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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셀리 (오숙은 옮김, 미래사)

by handaikhan 2023. 2. 5.

 

<메리 셀리 - 프랑켄슈타인 (1818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런던보다 한참 북쪽에 자리 잡은 곳이다. 이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걷도 있으면 차가운 북풍이 가볍게 뺨을 스치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내 가슴을 기쁨으로 채워준다.

이런 기분 알겠니? 이 산들바람, 내가 가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곳의 혹독한 기후를 미리 맛보게 해 주지. 이 약속의 바람에 내 꿈은 더욱 강렬하고 선명하게 타오른다. 북극은 얼음뿐인 황량한 땅이라고 스스로 냉정해지려 애써도 잘 안 되는구나. 나에게 북극은 늘 아름다움과 기쁨의 당이기에. (p.23-24)

 

나는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세상의 한 부분을 보면서 목마른 호기심을 실컷 충족시키고, 지금껏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땅에 내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것들이 나에겐 커다란 유혹이며, 그 유혹은 온갖 위험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울 만큼 크다. 그러기에 나는 어린아이가 친구들과 동네 강을 거슬러 탐험을 시작하며 작은 배를 띄울 때처럼 이 고생스러운 항해를 기쁜 마음으로 시작하련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이 부질없다고 해도, 내가 북극 근처의 항로를 발견하여 ㅅ후개월씩 걸리는 대륙간 여정을 단축하거나 자력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 물론 가능하다면 광산 같은 것을 개발해야 효과를 보겠지만- 전 인류에게, 아득한 후손에게까지 이루 헤이랄 수 없는 혜택을 주게 될 것이라는 점에는 너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처음 편지 쓸 때의 불안함이 말끔히 가시고 하늘에 닿을 듯한 열정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구나. 마음을 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으로는 확고한 목표 - 영혼이 지성의 눈을 고정시키는 지검- 만큼 좋은 것이 없디. (p.24-25)

 

어쩌면 지금까지 내 인생은 탄탄대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가 차려놓은 온갖 미끼보다 명예를 선택했다. 그래, 네 힘찬 목소리로 잘했다고 격려해 주겠지! 내 용기와 결심은 확고하다. 그런데도 자꾸 불안하게 기분이 가라앉는 건 왜일까. 바야흐로 길고 험한 항해를 떠날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겠지. 험난함을 이겨내려면 불굴의 정신이 필요하단다.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낙심할 때조차 나는 용기를 내야 한다. (p.26-27)

 

다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어 아직까지 흡족하지 않구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친구가 없다. 마거릿. 내가 성공에 열광할 때 같이 기뻐해줄 사람도, 내가 낙심해서 괴로워할 때 나를 격려해 줄 사람도 없어. 그래서 내 생각을 종이 위에 옮기기로 했다. 정말이다. 하지만 종이란 감정을 전달하기엔 빈약한 매체다. 나와 더불어 느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p.29-30)

 

내가 불평 좀 한다고 해서, 또 고난을 위로해 줄 친구를 아쉬워한다고 해서 내 결심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 결심은 운명처럼 흔들림이 없다. 지금 항해를 미루는 것도 날씨 때문에 출항이 허락되지 않아서일 뿐이다. 이번 겨울은 지독히 추웠지만 곳곳에 봄의 신호가 보이고 있다. 더구나 올봄은 유난히 일찍 찾아온다고 하니 어쩌면 예상보다 일찍 출항할지도 모르겠다. 절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마.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내 손에 달렸을 때에 내가 얼마나 신중하고 이해심 많은지는 너도 잘 알잖아. (p.33)

 

잘 지내라, 마거릿. 이 오빠가 다짐하지만 너는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무모하게 위험에 덤비지 않겠다. 항상 침착하게, 침을성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마.

그러나 성공은 내 노력에 왕관을 씌워주리라. 그렇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멀리, 길도 없는 바다에 안전한 길을 더듬어왔는데. 바로 저 별들이 내 승리의 목격자요 증인들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으되 순종적인 저 땅을 계속 나아가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사나이의 굳센 가슴과 단호한 의지를 그 무엇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p.36)

 

나는 그에게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 지금껏 내 운명이 허락했던 것보다 더 진한 교감을 친구와 나누고 싶다는 갈증을 이야기 했고, 이런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자랑할 수 없다는 내 신념을 덧붙였다. 

그러자 이방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우린 불완전한 존재지. 만들어지다만 존재. 하지만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선하고 고귀한 사람도 - 그런 사람을 친구 삼아야겠지만 - 우리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성격이 완전해지도록 도와주지는 못한다네. 나한테도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는 가장 고귀한 인간이었고 덕분에 나는 우정에 관해서 좀 알게 되었네. 그런데 자네에게는 희망이 있고 자네 앞에 펼쳐진 세상이 있는데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하지만 나,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없다네."

이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평온해지는가 싶더니 슬픔으로 굳어져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는 침묵에 빠져들었고 곧 자기 선실로 들어가버렸다.

아무리 그의 정신이 망가져버렸다고 해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만큼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바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지역이 보여주는 온갖 풍경들은 마치 그의 영혼을 지상에서 끌어올리는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인간들은 두 개의 존재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불행에 시달리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 속, 슬픔이나 어리석은 무모함 따위는 들어설 수 없는 영역에 들어가 앉으면 어떤 후광을 지닌 천상의 존재처럼 변하게 되지. (p.44-45)

 

"월튼 선장, 자네도 잘 알겠지만 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겪어왔네. 사실 오래전부터 그 불행한 기억들을 내 몸과 함께 묻어버리기로 했었지만 자네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어. 자네는 한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지. 하지만 내 경우처럼, 그 소망의 대가가 도리어 자네를 무는 독사가 되지 않기를 바라네. 내가 겪었던 재앙을 말하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똑같은 전철을 밟으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똑같은 위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적절한 교훈을 끌어낼 수도 있을 거야. 만약 자네가 이 사업에 성공하면 그 교훈이 방향을 가르쳐줄 것이고, 혹 실패한다 해도 그것으로 위안 삼을 수 있겠지. 누가 들어도 놀라운 이야기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게. 만약 우리가 좀 더 익숙한 환경 속에 있었다면 난 자네가 나를 불신할까, 어쩌면 비웃지 않을까 걱정했을 거야. 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웃고 넘겨버릴 많은 사건들도 이 야성의 신비가 감도는 곳에서는 가능한 일로 여겨질 것이네. 그리고 그 많은 사건들이 진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는 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걸로 믿어 의심치 않네." (p.46-47)

 

우리 보모님은 나이 차가 상당히 많이 났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이것이 두 분을 헌신적인 애정의 끈으로 더욱 가깝게 묶어준 것 같았다. 심성이 곧은 아버지에겐 어떤 정의감 같은 것이 있었고 따라서 헌신적인 사랑을 높이 평가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사랑을 받기만 한 사람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고난을 겪은 사람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p.51-52)

 

두 분은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들의 첫째 아이인 나는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그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같이 했다. 꽤 오랫동안 나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두 분은 서로를 깊이 사랑한 만큼, 사랑의 광산에서 무한한 애정을 캐내어 나한테 퍼붓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아버지의 인자한 웃음은 내가 첫 번째로 떠올리는 기억이다.

나는 이들의 장난감이자 인형이었고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이들의 아이, 천진하고 여린 그 존재는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라고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이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이들의 손에, 나에 대한 의무를 얼마나 다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두 분은 자신들이 탄생시킨 존재에 대한 의무를 깊이 새기고 있는 데다, 그들의 전부였던 적극적인 애정까지 쏟아부었으니, 어린 시절 내가 시간마다 인내와 자선심, 자제력을 쌓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완전한 듯하지만 한 가닥 즐거움이 빠진 비단 노끈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두 분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머니는 몹시 딸을 갖고 싶어 했지만 이들에게 자식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다섯 되던 해, 우리는 이탈리아 국경 너머로 짧은 여행을 나섰다가 코모 호수 근처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두 분은 성품이 너그러워 종종 가난한 사람들의 오두막에도 들어가곤 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의무 이상의 것, 필요이자 열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험난한 과거와 거기서 벗어난 과정을 되새기면서 이번에는 당신 자신이 고난 받는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고 싶어 했다. (p.52-5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이탈리아 여행 - 괴테 (박영구 옮김,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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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자랐다. 우리의 나이 차는 채 한 살도 되지 않았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고 이간질시키기 좋아하는 족속들이 보면 그래도 우리는 남남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이였고, 성격 차이는 서로를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가 좀 더 조용하고 집중하는 편이었다면, 나는 좀 더 활발하고 집요했으며 지식을 갈구하며 깊이 파고드는 쪽이었다. 그녀는 시인들의 시 낭송회를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우리 스위스 집을 둘러싼 웅장하고 경이로운 장관 - 장엄한 산맥의 위용, 계절의 변화, 폭풍우와 잔잔함, 침묵의 겨울, 그리고 생기와 기백이 넘치는 알프스의 여름 - 속에서 넘쳐 오르는 감탄과 기쁨의 배출구를 찾았다. 엘리자베스가 진지하고 흡족하게 장엄한 자연의 겉모습을 감상하는 동안 나는 그 원인을 탐구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나에게 세계란 밝혀내고 싶은 하나의 비밀이었다. 호기심, 숨겨진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기 위한 부단한 연구, 드디어 그 법칙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의 날아갈 듯한 기쁨, 이런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감정들이다. (p.57-58)

 

또 우리한테 연극이나 가면극을 시키기도 했는데, 그 배역들은 론세스바이에스나 원탁의 기사 주인공들, 또는 이교도로부터 예수의 신성한 무덤을 되찾기 위해 피를 흘리는 수많은 기사 이야기에서 끌어낸 것들이었다. (p.58-5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롤랑의 노래 (김준환 옮김,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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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은 내 운명을 조종해 왔던 거대한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철학이라는 학문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열세 살 되던 해, 우리 모두는 토농 근처의 온천장으로 놀러 갔었다. 날씨가 험악했던 까닭에 우리는 온종일 여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 집에서 나는 우연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책을 발견했다. 나는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 별생각 없이 책을 보던 나는 그가 펼치는 이론과 놀라운 사실들에 곧 열광하게 되었다. 머릿속에 새로운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난 신이 나서 아버지한테 달려갔고 내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이 책의 제목을 힐끗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빅터, 이런 것에 시간 낭비 말아라. 그건 어설픈 쓰레기란다."

만약에 아버지가 그 말 대신 '아그리파의 이론은 완전히 파기되었으며, 현대과학 체계가 도입한 이론들이 고대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후자가 비현실적이었던 반면 전자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라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난 아그리파의 책을 구석에 던져버리고 예전의 공부에 더 큰 흥미를 느끼며 내 상상력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나아가 내 생각의 사슬들이 치명적인 충격을 받고 결국 나 자신을 망치게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힐끗 스치듯 보던 아버지의 눈길은 당신이 책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확신시켜 주지 못했다. 나는 탐욕스럽게 그 책을 읽어나갔다.

집에 돌아오자 난 맨 먼저 이 작가의 모든 저서를 입수했고, 이어서 파라켈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섭렵했다. 난 이들 작가의 황당한 공상을 기쁘게 일고 연구했다. 이들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오직 나만 아는 보물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늘 자연의 비밀을 캐내려는 열망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현대 철학자들이 치열한 노력 끝에 대단한 발견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공부했던 내용은 늘 불만스럽고 흡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아이작 뉴턴 경은 스스로를, 인간이 탐험하지 않았던 광대한 진실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는 어린아이처럼 느꼈다고 한다. 자연과학의 각 분과에서 연구하는 그 후게자들에 대해선 나도 웬만큼 알고 있었고, 어린 내 눈에는 그들이 똑같은 것을 찾는 초보자들로 보였다. 

배운 것이 없는 농부는 자기 주변 요소를 관찰하고 그 실질적인 쓰임새를 익힌다. 많이 배운 철학자라도 그 농부보다 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자연의 얼굴에 씌워진 베일을 부분적으로 들춰냈을 뿐, 자연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경이롭고 신비하게 남아 있다. 그는 사물을 절단하고 해부하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궁금적인 원인은 고사하고 이차적, 삼차적인 원인들도 절대 알지 못한다. 나는 인간들이 자연의 성채에 들어가는 걸 막고 있는 그 요새와 장애물을 응시하며 경솔하게, 멋모르고 푸념해대곤 했다.

