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다쓰오 - 바람이 분다 (1937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가을을 맞이한 숲은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바뀌어 있었다. 우수수 잎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인적이 끊긴 별장의 테라스가 성큼 가까이 보였다. 균류의 축축한 냄새가 낙엽 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계절의 변화가, 너와 헤어진 뒤 나도 모르는 사이 이토록 흘러 버린 시간이라는 것이, 내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음속 어딘가에 너와의 헤어짐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확신 따위 때문인지, 이런 시간의 흐름까지도 내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인지, 나는 잠시 후 분명히 깨닫게 될 이러한 것들을 이때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십여분 뒤, 숲이 하나 끝나더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멀리 지평선까지도 바라다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이 나타났다. 나는 그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벌써 잎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한 한 그루의 자작나무 그늘에 몸을 누였다. 그 여름의 날들, 그림 그리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 내가 지금처럼 누워있던 그곳이었다. 그대는 거의 항상 소나기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지평선 언저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 모를 먼 산맥과 일렁이는 억새의 새하얀 이삭 끝이 뚜렷이 구분되어 그 윤곽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산맥의 모습까지 송두리째 각인시킬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그사이 내 의식 속에는 이제껏 내 안에 숨어 있던, 자연이 나를 위해 정해 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발견했다는 확신이 점차 또렷이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p12-13)
이렇게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도 세쓰코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어딘가에 마음을 빼앗긴 듯한 모습으로 내게 줄곧 기대어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야만 이 꽃향기 피어나려 하는 우리의 삶이 잠시나마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듯이. 이따금 울타리 저편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마치 억눌려 있던 호흡이 터져 나오듯 불어와 우리 앞의 수풀을 스치며 그 잎을 살랑거리게 하고는 거기에 그녀와 나만을 오롯이 남겨 둔 채 지나가곤 했다. (p22)
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서 당신에게 왠지 미안해요….
그렇게 몸이 약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더욱더 사랑스럽게 여긴다는 걸 어찌해서 모르는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걸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무리 안좋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 왠지 갑자기 살고 싶어졌어요….
당신으로 인해서….. (p22.23)
그곳에 가면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인생이란 네가 늘 그래 왔듯 모든 것을 그저 다 내맡겨 버리면 돼. 그러다 보면 미처 바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우리에게 주어질지도 모르잖아. (p26)
그사이 계절은 그때까지 조금 더디게 흐르던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봄과 여름이 거의 동시에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휘파람새와 뻐구기 울음소리가 우리를 깨워 주었다. 주변 숲이 발산하던 싱그러운 푸름은 요양원을 거의 온종일 사방에서 에워싸며 병실 안까지 시원한 푸른색으로 물들여 놓곤 했다. 그 무렵에는 아침에 산속에서 피어올라 어딘가로 향하던 하얀 구름들 조차 저녁이 되면 원래의 산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처음 며칠 동안, 내가 세쓰코의 머리맡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고 보냈던 그 무렵의 일들을 떠올리려 하면, 그날이 그날 같아서인지, 단숨함이 가진 어떤 매력 때문인지,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었는지를 구분하기 힘들어 질 때가 있다.
