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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창랑정기 - 유진오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17.

큰 한국문학 413 (44)

 

목차

 

유진오

김 강사와 T 교수

청랑정기

 

안회남

겸허(김유정전)

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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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 창랑정기 (1938년)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히 향수가 저려 든다.'고 시인 C군은 노래하였지만 사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란 짭짤하고도 달콤하며 아름답고도 안타까우며 기쁘고도 서러우며 제 몸 속에 있는 것이로되 정체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혹 우리가 무엇에 낙망하거나 실패하거나 해서 몸과 마음이 고달픈 때면은 그야말로 바닷물같이 오장육부 속으로 저려 들어와 지나간 기억을 분홍의 한 빛깔로 물칠해 버리고 소년 시절을 보내던 시골집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이며 한 글방에서 공부하고 겨울이면 같이 닭서리 해다 먹던 수남이, 복동이 들이 그리워서 앉도 서도 못 하도록 우리의 몸을 달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향수란 그러나 반드시 사람의 심사를 산란케만 해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만 갖는다면 우리의 거칠 대로 거칠어진 정서의 거친 벌을 다시 곱게 빗질해 줄 수도 있는 것이며, 또는 갈기갈기 흩어진 어지러운 생각을 외가닥 길로 인도해주는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여기 젊어서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만리타향에 나갔던 사람이 있다 하자. 바람 비 거친 몇십 년을 지낸 뒤 이마에 주름살이 깊어 가고 은빛 흰 머리칼이 나날이 늘어 갈 때 달 밝은 어느 밤 그가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언뜻 생각하면 향수란 놈은 사람의 마음을 재리재리하게 좀먹어 들어가는 우수의 사자인 것 같기도 하나 다시 생각하면 그가 젊어서 품었던 청운의 뜻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또는 처음 뜻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 소위 청운의 큰 뜻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생이란 것을 분홍빛 베일을 통해서만 볼 줄 알던 젊었을 때의 일시의 헛된 꿈이요, 사람의 마음과 몸을 영원히 안식시켜 줄 깊고도 높고 또 튼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의지할 바를 잃은 그의 심정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어 위대한 안심의 길로 인도해 주는 거룩한 어머니의 손길이야말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청운의 큰 뜻'을 이룬 사람에게나 못 이룬 사람에게나 향수란 다 같이 최후의 도착점이 아닐 것인가.

옛날 <귀거래사>의 시인은 '새는 날다 고달프면 돌아올 줄을 안다.'고 읊었고 '영원의 청춘'을 누리던 괴테도 서른한 살의 젊음으로써 이미 '모든 산봉우리에 휴식이 있느니라.'고 노래했거니와 이것은 즉 그들이 남다른 직관과 감수력으로 이 향수의 구슬프고도 깊은 의미를 몸으로써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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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 전집 - 도연명 (이치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괴테 시집 - 괴테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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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일상 현재 눈앞에 있는 것보다도 지나간 것, 없어진 것에 이상히 애착을 느끼는 법이다. 창랑정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없어졌기 때문에 창랑정은 더한층 내 향수를 자아내는 것이다. 창랑정의 후일담은 그 자신 한 편의 장편 소설이 되겠으므로 이곳에 쓰지 않거니와 간단히 뼈만 추려 말하면 내가 다녀오던 해로 정경 부인이 돌아가고 그 후 오륙 년이 지나 서강 대신이 구십이 가까운 나이로 마저 돌아가고 그 소상이 지나기도 전에 그 며느님 종근의 할머니도 또 돌아가셨다. 사람만 이렇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수백 년 바람 비 겪던 늙은 거목이 매운 겨울을 치르고 난 어느 봄, 소리도 없이 새싹을 돋지 못하듯이 수십 년 영화를 누리던 서강 대신의 집안은 나날이 변하는 세상 풍파에 밀려 불과 몇 해 동안에 여지없이 망해 없어지고 만 것이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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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이야기 - 조용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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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정의 몰락을 재촉한 것은 나의 형뻘 되는 종근의 난봉이었다. 어른들이 다음다음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들어앉아 한문책만 읽고 있던 종근 형이 별안간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기생 오입을 시작하였다. 서강 대신 대상 때에는 벌써 집터까지 남의 손으로 넘어가 창랑정은 텅 빈 껍데기뿐이었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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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명문가의 독서교육 - 최효찬 (한솔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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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임진란에 창랑정이 진터가 되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대원군 시절에 선교사를 학살한 것 때문에 불란서 해군 제독 로즈 장군이 프리모게 이하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로부터 한강을 쳐 올라와 조정을 발끈 뒤집히게 하며 여러 날을 정박하던 곳이 바로 창랑정 마당 앞이었다는 이야기, 그때에 조정에서 가장 맹렬하게 '양이 배척'을 주장하던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선전관으로 계시던 서강 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이야기들을 밤이 이슥토록 하고 계셨다.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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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 김동인 (문학사상)

강화도 서양 함대와 흥선 대원군 - 이정범 (주니어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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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해>

<창랑정기>는 조선 말기부터 30여 년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유진오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시기에 '나'는 7세서 중년으로 성장한다. 낡았지만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창랑정은 그 세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유년의 추억은 깨지고 우리의 인생도 무상하게 변화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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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교육자(대학 교수) 겸 정치인이다.

1906년 5월 13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유치형(兪致衡)이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해방 이후에는 헌법기초위원, 법제처장, 한일회담 수석대표,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12월부터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7년 8월 30일 사망했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김강사와 T교수」(『삼천리』7-3, 1935.3.), 「창랑정기(滄浪亭記)」(『동아일보』1938.4.19.∼5.4.)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학예사, 1939)을 간행했다.
1939년 7월 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그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곧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법학자·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대학원장(1949∼1952)·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 학위령 등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47년 6월 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 8월 초대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9년 『헌법의 기초이론』(일조각), 『헌법해의(憲法解義)』(명세당)를 발간했다. 1949년 고등고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55년까지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고려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 교수단 단장,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4∼8월),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0월 UN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활동했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대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55년 서울하바드클럽 회장·대학조사위원회 위원·교육특별심의회 위원 및 부의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한국연구원 창립이사로 위촉되었다. 1957년 영국 정부가 초청하여 영국을 시찰했고, 한국공법위원회 회장과 한국법철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8년 서울특별시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민간사절로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60년 9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UN한국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고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3년에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고려대학교출판부)를 출판했고, 1964년에는 193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창랑정기(滄浪亭記)」 등을 묶어 소설집 『창랑정기』(정음사)를 출간했다.
965년 10월 고려대학교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월 종로구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 1월 와병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12월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2월 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헌법)이 되었다.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름 위의 만상(萬想)』(일조각, 1966), 「편편야화(片片夜話)」(『동아일보』1974.3.1.∼5.16.), 『젊은 날의 자화상』(박영사, 1976), 『양호기(養虎記)-보전·고대 35년의 회고』(고대출판부, 1977), 『젊음이 깃칠 때』(휘문출판사, 1978), 『다시 창랑정에서』(창미사, 1985) 등을 발표했다.
유진오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68∼81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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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현대문학)

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창비)

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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