 풍경을 보느라 정신없다는 듯 말이다. 녀석이 그러는 것도 단지 잠깐 동안이었다. 이내 에드워드는 쓰고 있던 모자에 신경을 썼다. 녀석은 모자를 벗어서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 다시 썼다. 모자가 그에게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제 어른이었다.

역에 도착했을 때 에드워드는 사람들이 상자에 쓰인 자신의 자랑스런 이름을 볼 수 있도록 이름이 전면에 나타나도록 짐을 싣는데 열심이었다. 학교에 처음 가는 날은 한 번 뿐이니까! 그리고 나서 에드워드는 차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돈을 점검하고 다시 용기를 냈다. 우리는 이제 할 말도 별로 없었다. 그저 희생자가 제단에 올려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른처럼 새 옷을 차려입은 에드워드를 보았을 때, 그리고 딱딱한 모자를 쓰고 주머니에는 기차표를 넣고 다른 주머니에는 용돈을 갖고 있는 에드워드를 보았을 때, 나는 그와 우리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깨닫게 됐다. 다행히도 당시 나는 이 작은 플랫폼 위에서 구 질서가 사라지려 하고 있으며, 에드워드가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건 예전의 에드워드가 아닐 것이며 모든 것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정도로 어른스럽진 않았다.

기차가 마침내 증기를 내뿜었을 때 우리는 편하게, 그리고 영예롭게 좌석에 앉아있을 에드워드를 상상해 보았다. 승무원이 에드워드를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드워드의 머리가 창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보여주려고 아끼고 아껴뒀던 멋진 미소를 우리에게 보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기차 속에 있는 그의 얼굴이 매우 작고 하얗게 보였다. 하기만 우리는 여전히 그의 다부지고 멋진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기차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돌아가자 그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그는 드디어 경쟁과 분투가 도사리고 있는 바쁜 세상, 새로운 삶으로 향한 것이었다.

게가 다리를 잃으면 몸짓은 평소보다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진다. 하지만 시간과 자연은 게에게 다시 다리를 내어준다. 우리는 역에서 나왔다. 내내 굉장히 조용했던 해롤드는 내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그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약한 지주였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여자애들은 머리를 맞대고 다가오는 휴일에 뭐할질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자 해롤드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놀이를 했으나 별 재미가 없었다. 나는 다른 놀이도 해 보자고 제안했으나 역시 재미없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뒤집혀진 손수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먹으로 턱을 괴고, 갑자기 바뀌어진 상황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동안 셀리나와 샬롯은 에드워드의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바빴다. 녀석의 쥐들이 사는 우리도 청소해 주고 말이다. 쥐들은 미친 듯이 날뒤고 있었다. 그 애들은 율리시즈의 귀환을 대비하여 새로운 화살과 활, 채찍, 배, 총, 마구를 만들 재료도 착실히 모으고 있었다. 여자 애들은 그 영웅이 돌아오면 자신들이 한 서툰 일들을 경멸적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린애들이나 하는 일들! 이 애들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이 비밀의 이 베일이 벗겨지고 여자 애들이 3개월 후에 돌아올 에드워드, 즉 누더기 옷을 입고, 거친 말을 하고, 관습을 무시하고, 어떠한 육체적 고통에도 꿈적하지 않고, 30분 만에 인형을 갈기갈기 찢어서 신뢰라는 것을 박살 낼, 다시 말해 스페인 해에서 방금 돌아와 으스대며 돌아다니는 선장과도 같은 에드워드를 보게 된다면, 자기들이 에드워드의 복귀를 대비해 정성스럽게 한 일들이 녀석에게 얼마나 한심해 보일지 깨닫게 될까.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미래를 볼 수 있겠는가. 그저 미래의 환멸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여자 애들의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든 성인 되어서든 우리가 어느 순간에 행했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옆에서 보기에도 한심해 보이는 열정과 더불어, 우스꽝스러운 복종의 단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잘못된 열정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라다만투스처럼 판단한들, 즉 우리의 그러한 변화가 제대로 된 성공인지 아니면 애들 장난 수준에 그친 것인지를 판단한들 누가 상관할 것인가. (p.184-19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베르길리우스 - 아니네이스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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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케네스 그레이엄의 <황금시대>는 1895년에 초판 발행되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담은, 일종의 '어린 시절 백과사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을 거쳤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한 때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이 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신기해한다. 우리 역시 먼 옛날, 누군가, 어떤 어른의 마음속에 호기심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린이였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말이다. 그렇게 잊고, 그렇게 신기해하고, 그리곤 다시 잊고, 다시 신기해하고,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다. 잊지 않으면 기쁨도, 즐거움도, 신기함도, 호기심도 없다. 누군가는 잊은 것은 절망스러운 것이라고,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잊는다는 것, 자기의 과거, 자신과 가까운 타인의 과거를 잊는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픈 일이다. 표현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잊는 건, 어떤 면에서는,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잊지 않는다면 새로울 것 없는 이 세상에 새로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삶은, 때로는, 몰라서 새롭고, 잊어서 새롭다.

