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리아 플라사 - 처음 만나는 돈 키호테 (2004년)
옛날 라 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한 시골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증조할아버지의 유품인 찌그러진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다니길 좋아했다. 스스로를 편력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생활이 꽤 여유 있었을 당시엔 망아지였지만, 이제는 노쇠해 버린 말 잔등에 무장을 한 채 올라타고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곤 했다.
그의 집에는 집안일을 맡아 하는 마흔 살 가량의 가정부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조카딸, 금방 집안에서 서성거리는가 하면 어느새 우리로 달려가 돼지 여물을 주기도 하는, 그야말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하인이 같이 살고 있었다.
비쩍 말라 광대뼈가 툭 불거진 오십 줄의 이 시골 귀족은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서재에 쌓여 있는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어찌나 독서광이었던지 이제는 거의 외울 지경이 되어 버린 갖가지 기사 소설들을 사들이느라 전답까지 상당수 팔아치웠을 정도였다.
그는 특히 아서 국왕 휘하의 원탁의 기사들이나 호수의 기사 랜슬롯, 티란테 엘 블랑코, 영국의 팔메린과 롤랑 같은 기사들을 좋아했다. (p.11)
<참고>
돈 키호테 - 세르반테스 (전기순 옮김, 펭귄클래식)
1장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만차 어느 마을에 한 이달고가 살고 있었다. 그는 창 곶이에 놓인 창과 낡아빠진 방패, 말라빠진 말, 잘 달리는 사냥개를 가지고 있었다. 양고기보다 소고기를 좀 더 넣은 전골 요리를 좋아했던 그는 밤마다 살피콘을 먹고, 토요일엔 튀긴 돼지고기와 달걀 프라이를, 금요일이면 완두콩 요리를, 일요일에는 온갖 양념을 첨가한 비둘기 요리를 먹어대느라 재산의 4분의 3을 탕진했다. 그나마 남은 재산도 축제 때 입는 가운과 벨벳 바지와 덧신 따위를 사는 데 써버렸고, 주중에도 순모로 만든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그의 집에는 마흔이 넘은 가정부와 채 스무 살도 안 된 조카딸, 그리고 정원을 가꾸고 말안장을 채우고 들일을 거두는 젊은 하인이 있었다. 우리의 이달고는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섰는데 근엄한 표정에 피골이 상접했고 얼굴색은 어두웠지만,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었고 사냥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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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으면 좋은 책)
원탁의 기사 - 토마스 볼핀치 (한영환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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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나를 모험으로 이끄는구나!" (p.17)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말과 당나귀 고삐를 나무 기둥에 묶어 두고는 자리에 앉아 각자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돈 키혼테는 영광스러운 결투를 꿈꾸었고, 산초 판사는 섬의 영주가 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꿈보다 더 강렬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산초 판사가 보따리 속에서 양파와 치즈, 빵을 꺼냈다. (p.75)
"편력기사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기사께서는 잉글랜드의 아서 왕 이야기 같은 걸 안 읽어 보셨습니까?"
돈 키호테가 되물었다.
"아서 왕은 죽지 않았습니다. 마법에 걸려 한 마리 까마귀로 변해 버린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 언젠가는 아서 왕이 고향으로 돌아와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 때문에 그 시절 이후, 영국인들은 결코 까마귀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돈 키호테가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사이, 갑자기 한 무리의 새 떼가 일행의 머리 위를 휙 지나는가 싶더니 마치 죽음의 왕관이라도 되는 듯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 새 떼를 향해 곳곳에서 새들이 날아들어 합류했다. 다른 새들까지 그 색이 모두 검정빛이어서 하늘은 온통 제비, 종달새, 까마귀 등 상복을 입은 듯한 검은 새들 천지였다. 마치 검은 모포를 덮어 놓은 듯했다.
돈 키호테는 새 떼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 속에 영국 왕 아서가 포함되어 있기라도 하듯. (p.88-90)
"그러니까 편력기사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나 역시 용맹스러웠던 그 기사들처럼 기사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험을 찾아 이렇게 세상 곳곳을 다니지요. 약자를 돕고, 정의를 수호하는 데 심신을 다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말입니다." (p.90)
그 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리소스토모는 선한 사람이었으며 마르셀라는 못된 여자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몇몇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들도 해보았다. 사나이들은 전쟁터에서 죽어간다지만,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참혹한 전쟁이 또 있겠느냐고.