그런데 여기 책이 있었다. 더 깊이 파고들어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했던 말들을 송두리째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제네바의 학교에서 행해지는 고루한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혼자서 상당히 깊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과학과는 관계가 없었기에, 나는 혼자서 분별력 없이 어린아이처럼 끙끙대면서 지식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자 했다. 나는 새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정말 열심히, 철학자의 돌과 생명의 영약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곧 내 모든 관심은 생명의 영약에 집중되었다. 부란 저급한 목표지만 만약 내가 인체에서 병을 몰아낼 수 있다면, 가혹한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는가!

그것만이 내 꿈은 아니었다. 유령이나 악마를 깨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너그럽게 제시한 약속이자 내가 가장 열심히 얻고자 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내 마법이 항상 실패했을지라도, 나는 내 스승들의 부족한 기술이나 부정확함을 탓하기보다는 나의 경험 부족을 실패의 원인으로 돌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나는 폐기된 과학체계에 빠진 채, 맹렬한 상상력과 유치한 추론에 이끌려서 어설픈 과학자처럼 상반되는 수많은 이론을 결합시키면서 잡다한 지식의 찌꺼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내 생각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p.61-6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과학기술의 개척자들 - 송성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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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는 전기의 확실한 법칙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다. 마침 자연철학을 많이 공부한 남자가 우리 집에 묵고 있었는데, 그는 이 재난에 흥분해서 전기와 갈바니 전기에 관해 자신이 세운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말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가 말한 모든 내용은 내 상상력의 지배자였던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파라켈수스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 사라들이 무너져버리자 나는 습관처럼 해온 공부가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모든 것이 갑자기 천박하게 보였다. 어쩌면 우리들의 어린 날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이런 변덕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때까지 해오던 공부들을 당장에 팽개치고 자연사 및 그 산물들을 학문의 기형아나 조산아로 여겼으며, 참된 지식의 문턱 안으로는 절대 발을 들이지 못할 사이비 과학이라고 경멸하게 되었다. 이런 심정에서 나는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진 과학으로서, 또 연구할 가치가 많게 보였던 수학 및 수학의 여러 분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우리 영혼은 이상하게 만들어져 있고, 우리 인생은 그처럼 가는 끈으로도 번영이나 몰락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취향과 의지를 바꿔버린 기적과도 같은 이 변화는 나의 수호천사가 즉석에서 내놓은 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 그 순간에도 운명의 별에 걸려서 나를 덮칠 준비를 하던 폭풍의 방향을 돌림으로써 나를 구하려고 했던 천사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수호천사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내가 자신을 혹사하면서 해왔던 해묵은 공부를 포기하자 특별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불행이란 곧 수호천사들의 고발이며, 행복은 그들의 무관심이라는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착한 천사의 엄청난 노력이긴 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운명은 너무 강력했고 변할 줄 모르는 운명의 법칙은 나의 철학이고 무시무시한 파멸을 명령했다. (p.65-66)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의 표정엔 애정이 넘쳤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끈이 잘려나갔을 때의 느낌, 그 마음에 다가온 상실감, 그 표정에 나타나는 절망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마음을 추슬러서, 날마다 보았던,, 그 존재 자체가 우리 자신의 일부였던 사람을 영원히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 그 다정하던 ㄴ눈빛이 사라지고 귓가를 맴돌던 부드러운 음성도 잦아들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가 언젠가는 올 거라고.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불행이 현실로 느껴질 때 비로소 쓰디쓴 슬픔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지막지한 손이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갈라놓지 않겠는가? 누구나 느껴왔던, 또 느끼게 될 슬픔을 내가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슬픔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탐닉으로 바뀌는 시간은 결국 오게 마련이다.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찾아오며, 비록 모독으로 비칠지언정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남은 사람들과 예전처럼 계속 어울려 살아가야 하고 스스로를 그 저승사자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행운아로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사건 때문에 미루어졌던 나의 잉골슈타트행이 다시 결정되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몇 주간의 휴가를 받았다. 솔직히 슬픔에 싸여 조용한, 죽음처럼 적막한 집을 그렇게 빨리 떠나 생명이 충만한 곳으로 달려가는 건 일종의 모독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슬픔이란 생소했지만 그래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나는 나한테 남겨진 그 광경을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엘리자베스를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사실 그녀는 슬픔을 감추고 우리 모두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삶을 응시하고 꿋꿋하게 그 의무를 다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삼촌과 사촌이라고 불러왔던 우리 식구들에게 헌신적이었다. 환한 미소를 다시 지으며 우리에게 그 미소를 나누어주었던 이 시기만큼 그녀가 매혹적이던 때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마저 잊은 채 우리의 슬픔을 잊게 해 주려고 애썼다.  (p.68-70)

 

나는 나를 태우고 떠날 2륜 경마차에 몸을 싣고 무척 우울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나, 그동안 서로 기쁨을 주려고 애쓰는 다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던 나는, 이제 혼자였다. 내가 향하고 있는 대학교에서는 나 스스로가 나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 생활은 세상과 동떨어져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때문에 새로운 얼굴을 대하면 억누르기 힘든 적대감을 느끼곤 했었다. 나는 남동생들과 엘리자베스, 클레르발을 사랑했다. 이들은 '편안하고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는 전혀 재주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도 모르게 용기와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나에게는 학문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있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청춘을 한 곳에 가두어두기는 힘들 거라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내 위치를 차지하고 싶다고, 그런 욕구가 충족된 이상, 후회는 실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p.71)

 

어릴 적 나는 현대의 자연과학 교수들이 약속하는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었다. 극단적인 치기와, 그런 공부를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사고의 혼란으로 인해, 나는 시간의 길을 따라 지식의 계단을 거슬러갔고 최근의 질문에 대해 발견된 성과들을 잊혀진 연금술사들의 꿈들과 맞바꾸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현대 자연철학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어떤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거장들이 불멸과 힘을 추구한다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 관점은, 비록 무익할지라도 근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장면이 바뀐 것이다. 그 면접 교수의 야망은 그 거장들의 이상, 과학에 대한 내 열정의 바탕이었던 그 꿈들을 폐기시키는 데에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없이 뻗어나간 원대한 꿈을 거의 가치도 없는 현실과 바꾸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p.73)

 

"고대의 과학 교사들은 불가능을 기대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거장들도 기대하는 바가 거의 없죠. 그들은 금속의 성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생명의 영약은 헛된 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 더러운 오물을 만지작거리고, 현미경과 쇳물 도가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이들은 실로 기적을 행해왔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후미진 곳을 관찰하고 자연이 거기 숨어서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들은 신의 영역에도 접근합니다. 혈액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의 성질은 무엇인지 밝혀냈죠. 이들은 새롭고도 거의 무한한 능력을 획득해 왔습니다. 천둥을 명령하고 지진을 흉내 내며 그늘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방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교수의 그 말 - 차라리 운명의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이 나를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내 영혼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적과 씨름하는 기분이었다. 내 존재의 체계를 이루는 많은 열쇠들이 하나씩 만져지는 것 같았다. 암호들이 차례로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구상, 하나의 목적으로 채워졌다. 프랑켄슈타인의 영혼이 외쳤다. 그렇게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내가 더 많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리라. 이미 찍힌 발자국을 따라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미지의 힘을 탐사할 것이며, 창조의 가장 은밀한 신비를 세상에 펼쳐 보이리라. (p.74-7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지킬박사와 하이드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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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노력이란 아무리 빗나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유익한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마련이지. 9p.76)

 

"제자를 두게 되어 기쁘군. 자네가 그런 재능이 있는 만큼 부지런히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화학은 자연철학에서 가장 크게 진보해 온 분야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도 내 연구웨서 큰 성과를 보았지. 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분야의 과학을 소홀히 한 적도 없네. 자기 분야의 지식만 파고든다면 참으로 딱한 화학자가 되겠지. 자네가 한낱 실험꾼이 아니라 진정한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수학을 비롯해서 자연철학의 모든 분야를 공부하라고 충고하겠네.: (p.77)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현상 중 하나가 인간, 아니 생명을 지닌 모든 동물의 신체구조였다. 어디에서 생명의 원리가 비롯된 것일까? 나는 종종 이렇게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것은 대담한 질문이었지만,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심함과 부주의로 인해 우리의 탐구 활동이 제약받지만 않는다면 바로 근처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런 상황을 곰곰 생각하다가, 그때부터 생리학과 관련된 분야를 더욱 자세히 공부하기로 했다. 거의 초자연적이라고 할 열정이 없었다면 나의 연구는 무척 성가시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생명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죽음에 관해 연구해야 했다.

나는 곧 해부학에 완전히 통달하게 되었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인체의 자연적인 소멸과 부패 또한 관찰해야 했다. 아버지는 나를 키우면서 내가 어떤 초자연적인 공포에도 몸을 사리는 법이 없도록 상당히 주의를 기울였다. 사실 나는 미신적인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하거나 유령을 겁냈던 기억이 전혀 없다. 어둠은 내 상상력에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했으며 교회 묘지는 생전에 아름답고 강인했던 존재들이 구더기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생명을 빼앗긴 자들의 저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p.8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슬리피 할로우 - 워싱턴 어빙 (김동준 옮김,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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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부패의 원인과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납골소와 시체 안치소에서 밤낮을 보내야 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온갖 것들에 나는 관심을 쏟았다. 나는 아름다운 인간의 형태가 어떻게 추하게 훼손되어 없어지는지 보았다. 생명이 만개했던 볼에 죽음의 부패가 자리 잡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과 두뇌의 경이로움을 구더기들이 먹어치우는 과정을 보았다. 이런 원인 과정의 순간순간을, 중단시켜 검토하고 분석하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화를 더듬어 가다 보니 마침내, 그 암흑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빛이 내게 쏟아졌다 - 너무 환하고 신비하면서도 단순한 빛이어서, 나는 그것이 비추는 엄청난 전망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똑같은 과학분야의 많은 천재들 가운데 오직 나 혼자만이 그처럼 기막힌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미친 사람의 꿈이 아니다. 저 하늘의 태양도 지금 내가 다짐하는 그 진실보다 더 뚜렷하게 빛나지 않는다. 어떤 굉장한 기적이 그것을 연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견의 무대는 확실하고 개연성이 있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나는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생명이 없는 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dㅣ 발견에 대해 처음에 느꼈던 경악은 곧이어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다.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고통스러운 노력 끝에 한달음에 내 야망의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슴 뿌듯했다. 그러나 이 발견은 너무나 엄청나서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이르기 위해 하나씩 밟아왔던 단계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결과만 눈에 들어왔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가장 현명했던 자들이 연구하고 꿈꾸어왔던 것이 이제 내 손안에 있었다. 그렇다고 마술의 ㅣ한 장면처럼, 그것이 당장 모든 것을 펼쳐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을 보여주었다기보다 내 노력의 방향을 잡아주어 곧바로 연구 목표를 집어내주는 성격의 지식이었다. 나는 마치 시체들과 묻혀 있다가 대수롭지 않은 한 줄기 희미한 빛을 따라나섰다가 살아날 출구를 찾은 아라비아 인 같았다. (p.80-82)

 

경솔한 열정을 쏟았던 나처럼, 당신까지 파멸과 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이끌 생각은 없다. 나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면, 적어도 나를 보고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자기 존재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위대해지려고 갈망하는 사람보다 자기 고향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9p.82)

 

나는 여러 가지 실패의 경우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작업은 끊임없이 장애에 부딪칠 것이고 불완전하게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계학이 날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힘이 났고 현재의 내 시도는 최소한 미래의 성공을 위한 토대가 되리라는 희망이 솟았다. 또한 내 계획이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고 해서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을 수도 없었다. 한 인간의 창조를 시작한다는 벅찬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세한 신체 부분들이 작업 속도를 늦추는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거대한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p.8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이브의 미래 -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 (고혜선 옮김, 시공사 세계문학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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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거둔 성공의 흥분 속에서 마치 허리케인처럼 나를 앞으로 떠밀었던 그 다양한 감정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이상적인 영역이었지만, 나는 맨 먼저 그곳을 뚫고 들어가 우리의 암흑세계에 환한 빛을 쏟아부어야 했다. 새로운 종들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것이었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들이 나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아버지도 나만큼 자식으로부터 완벽하게 감사받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계속하다 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비록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죽어서 부패하게 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p.84)

 

"네가 잘 지낸다면 넌 애정으로 우리를 생각하며 꼬박꼬박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다. 네 편지가 뜸해지면 곧 네가 다른 의무도 똑같이 소홀히 한다는 증거라고 여길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그런 까닭에 아버지가 어떤 심정일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뿌리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붙들고 있던 그 역겨운 일에서 한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관된 것들은 모두, 나다운 습관을 죄다 삼켜버린 그 엄청난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의 소홀함을 타락이나 무슨 비행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나에게 전적으로 잘못이 없지는 않다고 보았던 아버지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완전한 인간이라면 항상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가져야 하며 절대 열정이나 일시적인 욕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식을 탐구한다고 해서 이 법칙에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연구로 인해 당신의 애정이 엷어지고,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에 무감각해진다면 그 연구는 분명 불법적인 것,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이 항상 지켜졌다면, 어떤 인간도 자기 내면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을 절대로 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는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카이사르는 로마를 구했을 것이며, 아메리카는 좀 더 서서히 발견되어 멕시코와 페루의 제국들이 파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p.85-8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 카르망 베르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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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러웠던 11월의 어느 밤 나는 그 치열했던 싸움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제 내 발 앞에 놓인 생명이 없는 것에 존재의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나는 갈망으로 거의 몸부림치다시피 하면서 주변에 놓여 있던 생명의 기구들을 가져왔다. 이미 새벽 한 시였다. 음산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고 초는 거의 타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반은 꺼져버린 희미한 빛 속에서, 그것이 흐리멍덩한 노란 눈을 떴다. 그것은 거칠게 숨을 쉬면서 발작적으로 사지를 꿈틀거렸다.

