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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 - 안톤 체호프 (최선 옮김, 고려대출판부)

by handaikhan 2023. 2. 5.

안톤 체호프 -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 (1899년)

 

사람들은 해변에 새 얼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이 나타났다고 했다. 드리트리 드미트레비치 구로프는 알타에 온 지 벌써 두 주일이나 되어 이곳에 익숙해진 터라 모든 새 얼굴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해변에 설치된 베르네 정자카페에 앉아 그는 한 젊은 여자가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큰 키가 아니었고 금발이었으며 베레모를 스고 있었는데 그녀 뒤에는 하얀 털강아지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그 여자를 공원이나 산책로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마주쳤다. 그 여자는 항상 혼자서 항상 똑같은 베레모를 스고 하얀 털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였고,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서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여기 남편도 없이,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라면 그녀와 알고 지내는 것도 쓸데없는 일은 아니겠는데'라고 구로프는 상상했다. (p.323-324)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고 그 횟수도 잦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그는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이 어리석다는 의견을 가졌으며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여자들을 "열등한 인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자들을 '열등한 인종'이라고 마음대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쓰디쓴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여겼지만 어쨌든 이 '열등한 인종' 없이는 이틀도 살 수가 없었다. 그는 남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권태를 느끼고 자연스레 행동할 수 없었고 말도 별로 안 하는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여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자연스러움을 느꼈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는 남자였다. 그들과 함께는 침묵하는 것조차 쉬었다. 그의 외모나 성격, 그의 모든 성질 속에는 무엇인가 매력적인 면, 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여자들을 끌고 유혹하는 힘이 있었다. 그 자신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고 또 마찬가지로 어떤 힘이 그 자신을 그들에게로 이끌었다. (p.325-326)

 

그러나 흥미로운 여자를 새로이 만날 때마다 이 쓴 경험들은 기억에서 빠져나가 버리고 새로이 삶에 대한 욕망이 일면서 모든 것이 쉽고 재미있게 보이는 것이다. (p.326)

 

"전 벌써 두 주일이나 죽치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은 빨리 가지요. 그런데도 여기는 얼마나 권태로운지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권태롭다고 그냥 말하는 거지요. 벨료브나 쥐즈드라 같은 촌구석에 살면서도 권태를 모르던 사람들이 여기 오면 '아, 권태로워! 아, 이 먼지! 그러지요. 자기가 무슨 그라나다에서 온 것 같아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둘은 모르는 사람처럼 말없이 식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식사가  끝난 후 둘은 나란히 걸었다. 어리도 가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아무래도 괜찮은 여유롭고 만족스런 사람들의 장난스럽고 가벼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둘은 산책하며 바다가 ㅏ얼마나 기이하게 빛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바다는 부드럽고 따스한 라일락 빛이었고 그 위에는 달빛이 금색의 줄무늬를 내고 있었다. 또 뜨거운 낮이 지나니 몹시 후덥지근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p.328-329)

 

'세상에는 별 만남도 다 있군!' 과거로부터 그의 기억에 남는 여자들은 정사에 쾌락을 느끼고 짧은 행복이었찌만 그에게 감사하는 태평한 맘씨 좋은 부류, 정사를 할 때 솔직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태도를 구미는, 신경질적이고, 마치 그것이 사랑이나 정열이 아니라 무슨 좀더 중요한 것이라는 표정을 짓는, 예를 들어 그의 아내는 같은 부류, 마지막으로 매우 아름다우나 차가운 여자들, 인생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인생으로부터 취하고 움켜쥐려는 고집스런 욕망, 탐욕스런 표정이 얼굴에 갑자기 불현듯 지나가는, 이미 젊지 않은, 변덕스럽고 사려 깊지 못 하고, 남을 쥐고 흔들려고 하는 어리석은 여자들, 구로프가 그녀들에 대한 열이 식었을 때 그녀들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킬 뿐이고, 그녀들의 속옷에 달린 레이스가 그때는 그에게 물고기 비늘처럼 여겨지는 두 서너 명의 여자들의 부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여전히 경험 없는 젊은 여자의 소심함과 어색함, 거북한 감정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두드린 것처럼 당혹스런 인상을 받았다. 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벌어진 일에 대해서 어쩐지 특별하게, 매우 진지하게, 마치 자신이 파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상하고 적당치 않았다. 그녀의 얼굴 윤곽은 아래로 처졌고 시들어 보였으며 얼굴 양옆으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은 마치 옛날 그림에 그려진 죄지은 여자처럼 슬픈 자태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저를 존경하지 않는 처음 사람이 되겠군요." (p.332-334)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감동적이었다. 그녀에게서는, 행실 바르고 순진한, 아직 세상을 거의 모르는 여자의 순수함이 풍겼다. 탁자 위에 타고 있는 단 하나의 촛불은 그녀의 얼굴을 희미하게만 비추었으나 그녀의 마음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을 존경하지 않게 된다는 거요?"

