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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장마 - 윤홍길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12. 29.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7

 

윤홍길 - 장마 (1973년)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p.7)

 

아버지와 구장어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헛걸음을 한 것이 우리에겐 삼촌이 실제로 돌아온 거나 다름없는 경사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느 때와 매일반으로 별로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개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적이 안심이 되는 한편 더욱더 착잡해지기도 하는 듯한 두 개의 얼굴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며 엇갈리고 있었다. 경찰서 뒤뜰에서 시체를 못 봤다는 사실이 결과적으로 삼촌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해도 그가 겪게 될 앞날의 고초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모앙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게 아니었다. 대번에 기고만장해 가지고, 그러면 그렇지 그것 보라고, 내가 뭐라고 그러더냐고, 우리 순철이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거지반 고함을 지르듯 말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합장한 두 손바닥을 불이 나게 비비대면서 샘솟듯 흘러내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늙고 추한 얼굴을 들어 꾸벅꾸벅 수없이 큰절을 해가면서,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고 부처림께 감사하고 신령님께 감사하고 조상님네들께 감사하고 터줏귀신에게 감사하면서, 번갈아 방바닥과 천장과 사면 벽을 향하여 이리 돌고 저리 돌고 뺑뺑이질을 치면서 미쳐돌아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가진 소박한 신앙과 모성애가 우리 모두의 가슴 구석구석을 뜨겁게 적시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믿기로 했다. 같이 믿어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할머니를 진정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어떤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에 싸여 예배의식의 한 절차처럼 서로 '아무 날 아무 시'란 주문을 나직이 외어가며 불사신 우리 삼촌의 무사귀환을 신심 깊게 확인하기를 끝없이 되풀이했고 그러다가 그날에 우리가 맞게 될 행복스러운 꿈의 크기를 저마다 재기 위하여 새벽이 방문 밖에까지 와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늦은 잠자리에 다난했던 하루를 고이 눕혔다. 그토록 벅찬 하루를 우리는 살았다. (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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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尹興吉 1942년 12월 14일 - )

대한민국 소설가.

1942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1976년 첫 소설집 『황혼의 집』을 출간하기 전까지 국어교사와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초기에는 중편 「장마」로 대표되는 작품들로 전쟁과 분단체제, 폭력의 역사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나 두번째 소설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부터는 근대 산업화 시대의 노동과 소외의 문제를 다각도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발표한 「꿈꾸는 자의 나성」 등에서는 소시민의 갈등과 좌절을 형상화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유효한 세계의 복합적 아이러니를 핍진하게 그려냈다. 2018년 20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로 식민통치하의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사상과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 가족을 통해 근대사의 비극을 조망한 대작 장편 『문신』을 출간했으며, 전통적 질서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는 평과 함께 2020년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한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묵시의 바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순은의 넋』 『에미』 『완장』 『백치의 달』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소라단 가는 길』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창작문학상, 현대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접기
수상 : 2020년 박경리문학상, 2010년 현대불교문학상, 2004년 대산문학상, 2000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1995년 요산김정한문학상, 1983년 현대문학상, 1983년 한국창작문학상, 1982년 한국일보문학상, 1977년 한국문학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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