이 참극을 보았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아니 그토록 엄청난 고통과 정성을 쏟아 만든 괴물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팔다리를 비례가 맞도록 구성했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도록 짜 맞추었다. 아름답게! 신이시여! 누런 피부는 그 밑에서 움직이는 근육과 동맥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윤기를 내며 흘러내렸고 이는 진주처럼 희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은 그 젖은 눈, 희끄무레한 안와와 거의 비슷한 색깔의 축축한 눈과 쭈글쭈글한 피부, 새까만 입술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섬뜩하기만 했다.

인생에서 인간의 감정처럼 쉽게 변하는 것도 없다. 나는 2년 가까운 시간을, 생명이 없는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것을 위해 휴식과 건강도 포기했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간절히 그것을 갈망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끝낸 지금,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역겨움이 엄습해 왔다.

내가 만들어낸 모습을 더는 참고 바라볼 수가 없어서 연구실을 뛰쳐나왔다. 오랫동안 침실에서 서성였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격한 마음이 겨우 누그러지기 무섭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자 나는 잠시라도 잊고 싶은 마음에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사실 잠이 들긴 했지만 사나운 꿈에 시달렸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잉골슈타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껴안았는데 나의 첫 번째 입맞춤에 그녀의 입술은 죽음의 납빛이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내 품에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가 안겨져 있었다. 수의를 입은 어머니, 그 플란넬 천의 주름 사이로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이가 딱딱 부딪쳤으며 경련을 일으키듯 온몸이 부들거렸다.

그때, 창의 비늘 덧문을 비지고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나는 그 추잡한 것 - 내가 창조해 낸 끔찍한 괴물을 보았다. 그가 침대 커튼을 걷어올렸다. 그 눈, 그걸 눈이라고 한다면, 그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벌어진 입,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고 뺨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히죽 웃었다. 그는 뭔가 말했겠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날 잡으려는 듯 한 손이 뻗쳐왔지만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와 아래층으로 달아났다. 마당으로 몸을 피한 채 극심한 불안감에 밤이 새도록 그곳을 서성였다. 내가 너무나 어설프게 생명을 주어버린 그 악마 같은 시체가 다가올까 봐 귀를 곤두세우고 모든 소리 하나하나에 가슴을 졸였다.

아! 그 공포스러운 얼굴을 보고도 견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미라도 그것만큼 소름 끼칠 수는 없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도 그를 가만히 뜯어본 적이 많았다. 그때는 보기 흉한 정도였지만 막상 근육과 관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단테도 상상 못 할 그런 악마가 되고 말았다.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밤을 새웠다. 때로는 맥박이 너무 거칠게 뛰어서 모든 동맥의 떨림이 느껴졌다. 때로는 무기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았다. 이런 공포 속에는 쓰디쓴 실망감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나의 양식이자 즐거운 휴식이던 꿈이 이제 지옥이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철저하게 바뀌어버린 것이다!

아침이, 음산하게 젖은 얼굴로 밝아왔다. 잠을 못 자 쓰라린 눈에 잉골슈타트 교회의 하얀 첨탑이 보였다. 첨탑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지기가 간밤에 나의 정신병동이 되었던 정원 문을 열자 나는 거리로 나와 빠른 걸음을 옮겼지만,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괴물이 눈앞에 나타날까 두렵기만 했다. 내가 사는 그 집에는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검고 황량한 하늘에서 퍼붓는 비에 몸은 흠뻑 젖었지만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계속 걸었다. 육체를 움직이면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가 조금이라도 덜어질까 해서. 어디를 가는지 무엇하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하고 숱한 거리들을 지났다. 토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심장이 펄떡였고, 난 내 모습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p.88-91)

 

마치, 쓸쓸한 길을

공포와 겁에 질려 걸어가다가

한번 뒤돌아보고 다시 길을 가지만

더는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았네

그는 알기 때문이지, 무서운 마귀가

바로 뒤를 바짝 따라온다는 것을

                         -콜리지 <노수부의 노래>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신곡 - 단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노수부의 노래 -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이정호 옮김, 창조문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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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리스 어를 안 해도 일 년에 만 플로링을 벌고 그리스 어를 몰라도 실컷 먹고 산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무리 공부가 못마땅해도 결국 우리 아버지도 아들이 지식의 땅으로 발견의 항해를 떠나도록 허락해 주셨다는 거 아니냐. (p.93)

 

그 애는 공부를 무슨 불쾌한 족쇄처럼 생각해. 그래서 주로 집 밖에서 등산을 하거나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시간을 보내지. (p.99)

 

정다운 산이여! 아름다운 호수여! 이 방랑자를 변함없이 맞아주다니! 저 산꼭대기는 선명하고 하늘과 호수는 파랗고 잔잔하구나. 이건 평화의 전조인가 아니면 내 불행에 대한 조롱인가? (p.115)

 

제네바 성곽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으므로 제네바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세슈롱이란 마을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밤하늘이 맑았다.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가엾은 윌리엄이 살해된 지점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을 지나갈 수 없었으므로 플랭팔레에 가려면 배로 호수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항해 도중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몽블랑 꼭대기에서 불빛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폭풍우가 급속도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린 나는 폭풍의 방향을 살펴보려고 낮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폭풍우는 저만치 와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곧 뚝뚝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느껴졌고 이어서 거센 비가 몰아쳤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 걸어갔다. 시시각각으로 어둠과 폭풍은 더해갔고 머리 위에선 우레와 함께 무서운 번개가 터졌다. 그 소리가 살레브, 쥐라 산맥, 사보이 알프스로 메아리쳤다. 눈부신 섬광이 번쩍 호수를 비추자, 호수는 불타는 거대한 선박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순간 모든 것이 칠흑처럼 깜깜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스위스에서 그런 폭풍은 종종 일어나는데 하늘 곳곳에서 한꺼번에 번개가 터지기도 한다. 가장 강력한 우레가 마을 바로 북쪽, 벨리브 절벽과 쿠페 마을 사이의 호수 위에서 포효했다. 다른 번개는 엷은 섬광으로 쥐라 산을 비추었고 또 하나가 호수 동쪽을 덮은 채 이따금 몰 산의 모습을 비추었다.

나는 아름답고도 두려운 이 폭풍을 보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고귀한 전쟁에 고무되어 손을 움켜쥐고 고함을 질렀다.

"윌리엄, 우리 천사야! 이것이 너의 장례식이다. 너를 위한 만가다!"

그 순간 가까운 덤불 뒤에서 몰래 다가오는 검은 물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헛것을 보았을 리 없었다. 번갯불이 터지는 순간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거대한 체구, 흉측스러운 얼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모습, 그것은 바로 내가 생명을 주었던 추잡하고 더러운 악마였다. 그가 그곳에는 무슨 일로? 혹시 그가 내 동생을 살해한 걸까? (나는 이 생각에 몸서리쳤다). 이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가 딱딱 부딪쳤고 맥이 풀려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는 휙 내 앞을 지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의 탈을 쓰고서 그 귀여운 아이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가 바로 범인이었다! 후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 생각 자체가 그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나는 악마를 뒤쫓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번의 번개가 번쩍인 순간 살레브 산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 틈새에 매달려 올라가는 그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금방 꼭대기에 오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천둥은 그쳤지만 비는 계속 쏟아졌고 주위 풍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그때까지 잊으려고 애썼던 사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을 창조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 내 손으로 빚은 그것이 침대 곁에 나타났던 일, 그리고 사라졌던 이들이. 그가 생명을 받은 밤으로부터 거의 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이번이 그의 첫 번째 범죄라고 할 수 있을까? 아뿔싸! 나는 살육과 참극을 저지르며 즐거워하는 사악한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았던 것이다. 그가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겠는가?

그날 밤, 추위 속에서 비를 맞으며 지냈던 내 괴로운 심정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날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머리에선 참혹하고 절망스러운 장면들이 바삐 돌아갔다. 내가 인간 세상에 내던졌던 존재, 내가 부여한 의지와 능력으로 방금 여기서처럼 공포를 심어줄 수 있는 그 존재가 흡사 나 자신의 뱀파이어처럼, 무덤에서 살아나 나를 사랑했던 모든 자들을 파멸시킬 나의 영혼처럼 느껴졌다. (p.116-11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드라큘라 - 브램 스토커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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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슬픔 속에서 몇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열한 시, 재판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식구들은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나도 같이 법정에 갔다. 정의가 조롱당하는 이 괴로운 절차가 내게는 생생한 고문으로 느껴졌다. 내 호기심과 방종한 계획의 결과가 두 인간에게 죽음을 초래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되려는 순간이었다. 

한 명은 웃는 얼굴이 천진하기 그지없던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살인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훨씬 더 끔찍하게 살해되려 하고 있었다. 저스틴 또한 착한 소녀였고 행복한 인생을 누릴 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명예스러운 무덤 속으로 사라질 이 순간에, 나는 그 원인제공자였다! 나는 수천 번이라도 저스틴에게 누명을 씌우게 된 내 잘못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사건이 일어나던 때 나는 이곳에 없었고, 또 그런 자백을 한들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만 여겨질 뿐 나로 인해 고통받는 그녀를 풀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p.124-125)

 

엘리자베스의 소박하면서 무게 있는 호소에 법정이 술렁였다. 그러나 그녀의 관대함에 괌동해서였지 저스틴의 편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군중들은 저스틴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배은망덕의 죄까지 덧씌워 한층 더 분개했다.

저스틴은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동안 흐느끼기만 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재판 중에 느낀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었으며, 알고 있었다. 내 동생을 죽인 그 악마 (이 사실을 한시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가 가증스러운 장난으로 이 순진한 사람을 죽음과 불명예에 몰아넣었단 말인가? 난 그 무시무시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군중의 목소리와 판사들의 표정으로 이미 이 불행한 피해자가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법정을 뛰쳐나왔다. 저스틴의 괴로움은 나의 것과는 달랐다. 그녀에겐 결백이란 보루가 있었지만, 내 가책의 송곳니는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p.12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부활 - 톨스토이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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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괴로움에서 눈을 돌려 엘리자베스의 소리 없는 비애를 바라보았다. 이것 또한 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슬픔과, 그렇게 화기애애하던 집이 쓸쓸하게 변해버린 것도 모두가 이 저주받은 손이 빚어낸 것이었다! 그래 울어라, 불행한 이들이여,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눈물은 아니니! 그대들은 다시 애도의 통곡을 하게 될 것이고, 그대들의 탄식은 또다시 들리리라!