아니, 그런 엇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에서조차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듣나. 그리고 그렇게 시간에서 벗어나 있던 날들의 일상생활은 그 어떤 사소한 부분조차 그전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희미한 온기를 지닌 채 그윽한 향을 풍기는 존재, 조금 빠른 그 호흡, 내 손을 잡고 있는 그 보드라운 손, 그 미소, 그리고 도 이따금씩 나누는 평범한 대화, 만약 이러한 것들을 지워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은 단순한 날들이었지만, 우리의 삶이란 것이 본디 그 요소라고 해 봤자 사실 이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토록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이 여인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당시 일어나 유일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녀에게서 가끔 열이 나는 정도였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좀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날에는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매력을, 더욱 세심하게, 더욱 천천히, 마치 몰래 훔친 금단의 과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맛보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딘가 죽음의 맛이 나는 삶의 행복을 이때 오히려 한층 더 온전히 지켜 낼 수 있었다. (p.37-18)
인간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키는 사건이란 것은 막상 그것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오히려 마치 남의 일처럼 보이는 법이다. (53)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만족하고 있는 게 당신 눈에는 안 보이나요?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만약 당신이 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됐을까요?.......아까만 해도 그래요. 당신이 없는 동안 처음에는 그래도 당신이 늦게 돌아오면 올수록 돌아왔을 때 얼마나 그 기쁨이 더할까 하면서 힘든 걸 꾹 참고 있었는데, 돌아올 시간을 훌쩍 지나도 당신이 오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정말 불안 했어요. 그러자 항상 당신과 함께 있던 이 방조차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고 두려워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구요…..하지만 그러다가 당신이 언젠가 내게 해 줬던 말을 떠올리니니까 기분이 아주 조금 차분해지는 거예요.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죠. 지금의 우리 삶에 대해 아주 먼 훗날 다시 떠올려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라고…. (p66)
참으로 고요한 밤이다. 오늘 밤도 마음속에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나는 남들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 같아. 그런 행복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예전에는 우리를 꽤나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하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야. 오히려 요즘의 내가 행복에 훨씬 가까운 상태인지도 모르지. 뭐 구태여 말하자면 요즘의 내 마음은 그때와 비슷하면서 그때보다 살짝 슬픈 정도. 그렇다고 해서 전혀 즐겁지 않은 것만도 아니야…..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이 내가 되도록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지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기력한 내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말이지 다 네 덕분이야. 그런데도 세쓰코, 나는 여태까지 내가 이렇게 고독하게 사는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어차피 내가 좋다고 이러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역시 너 때문에 이러는 것이면서도 그것이 고스란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내가 나한테는 과분한 너의 사랑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일까? 그 정도로 너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나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렇게 밖에 나오자, 이 골짜기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산 저편에서 자꾸만 바람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무척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렇게 멀리서 들리는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베란다로 나온 것처럼 귀 기울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골짜기의 모든 것이 처음에는 그저 하얀 눈에 물들어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이더니, 한동안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풍경이 점점 눈에 익은 것인 것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내 기억으로 그 사이사이를 메꾼 것인지 몰라도, 어느샌가 선 하나하나, 형태 하나하나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토록 그 모든 것이 내게 친숙해진, 사람들이 행복의 골짜기라 일컫는 이곳. 그래, 과연 이렇게 정 붙이고 살다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이 골짜기를 불러도 될 것 같다…..골짜기 건너편이 저렇게나 바람에 술렁거리는데 이곳만큼은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없구나. 뭐 이따금씩 오두막 바로 뒤편에서 무언가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 저 멀리서 불어 오는 바람에 바싹 마른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부대끼며 내는 소리리라. 때때로 그 바람의 끝자락 같은 것이 내 발치에서도 낙엽 위에 다른 낙엽을 두어 장 살포시 포개 놓고 있다…. (p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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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다쓰오 (堀辰雄, 1904년 12월 28일 - 1953년 5월 28일)
도쿄에서 태어나 1921년 제일고보 이과를 거쳐 1929년 도쿄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전쟁 당시의 불안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고수한 작가다. 당시까지 사소설(私小說)적이었던 일본 소설의 흐름 속에서 호리는 픽션이라는 ‘지어낸 이야기’로 낭만파라는 문학 형식을 확립하려 했다. 1923년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알게 되어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아쿠타가와의 자살에서 받은 큰 충격을 대학 졸업 논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론」 및 「성가족(聖家族)」에 담아냈다. 전쟁 말기부터 결핵 증상이 악화해 전후에는 거의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문학은 서정성이 높아 시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대표작으로는 「성가족(聖家族)」, 『아름다운 마을(美しい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광야(曠野)」 등이 있다. 이 대표작들에는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생을 발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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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 호리 다쓰오 (오경환 옮김, 소화)
바람이 분다 - 호리 다쓰오 (토요일본문학회, 석영)
눈 위의 발자국 - 호리 다쓰오 (문헌정 옮김, 북랩)
성가족 - 호리 다쓰오 (문헌정 옮김, 좋은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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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으면 좋은 책]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강신주 (EBS Books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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