비발도가 관 속에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막 집어들려고 하는데, 나무 사이에서 양치기 처녀 마르셀라가 불쑥 나타났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어찌나 빼어났던지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감탄의 물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단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암브로시오가 친구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은 그 잔인함이 빚어낸 결과를 확인해 보려고 오셨나 보군?"
"아닙니다. 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왔어요. 그리소스토모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여기는 모든 분들에게 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지요."
마르셀라가 대답하더니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 말이, 저를 보고 타고난 미인이라더군요. 그리고 저의 미모 때문에 당신들은 저를 아끼고 사랑하지요. 그러면서 저에게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신들을 사랑하라고 강요합니다.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세요. 혹 제가 못생긴 여자였더라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가 여러분을 비난하는 게 옳을까요?"
돈 키호테는 그녀를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도 마르셀라는 양치기 처녀라기보다는 어느 왕국의 공주처럼 보였다.
"제가 어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당사자는 불평하고 그분의 불행을 제 탓으로 돌립니다. 반대로 제가 저를 사랑하는 모든 분을 사랑한다고 하면 절더러 경박하고, 배은망덕하며, 정숙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겠지요."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중 일부는 마르셀라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그녀에게 주목하면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신의 작품이라 칭할 수 있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연정을 느끼기도 했다.
기사 소설을 떠올리는 데 익숙해 있던 돈 키호테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둘시네아를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같았다.
한편 산초 판사는 마르셀라의 현학적인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호두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마르셀라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독사는 몸 안에 독을 지니고 있어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독으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라도 자연이 준 특성이기에 비난받지 않지요. 저 역시 아름다움을 타고났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정숙한 여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외따로 떨어진 화톳불이거나 칼날과 같아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을 태우지도 칼로 베지도 않는 법입니다."
두 기사는 놀란 표정으로 양치기 처녀의 명료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실 마르셀라는 이 지역 최대 부호의 딸이었지만,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고독한 평원을 선택한 것이었다.
"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양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절 좀 내버려 두세요. 당신들 잘못의 결과를 제 탓으로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치 못하면서 누구를 탓하시는 겁니까? 저는 제 발로 그리소스토모를 찾아간 적도 없고, 그에게 뭔가를 요구한 적도 없으며, 빈말로라도 그 어떤 약속 한 번 한 적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사람들의 반응 같은 것은 기다리지도 않고 휙 돌아 숲 속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은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에 눈이 멀어 버린 몇몇 청년들이 그녀의 뒤를 쫓아가려고 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상냥하고, 지혜로우며, 명석함까지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손에 창을 들고 선 돈 키호테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누구도 마르셀라의 뒤를 쫓을 생각은 마시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그리소스토모의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밝혔소. 그녀의 말은 정당했고, 따라서 편력기사로서 나는 그녀를 보호할 것이오."
돈 키호테의 이런 엄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암브로시오가 다른 목동들에게 이제 그만 친구 그리소스토모의 시신을 매장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서였는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p.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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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플라사 (Jose Maria Plaza)
스페인 북부 도시 부르고스 출생. 작가이자 신문기자로 활동했으며, 스페인 주요 일간지 「엘 문도」에 기고하면서 어린이책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자녀를 생각하며 쓴 책으로 어린이의 마음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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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꼬마 의사 - 플라사 (김수진 옮김, 크레용하우스)
다비드와 괴물의 친해지기 - 플라사 (배상희 옮김, 월드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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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년 9월 29일~1616년 4월 23일)
스페인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첫 근대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돈 키호테》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명작에 속한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지혜의 왕자"(el Príncipe de los Ingenios)라는 별명이 있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의 대학가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고, 아버지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하급 귀족 가문의 외과 의사여서 매우 가난했다. 이에 세르반테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족은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 이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570년 22세 때 이탈리아의 추기경을 따라 로마로 건너가 군인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으나 부상으로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1575년에는 해적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5년간 노예로 생활하다가, 성 삼위일체 수도회의 도움으로 주인에게 몸값을 지급하고 가족이 사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585년 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판하였으나 인기를 별로 끌지 못하였다. 1605년 《돈 키호테》 제1부를 발표하여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615년 《돈 키호테》 제2부를 완성했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1616년 4월 23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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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 세라반테스 (전기순 옮김, 펭귄클래식)
돈키호테 - 세라반테스 (민용태 옮김, 창비)
돈키호테 - 세라반테스 (안영옥 옮김, 열린책들)
돈키호테 - 세라반테스 (박철 옮김, 시공사)
돈키호테 - 세라반테스 (김현창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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