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 결투 (1891년)
고교는? 대학은? 그러나 이것 또한 엉터리였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배운 것도 모두 잊고 말았다. 사회에 대한 봉사는? 그것도 또한 말이 아니다. 관청에 나가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월급이나 거저 타 먹었기 때문이다. 그의 근무는 재판 사태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실은 꺼림칙한 공금 낭비였던 것이다.
진리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양심은 악덕과 거짓에 얽매여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잖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이방인처럼 또는 다른 유성에서 고용되어 온 사람처럼 사람들과의 공동 생활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들의 괴로움이나 사상이나 종교나 학문이나 탐구나 투쟁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단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었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독창적인 것을 단 한 줄도 쓴 일이 없었다. 무엇하나 남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다. 다만 그들의 빵을 먹고, 그들의 포도주를 마시고, 그들의 아내를 빼앗고, 그들의 사상으로 생활하고, 자기의 구역질나는 기생충 같은 생활을 그들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기 위해 언제나 자기가 그들보다 높고 뛰어난 사람인 것 같은 얼굴을 해 왔을 뿐이었다. 거짓이다, 거짓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거짓인 것이다....(163-164)
"생활은 파멸이야!"
그는 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나는 아직껏 살고 있는 것인가. 아아...."
그는 희미해진 자기의 별을 하늘에서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별은 떨어지고, 그 빛은 밤의 어둠이 삼켜 버렸다. 별은 이제 하늘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인생은 한 번 주어질 뿐이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지난날의 허위를 진실로, 무위를 근로로, 권태를 환희로 바꾸고, 자기가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에게 그 순결을 되돌려 줄 것이다. 하느님과 정의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떨어진 별을 다시 하늘로 되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절망에 빠진 것이다. (p.165)
"페테르부르크로 간다는 것은?"
라예프스키는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재 내가 저주하고 있는 옛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철새처럼 장소를 바꿈으로써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로 가든, 대지는 언제나 같은 대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은?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청할 것인가? 사모이렌코의 온정이나 관대라 할지라도 신부의 웃음이나 폰 코렌의 증오와 마찬가지로 남을 구할 수는 없은 것이다. 구원은 자기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p.166)
보트는 밀려 되돌아오고 있어.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거야. 그러나 노잡이들은 까딱도 안 해. 한결같이 노를 젓고 높은 물결도 겁내지 않아. 보트는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었군. 앞으로 반 시간만 있으면 노잡이들은 배의 등불을 똑똑히 볼 수 있겠지. 인생도 이것과 마찬가지야. 진실을 추구하며 사람들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 고뇌와 과실이나 삶의 권태가 그들을 도로 뒤로 밀어 낸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갈망과 굽히지 않는 의지가 앞으로 앞으로 그들을 몰아 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참된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p.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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