구로프가 물었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려."

"하느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이건 끔찍해요."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 같소."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어요? 전 바보 같은 천한 여자예요. 저는 제 자신을 경멸해요. 전 자신을 정당화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요. 저는 남편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반했어요. 그리고 이제 처음 그런 것이 아니고 벌써 오래전부터 자신을 배반해 왔어요. 제 남편은 아마도 정직하고 좋은 사람일 거예요. 그러나 그는 하인이예요. 저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근무를 하는지 몰라요. 제가 아는 것은 다만 그가 하인이라는 것이예요. 제가 결혼했을 때 겨우 스무 살이었지요. 호기심이 저를 괴롭혀 왔어요. 저는 다른 어떤 삶이라도 좋으니 좀더 나은 것을 원해 왔어요. 전 자신에게 말하곤 했어요. 다른 삶이 존재한다. 저는 사는 듯하게 살고 싶었지요. 진징한 삶을 살고 싶었단 말예요. 진정한 삶을요. 호기심이 저를 불사른 거예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맹세코 말할 수 있어요. 전 제 자신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어요. 제 자신에게 뭔가가 일어난 거예요. 자신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거든요. 저는 남편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이리로 온 거예요...그리고 여기서 내내 정신 나간 여자처럼 열에 들떠서 돌아다녔어요....이제 누구나가 경멸하는 천박하고 더러운 여자가 되었구요."

구로프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벌써 따분해졌다. 순진한 어조. 이 예기치 않은 어울리지 않는 회개가 그를 짜증나게 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없었다면 그녀가 농담을 하거나 연극을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을 것이다.

"난 알 수가 없소." 그는 조용히 말했따. "당신이 원하는게 도대체 뭐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 몸을 꼭 붙였다.

"제발, 믿어 주세요, 믿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사랑해요. 죄를 짓는 것은 정말 싫어요. 전 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저한테 무슨 귀신이 씌웠다고. 제게 정말 귀신이 씌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됐소, 그만해요."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공포에 찬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키스하며 조용히 다정하게 이야기했고 그녀는 차츰차츰 평정을 찾더니 다시 쾌활해졌다. 둘은 다시 웃게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해변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있는 도시는 완전히 죽은 모습이었지만 바다는 아직 속삭이며 해변을 때리고 있었다. 대형 보트 한 척이 파도 위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위에 등불이 몽롱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p.334-337)

 

오래안다에서 그들은 교회 가까이 있는 벤치에 앉아 바다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얄타 섬이 아침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고, 산봉우리마다 하얀 구름이 꼼짝 않고 걸려 있었다. 나뭇잎들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매미만 울어대었다.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단조로운 둔탁한 파도소리는 인간들을 기다리는 평온, 영원한 안식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에 얄타나 오레안다가 없었을 때도 바다는 이렇게 소리 냈을 것이고 지금도 소리 내고 있고, 또 우리가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로 무심하고 둔탁하게 소리 낼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지상의 삶의 끊임없는 지속과 완성의 저당물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아침노을 속에 이렇게도 아름답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은, 동화 같은 풍경 - 바다, 산들, 구름, 넓은 하늘을 보고 황홀해 하는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구로프는, 우리 인간이 존재의 높은 목표들을 잊고 인간 자신의 존엄을 망각했을 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가와 - 아마도 보초였떤 모양인데 - 그들을 바라보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세세한 일들까지 그렇게도 신비하고 또 아름다워 보였다. 페오도시야에서 기선이 이미 불을 끄고 아침노을을 받으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풀잎에 이슬이 맺혔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그렇소, 집으로 돌아 갈 때요..."

