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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창비)

by handaikhan 2023. 9. 20.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1권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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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 모래톱 이야기 (1966년)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 이틀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엣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p.149)

 

'섬 얘기'란 제목의 그의 글은 결코 미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은 끔찍한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가 사는 고장 -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아기진달래도 피지 않는 조마이섬은 몇백 년, 아니 몇천 년 갖은 풍상과 홍수를 겪어오는 동안에 모래가 밀려서 된 나라땅인데, 일제 때는 억울하게도 일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는가 하면, 그 뒤는 또 그 조마이섬 앞강의 매립허가를 얻은 어떤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다든가 하는 - 말하자면 선조 때부터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오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뒤바뀌고 있다는, 섬의 내력을 적은 글이었다. 그저 그런 정도의 얘기를 솔직히 적었을 따름인데, 어딘지 모르게 무엇인가를 저주하는 듯한, 소년의 날카롭고 냉랭한 심사가 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갑자기 무슨 고발이라도 당한 심정으로 그 글발을 따로 제쳐서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p.15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친일파와 일제시대 토지 - 홍경선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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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는 어머니처럼 혼자 사시는 분이라 그런지 그분의 글에는 한결 감동되는 바가 있었다. 「내가 본 국도」 속의 한 구절.

"그래도 선거 때가 되면 소속 육지에서 똑딱선을 가지고 섬 백성을 모시러 오는 알뜰한 정당이 있어. 이들은 다만, 그 배로 실려가서 실상 자기네 실생활과는 무연한 정치를 위하여 지정해주는 기호 밑에 도장을 찍어주고 그 배에 실려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혜택이라곤 아직 받아보지 못한 그들의 생활 속에도 현대 문명인이 행사하는 선거란 상식이 깃들게 되고, 어느 정당이나 정치의 영향도 알뜰히 받아보지 못한 그네들에게도 투표하는 임무만은 지워져야 하고 조국의 사랑이라곤 받아본 일이 없이 헐벗고 배우지 못한 그들의 아들들이 먼저 조국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훈련을 받고 총을 메고 군인이 되었갔다는 것..."

우리 아버지도 응당 이러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래서 언제 어디서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국군묘지에도 묻히지 못하고, 우리에겐 연금도 없고.... (p.158-159)

 

"비록 개깃배를 타고 있지만 나도 과히 나뿐 놈은 아임데이. 내, 선생 이바구 다 듣고 있소. 이 송아지 빨갱이(섬에까지 그런 별명이 퍼졌던 모양이다)한테도 여러분 들었고 우리 손자놈한테도 듣고 있소. 정말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그까짓 국회의원이 다 먼교? 돈만 있음 *라도 다 되는 기고, 되문 나라땅이나 훑이고 팔아묵고 그런 놈들이 안 많던기요? 왜, 내 말이 어데 틀맀십니꺼?" (p.164)

 

건우 할아버지와 윤춘삼씨가 들려준 조마이섬 이야기는 언젠가 건우가 써냈던 '섬 얘기'에 몇 가지 기막히는 일화가 붙은 것이었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싸 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준 우리조마이섬은...."

건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 자기들 것이라고 믿어오던 땅이 자기들이 겨우 철들락 말락 할 무렵에 별안간 왜놈의 동척 명의로 둔갑을 했더란 것이었다.

"이완용이란 놈이 '을사보호조약'이란 걸 맨들어낸 뒤라 카더만!"

윤춘삼씨의 틍방울 같은 눈에도 증오의 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1905년 - 을사년 겨울,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서 맺어진 '을사보호조약'이란 매국조약을 계기로, 소위 '조선 토지사업'이란 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일. 그리고 이태 후인 정미년에 가서는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수할 사"란 치욕적인 조목으로 시작한 '한일 신협약'에 따라, 더욱 그 사업을 강행하고 역둔토의 대부분과 삼림원야들을 모조리 국유로 편입시키는 등 교묘한 구실과 방법으로써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뒤, 다시 불하하는 형식으로 동척과 일인 수중에 옮겨놓던 그 해괴망측한 처사들이 문득 내 머릿속에도 떠올랐다.

"쥑일 놈들."

건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의원, 다음은 하천부지의 매립 허가를 얻은 유력자....이런 식으로 소유자가 둔갑되어간 사연들을 죽 들먹거리더니,

"이 꼴이 되고 보니 선조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워가며 살아 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되는기요?"