프랑켄슈타인, 그대의 아들, 그대의 친척, 그대들이 사랑했던 옛 친구, 그가 그대들을 위해 생명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바칠 것이니. 그대들의 표정에 비친 기쁨이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기쁨의 전부인 까닭에 축복으로 대기를 채우고 그대들을 위해 삶을 바치리니, 그대들이여 울어라, 셀 수 없는 눈물을 떨구어라. 그렇게 해서 무정한 운명이 만족한다면, 그 슬픈 고뇌에 이어 무덤의 평화가 찾아오기 전에 죽음이 멈추어준다면, 그대들은 그가 소원하는 것보다 더더욱 행복하리라. (p.135)

 

잇달아 몰아친 사건으로 인간의 감정이 한껏 고조된 후, 그 뒤에 찾아오는 죽은 듯한 정적, 그리고 모든 희망과 두려움까지 앗아가 버리는 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저스틴은 죽어서 안식을 찾았고 나는 살아 있었다. 피는 혈관 속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지만 무엇으로도 없애지 못할 절망과 자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잠은 나를 저버렸다.

나는 불행한 영혼처럼 방랑했다.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장난을 저질렀지만 그보다 더한, 훨씬 더한 것이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나는 미덕을 사랑했고 마음은 늘 애정에 넘쳤다. 나는 선한 의도로 삶을 시작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과거를 흐뭇하게 돌아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끌어내는 양심의 평화는 사라지고 가책과 죄의식이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나를 재촉해 댔다.

이런 정신 상태는 육체의 건강을 갉아먹었고, 어쩌면 처음 받았던 충격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대하기가 싫었고 즐겁고 기쁜 소리들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고독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깊고 어두운, 죽음 같은 고독만이. (p.137-138)

 

"빅터, 네가 보기엔 어떠냐? 이 아비는 괴롭지 않은 것 같으냐? 내가 네 동생을 사랑했던 것만큼 자식한테 사랑을 쏟은 아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지나치게 슬픈 표정은 자제하는 게 좋겠구나. 죽은 자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도리 아니겠니? 그건 네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슬픔에 젖어 있으면 기운을 차리거나 즐거워할 수가 없어, 사회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일상마저 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충고였지만 내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죄책감이 고통과 공토의 예감을 드리우며 나머지 감정에 뒤엉켜 들지 않았다면, 나는 내 고뇌를 감추고 식구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쓸 뿐이었다. (p.138-139)

 

나는 종종, 식구들이 잠자리에 들면 호수에 나가 배를 타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돛을 올리고 바람 부는 대로 떠다녔다. 호수 가운데까지 노 저어간 다음, 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만히 놔두고 비참한 생각에 빠져들 때도 있었다. 온통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불안하게 방황하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 호숫가로 다가가면 박쥐나 개구리들이 쉰 목소리로 정적을 개기도 했지만 - 고요한 호수가 나와 나의 불행을 영원히 삼켜버리기를 바라며 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의연히 고통을 참아내는 엘리자베스를 생각하면, 나와 단단히 연결된 사랑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또 아버지와 남은 동생을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피함으로써 내가 세상에 내보낸 그 사악한 마귀한테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럴 때면 나는 격하게 흐느끼면서 빨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그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책감은 모든 희망의 불씨를 꺼버렸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지어낸 작가로서, 내가 창조한 괴물이 뭔가 새로운 악행을 저지를까 봐 매일 두려워하며 살았다.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며 그가 아주 중대한 범죄, 과거를 하찮게 만들어버릴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남아 있는 한 두려움은 따라다닐 것이다. 그 악마를 생각하며 내가 품었던 증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고, 눈에선 불꽃이 타올랐고, 그렇게 생각 없이 주어버린 생명을 도로 거두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죄와 사악함을 생각하면 원한과 복수심이 폭발했다. 안데스 산맥 최고봉으로 순례를 떠나 그곳에서 깊은 골짜기 바닥으로 그를 밀어버리리라.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끝 간 데 없는 증오를 그의 머리에 퍼붓고 윌리엄과 저스틴의 죽음에 복수하고 싶었다. (p.139-140)

 

우리 집을 감싸고 있는 비애는 사라질 줄 몰랐다. 아버지는 최근의 사건들로 충격을 받아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슬퍼서 기운이 없었다. 평소 하던 일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그녀에게 즐거움이란 고인에 대한 모독이었다. 영원한 비애와 눈물이 그렇게 스러져간 순결함에 바쳐져야 할 제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어릴 적 나와 함께 호숫가를 거닐며 환희에 차서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던 행복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가 홀로 서기 위해 겪어야 할 그 슬픔들 가운데 첫 번째를 경험했고 그 어둠의 힘이 그녀의 환한 미소를 꺼버렸다.

"빅터, 비참하게 죽어간 저스틴과 모리츠를 생각하면 세상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아. 전에도 책을 읽거나 사람들한테 들어서 악이나 불의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옛날이야기이거나 꾸며낸 얘기라고만 생각했어. 적어도 그런 일들은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슴보다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막상 이런 불행이 덮치고 보니, 사람들이 서로의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느껴져. 나도 떳떳하지 못하고 말이야. 모두가 불쌍한 저스틴이 유죄라고 믿었어. 만약 저스틴이 그 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그 애는 가장 타락한 인간이겠지. 그깟 보석을 얻으려고 자기 은인의 아들을, 날 때부터 돌봐주면서 자식처럼 사랑했던 아이를 죽였으니 말이야! 나는 어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런 자가 우리와 같이 산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그 애는 무죄였어. 난 알아, 느낄 수 있어. 그 애는 결백해. 너도 같은 생각이고 그래서 더더욱 학신하는 거야. 아아! 빅터, 거짓이 진실처럼 보인다면 누가 진정한 행복을 장담할 수 있겠어? 마치 내가 벼랑 끝에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 심연으로 밀어 넣기 위해 달려오는 것 같아. 윌리엄과 저스틴은 살해되고 살인범은 달아났어. 그 자는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어쩌면 존경받을지도 모르지. 설사 내가 똑같은 죄로 교수대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악한과 내 처지를 바구지는 않겠어." (p.140-141)

 

결국 내 영혼을 고뇌에서 구해줄 것은 다정한 우정도, 아름다운 자연이나 하늘도 아니었다. 사랑의 말 자체는 효과가 없었다. 나는 어떤 도움으로도 뚫지 못할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상처 입은 사슴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끌며 무성한 덤불로 들어가서 자기 몸에 꽂힌 화살을 쳐다보며 죽어간다 - 그것이 바로 나였다.

가끔은 나를 뒤덮은 무거운 절망을 이겨낼 것도 같았지만, 어떤 때는 소용돌이치는 열정에 떠밀려서 운동을 하거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참기 힘든 감정을 달래 보려고 애썼다. 갑자기 집을 떠나 알프스 계곡 근처로 향하게 된 것도 이런 발작 때문이었다. 그 웅장하고 영원한 풍경 속에서 나 자신과, 인간이가에 덧없는 슬픔을 잊고 싶었던 것이다. 정처 없는 걸음은 샤모니 계곡으로 향했다. 소년 시절 자주 갔던 곳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나는 폐인이 되었지만 그 야생의 풍경은 변한 것이 없었다. (p.14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시조에 깃든 우리 얼 - 최승범 (범우 사르비아총서)

길재(吉再)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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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은 계곡을 돌아다녔다. 나는 빙하 속에서 솟아나는 아르베롱 강의 발원지 옆에 섰다. 빙하는 산꼭대기에서부터 느린 속도로 내려와 계곡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산맥의 가파른 경사면이 펼쳐졌다. 빙하의 얼음벽이 높이 걸려 있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드문드문 보였다. 자연이라는 제국의 이 화려한 알현실에는 엄숙한 침묵이 내려 있었고 그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거센 물살이나, 거대한 빙하 조각이 추락하면서 내는 소리, 눈사태나 빙하의 균열로 인한 천둥소리가 얼음이 쌓인 산을 타고 흐를 때뿐이었다. 얼음은 산맥의 손에 놓인 장난감에 불과한 듯 조용히 진행되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언제든 갈라지고 깨어져나갔다.

이 숭고하고 장엄한 장면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이었다. 그것은  온갖 미천한 감정의 수렁에서 나를 끌어내주어 슬픔을 가라앉히고 달래주었다. 또한 어느 정도는 내가 지난달에 품었던 생각을 접어두게 했다. 나는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기다렸다는 듯 낮에 내가 감상했던 웅장한 형태를 조립해 나갔다. 그것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흠 없이 눈으로 덮인 산꼭대기, 반짝이는 뾰족 봉우리, 소나무 숲, 울퉁불퉁 맨살을 드러낸 계곡,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던 독수리 - 모든 것이 내 주위에 모여 평화를 누리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났을 때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영혼을 고무하던 모든 것은 잠과 함께 달아났고 암울한 구름이 모든 생각을 덮고 있었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고 두터운 안개가 봉우리들을 가려 거대한 산맥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뿌연 베일을 뚫고 침울하게 칩거한 그것들을 찾아가고 싶었다. 비와 폭풍이 무어란 말인가? 노새가 문 앞에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몽탕베르 정상을 오르기로 했다.

서서히 움직이는 엄청난 빙하의 장관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다음 순간 순수한 환희가 밀려오더니 내 영혼은 날개를 달고 흐릿한 세상을 박차고 빛과 기쁨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두려울 만큼 늠름한 자연의 위용은 항상 나를 엄숙하게 만들었고 덧없는 근심들을 잊게 해 주었다. 나는 길잡이 없이 혼자 가기로 했다. 길은 잘 알고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고독한 장관을 망칠 것 같아서였다.

깎아지른 오르막, 그러나 끊길 듯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수직의 산을 올라갈 수 있었다. 숭고하리만치 고독한 풍경이었다. 겨울 눈사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그런 곳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완전히 부러진 나무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튀어나온 암벽에 몸을 누이거나 다른 나무의 팔에 안겨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주 만나게 되는 눈 골짜기에선 끊임없이 돌들이 굴러내려 왔다. 특히 어떤 골짜기는 더 위험했는데, 떠드는 목소리  같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진동이 일어나 말하는 사람의 머리를 부숴버릴 커다란 돌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곳 소나무들은 키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진지하게 서 있어서 준엄한 분위기를 더했다.

나는 아래쪽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안개를 피워 올리는 강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리며 맞은 편의 산을 휘감고 있었고, 그 산봉우리들을 뒤덮은 구름은 어두운 하늘에 비를 퍼부으며 주변 풍경으로 인한 울적한 마음을 더욱 적셔주었다. 아아! 인간은 어찌하여 겉보기에 야만적이라고 그들 앞에서 우월한 감성을 뽐내는가. 그래봤자 그들을 더욱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 뿐인 것을. 우리가 느끼는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 성욕뿐이라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는 바람에 끝없이 흔들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연한 말이나 풍경에도 쉽게 움직인다.

우리는 쉬지만, 꿈은 잠을 독살하는 힘을 가졌네.

우리는 일어나지만, 떠도는 생각은 하루를 더럽히네.

우리가 느끼며 깨닫고 추론하든, 또 웃든 울든

고뇌를 껴안거나 근심을 떨쳐버린들

모두 다 같은 것이지. 기쁨이건 슬픔이건

그 자리를 떠나온 길은 모두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의 어제는 절대 내일과 같지 않으니

그 가변성을 버티어낼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p.146-149)

 

나는 후미진 암벽에 쉬면서 이 아름답고 놀라운 장관을 감상했다. 그 바다, 아니 거대한 빙하는 산을 의지하며 굽이쳤고 산들은 그 위로 까마득한 봉우리를 드리웠다. 얼음으로 반짝이는 봉우리들이 구름 위로 고개를 내밀고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울적했던 마음이 비로소 기쁨 같은 것으로 부풀어 올랐다. 나는 소리쳤다.

"방황하는 영혼들이여, 진짜 방랑한다면 좁은 침상에서 쉬지 말고 나에게 이 엷은 행복을 허락해 주시오. 아니 삶의 기쁨을 떠나는 길에 나를 벗 삼아 데려가주시오."

순간 갑자기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꽤 멀리서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조심스레 건넜던 얼음의 갈라진 틈을 훌쩍 뛰어넘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그 체구는 사람보다 훨씬 커 보였다. 아찔했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산이 상쾌한 기운에 곧 정신을 차렸다. 나는 보았다. 다가오는 그 형체는(참으로 역겨운 장면이었다!) 내가 창조했던 그 괴물이었다! 나는 분노와 공포로 몸을 떨면서 결심했다.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목숨 걸고 싸워서 끝장을 내겠다고, 그가 다가왔다. 그 표정은 심한 고뇌와 경멸, 악의를 품고 있었고, 지옥에서 막 나온 듯한 추악한 얼굴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흉측함이 보이지 않았다. 분노와 증오로 할 말을 잊었던 나는 곧 거세게 혐오와 경멸의 말을 퍼부었다.