<황금시대>는 바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보통 소중한 것, 귀한 것은 언젠가는 잃거나 잊는다. 삶은, 그리고 삶을 움직이는 시간이라는 녀석은 우리가 소중한 것을 영원히 손에 쥐고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하나 잃어간다. 얻었나 싶으면 어느새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 있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하물며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는가. 우리는 그걸 죽음이라 부른다.

<황금시대>는 아직 죽음을 모르는, 시간의 마수에서 아직은 자유로운 어린이들에 대한 서사다.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서로 투닥거리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모험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자잘자잘한 사고를 쳐서 어른의 꾸중을 듣기도 하고, 그 어른에게 나름의 복수를 하기도 하고, 어른의 눈을 피해 또다시 사고를 칠 궁리를 하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놀고, 투닥거리고, 모험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어른으로..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르면 어른의 세계로 가는 문턱에 한 발을 딛고 서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어른이 된 자는 더 이상 왜 그러고 사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긴장과 거짓'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

눈치 싸움하느라 '긴장과 거짓'이 끊일 날이 없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어른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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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그레이엄(Kenneth Grahame, 1859년 3월 8일 – 1932년 7월 6일)

영국의 저자이다.

1859년 영국 에딘버러의 건실한 회계사와 변호사 집안의 네 아이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템스 강변의 그림 같은 마을 쿠컴 딘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알코올중독이었던 아버지는 평생 밖으로 나돌아 아이들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부모의 사망으로 옥스퍼드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1879년 잉글랜드 은행에 들어갔다. 1890년경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마치 동인도회사의 C. 램과 같은 착실한 은행원 저술가가 되었다.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은 《황금시대》와 《꿈속의 나날》[2]은 A. C. 스윈번이나 A. 프랑스가 격찬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세인트 에드워즈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애석하게도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은행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문학적 소질이 있었던 그는 단조롭고 고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1899년, 엘스피트 톰슨과 결혼하여 이듬해 ‘생쥐’로 불린 아들, 앨러스테어를 얻게 된다.
그의 명성은 그의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나 편지를 통하여 들려준 강가의 작은 동물의 이야기인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1908)으로 굳어졌으며, 이것은 동화의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 앨러스테어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서, 풍경의 세부묘사가 뛰어나고 소리와 동작의 표현도 다양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들 앨러스테어가 20살 생일을 눈앞에 두고 기차 사고로 세상을 뜬 후, 집필을 그만둔 그는 템즈 강이 보이는 버크셔의 팬브룬에서 1932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교도의 서류》, 《목 베는 여자》, 《로마의 길》, 《출발》, 《싸우기 싫어하는 용》, 《바다의 전설》, 《다툼》, 《베르티의 소동》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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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 케네스 그레이엄 (신수진 옮김,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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