그의 꺽꺽한 목소리에는, 건우가 지각을 하고 꾸중을 듣던 날 "나릿배 통학생임더" 하던 때의, 그 무엇인가를 저주하듯 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들의 땅에 대한 원한이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섬사람들도 한번 뻗대보시지요?"

이렇게 슬쩍 건드려봤더니, 이번엔 윤춘삼씨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선생님은 그런 걸 잘 알면서 그러네요. 우리 겉은 기 멀 알며, 무슨 힘이 있십니꺼. 하도 하는 짓들이 심해서 한분 해보기는 해봤지요. 그 문딩이떼를 싣고 왔일 때 말임더..."

윤춘삼씨는 그때의 화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듯이 남은 술을 꿀꺽 들이켰다.

"쥑일 놈들!"

마치 그들의 입버릇인 듯 되어 있는 이 말을 안주처럼 되씹으며 윤춘삼씨는 문둥이들과 싸운 얘기를 꺼냈다.

-큰 도둑질은 언제나 정치하는 놈들이 도맡아놓고 한다는 게 서두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동포애니 우리들의 현실성이 어떠니를 앞세우겠다! 그때만 해도 불쌍한 문둥이들에게 살 곳과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면서 관청에서 뜻밖에 웬 문둥이들을 몇 배 해 싣고 그 조마이섬을 찾아왔더란 거다. 그야말로 섬사람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격으로...옳아, 이건 어느 놈의 엉큼순지는 몰라도 필연 이 섬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꿍심으로 우릴 몰아내기 위해서 한때 문둥이를 이용하는 거라고...누군가의 입에서부터 이런 말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 섬사람들뿐 아니라 이웃 섬사람들까지 한둥치가 되어 그 문둥이떼를 당장 내쫓기로 했더란 거다.

상대방은 자다가 호박을 주운 격인 병신들인데 오자마자 그 꼴을 당하고 보니 어리둥절은 하였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떠나갈 배짱들은 아니었다. 결국 나가라니 못 나가겠느니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바로 이 갈밭새 부자가 앞장을 안 섰는기요. 어데, 그때 문둥이한테 물린 자리 한분 봅시더."

윤춘삼씨는 하던 말을 별안간 멈추고, 건우 할아버지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골동품 같은 마도로스 파이프를 뻑뻑 빨고만 있는 건우 할아버지의 왼쪽 팔을 억지로 걷어올렸다. 나이에 관계없이 아직도 우악스러워 보이는 어깻죽지 바로 밑에 커다란 흉터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한 놈이 영감 여길 어설피 물고 늘어지다가 그만 터졌거든!"

윤춘삼씨는 자랑삼아 이야기를 이었다.

-그렇게 악을 쓰는 문둥이들에 대해서, 몽둥이, 괭이, 쇠스랑 할 것 없이 마구 들이대고 싸웠노라고. 그래서 이쪽에서도 물론 부상자가 났지만, 괜히 문둥이들이 많이 상하고, 덕택에 자기와 건우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많은 섬사람들이 그야말로 문둥이떼처럼 줄줄이 경찰에 붙들려가고...그러나 뒷일이 더 켕겼던지 관청에서는 그 '기막힌 동포애'를 포기하고 그 문둥이들을 도로 싣고 갔다는 얘기였다. (p.166-168)

 

바로 어제 있은 일이었다. 하단서 들은 대로 소위 배짱들이 만들어 둔 엉터리 둑을 허물어버린 얘기였다.

-비는 연 사흘 억수로 쏟아지지, 실하지도 않은 둑을 그대로 두었다가 물이 더 불었을 때 갑자기 터진다면 영락없이 온 섬이 떼죽음을 했을 텐데. 마침 배에서 돌아온 갈밭새 영감이 설두를 해서 미리 무너뜨렸기 때문에 다행히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와 건우 할아버진 끌고 갔느냐고요?"

윤춘삼씨는 그제야 소주를 한잔 훅 들이켜고 다음을 계속했다. 섬 사람들이 한창 둑을 파헤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다. 좀더 똑똑히 말한다면, 조마이섬 서쪽 강둑길에 검정 지프차가 한 대 와닿은 뒤라 한다. 웬 깡패같이 생긴 청년 두 명이 불쑥 현장에 나타나더니, 둑을 허물어뜨리는 광경을 보자, 이내 노발대발 방해를 하기 시작하더라고. 엉터리 둑을 막아놓고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소위 유력자의앞잡인지 뭔지는 모르되. 아무리 탕일러도, "여보, 당신들도 보다시피 물이 안팎으로 이렇게 불어나는데 섬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오?" 해봐도, 들어주긴커녕 그중 힘깨나 있어 보이는, 눈이 약간 치째진 친구가 되레 갈밭새 영감의 괭이를 와락 뺐더니 물속으로 핑 집어던졌다는 거다.