"이 악마 자식아. 감히 나한테 다가와? 네 가련한 머리를 쳐부술 이 복수의 손이 두렵지도 않느냐? 꺼져라, 더러운 녀석! 아니 기다려라, 내가 널 가루로 만들어줄 테니! 그래! 네 역겨운 존재를 죽임으로써 네가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사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러자 그 악마가 말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사람은 누구나 추한 것들을 미워하지. 그러니 나는, 짐승들보다 더 흉측한 나는 얼마나 혐오스럽겠소! 그러나 당신, 나의 창조자여, 당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미워하고 멸시하지만, 나와 당신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 묶여 있소.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이오?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은 물론 다른 인간들에 대해 내 할 일을 할 테니. 당신이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순순히 인간들의 곁을 떠나겠소. 그러나 거절한다면 당신 친구들의 피로 배부를 때까지 실컷 죽음을 탐하리라."

"가증스러운 괴물 같으니! 마귀가 따로 없구나! 네 죄에 복수하려면 지옥의 고문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 못된 악마 녀석! 너를 만들었다고 나를 원망했겠다. 좋다, 덤벼라. 내가 생각 없이 주었던 그 불꽃을 직접 꺼줄 테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나는 그에게 덤벼들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쏟아부을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는 가뿐히 나를 피했다.

"진정하시오! 이렇게 애원하니 부디 저주받은 이 머리에 당신의 증오를 퍼붓기 전에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지금까지 고통받은 것도 충분한데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작정이오? 삶이 비록 고뇌 덩어리라 해도 나한테는 소중한 것이오. 난 내 삶을 지킬 거요. 명심하시오. 당신은 나를 당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소. 나는 당신보다 키도 크고 움직임도 유연하고. 하지만 당신과 맞설 생각은 업소.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책임만 다해준다면 내 주인이자 왕인 당신에게 고분고분 부드럽게 대하겠소. 제발,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한테는 잘해주면서 나만 짓밟지 말아 주시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건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세상 모든 곳에 기쁨이 가득하지만 나만 혼자 영원히 기쁨에서 따돌려졌소. 나는 원래 착하고 너그러웠소. 하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오. 날 행복학 해주시오. 그러면 다시 선해지리라."

"꺼져! 네 말은 듣기 싫다. 너와 나 사이에 공통점은 있을 수 없어. 우린 적이야. 어서 꺼져. 아니면 누구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워 보든지."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이 움직일까? 아무리 빌어도 당신은 자기 피조물에게, 이렇게 당신의 친절과 동정을 애원하는 나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오? 프랑켄슈타인, 믿어주시오. 나는 착하게 살려고 했소. 내 영혼은 사랑과 인간애로 빛났소. 하지만 나는 혼자, 처절하게 혼자가 아니오? 내 창조자인 당신조차 나를 미워하는데 나에게 아무 빚도 없는 당신의 동료 인간들에게 내가 무얼 바라겠소? 그들은 날 멸시하고 미워하오. 인적 없는 산과 황량한 빙하가 내 피난처요. 나는 여기서 많은 날을 방황했소. 내가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고 사람들이 유일하게 탐하지 않는 얼음 동굴이 내 집이요. 내가 저 황량한 하늘을 찬양하는 것도 당신들 인간보다 내게 더 친절하기 때문이오. 인간들이 내 존재를 알았다면 당신처럼 나를 멸시하면서 죽이려고 무기를 들었을 거요. 그들이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데 어찌 내가 그들을 미워하지 않겠소? 나의 적들에게 잘 대해줄 생각은 조금도 업소. 내가 불행하면 그들도 내 비참함을 맛보게 될 거요. 하지만 내 괴로움을 보상해 줄 사람은 당신이고, 앞으로 커지기만 할 당신의 불행과 또 당신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삼켜버릴 불행에서 구하는 일은 당신한테 달렸소. 부디 동정심을 발휘하여 나를 경멸하지 말아 주시오. 당신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소. 일단 끝까지 듣고 나서 당신 판단에 따라 나를 버리든 동정하든 마음대로 하오. 하지만 먼저 들어보시오. 인간의 법은 아무리 잔혹한 죄일지라도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 스스로 변론할 기회를 주는 걸로 알고 있소. 제발, 프랑켄슈타인, 당신은 나를 살인자라 비난하지만 양심을 가진 당신도 자기 피조물을 죽이려 하고 있지 않소. 아, 인간의 영원한 정이를 찬양하라! 제발 날 버리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주시오. 그런 다음 할 수 있으며, 또 하고 싶다면 당신의 피조물을 죽여도 좋소."

내가 대꾸했다.

"이유가 뭐지? 왜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거냐?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그 상황들을, 내가 그 불행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오? 징그러운 악마야, 차라리 그날을 저주해라. 네가 처음 빛을 본 그 저주의 날을! 너를 만든 그 손을 저주해라(나 스스로 저주하고 있지만)! 너 때문에 난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너 때문에 나는 너한테 떳떳한지 아닌지 생각할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사라져라! 제발 그 역겨운 모습을 보지 않게 해 달란 말이다."

"그렇게 해주리다."

이렇게 말하며 그가 징그러운 손을 내 눈에 갖다 대자 나는 거칠게 그 손을 떠밀었다.

"그래야 당신이 싫어하는 모습을 안 볼 거 아니오. 아직도 내 말을 듣고 동정을 베풀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왕년의 착한 마음씨로 이렇게 부탁하겠소. 내 이야기를 들어주오. 참으로 길고 이상한 이야기요. 그런데 이 추운 곳은 예민한 당신한테는 적합하지 않소. 산 아래 오두막으로 갑시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으니, 해가 눈 덮인 산 너머로 사라져 다른 세계를 비추기 전에 내 이야기를 다 듣고 결정할 수 있을 거요. 내가 당신들 인간 곁을 영원히 떠나 조용히 살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천벌이 되어 당신의 빠른 몰락을 재촉할지. 그건 당신한테 달렸소."

그는 이 말과 함께 얼음 위를 건너갔다. 나는 뒤따라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그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느껴져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호기심과 동정심이 그런 결심을 굳혀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그 라고 믿었으므로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창조자가 자기 피조물에 대해 가지는 책임을 느꼈으므로, 그의 사악함을 불평하기 전에 먼저 행복하게 해주는 게 도리 같았다. 그의 요구를 따른 것은 이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빙하를 건너 맞은편 암벽을 올라갔다. 공기는 차가웠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두막에 들어섰다. 악마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이상 그 소름 끼치는 동반자가 피운 불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p.149-155)

 

정오께 잠이 깬 나는 눈밭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따사로운 햇볕에 끌려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소. 오두막에서 발견한 가방에 농부가 남긴 음식을 넣은 후 들판을 계속 걸어가 해질 무렵 한 마을에 도착했소. 그 풍경이 얼마나 놀랍던지! 오두막들, 그보다 더 말쑥하게 생긴 집들, 웅장한 저택들이 차례대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소. 마당에는 야채가, 몇몇 집 창가에는 우유와 치즈가 놓여 식욕을 자극했소.

나는 그 가장 좋은 집에 들어갔소. 하지만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한 여자는 기절해 버렸소.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힌 건 물론이고, 어떤 이는 도망갔고 어떤 이들은 나를 공격했소. 나는 돌과 무기들에 맞아 심하게 멍이 든 채 들판 쪽으로 달아났고, 겁에 질려서 나지막한 우리 안으로 몸을 피했소. 아까 마을에서 본 궁전에 비하면 그곳은 휑하니 꼴사나운 모양새였소. 그 우리 옆으로 깔끔하고 아늑해 보이는 집이 붙어 있었지만 큰 대가를 치른 뒤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소.

내가 숨은 곳은 나무로 지어져 있었는데 너무 낮아서 똑바로 앉기도 힘들었소. 바닥에는 나무판자 같은 건 깔려있지 않았지만 습하지 않았고 수많은 틈을 비집고 바람이 들어오긴 해도 눈비를 피하기에는 괜찮은 피신처였소.

비록 보잘것없는 잠자리였지만, 혹독한 날씨와 잔인한 인간들을 피할 수 있어 행복했소. (p.161-16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반쪽이 (서정오의 우리 옛이야기 백가지) - 서정오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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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더미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나는 그날 있었던 사건들을 생각했소. 먼저 그 사람들의 다정한 태도가 떠올랐소.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소. 전날 밤 야만스러운 마을 사람들에게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생생했기에 난 당장은 우리 안에 조용히 머물며 이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무엇이 그 사람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드는지 알아보기로 했소.

이튿날 오두막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일어났소. 소녀는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청년은 첫 번째 식사 후 집을 떠났소. 그날도 전날과 똑같이 정해진 순서대로 지나갔소. 청년은 계속해서 집 밖에서 지냈고 소녀는 집안에서 부지런히 온갖 일을 했소. 노인은 알고 보니 장님이었는데 악기를 연주하거나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냈소. 그 젊은이들은 노인에게 실로 비할 데 없는 사랑과 존경을 바쳤소. 노인을 위해 하는 작은 일 하나에도 따듯한 애정과 정성이 깃들어 있었고 노인은 이에 인자한 미소로 보답했소.

그들이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오. 청년과 소녀는 종종 따로 나가서 우는 것 같았소. 나로선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정말 가슴이 아팠소.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불행하다면 불완전하고 외로운 내가 비참하다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소.

그런데  이 품위 있는 존재들이 불행한 이유가 뭘까? 그들은 좋은 집(내가 보기에는)을 가지고 온갖 호사를 누리는데, 추울 때 몸을 녹일 불이 있고 배고플 때 먹을 맛있는 요리가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게다가 서로를 벗 삼아 날마다 다정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눈물은 대체 무얼 뜻하는 걸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 처음에는 도저히 이런 문제를 풀 수 없었지만 계속 지켜보면서 시간이 흐르자 수수께끼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소.

하지만 이 다정한 가족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소. 그건 바로 가난이었는데, 그들은 아주 비참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소. 그들의 식사는 대개 마당에서 나는 채소와 젖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우유가 전부였는데, 그나마 겨울이면 소도 제대로 먹지 못해 우유도 거의 나오지 않았소. 그들은 주린 배를 움켜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오. 특히 두 젊은이는 노인 앞에 음식을 내놓으면서 자기들 것은 남겨놓지 않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소.

나는 그런 배려에 큰 감동을 받았소. 사실 나는 그들이 저장해 둔 음식을 밤중에 몰래 훔쳐먹곤 했는데, 그것이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근처 숲에서 딸기나 나무열매, 뿌리 같은 것을 주워 먹었소.

또 나는 이들의 수고를 덜어줄 방법을 찾아냈소. 청년은 날마다 땔감을 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그가 쓰는 연장의 사용법을 곧 터득해서 밤중에 종종 숲으로 가 며칠 쓰기에 충분한 땔감을 구해오곤 했소. (p.166-168)

 

펠릭스가 사피에게 가르치던 책은 볼네의 <제국의 폐허>였소. 펠릭스가 그 책을 읽으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요. 그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그 웅변조의 서술이 동방 작가들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했소. 이 책을 통해 나는 대강의 역사 지식과 현대 몇몇 제국의 면모를 알 수 있었소.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예절과 정부, 종교에 관해서도 배웠소. 게으른 아시아 부족들과 천재적인 정신 활동을 보여주었던 그리스 인들, 초기 로마 인들의 전쟁, 그들의 아름다운 덕목과 이후의 타락, 그 강대한 제국의 몰락과 기사도, 기독교, 왕들에 관한 얘기도 많았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사피를 눈물짓게 만든 그 고향 주민들의 불운한 운명에 관해서도 들었소.

그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소. 

인간이란 그렇게 강인하고 덕과 품위를 지녔으면서도, 그렇게 악하고 비열한 존재란 말인가? 어떤 때는 사악한 원리의 소산인 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우아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비쳐지기도 했소. 위대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소. 많은 기록에 나타났듯이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은 가장 비천한, 눈먼 두더지나 유순한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졌소.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이나 정부가 왜 있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소. 죄악과 살육에 관해 자세히 듣고서야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지만 나는 역겹고 혐오스러워 고개를 돌렸소.

이제 오두막 사람들의 모든 대화는 새로운 경이를 보여주었소. 펠릭스가 아라비아 여인을 그르치는 내용을 엿들으면서 인간 사회의 이상한 구조를 이해해 나갔소. 재산의 구분, 거대한 부와 비참한 가나, 그리고 계급과 가문, 귀족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소.

