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한국문학 413 (44)
목차
유진오
김 강사와 T 교수
청랑정기
안회남
불
겸허(김유정전)
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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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남 - 불 (1946년)
음력 정월 보름날 -
새벽 일찍이 일어나 안방으로 가니까, 어머님께서 밤 한 톨을 주신다. 어려서부터 해 오던 버릇대로 공손히 받아서 입에 넣고 깨물었다.
또 약주 한 잔을 데우지도 않고 주셨다. 먹으니까 찬 술이 향기를 풍기며, 찌르르 기분 좋게 뱃속을 자극한다.
아마 이날 날밤이나 잣, 호도 등속의 단단한 것을 먼저 먹게 하는 것은 치아가 튼튼하라는 뜻인 성싶다. 치아가 오복 중에 하나로 든다고 한다. 찬 약주를 그대로 마시는 것은, 일 년 내 남에게서 추잡하지 않고 좋은 말만 들으라는 축수이며 또 귀가 밝아지는 것이라고 어머님이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좋은 말만 들으라는 말처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나는 옛 풍속의, 이러한 분위기를 대단히 좋아한다. (p.87)
"살아 나온 것이 꿈입니다. 아직 정신이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말하는 어조도 충청도의 농민이 아니었다.
"처음 부산에 떨어져 울면서 땅을 어루만져 봤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건 조선의 물이드군요. 먹는 물요...."
이런 말을 들을 때는 해외의 사지에서 헤매이며 오랫동안 풍상을 겪고 온 무슨 위대한 정치가의 감상담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풍성한 농민들은 항용 말끝에 '유우' 하는데, 그 '유우' 대신 이렇게 올바로 '요오' 하는 사람은,, 도회지의 물을 먹었거나 그 이상의 바람을 쏘인 인물들이다.
"코 큰 사람들이 라바우루하구 도락구에는 끝끝내 상륙을 못했죠. 그래서 도락구에다 맨 첨 원자폭탄을 쓸려구 했었습니다. 도락구 도에 있는 일본 해군은 제사 함대였는데 나중엔 할 수 없이 항복했지요."
이렇게 되고 보면 더군다나 이 서방이 이 서방 같지 않았다. 제4 함대라는 말을 쓰는 조선의 농민들 앞에다 앉혀 놓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트라크 도에 대한 일본군의 점령 관계는 어떠했던가, 나의 그것에 대한 지식은 이제와 모두 몽롱해졌으나 이 서방의 말을 들으면 그는 조선서 떠나자, 곧 속아서 트라크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올 때까지 사 년 동안이나 있었는데 처음에는 비행장을 닦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비 부대의 후보로 강제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한다. 물론 고향에다는 편지 한 장을 못 가게 해서 오늘날 자기 가정의 큰 비극을 이룬 원인이 되었노라는 것을 암시하여 말했다.
싸이판과 유황도, 비율빈이 미국군의 손에 들어가면서부터 트라크에는 급작시리 식량이 결핍해져서 하루에 감자 한 개씩으로 연명들 하다가 나중에는 쥐, 도마뱀 등을 잡아먹고 좀 있으면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게 될 지경인데, 일본이 항복하고 미국군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트라크가 폭격을 당할 당시의 일은 이루 말로 형용해서 이야기할 수 없고 그냥 불바다 였었다 한다.
연기군에서 간 사람이 사십팔 명이었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이 불과 일곱 명이다. 물론 그중에는 병으로 죽은 사람, 또 굶어 죽은 사람, 반은 미치다시피 되어 목을 매 자살한 사람들도 끼어 있으나, 대부분은 폭격과 함포 사격에 희생된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 놀라운 사상률이냐.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어떤 정도의 것이라고 짐작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실로 나의 원수요, 나의 친구의 원수요, 우리 조선 사람의 원수요, 서양 사람들의 원수요, 전 인류의 원수, 아니, 일본 사람의 원수도 이번 전쟁을 먼저 시작하고 끝끝내 전쟁을 하려고 버티던 그 전쟁병자, 전쟁광의 일본 놈이라고 그는 이상히 흥분된 어조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트라크 도에 갔다 온 덕택으로 자기 앨개인 외에 여러 사람을 위하여 사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 가서 밉고 미운 일본을 위해 힘을 썼던 것이 부끄러운 만큼 무엇으로든지 앞으로는 조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p.96-9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 이재갑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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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가니 등레는 벌써 불놀이가 시작되었다. 근년에 산나무들을 함부로 찍어 때고, 치산들을 안 해서 웬만한 야산은 산이 아니라 나무 하나 서 있지 않은 그냥 잔디 벌판이었다. 그래서 불놀이하기는 십상이었다. 겨울 동안 바싹 말라붙은 누룽지처럼 된 잔디 위에다, 성냥을 그어 대면, 까맣게 타 버린 자리를 뒤로 남기면서 불길은 점점 커져 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퍼졌다. 산등 벌판 둑 위 논두렁 이곳저곳 사방에서 화염과 흰 연기가 일어 제법 장관이었다.
