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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표구된 휴지 - 이범선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14.

삼성 문학의 탐정 한국문학 1

 

목차


이범선 

표구된 휴지


맹주천 

천 년 묵은 홰나무


박완서 

자전거 도둑
시인의 꿈
옥상의 민들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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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선 - 표구된 휴지 (1972년)

 

니무슨주변에고기묵건나. 콩나물무거라. 참기름이나마니처서무그라.

 

누렇게 뜬 창호지에다 먹으로 쓴 편지의 일 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피곤할 때면 화실 한쪽 벽에 걸린 그 조그마한 액자의 편지를 읽는 버릇이 생겼다. 그건 매우 서투른 글씨의 편지다. 앞부분과 끝 부분은 없고 중간의 일부분만인 그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시골에 있는 늙은 아버지 - 어쩌면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 가 서울에 돈 벌러 올라온 아들에게 쓴 편지라는 것이 대충 짐작될 따름이다.

사실은 그 편지가 노인이 쓴 것으로 생각되는 까닭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보다도 더 그 편지의 종이나 글씨에 있는지 모른다. 아마 어느 가을에 문을 바르고 반 장쯤 남았던 창호지를 용케 생각해 내서 벽장 속을 뒤져 먼지를 떨고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쓸어 펴서 적당히 두루마리 모양이 나게 오린 것이리라. 누렇게 뜬 종이 가장자리가 삐뚤삐뚤하다. 거기에 사연을 먹으로 썼다. 순 한글 - 아니 이 편지에서만은 언문이라는 말이 좀 더 어울릴까 - 로 쓴 그 글씨가 재미있다. 붓으로 썼다기보다 무슨 꼬챙이에 먹을 찍어서 그런 것 같은 글자는 단 한 자도 그 획의 먹 농도가 고른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글자의 획들이 모두 사개가 물러나서 이승스레 헐렁한데, 그런 글자들이 또 제각기 제멋대로 방향을 잡고 아무렇게나 눕고 서고 했다. 그러니 글줄이 바를 리는 만무고.

 

니떠나고메칠안이서송아지낫다. 그너석눈도큰게잘자란다. 애비보다제에미를더달맛다고덜한다.

 

이 대문에서는 송아지 석 자가 딴 글자보다 좀 크고 먹 색깔도 진하다. 나는 언제나 이 액자를 보면 그 사연보다 그 글씨로 하여 먼저 미소 짓게 된다.

베적삼 고름은 헐렁하니 풀어 헤쳤고 잠방이 허리는 흘러내려 배꼽이 다 드러난 촌로들이 마을 어귀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더러는 마주하고 장기를 두고, 옆의 한 노인은 부채질을 하다 졸고, 또 어떤 노인은 장죽을 쑤시는가 하면 때가 새까만 목침을 베고 흰머리는 서툰 가락의 시조를 읊고.

그 크고 작고, 진하고 연하고, 삐뚤삐뚤한 글자들. 나는 거기서 노인들의 구수한 농지거리를 들을 수 있다. (p.8-11)

 

<작품 이해>

1. 어느 날, 젊으 지게꾼이 누런 창호지에 동전을 한가득 싸 가지고 은행에 왔는데, 그 창호지에는 집에서 보내온 편지글이 쓰여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보내온 창호지 편지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전혀 맞지도 않았다.

편지 내용 또한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글쓴이 주변의 소소한 일상적 일등리 담겨 있었다. 한 해 농사지은 것이 전해에 비해 어떻다는 둥 마을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둥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소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 우물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 장손이는 장가갔고 구장네 탄실이는 시집갔다는 것 그리고 앞집 순이가 감자를 삶아 가지고 와서 자신은 시집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등이 편지에 담긴 내용의 전부였다. 

2. 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웃을 자신의 가족같이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동네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나'가 이 편지를 읽으면 시골 마을 노인들이 큰 느티나무 아래 모여 베적삼 고름을 풀어 헤치고 장기를 두거나, 낮잠을 즐기거나, 시조를 읊거나 하는 등의 평화롭고 정겨운 시골 마을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가 그런 것처럼 친구도 이 편지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풍경을 본 것이다. 곧 '나'와 친구는 자신들이 사는 도시와는 달리, 편지를 보내온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이웃과 가족처럼 지내며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이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나'의 친구는 이 편지를 '국보급'이라고 한 것입니다.

3. 이 편지 속에는 그야말로 순박한 농촌 사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곁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젊은 지게꾼이 은행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은 은행 안내원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서울로 돈 벌러 간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송아지가 태어나서 행복하다는 순박한 마음을, 돈보다 아들이 더 좋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다른 글자보다 좀 크고 진하게 쓴 '송아지' 석 자에서 그대로 느낄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박함은 은행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젊은 지게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편지를 표구해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한 것은, 이러한 농촌 사람들의 순박함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며 자신들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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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선(李範宣, 1920년 12월 30일 ~ 1982년 3월 13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호는 학촌(鶴村).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 출신. 1938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풍천(風泉) 탄광에 징용되었다.
광복 후 월남해서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6·25 때는 거제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 때 『현대문학』에 단편 「암표(暗票)」(1955)와 「일요일」(1955)로 김동리(金東里)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휘문고등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대광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8년 한국외국어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1977년부터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 동안 한국문인협회 이사, 소설가협회 부대표위원에 선임되었고,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초기의 작품 「암표」·「일요일」·「이웃」(1956)·「학마을 사람들」(1957)·「수심가(愁心歌)」(1957)·「갈매기」(1958) 등에는 그의 생활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단면과 무기력한 인간상(人間像)이 많이 등장한다.
담담한 필치의 서경적 묘사의 수법으로 토착 서민의 생태를 표현, 길흉의 미신 또는 무욕(無慾)의 인간상을 다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뒤 「피해자」(1958)·「오발탄」과 장편 「춤추는 선인장」(1966∼1967) 등에서는 사회고발의식이 짙은 리얼리즘의 문학으로 전환하여 약자의 생존과 침울한 사회상, 종교의 위선, 남녀의 생태 등을 부각시키는 객관적 묘사를 보여 주었다.
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냉혈동물」·「돌무늬」·「삼계일심(三界一心)」(1973)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모순을 추구하려는 존재론의 회의적 허무가 깃들인 잔잔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 있다.
1958년 처녀창작집 『학마을 사람들』로 제1회 현대문학상 신인문학상을, 1961년「오발탄」으로 제5회 동인문학상과 1962년 제1회 오월문예상을, 또 「청대문집 개」(1970)로 제5회 월탄문학상(月灘文學賞)을 수상하였다. 창작집으로 『학마을 사람들』·『오발탄』·『피해자』·『분수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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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 - 이범선 (문학과지성사)

학마을 사람들 - 이범선 (사피엔스21)

오발탄 - 이범선 (창비)

이범선 대표 중단편선집 - 이범선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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