그런 이야기들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소. 당신네 인간들이 가장 중시하는 부와 결부된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이었소. 인간은 이런 이점 중 하나만 지녀도 존경을 받지만 둘 다 없으면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랑자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선택된 몇몇의 이익을 위해 능력을 낭비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소!

그런데 나는? 비록 나의 탄생과 창조자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내게는 돈도 친구도 아무런 재산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소. 게다가 소름 끼치도록 흉측하고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소. 심지어 인간과 똑같은 존재도 아니었소. 나는 그들보다 민첩하고 더욱 거친 음식으로도 연명할 수 있었소. 극한 더위와 추위를 별 탈 없이 견디고 몸집은 그들보다 훨씬 컸소. 주변을 둘러봐도 나와 같은 존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소. 그렇다면 나는, 보기만 해도 모든 인간이 달아나고 외면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들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오. 아무리 떨쳐내려고 애써도 지식이 늘수록 내 서러움은 더해만 갔소. 아, 내 고향 숲울 영원히 떠나지 않았다면, 배고프고 목마르고 더운 것 외에는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다면!

지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오! 일단 머리에 들어온 후엔 바위에 이끼가 끼듯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오. 때로 모든 생각과 감정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괴로운 마음을 극복할 방법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란 걸 깨달았소. 사실 죽음이란 두렵기도 했고 아직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소.

나는 선하고 고귀한 감정을 숭배했고, 오두막 사람들의 다정한 태도와 선량한 성격을 사랑했지만 그들과의 교류는 단절되어 있었소. 물론 눈에 띄거나 들킬 염려가 없을 때 몰래 교류하는 방법은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기는커녕 갈증만 더 키워주었소.. 아가사의 다정한 말이나 아라비아 여인의 생기 넘치는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소. 또 노인의 부드러운 충고와 펠릭스의 생생한 이야기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소. 불행하고 비참한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소!

다른 가르침은 한층 더 깊은 영향을 주었소. 나는 남녀의 차이, 아이의 탄생과 성장에 관해서 듣게 되었소. 아버지가 아기의 웃음을, 어린아이들의 장난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머니가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의무인지를. 그리고 어린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지식을 습득해 가는지를, 또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형제자매와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들었소.

그렇다면 내 친구와 친척들은 어디 있을까? 내 어린 날을 지켜보았던 아버지도, 미소와 애정으로 날 축복해 준 어머니도 없었소. 있었다고 해도 나의 모든 과거는 하나의 점.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는 캄캄한 공백이었소. 오래전 기억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똑같은 키와 체구를 지니고 있었소. 나는 나를 닮거나 나와 관계있다는 존재를 본 적이 없었소. 나는 무엇일까? 이 의문이 다시 떠올랐지만 대답 대신 신음소리만 나왔소.

이런 감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곧 설명할 테지만 지금은 그 오두막 사람들 얘기를 계속하겠소. 그들의 이야기는 분노와 기쁨, 경이 등 정말 다양한 감정으로 나를 흥분시켰지만 결국엔 내 수호자들 (비록 씁쓸한 자기기만이긴 해도 나는 악의 없이, 그들을 수호자라 부르는 것이 좋았소)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더해주기 마련이었소. (p.178-181)

 

어느 날 밤, 내가 먹을 양식과 내 수호자들에게 갖다 줄 땔감을 구하러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까운 숲에 나갔던 나는 옷 몇 점과 책이 든 가죽 트렁크를 발견했소. 나는 그 전리품을 소중히 들고 우리로 돌아왔소. 마침 그 책들은 내가 그 오두막에서 배운 언어로 씌어 있었소. <실낙원>, 플루타트코스의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소. 이 보물들을 가지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내 친구들이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계속 이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습득했소.

이 책들의 영향을 설명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오. 이 책들은 새로운 개념과 감정들을 일깨우면서 내게 환희를 주었지만 큰 실망을 안겨준 적이 더 많았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단순하고 감동적인 줄거리가 흥미로웠소. 나로선 막연히 이해했던 주제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견해를 토로하고 있어서 생각할 거리나 놀랄 거리가 끝없이 많았소. 거기에 묘사된 다정한 태도들은 다른 대상을 향한 고결한 감정으로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내 수호자들을 통해 경험해왔던 것, 내 가슴에 영원히 품게 된 소망과 딱 들어맞았소. 하지만 베르테르는 내가 보거나 상상한 어느 누구보다 더 성스럽게 느껴졌소. 그는 전혀 가식이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깊이 가라앉아 있소. 죽음과 자살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놀라웠소. 나는 감히 그런 행위를 따라할 용기가 없었ㅎ지만 주인공의 견해에 공감이 갔고, 그가 죽었을 때는 저오학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흐느꼈소.

그러나 계속 읽어나갈수록 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소. 나는 내가 읽거나 엿듣는 대화의 주인공들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소. 나는 그들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이해했지만 나 자신의 자아 같은 것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소. 내게는 의지할 사람도 없었고 핏줄도 없었소. '내가 떠나온 길은 빈 칸' 이었고 나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도 없었소.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 그건 무슨 뜻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지? 내 운명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지만 풀 수 없었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고대의 공화국을 처음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였소. 이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는 전혀 다른 영향을 주었소. 베르테르의 상상력에서 실망과 우울을 배웠지만, 플루타르코스는 고매한 사상을 가르쳐주었소. 그 책은 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 과거의 영웅들을 찬양하고 사랑하게 해 주었소. 많은 내용들이 내 이해력과 경험을 넘어선 것이었소. 나는 왕국과 드넓은 영토, 거센 강, 끝없는 바다에 대해서는 매우 혼란스럽게나마 알고 있었소. 그러나 도시와 많은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소. 내 수호자들의 오두막이 내가 인간을 연구하는 유일한 학교였지만, 이 책은 새롭고 훨씬 강력한 행뒤들의 무대를 보여주었소. 공공의 일과 관련된 사람들, 같은 종족을 다스리거나 학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읽었소. 나는 덕에 대해서는 열정이, 악에 대해서는 혐오가 치솟는 것을 느꼈는데, 내가 이해하는 단어의 의미를 기쁨과 고통에 적용해 보았을 때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었소. 따라서 나는 당연히 로물루스와 테세우스보다 평화를 위한 법을 만든 누마나 솔른, 리쿠르구스를 존경하게 되었소. 내 수호자들의 성스러운 생활에 영향받은 감정들이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던 거요. 어쩌면 나에게 인간을 알게 해 준 사람이 명예와 정복욕에 불타는 젊은 군인이었다면 나는 다른 감정에 물들었을 거요.

그러나 <실낙원>은 또 달랐고 훨씬 깊은 감동을 주었소. 내 손에 들어온 여러 책을 읽을 때마다 그랬지만 나는 그것을 실제 있었던 역사로 받아들였소. 전능하신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과 싸우는 그림은 온갖 경이와 두려움을 일으키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었소. 문득 그 유사성을 깨달을 때면 나는 종종 여러 사건들을 내 자신의 상황에 맞춰보곤 했소. 아담처럼 나는 실재하는 어떤 존재와도 전혀 연관이 없었소. 그러나 그의 위치는 모든 면에서 나와 전혀 달랐소. 그는 완벽한 피조물이었고, 신의 손에서 태어난 행복하고 창창한 존재였으며 창조주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인도되었소. 그는 고등한 존재와 대화하며 지식을 얻었지만, 나는 흉측하고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혼자였소. 내 상황에 맞는 상징은 오히려 사탄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소. 내 수호자들의 고귀한 기쁨을 볼 때는 사탄처럼 부러워서 가슴 쓰라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오.

이런 느낌이 더욱 확고하게 굳어진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소. 그 우리에 도착한 얼마 후에, 나는 당신 실험실에서 가져왔던 옷 주머니에서 몇 장의 종이를 발견했소. 처음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나중에 그 글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부터 부지런히 연구하기 시작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 넉 달 동안 당신이 쓴 일기였소. 당신은 작업의 모든 과정을 그 종이에다 빠짐없이 기록했소.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소. 당신은 이제 그 일기가 기억나나 보군. 이게 그 기록이오. 내 저주받은 탄생에 얽힌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기록. 나의 존재를 만들어낸 그 역겨운 상황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있소. 내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 글에는 당신의 공포가 생생히 드러나 있고, 나 역시 씻을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소. 그 글을 읽으면서 토할 것만 같았소. '생명을 받은 그 지긋지긋한 날!' 나는 괴로움에 소리쳤소.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 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만들었건만 내 모습은 추잡한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끔찍해졌다. 사탄에게는 칭찬해 주고 용기를 줄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었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미움을 받는 존재라니."

이런 것들이 내가 절망과 고독 속에서 생각했던 내용이오. 그러나 오두막 사람들의 덕과 상냥하고 자애로운 표정을 떠올리고, 언젠가는 덕을 찬양하는 내 마음을 그들이 알아주고, 나를 측은히 여겨 내 흉측한 외모 따위는 무시할 날이 오리라고 스스로 위로했소. 아무리 생김새가 괴물 같다고, 그들의 동정과 우정을 바라는 사람을 내몰 수 있을까? 나는 최소한 절망은 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내 운명을 결정할 그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소. 그 시기는 몇 달 뒤로 잡았소. 그 성패 여부가 굉장히 중요할 테니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소. 게다가 내 이해력은 날마다 경험으로 크게 향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을 더 기다려 내가 더욱 현명해진 후에 일을 시작하기로 했던 거요.

그러는 동안 오두막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소. 사피의 존재는 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었고, 내가 보기에도 오두막 생활은 훨씬 더 풍요로워졌소. 펠릭스와 아가사가 즐겁게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일을 거드는 하인들도 생겼소. 그들은 부자 같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지냈소. 지식이 늘수록 내 외모가 얼마나 흉측한지 더욱 뚜렷하게 깨달았던 것이오.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물에 비친 내 모습이나 달빛 아래 내 그림자를 보면, 그것이 아무리 흐릿한 영상이고 흔들리는 그림자라고 해도 자꾸 희망의 빛은 바래갔소.

나는 몇 달 후로 예정한 운명의 심판을 위해 그런 두려움을 깨고 마음을 굳게 가지려고 무지 애썼소. 때로는 이성을 접어둔 채로 낙원을 거니는 상상도 해보고, 내 감정에 공감하고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상상하기도 했소. 천사 같은 그들의 표정에는 위로의 미소가 어려 있었소. 그러나 모두가 꿈이었소. 나의 슬픔을 달래거나 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이브는 없었소. 나는 혼자였소. 아담은 창조주에게 부탁이라도 했지만 나의 창조자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나를 버린 사람이었고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그를 저주했소. (p.189-19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플루타르코스 (이성규 옮김, 현대지성클래식)

실낙원 - 단테 (이창배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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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을이 지나갔소. 시들어 떨어지는 잎들을 보니 놀랍기도 했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소. 자연은 내가 맨 처음 숲을 보고 아름다운 달을 보았을 때의 그 황폐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되돌아갔소. 그러나 황량한 날씨는 아무래도 좋았소. 나는 신체 구조상 더위보다는 추위에 훨씬 잘 견디었으니까.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꽃과 새, 여름의 활기찬 정경이었소.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오두막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소. 그들의 행복은 여름이 갔다고 해서 시들지 않았소.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일도 그들이 나누는 기쁨을 방해하지 못했소. 그들을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보호받고 싶었고 친절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고 싶은 욕망도 켜져 갔소. 나를 이 다정한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소. 애정으로 나를 대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표정을 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소. 그들이 나를 경멸하거나 무서워해서 등을 돌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소. 그들은 집에 찾아온 거지를 쫓아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사실 약간의 음식이나 휴식보다 더 큰 보물을 요구했던 거요. 내가 바란 건 친절과 동정이었고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진 않았소. (p.195)

 

"그들이 독일 사람이오?"

"아뇨, 프랑스 인이죠. 하지만 이 얘기부터 들어보십시오. 저는 버림받은 불행한 존재입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세상에는 친척이나 친구하나 없죠. 내가 찾아가는 이 상냥한 사람들은 나를 본 적도 없고 나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버려질까 봐 몹시도 두렵습니다."