그들은 도시로 돌아왔다. (p.338-339)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매혹적인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열정적이 되었으며 그녀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주 생각에 잠기곤 하였고 항상 그에게 그가 그녀를 존중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이제는 그녀를 천박한 여자라고 여기고 있다고 고백하라고 졸랐다. 거의 매일 저녁 느지막이 그들은 도시를 벗어나 오레안다나 폭포로 나갔다. 산책은 즐거웠고 변함없이 매번 멋지고 굉장한 인상을 남겼다. (p.340)

 

"당신을 생각하고...기억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요. 저를 좋게 기억해 주세요. 만나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는군요.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요."

열차는 빠른 속도로 떠나갔고 그 불빛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일 분 후에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 달콤한 망각과 무분별을 어서 빨리 중지시키려고 고의로 그렇게 음모를 꾸민 것 같았다. 이제 구로프는 플랫폼에 혼자 남아 먼 어둠 속을 응시하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으로 귀뚜라미 소리와 전선줄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 그의 인생 속에 또 하나의 모험, 또는 로맨스가 있었으며 그것도 역시 이미 끝났고 이제는 기억만 남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마음이 저렸으며 슬펐고 가벼운 후회 같은 것을 느꼈다. 그가 앞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그 젊은 여자는 그와 함께 행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친절하고 진심으로 대하기는 했지만 그의 어조나 애무에는 가벼운 조롱, 행복을 느끼는 남자, 또 그녀보다 거의 두 배나 나이가 많은 남자의 다소 거친 우쭐거림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내내 그녀는 그를 선량하고 독특하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그녀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즉 그는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속인 셈이었따...(p.341-342)

 

이제 한 달만 어떻게 보내면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기억 속에 안개처럼 덮여 버려 다른 여자들이 꿈에 보이는 정도로 아주 가끔만, 그 심금을 울리는 미소와 함께 꿈에 보이겠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겨울이 깊었는데도 마치 그가 바로 어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헤어진 것처럼 모든 것이 기억 속에 또렸하였다. 그리고 기억은 점점 더 강하게 불타올랐다. (p.344-345)

 

그는 오랫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미소를 짓곧 했다. 그러면 회상은 상상으로 넘어갔으며 상상 속에서 과거는 미래와 섞였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좇으며 따라다녔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녀는 그때보다 더 아름답고 젊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얄타에 있었던 그때보다 더 멋있게 여겨졌다. 그녀는 저녁마다 책장 뒤에서, 벽난로로부터, 구석으로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숨결과 옷의 다정한 사각거림이 그에게 들려왔다. 거리에서도 그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그녀와 비슷한 여자가 없나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추억을 아무하고라도 나누고 싶은 강학 욕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집에서 그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집 밖에서는 같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없었따. 세든 사람이나 은행 동료와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가 그때 사랑했었나? 그와 안나 세르게에브나와의 관계 속에 무언가 아름답고 시적이거나 혹은 교훈적이거나 혹은 그냥 흥미 있는 그 무엇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막연히 사랑에 대해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무도 무엇이 문제인지 추측하지 못했고, 아내만이 검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곤 했다.

"디미트리, 당신에겐 멍청이의 역할이 전혀 안 어울려요."

어느 날 밤 그의 파트너인 관리와 함께 의사클럽에서 나오다가 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내가 얄타에서 얼마나 매혹적인 여자와 사귀었는지 아신다면 놀랄거요!"

관리는 썰매마차에 앉자 출발했지만 갑자기 돌아보며 소리쳤다.

"드리트리 드미트리치!"

"네?"

"당신 말이 옳았어요. 전번 그놈의 철갑상어는 맛이 좀 갔어요!"