"아하!"
"불을 보니까...."
"이렇게 벌판에 무작정하고 퍼지는 큰 불을 보니까 살 것 같군요!"
"집에 와서 처음 답답하던 가슴이, 좀 내려앉습니다...."
이 서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트라크 도보다 조선은 참으로 춥다고 하면서, 잠시도 벗어 놓지를 않던 외투 단추를 따면서 후우 하고 한숨을 내뿜었다.
불이 크게 나매, 우리는 성냥을 쓸 것 없이, 마른 참나무 가지나 그 외의 삭정이에다 불을 달려 가지고 마음 내키는 곳마다 댕겨 놓았다. 해방된 기분이 이 불놀이에도 집중되고 폭발한 것이 아닌가 의아할 만큼, 금년의 불놀이는 내가 본 어느 해의 불놀이보다도 성화였다.
넓은 광야는 자꾸 군중이 모여들어, 눈에 바라다보이는 곳곳에 불을 놓는 사람들이요, 불길이며, 하늘파청 올라가는 연기였다. 아이들은 불을 달리며, 일변 끄며 뛰어다녔다. 이 서방도 그에 지지 않고, 커다란 불방망이를 만들어 가지고, 거의 그의 밟고 다니는 발자국 수효만큼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그는 집에서 먹고 나온 술에도 취했지만 분명 불에도 취한 성 싶었다.
그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그렇지만 트라크 도에서 자기가 본 불에다 대면, 이런 것은 불이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는 부산에서 목도하였는데, 일전 음력 초엿샛날, 하늘 한가운데 나타난 흰 무지개와 일곱 개의 색동 무지개를 봤느냐, 그러한 것이 하늘 가뜩 이 차 있어 움직이는 꼴을 생각해 보아라, 또 공중에서 반짝이던 별들이 일시에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상상해 보아라, 그런 것이 트라크 도에서 폭격과 함상 포격을 받으며, 자기가 경험한 화광이라고 말하였다. 아니, 그러한 무시무시한 것까지 생각할 것 없이, 나는 겨우 요만 정도의 땅 위에 퍼져 있는 불빛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도, 고개를 쳐들으니까 하늘에서도 불이 일고 있는 듯, 겁나게 부럽게 보였다.
땅거미 질 때쯤 해서, 사람들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조금 있다가 달이 뜨면, 인제 망월을 할 참인 것이다. 넓은 들판과 산 잔등이 까맣게 타서, 한층 더 쉽사리 어두침침한 듯했다. 이렇게 불을 놓아 태우는 것은 불놀이도 불놀이려니와, 온갖 해충을 죽이고, 겸하여 풀잎이 탄 재로써, 자연히 비료가 되게 해서, 새봄의 새싹이 잘 돋아 나오게 함이려니 추측됐다.
산 잔등을 타고 내려오면, 이 서방이 살던 집 앞으로 닿게 되었다. 그는 별안간,
"안상 어른."