"절망하지 마시오. 친구가 없다는 건 사실 불행한 일이오만, 자기에게 이롭다고 판단해서 일종의 편견을 갖게 되면 우애와 박애가 넘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희망을 믿으시오. 그 친구들이 진실로 선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절망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그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죠. 그러나 불행히 그들은 제게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하다고 자부합니다. 지금까지 남한테 해를 끼친 적이 없고 어느 정도 도움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려서, 다정하고 상냥한 친구 대신에 징그러운 괴물만을 보지요."

"참으로 안 됐소. 하지만 댁이 진정 잘못한 게 없다면 잘못을 깨우쳐줄 수도 있지 않소?"

"이제 막 그 일을 하려는 참이죠. 그리고 그 때문에 두렵기도 합니다. 나는 이 친구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여러 달 동안 매일같이 습관처럼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가 그들을 해칠 거라 믿는데, 그게 바로 제가 깨뜨리고 싶은 편견입니다." (p.198-199)

 

저주받을 창조자! 내가 왜 살았을까? 당신이 멋대로 주었던 생명의 불씨를 왜 즉시 꺼버리지 못했을까? 모르겠소. 그러나 절망은 아직 나를 지배하지 못했소. 분노와 복수심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얼마 나든지 그 오두막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참혹함을 실컷 즐길 수도 있었소.

밤이 되자 나는 우리를 빠져나와 숲을 돌아다녔소. 이제는 발각될까 두려워 몸을 사릴 필요도 없이 울부짖을 수 있었소. 나는 올가미를 부순 한 마리 야수처럼, 나를 구속하던 굴레를 파괴한 수사슴처럼 날렵하게 숲을 배회했소. 아! 얼마나 참담한 밤이었던가! 싸늘한 별들이 비웃듯 반짝이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머리 위에서 가지를 흔들고 있었소. 간간이 아름다운 새소리가 사방의 적막을 깨뜨리곤 했소. 나를 뺀 모든 것이 잠들거나 즐거워하고 있었소. 나는 악마처럼 마음에 지옥을 품었고, 아무에게도 동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무를 뽑고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 황폐함을 즐기고 싶었소

그러나 그건 지속될 수 없는 감정의 사치였소.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 녹초가 되어버린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축축한 풀밭에 주저앉았소. 세상의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그렇소. 그 순간부터 나는 인간과, 아니 누구보다 나를 이렇게 불행으로 내친 사람과의 영원한 전쟁을 선포했소. (p.201-202)

 

나는 날이 저물 때까지 우리 안에서 바보처럼 끝 모를 절망감에 빠져 있었소. 내 수호자들은 세상과 나를 이어주던 유일한 고리를 끊고 떠나버렸소. 처음으로 내 가슴에 복수심과 미움이 차올랐고 나는 그걸 막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인간을 해치고 죽이는 것만을 생각했소.

내 친구들, 온화한 목소리의 드 라세와 상냥한 눈의 아가사, 빼어난 미모의 아라비아 여인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사라졌고, 솟구치는 눈물이 어느 정도 나를 달래주었소. 그러나 그들이 나를 거절하고 떠난 생각에 다시 원망과 화가 치밀어 사람 대신 물건에 대고 화풀이를 해댔소. 밤이 되자 나는 오두막 주변에 불이 잘 붙을 만한 것들을 늘어놓고 채소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분풀이를 하기 위해 달이 저물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소.

밤이 깊어지자 숲에서 거센 바람이 일더니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들이 금세 흩어졌소. 엄청난 눈사태처럼 휘몰아치는 돌풍이 이성과 사고의 벽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나를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렸소. 나는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제물이 된 오두막을 빙빙 돌며 분노의 춤을 추면서 서쪽 지평선, 이제 막 달이 들어가려는 끝자락만 보고 있었소. 마침내 달의 끝이 지평선에 걸리자 나는 횃불을 흔들었소. 이윽고 달이 가라앉았고 나는 주워 모은 밀짚과 히스, 관목 덤불에 고함을 지르며 불을 붙였소. 바람이 불을 부채질했고 화염은 이내 오두막을 덮치면서 파괴의 혀를 여러 갈래로 날름거렸소.

이제 그 오두막이 영영 파괴되었다 싶은 확신이 들자 나는 그곳을 떠나 숲으로 들어갔소.

어로 걸음을 옮겨야 할까? 나는 불행의 현장에서 멀리 달아나기로 했소. 그러나 인간들로부터 혐오와 멸시를 받는 내게는 세상 어디나 똑같이 끔찍할 게 분명했소. 그러다가 결국 당신 생각을 하게 된 거요. 당신의 일기를 통해 당신이 내 아버지, 창조자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나한테 생명을 준 사람보다 누구를 더 의지할 수 있단 말이오? 펠릭스가 사피한테 가르쳐준 것 중에는 지리도 있었소. 지구상의 서로 다른 나라의 상대적인 위치 정도는 나도 배워서 알고 있었소. 당신의 일기에서 보았던 제네바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나는 그곳을 향해 가기로 결심했소.

그런데 어떻게 길을 알아내야 할지 막막했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남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길잡이는 태양뿐이었소. 나는 내가 거쳐가야 할 도시 이름도 몰랐고 누구를 붙잡고 길을 물어볼 수도 없었소.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소. 비록 당신에 대해서는 야속한 감정밖에 없었지만 내가 구원을 기대할 사람도 당신뿐이었으니까. 무정한 창조자 같으니! 당신은 내게 인지력과 열정을 주어놓고 선 세상 밖으로 내팽개쳐 인간의 경멸과 공포를 사게 만들었소. 내가 동정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은 당신뿐이었으므로 당신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에게서 헛되어 구하려 했던 정의를 찾기로 했소.

참으로 멀고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소. 그토록 오래 머물던 그 지방을 떠날 때가 늦가을이었소. 사람 눈에 띌까 봐 두려워 밤에만 옮겨다녔소. 주변의 자연은 시들고 해는 식어갔소. 비와 눈이 내 몸에 퍼부었고 도도한 강물은 얼어붙었소. 아, 대지여! 내 존재의 기원을 얼마나 저주했던가! 온화한 심성은 사라지고 내 마음엔 온통 증오와 괴로움이 가득했소. (p.204-206)

 

나도 곧 따라갔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소. 그 남자는 내가 쫓아가는 걸 보더니 총을 겨누고 발사했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사람은 더욱 날쌔게 숲으로 사라졌소.

그것이 내 은혜의 보답이었소! 한 인간을 죽을 고비에서 구해주었건만 살과 뼈가 찢기는 비참한 통증에 나뒹굴어야 하다니. 불과 몇 분 전의 다정한 마음이 이가 갈리는 극도의 분노로 바뀌었소. 고통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나는 인간을 영원히 미워하고 복수하리라 맹세했소. 그러나 통증이 날 덮치면서 맥박이 멈추고 의식을 잃었소. (p.208)

 

몇 주가 지나자 상처가 나아 다시 길을 떠났소. 밝은 햇빛과 부드러운 봄바람도 더 이상 내 고뇌를 덜어주지 못했소. 즐거움이란 비참한 내 신세를 모욕하는 비웃음일 뿐이었고, 나는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소. (p.208)

 

"징그러운 괴물아! 어서 놓으라니까. 우리 아빤 의원님이야. 프랑켄슈타인 의원님. 아빠가 가만 안 둘걸. 넌 날 놓아줘야 할걸."

"프랑켄슈타인! 그렇다면 넌 내 원수로구나. 난 프랑켄슈타인에게 영원한 복수를 맹세했지. 네가 그 첫 번째 희생자다."

아이는 그래도 발버둥 치며 내 가슴을 저미는 욕설을 해댔소. 아이를 조용히 시키려고 목을 붙잡았는데 다음 순간 아이는 죽어서 내 발치에 누워 있었소.

내죽인 피해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환희와 가증스러운 승리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소.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소.

"나도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내 원수라고 무쇠로 만들어졌더냐. 이 죽음이 그에게 절망을 안겨주리라. 그리고 수많은 불행이 그를 괴롭히고 파멸시키리라." (p.210)

 

당신이 내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할 때까지는 우린 헤어질 수 없소. 나는 외롭고 비참하오. 인간은 나와 사귀려들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만큼 흉하고 소름 끼치는 여자라면 나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오. 내 배우자는 나와 같은 종이어야 하고 똑같은 약점을 지녀야 하오. 당신이 그런 존재를 만들어주시오. (p.212)

 

 그는 말을 끝내고 대답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혼란스럽고 황당했으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그 제안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나누며 함께 살 여자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요. 이 일은 당신만이 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으니 당신이 거절해서는 안 되는 거요."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오두막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냈던 이야기를 들으며 사라졌던 분노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나는 그 건방진 말에 타오르는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는 못한다. 아무리 날 괴롭혀도 소용없다. 넌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 순 있겠지만 비열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해. 사악한 마음으로 세상을 파괴할 너 같은 존재를 또 하나 만들라고? 집어치워! 똑똑히 들어둬. 네가 아무리 날 괴롭혀도 절대 그럴 수 없다."

"오해하고 있소. 난 당신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오. 내가 악한 마음을 품게 된 건 내가 비참하기 때문이오. 나는 모든 인간들이 등을 돌리고 미워하는 존재가 아니오? 당신, 내 창조자란 사람은 나를 갈가리 찢고 짓밟으려 하고. 말해보시오, 내가 왜 나를 동정하지 않는 인간을 동정해야 하오? 만약 당신이 저 빙하 틈새로 나를 밀어 넣어 내 몸을, 당신의 작품을 파괴시킨다고 해도 그건 살인이라 하지는 않을 거요.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존경하겠소? 그 사람한테 나와 사이좋게 살도록 해보시오. 나는 그를 해치기는커녕 대신 날 받아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은혜를 베풀 거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인간의 관념은 우리가 화합하는 데 있어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오. 그리고 나 또한 비열한 노예가 되어 굴복할 생각이 없소. 나는 상처를 받은 만큼 복수할 거요. 사랑을 일깨울 수 없다면 두려움을 일깨우겠소. 그 주요 표적은 불구대천의 원수, 바로 당신이오. 내 창조자인 당신을 영원히 증오하기로 맹세했으니까. 조심하시오. 나는 당신을 파멸시킬 것이오. 당신이 폐인이 되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할 때까지."

악마와 같은 문노가 그를 덮쳤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너무나 섬뜩하게 일그러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설득하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소. 이렇게 울분을 터뜨려봤자 내게 이로울 게 없지. 당신은 그 울분의 원인이 자신한테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만약 어떤 인간이든 내게 자비로운 감정을 품는다면 나는 백 배 천 배로 그 은혜를 갚을 거요. 그 한 인간을 위해서 전체 인간과 화해할 용의가 있소! 그러나 그 달콤한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오. 어쨌든 내 요구는 정당한 것이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오. 나와는 성이 다르지만 나처럼 징그러운 존재를 만들어 달라는 것뿐이오. 그로 인해 얻는 만족은 소박하겠지만 그것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전부이고 그것이면 충분하오. 사실, 우리는 세상과는 담을 쌓은 괴물이 될 거요. 그런 만큼 서로가 더욱 애착을 느낄 거고, 우리의 삶은 행복하진 않겠지만 남한테 피해 주는 일 없고, 지금 나처럼 비참하지도 않을 거요. 아! 제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오.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당신께 감사하게 해 주시오! 다른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아보고 싶소.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 벌어질 결과를 생각하면 몸소리가 쳐졌으나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나 지금 표현하는 감정으로 보면 그는 세련된 인식의 소유자임이 분명한데, 나는 그의 창조자로서 내가 줄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주어야 하는 빚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마음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말을 이었다.

"만약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겠소. 남아메리카의 광활한 황야로 갈 것이오. 나는 인간들의 음식을  먹지 않소. 식욕을 채우려고 양을 죽이거나 아이를 잡아먹는 일은 없소. 도토리와 들딸기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소. 내 배우자도 나와 같을 테니 같은 음식이면 만족할 거요. 잠자리는 마른 나뭇잎만 있으면 되오. 햇빛은 인간에게처럼 우리에게 똑같이 비치며 우리 양식을 무르익게 해 줄 거요. 내가 이렇게 평화롭고 인간적인 미래의 계획을 제시하는 마당에, 악의를 품고 잔인하게 나올 생각이 아닌 이상 내 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요. 지금까지 내게 무정하던 당신이 이제 동정의 빛을 보이는구려. 부디 이 절호의 기회를 허락하여 간절한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황야에서 야수들을 벗 삼아 살겠다는 말이지. 인간의 사랑과 동정을 바라는 네가 어떻게 그 유배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넌 분명 돌아와서 다시 인간의 친절을 구할 것이고 그러다가 또 경멸을 받을 것이다. 네 불행한 열정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때는 네 동료까지 함께 나서서 파괴 행각을 저지르겠지. 이건 안 될 말이야. 그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난 동의할 수 없으니까."