이 말, 이 평범한 말이 웬일인지 갑자기 구로프를 화나게 했으며 천하고 더럽게 여겨졌다. 이 무슨 야만적인 관습이람, 이 무슨 지긋지긋한 사람들인가, 이 무슨 바보 같은 저녁모임이고 재미없고 하릴없는 나날들인가! 끝없는 카드놀아, 진창 먹고 마시고, 내내 똑같은 이야기들을 지끌이지, 이 쓸떼없는 일과 항상 똑같은 이야기들이 가장 좋은 시간과 가장 좋은 힘을 제몫으로 요구하고 결국 어떤 꽁지 잘린, 낼개 꺾인 삶이 마귀처럼 남게 되고 정신병원이나 포로수용소에 있는 것처럼 나갈 수도 도망갈 수도 없게 되지!

구로프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다음 날을 종일 두통으로 보냈다. 그리고 계속 그는 잠ㅁ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으며 내내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기거나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아이들도 지겨웠고 은행도 지겨웠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p.34-348)

 

'이 모든 게 얼마나 바보 같은 괜한 난리야.' 그는 깨어나 어두운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벌써 저녁이었다. '뭣 때문에 여기서 잠까지 실컷 자 두었군. 이제 밤에는 뭘 한다지?'

그는 병원용 시트 같은 회색의 싸구려 천으로 덮여 있는 침대에 앉아 화가 나서 자신을 비웃었다.

'자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을 찾아왔군. 자 로랜스를 찾아왔어...그러니 죽치고 있어야지.' (p.350-351)

 

관객들이 들어오고 자리를 잡는 동안 내내 구로프는 눈으로 탐욕스럽게 찾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들어왔다. 그녀는 셋째 줄에 앉았고 구로프는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심장이 죄어 왔다. 그는 이제 분명히 깨달았다. 지금 온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가깝고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시골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는 아무 두드러진 점이라고는 없는, 손에는 싸구려 오페라 안경을 쥐고 있는 이 작은 여자는 지금 그의 삶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고, 그의 슬픔이자 기쁨이고, 그가 지금 자신을 위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수준 낮은 오케스트라, 거지 같은 시골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그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하며 공상에 잠겼다. (p.352)

 

첫번째 막간에 남편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그녀는 혼자 일층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역시 일층에 앉아 있던 구로프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억지로 미소를 띠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다시 경악하는 표정으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두 손에 부채와 오페라 안경을 꽉 쥐는 모습이 기절하지 않으려고 자신과 싸우는 것이 분명했다. 둘은 침묵했다. 그녀는 앉아 있었고, 당황하는 그녀에게 놀란 그는 옆에 앉을 엄두를 못 내고 서 있었다. 다시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음을 맞추느라 삑삑거리기 시작했는데 모든 좌석으로부터 사람들이 보는 것 같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일어나 빨리 출구로 갔고 그는 그녀 뒤를 따라갔다. 둘은 정신없이 복도를 따라 걸으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들 눈앞에는 법원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 교사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 궁정 관리인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른거리고 지나갔는데 그들 모두는 제복에 무슨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귀부인들과 옷걸이에 걸린 모피 외투들이 어른거리고 지나갔다. 맞바람이 불어 담배꽁초 냄새가 풍겼다.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는 구로프는 생각했다.

'맙소사, 이 사람들은 왜 이리 어른거리나..., 이 오케스트라는 또..."

그리고 이 순간 그는, 그 당시 저녁에 역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배웅하였을 때 모든 것이 끝났고 그들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을 갑자기 기억했다. 그러나 끝이 나려면 아직 멀었다!

'측면 관람석 입구'라고 씌어진 좁고 어두운 계단에서 그녀는 멈춰 섰다.

"얼마나 저를 놀라게 하셨는지요!" 아직 질리고 놀란 얼굴로 숨이 가빠하며 그녀는 말했다. "오, 어떻게 그렇게 저를 놀라게 하세요., 전 죽는 줄 알았어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셨어요? 무엇 때문에?"

"이해해 주세요, 안나 세르게예브나, 이해해 주세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성급히 말했다. "간청이니 제발 이해해 주세요..."