나를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트라크에 있을 적에 등화관제를 하면, 어느 때는 그저 일부러 불이 놓고 싶었었다는 것이다. 그놈들에게 거기까지 끌려간 후, 무엇을 조금 잘못해서 되게 매까지 맞은 날이면 휘발유 창고에다 기어이 불을 지르겠다고 몇 번씩 맹서 했었는데, 사실 그것을 한 번도 실행 못 한 것은 무엇을 먹다가 삼키지 못한 것처럼 늘 되풀이할 적마다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 자신 작년에 북구주로 징용이라는 것을 당해 가서 지냈을 때의, 그와 비슷한 일이 생각났다. 탄광 안에 갇혀 있는 조선 사람들은 공습경보가 나고 비행기가 떠 들어오면 환성을 치며 무조건 하고 좋아했다. 어떻든지간에 현상 파괴라는 막연한 것이나마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몰래 쌓여진 석탄덩이에다가 불을 질러, 등화관제를 방해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동무에게로부터 들었었던 것이다. (p.99-103)
나는 그 후 한번 이씨와 만났다. 그는 전보다도 일층 더 예민하고 침착해진 것 같았다. 순간순간 그는 자꾸 딴사람으로 변해 가는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고향을 떠나 멀리 가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번은 조선 땅 안에서 일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나는 그 섬 속에서 몇 달 동안이나 먹는 것 없이 살았습니다. 나는 정말은 섬 속에서 불에 타 죽었던지 굶어 죽었던지, 왜종에게 맞아 죽었던지, 태평양 바닷물 속에 빠져 죽었던지, 내 손으로 목을 졸라매 죽었던지 했을 겝니다. 내가 이렇게 고향에 돌아와 있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 와서도 다시 살지 않고, 옛날처럼 살려니 됩니까. 나는 새로 살아야겠습니다....한 분 어머님은 매부에게 맡겼습니다. 나는 인제 부모도, 처자도, 집도, 살림도 다 없습니다. 새로 새 세상을 찾아가겠습니다....트라크 도로 끌려갈 때는 가정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짐이 무겁더니, 이번에는 가뿐합니다. 아무 걱정 마십쇼...안상 말씀 말마따나, 우리 조선이 해방되었으니까 좋은 새 세상이 있겠지요. 그것을 위해서는....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집에 나갔을 때는 불행을 가져왔으나 이번에는 꼭 행복을 찾아오겠다는 희망이었다. 나는 혹, 서울엘 오거든 나도 서울 가서 있을 테니까, 옛날 정자옥 바로 건너편 흰 사층 벽돌집이 있는데, 그 사층 조선 문학가 동맹 안으로 찾아오라고 주소를 써 주며 간곡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그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 그와 나와는 비교하여 보면, 과거에 있어서 가정적으로, 내가 그보다 퍽 행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가령, 보름날 밤 나는 쑥스러운 보름날 행사를 충실하게 시행하는 한편 평화스런 내 집에 불이나 나지 않을까,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소심한 위인인 대신, 그는 아무 애착 없이 자기 집에 불을 놓아 과거의 악몽을 불살라 버리고 파괴하였다. 물론 꼭 그러한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나, 하여간 이것은 그와 나와의 현실에 대한 태도와 인간으로서의 많은 거리를 보여 준 것이며, 그가 나보다 불행한 대신, 헌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앞에 서 있는 것을 직접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와 다르며, 불행했으며, 적어도 나보다는 새로우며, 또 적어도 나보다는 앞에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과 그의 말을 생각하면 모두 그가 믿어지는 까닭이다. 내가 앞으로 좀 더 큰 소설가 노릇을 하기 위하여서는 새로 살려고 하는 그와 함께 모든 새로운 타입의 인물을 붙잡아야만 할 것이다. (p.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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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남(安懷南, 1909년 11월 15일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성(安城). 본명은 안필승(安必承). 서울 출생. 개화기에 신소설 작가로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을 쓴 안국선(安國善)의 아들이다.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 3학년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개벽(開闢)』지의 사원으로 입사 후, 약 10년간 창작 생활에 전념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발(髮)」이 3등으로 입선되어 작가 생활이 비롯되었는데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목되었다.
그는 예술파의 작가로 평판되었고 당대 일본 문단의 신흥예술파를 적극적으로 소개(新東亞, 1932.11.)하기도 하였다. 전기에는 신변, 가정사를 제재로 한 심리 추구가 주조를 이룬 「연기(煙氣)」(1933)·「명상(瞑想)」(1937) 등을 발표했다.
후기에는 거의 개인적인 주변의 일을 다룬 작품으로, 「소년과 기생」(1937)·「온실(溫室)」(1939) 등이 거론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악마(惡魔)」(1935)·「우울」(1935)·「향기(香氣)」(1936)·「그날 밤에 생긴 일」(1938)·「겸허(謙虛) 김유정전」(1939)·「탁류(濁流)를 헤치고」(1940) 등이 있다.
이들 소설들은 그의 평론 「본격소설론-진실과 통속성에 관한 제언」(1937)에서 소설의 목표를 인생의 묘사, 특히 ‘인생의 단면’의 묘사에 있다고 한 것과 ‘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와 결혼과 문학’이라고 하였던 논리와 상통한다.
1944년 9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북구주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소설부 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작품은 「폭풍(暴風)의 역사」(1947)와 「농민의 비애(悲哀)」(1948) 등으로 이를 통하여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였다.
1947년 월북 후, 별로 뚜렷한 작품 활동이 없었고 문단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본래 프로문학 작가가 아니었던 그로서는 북한의 문학 이념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문필 활동이 중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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