그러곤 누굴 믿고 하는 수작일 테지만 후욕패설을 함부로 뇌까리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갈밭새 영감도,

" 이 개 같은 놈아, 사람의 목숨이 중하냐, 네놈들의 욕심이 중하냐?"

말도 채 끝내기 전에 덜렁 그자를 들어 물속에 태질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아이고' 소리도 못해보고 탁류에 휘말려가고, 지레 달아난 녀석의 고자질에 의해선지 이내 경찰이 둘이나 달려왔더라고.

"내가 그랬소?"

갈밭새 영감은 서슴지 않고 두 손을 내밀었다는 거다. 다행히도 벌써 그때는 둑이 완전히 뭉개지고, 섬을 치덮던 탁류도 빙 에워돌며 뭉그적뭉그적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 조마이섬을 지키다시피 해온 영감인데...살인죄라니 우짜문 좋겠능기요?"

게까지 말하고 나를 쳐다보는 윤춘삼씨의 벌건 눈에서는 어느덧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과 유력자의 배짱과 선량한 다수의 목숨.....나는 이방인처럼 윤춘삼씨의 컁컁한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폭풍우는 끝났다. 육십 년래 처음이니 뭐니 하고 수다를 떨던 라디오와 신문들도 이젠 거기에 대해선 감쪽같이 말이 없었다. 그저 몇몇 일간신문의 수해 구제 의연란에 다소의 금액과 옷가지들이 늘어갈 뿐이었다.

섬사람들의 애절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육십이 넘는 갈밭새 영감은 결국 기약 없는 감옥살이로 넘어갔다.

그리고 구월 새학기가 되어도 건우군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일기장에는 어떠한 글이 적힐는지.

황폐한 모래톱 - 조마이섬을 군대가 정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p.182-184)

 

<문학>6호 (19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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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金廷漢, 1908년 10월 20일 ~ 1996년 11월 28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김정한(金廷漢, 음호는 요산(樂山). 경상남도 동래(東萊)(지금의 부산광역시) 출생. 어려서 서당에 다니다가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 다음 해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1928년 졸업 후, 울산 대현보통학교(大峴普通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1930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한편 『조선시단』에 「구제사업(救濟事業)」이란 단편을 기고하였다가 작품 제목만 살리고 내용은 전문이 삭제를 당하였다.
1932년에 귀국, 양산(梁山)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 1933년 남해보통학교(南海普通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36년에 단편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소설 「옥심이」·「항진기(抗進記)」·「기로(岐路)」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그일에 관여하였다가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경찰에 피검되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붓을 꺾었다. 광복 후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이후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5·16 직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과 칼럼을 집필하는 한편 1967년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부산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다시 부산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1974년 정년퇴직하였고, 그 뒤 1987년 민족문학학회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1966년 단편소설 「모래톱이야기」 발표를 계기로 중앙문단에 복귀하고, 이후 5년 동안 낙동강변의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암담한 일제치하와 그 이후 핍박당하는 농촌현실을 폭로하는 소설을 썼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고, 1971년 「산거족(山居族)」으로 제3회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특히 문제작으로 평가된 「수라도」는 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 진사(許進士)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름 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킨 작가의 문제작의 하나로 꼽힌다.
한편 그의 대표작으로 1971년 창작집 『인간단지(人間團地)』를 발간하여 높이 평판되었다. 1990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단편 「인간단지」는 반인간적·반사회적·반민족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저항의 압권이란 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나환자 수용소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 원장의 비인도적인 처사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우 노인 일행은 정치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공화국 ‘인간단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필생의 소원을 이룬 듯 하였으나 나병환자들과는 이웃할 수 없다는 이웃 부락민들의 습격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복지사회를 모색해 본 민중의지의 강한 외침이라 할 것이다.
그 후 1977년 작품집 『사밧재』와 장편소설 「삼별초」, 그리고 수상집 『낙동강의 파수군』 등이 출간되었다. 197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4년 심산(心山)상 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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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촌 - 김정한 (문학과지성사)

사하촌 - 김정한 (사피엔스21)

사하촌 - 김정한 (현대문학)

수라도 - 김정한 (일신서적)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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