그녀는 공포와 애원과 사랑과 함께 그를 바라보았고, 기억 속에 그의 모습을 더 강하게 보존하려는 듯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녀가 계속 말했다. "저는 항상 당신 생각만 했어요. 전 당신 생각으로 살아요. 저도 잊고 싶었어요. 잊고 싶었다구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기 오신 거예요?"

위의 층계참에서 두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구로프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끌어당겨 그녀의 얼굴과 양 볼과 양손에 키스했다.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에요." 그녀는 경악하며 그를 자기 몽에서 떼며 말했다. "당신과 저는 정신이 나갔어요. 오늘 떠나세요. 당장 떠나세요...모든 신성한 것을 걸고 당신에게 간절히 청할게요. 제가 이렇게 애원해요....사람들이 이리로 와요!"

누군가가 층계를 따라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당신은 떠나셔야 해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속삭이는 소리로 계속 말했다. "들려요? 드미트리 드미트리치? 제가 모스크바로 당신을 찾아가겟어요. 전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행복하지 않고 앞으로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결코! 제게 더 큰 고통을 주지 마세요! 맹세할게요, 제가 모스크바로 가겠어요. 지금은 헤어지도록 해요! 내 사랑하는 착하고 소중한 사람, 안녕!"

그녀는 그에게 악수하고 내내 그를 뒤돌아보면서 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정말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구로프는 잠시 그곳에 서서 귀를 기울인 다음 모든 것이 잠잠해지자 자기 옷을 찾아 극장에서 나왔다. (p.352-357)

 

그에게는 두 가지의 삶이 있었다.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공공연한, 필요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삶이고, 조건부 진리와 조건부 허위로 가득 찬 그의 지기나 친구들의 삶과 완전히 비슷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몰래 흐르는 삶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상한, 아마도 우연한 사태의 연속으로 인하여 그에게 중요하고 흥미롭고 필수적인 모든 것, 그리고 그가 그 속에서 진솔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모든 것, 그의 삶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진행되고 있었고, 그의 거짓이자 진실을 감추기 위해 그가 덮고 있는 표피, - 예를 들어, 그의 은행 근무, 클럽에서의 토론, 그가 하는 '열등한 인종'이라는 말, 아내와 함께 기념 파티에 가는 것 - 이 모든 것들은 공공연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가 본 것을 믿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정하고 재미있는 삶은 마치 밤의 덮개 밑에서처럼 비밀의 덮개 밑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여겼다. 모든 개인의 삶은 비밀의 기반 위에 유지되고 있으며, 교양 있는 인간이 개인의 비밀을 존중해야 한다고 신경질적으로 야단인 것은 부분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p.35-359)

 

그녀는 흥분 때문에 또 그들의 삶이 이렇게 슬프게 만들어져 있다는 비참한 생각에서 울고 있었다. 그들은 몰래 만나고 사람들로부터 도둑처럼 숨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이미 부서졌단 말인가?

"이제 그만 그쳐요." 그가 말했다.

그에게는 그들의 이 사랑이 아직 금방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확실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점점 더 강하게 그에게 매달렸고 그를 열열히 사랑했다.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말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애무하려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이때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미 세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늙고 흉하게 된 것이 그에게 매우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의 손이 놓여 있는 어깨는 따뜻했고 떨고 있었다. 그는 이 삶에, 아직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우나 아마도 이미 그이 삶처럼 바래고 시들기 시작하는 쪽으로 더 가까이 가는 이 삶에 연민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그를 이다지 좋아하는 것일까? 그는 항상 여자들에게 본래의 그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았고 그들은 그 속에서 그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사람, 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탐욕스럽게 찾던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챘으나 그래도 여전히 사랑했다. 그들 중의 어느 한 여자도 그와 행복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여자들을 사귀고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을 했지만 사랑만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회색이 된 지금에야 그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진정으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일생 처음으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그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처럼, 혈연처럼, 남편과 아내처럼, 다정한 친구들처럼 서로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에겐 운명이 그들을 서로서로에게 예정해 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왜 그에게 아내가 았고 그녀에게 남편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철새 한쌍, 암컷과 수컷이 사로잡혀 서로 다른 새장에서 살게 된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수치로 여겼던 과거를 서로 용서했으며, 현재의 모든 것을 용서했고, 그들의 이 사랑이 그들 둘을 변화시켰다고 느꼈다.

예전에 우울할 때면 그는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말들로써 자신을 달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깊은 연민을 느겻으며 진솔하고 다정하고 싶었다.

"멈춰요, 내 이쁜 사람, 좀 울었으니 낫지..."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무슨 수를 좀 생각해 냅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오랫동안 의논하고, 숨어야 하고 속여야 하고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잠깐밖에 만날 수 없는 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하는 데 대해 이야기했다. 이 견딜 수 없는 행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어떻게?"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떻게?"

그리고 아직 조금 더 기다리면 해결 방법이 찾아지고, 그때는 새로운 멋진 삶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끝이 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이었다. (p.360-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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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Антон П. Чехов, 1860∼1904)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 항구 도시인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은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새벽 기도와 성가대 활동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작가의 유년 시절의 지각(知覺)을 지배하게 된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파산해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떠난 후 체호프는 타간로크에 혼자 남았다. 이때부터 체호프는 독립심과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며 공부하던 그는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마친 뒤 1879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고, 졸업 후 의사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나섰다. ‘안토샤 체혼테’, ‘내 형의 아우’, ‘쓸개 빠진 남자’와 같은 필명으로 생계를 위해 유머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단편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885년 12월 체호프는 레이킨의 초대를 받아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
거기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와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수보린을 알게 된다. 1884년 의사 자격을 얻은 후 결핵을 앓는 와중에도 의료 봉사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풍자와 유머가 담긴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로비치는 체호프의 『사냥꾼』을 읽으면서 그의 위대한 재능이 소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 무렵 그에게 당대 최고의 작가 그리고로비치가 천재적인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문학에 집중하라는 조언의 편지를 보내 온다.
이 충고 이후 1887년 봄 무렵부터 체호프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객관적인 작가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으로 수보린은 체호프에게 고정 지면을 내주었고, 경제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의 경제적 후원 덕택에 체호프는 원고 마감 시간과 주제의 제약과 같은 현실적 부담에서 벗어나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황야』, 『지루한 이야기』, 『등불』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고, 30세 때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기점으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여 단편집 『황혼』(1887)으로 푸슈킨상을 받고 희곡 『이바노프』(1887), 중편소설 『대초원』(1888)을 발표하며 그동안의 스타일에 작별을 고했다. 1890년에는 사할린 섬으로 가 당시 제정 러시아의 유형 제도를 면밀히 관찰하고 이에 관한 르포르타주 『사할린 섬』(1895)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대중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며, 사할린에서 만난 하층민 유형수들과 정부 제도의 부조리는 이후 발표되는 그의 작품이 민중의 삶에 더욱 밀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 모스크바 근교의 멜리호보에 정착한 작가는 왕성한 창작열로 『6호실』(1892), 『문학 선생』(1889∼1894), 『롯실트의 바이올린』(1894), 『대학생』(1894), 『3년』(1895), 『다락이 있는 집』(1896), 『나의 삶』(1896), 『갈매기』(1896), 『농군들』(1897)과 같은 후기 걸작들을 집필했다.
한편으로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톨스토이, 코롤렌코와 함께 기근(饑饉)과 콜레라 퇴치 자선사업을 펼쳤으며, 학교와 병원 건립 등 사회사업에도 참여했다. 1898년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크림 반도의 얄타로 이사한 체호프는 우울과 고독 속에서 나날을 보냈는데, 모스크바 예술극장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의 결혼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용무가 있어서』(1899), 『사랑스러운 여인』(1899),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바냐 외삼촌』(1899), 『골짜기에서』(1900), 『세 자매』(1901), 『약혼녀』(1903) 등을 발표했다.
1904년 1월 17일 체호프의 생일에 초연된 [벚나무 동산]과 창작 25주년 축하연은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지만, 그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같은 해 6월 독일 바덴베일레르(Баденвейлер)로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요양을 떠나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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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 체호프 (박현섭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체호프 (오종우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체호프 단편선 - 체호프 (김학수 옮김, 문예 세계문학)

지루한 이야기 - 체호프 (석영중 옮김, 창비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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