"정말 변덕스럽기 짝이 없군! 방금 전만 해도 내 얘기에 마음이 흔들리더니 왜 다시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는 거요? 내가 사는 이 대지에, 나를 만든 당신을 걸고 맹세하건대 당신이 내 배우자만 만들어준다면 그녀와 함께 인간 주변을 영원히 떠나 황야에서 살겠소. 내 불행한 열정은 사라질 것이오. 나와 공감할 사람이 있으니까! 조용히 내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아도 날 만든 이를 저주하지 않겠소."

그의 말은 강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측은한 생각에 몇 번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추잡한 덩어리가 움직이고 말하는 것을 보면 속이 울렁거려 공포와 혐오가 다시 살아났다. 나는 이런 내 감정과 싸웠다. 내가 그를 동정할 수 없다면 아직 내 손에 달린 그의 작은 행복을 못 가지게 막을 권리도 없었다.

"너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넌 이미 불신을 사기에 충분한 나쁜 짓들을 저지르지 않았더냐? 어쩌면 이것도 더 큰 복수극에서 더 크게 승리하기 위한 속임수가 아니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이제 그만 날 우롱하고 어서 대답을 해주시오. 내가 외롭게 사랑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미움과 악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면 내 죄악의 동기가 해소될 것이고 나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살아갈 거요. 나의 악행이 고독을 강요받은 결과였던 만큼, 만약 나와 동등한 존재외 교류하며 산다면 반드시 선을 행하게 될 거요."

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가 말한 모든 내용과 주장들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가 초기에 보여주었던 선의 가능성, 그리고 그의 수호자들의 혐오와 경멸로 인해 황폐해지게 된 좋은 감정들을 생각했다. 그의 능력과 위험성도 빠뜨리지 않고 계산했다. 빙하의 얼음 동굴에서 지낼 수 있고 또 추적을 따돌리고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절벽 틈으로 숨을 수 있다면 절대 맞설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나는 그와 내 동료 인간들에 대한 정의로써 그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네 요구를 들어주겠다. 단 너와 함께 동행할 여자를 건네받는 즉시 영원히 유럽을,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주거지를 떠나겠다는 네 엄숙한 맹세를 조건으로 한다."

그가 소리쳤다.

"맹세하오. 태양에, 파란 하늘에, 내 가슴을 태우는 사랑의 불꽃에 걸고 맹세하오. 당신이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다. 당신은 집을 떠나서 일을 시작하시오. 난 간절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겠소. 그러나 걱정은 마시오. 당신이 일을 끝낸 후에야 나타날 테니."

그는 이 말과 함께 홀연히 나가버렸다. 아마도 내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독수리보다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가더니 금세 빙하의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p.213-21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피그말리온 - 조지 버나드 쇼 (김소임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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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무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나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당장 제네바로 돌아갔다. 스스로도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산만큼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그 무게에 내 고뇌는 으스러졌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내 수척하고 험한 몰골에 가족들은 몹시 불안해했지만 나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금지령을 받은 살마처럼 - 그들의 동정을 받을 권한이 없는 것처럼 - 더 이상 그들과 같이 즐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존경에 가깝게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일을 예상하니 존재하는 다른 상황은 모두가 내 앞을 스치는 꿈처럼 여겨졌고 그 생각만이 삶의 현실로 다가왔다. (p.219)

 

사실 남자란 여자가 세심하게 신경 쓰는 온갖 상황에서 참으로 둔감하다. (p.225)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들이 지나가는데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지와 여행기간 동안 해야 할 일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며칠을 멍하니 지내며 기나긴 길을 달린 후, 나는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고 거기서 이틀 동안 클레르발을 기다렸다. 그가 왔다. 정말이지, 우리 두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일까! 그는 새로운 광경이 펼쳐질 때마다 활기를 띠었고,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에 즐거워했으며, 아침해가 새 하루를 여는 것을 볼 때는 더욱 행복해했다. 그는 나에게 수시로 색이 변하는 풍경과 하늘을 가리켰다.

"이런 게 바로 살아 있다는 거야. 이렇게 나는 존재를 즐기노라! 그런데 프랑켄슈타인, 넌 대체 무엇 때문에 풀이 죽어서 그렇게 울상이니?"

사실 나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서, 라인 강에 비친 황금빛 일출이나 지는 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여, 당신이 클레르발의 일기를 본다면 내 얘기를 듣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느끼고 기뻐할 줄 아는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니까. 그러나 내 비참한 인생은 즐거움으로 향한 모든 길이 차단된 저주에 묶여 있었다. (p.226)

 

우렁찬 폭포수가 정열처럼 그를 사로잡았고

높은 바위, 저 산, 그리고 깊고 어두운 숲

그 색깔과 모습들은 그때 그에겐 하나의 욕망이었다

하나의 감정이자 사랑이어서

상념에서 생겨나는 깊은 매력이 필요 없었고

눈에서 생겨나지 않는 그 어떤 흥미도 필요 없었다.

 - 워즈워드, '틴턴 사원' - (p.22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무지개 - 윌리엄 워즈워스 (유종호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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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다시 옥스퍼드로 향했다. 이 도시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한 세기 반도 더 전에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사건들을 떠올렸다. 찰스 1세가 군대를 모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p.23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 신승현 (주니어 김영사)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 찰스 디킨스 (민청기 옮김, 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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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경치에 흠뻑 취해 있다가도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감에 괴롭게 깨어나곤 했다. 나는 평화로운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줄 알았었다. 어린 시절 전혀 불만을 모르고 살았으며, 어쩌다 권태감에 빠졌을 때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인이 만들어낸 신기하고 멋진 것들을 연구하면 흥미가 되살아나 낙천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타 죽은 나무였다. 그 벼락은 내 영혼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아서 머잖어 닥칠 내 존재의 종말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 망가진 인간성의 참혹한 광경, 다른 이에게는 안타깝고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을. (p.234)

 

어느 날 저녁 나는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해는 이미 지고 달이 막 바다에서 뜨고 있었다. 작업을 하기에는 불빛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멍하니 쉬면서 그날  밤은 쉬어야 할지 아니면 서둘러 완성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3년 전 나는 이와 똑같은 일을 했고, 그렇게 만든 악마는 비할 데 없는 잔인성으로 내 가슴을 황폐하게 했고, 지울 수 없는 자책감을 심어주었다.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존재의 성격 또한 나는 모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배우자보다 천 배 만 배 사악해서 살인과 참극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주변을 떠나 외딴 오지에 숨어 살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생각하고 추론할 줄 아는 동물일 텐데,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계약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이 서로를 미워할 가능성도 있다. 그 녀석이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싫어하는데 자기 앞의 여자를 보고 더 큰 혐오감을 가지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녀 또한 훨씬 잘생긴 사람을 보고 그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를 떠나면 그는 다시 혼자가 될 것이고, 자기 종족에게 버림받은 사실에 새로운 분노를 불태울지도 모른다.

사 그들이 유럽을 떠나 신대륙의 황무지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악마가 바라는 한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고, 악마의 씨족들이 지구에 번식한다면 인간들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이런 저주를 부를 권리가 있는 걸까? 전에 나는 내가 창조한 존재의 궤변에 감동했었다. 실은 그의 악마적인 위협에 꼼짝없이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비로소, 내 약속의 부도덕성을 깨닫게 되다니. 후손들이 나를, 자기만의 이기심에서 인류 전체의 존재와 자신의 평화를 맞바꾼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저주할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고개를 들었는데, 창문에서 그 악마의 모습의 달빛에 보였다. 소름 끼치는 웃음으로 입술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나를, 자신이 명령한 과제가 진행되고 있는 방을 보고 있었다. 그래, 그는 나를 따라왔던 것이다. 숲을 어슬렁거리고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또는 드넓은 히스 벌판에서 쉬면서, 이제 내가 얼마나 일을 진척시켰는지 확인하고 약속이행을 재촉하러 나타난 것이다.

그를 볼수록 그 얼굴이 극도의 사악함과 배신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를 닮은 존재를 또 하나 만들겠다는 약속은 미친 짓이었다. 나는 분노를 부들부들 떨면서 작업하던 것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 악마는 머지않아 행복을 안겨 줄 존재가 파괴되는 광경을 보더니 절망과 원한에 사무쳐 섬뜩하게 울부짖으며 물러났다. (p.241-24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마음의 아이들 - 한스 모라벡 (박우석 옮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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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힘들게 시작했던 것을 파괴해 버렸어. 대체 의도가 뭐지? 감히 약속을 깨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난 온갖 고생을 다 겪어왔어. 당신과 함께 스위스를 떠나 라인 강변을 따라 버드나무 많은 섬들 사이로, 언덕을 너머 기다시피 옮겨 다녔어. 잉글랜드의 히스 들판과 스코틀랜드의 황야에서 몇 달씩 지냈고, 생각도 못할 피로와 추위, 굶주림을 견뎌왔는데 감히 내 희망을 무너뜨려?"

"꺼져! 약속은 지키지 않겠다. 너처럼 흉측하고 사악한 존재는 절대 다시 만들 수 없어."

"노예 양반, 그렇게 설득했건만 넌 내가 애써 겸손 떨 가치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어. 내 능력을 잊지 마. 넌 지금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네가 햇빛도 싫어할 만큼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 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내가 과거에 우유부단했던 건 사실이니 이제 어디 네 마음대로 해보아라. 하지만 아무리 위협해도 억지로 나한테 사악한 짓을 하게 만들지 못해. 오히려 네 악행의 동반자를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내 결심만 굳어질 뿐이지. 내가 맨 정신으로, 죽음과 참극을 즐길 악마를 세상에 풀어놓을 것 같으냐? 어림없다!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협박해도 네 말은 내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야."

그 괴물은 내 얼굴에 나타난 굳은 결심을 보더니 무기력 한 분노로 이를 갈았다.

"모든 남자가 아내를 가슴에 품고, 모든 야수가 자기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 살라고? 나도 한때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혐오와 경멸뿐이었다. 이봐! 너는 맘에 안 들겠지만 조심해야 할걸! 앞으로 네 인생은 공포와 불행 속에서 지나갈 것이고 머지않아 네게서 영원히 행복을 앗아갈 벼락이 내릴 테니까. 내가 감당 못할 비참함 속에서 뒹구는 동안 너는 행복하겠다고? 넌 나의 나머지 욕망도 파괴할 수 있겠지만 복수는 남아. 복수, 앞으로는 그것이 빛이나 음식보다 더 달콤한 단어가 될 것이다! 나는 죽을지 몰라도 그전에 네가, 너를 괴롭히는 폭군인 네가 먼저 너의 불행을 지켜보는 태양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명심해라. 난 겁이 없고 그래서 강인하거든. 뱀처럼 교활하게 지켜보다가 독을 쏠 테니. 넌 네가 입은 상처를 보며 후회하겠지."

"닥쳐라, 악마야. 그 아삭한 말로 공기를 더럽히지 말거라. 내 결심은 이미 말했고 난 그런 말에 뜻을 굽힐 겁쟁이가 아니다. 이제 그만 떠나라.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좋다, 가지. 하지만 잊지 마라. 네 결혼 첫날밤에 함께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비열한 녀석! 내 죽음을 말하기 전에 네 몸이나 무사하게 잘 간수해라."

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몸을 피하더니 총총히 집을 떠났다. 몇 분 후 그가 탄 배가 쏜살같이 물을 가르며 나가는가 싶더니 곧 파도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지만 그의 말이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내 평화를 압살 한 그 녀석을 쫓아가서 바닷속에 처박고 싶은 분노가 이글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방안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가슴을 찢고 에는 듯한 수천 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왜 그를 쫓아가서 죽어라 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처를 주어 그를 떠나게 만든 사람은 나였고 그는 본토 쪽을 향해 길을 떠난 후였다. 만족을 모르는 그의 복수극에서 다음 희생자가 누구일지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다시 그의 말이 떠올랐다. '네 결혼 첫날밤에 함께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내 운명의 종점으로 정해진 시점이었다. 나는 바로 그 시간에 죽어서 그의 원한을 만족시키고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ㄴ에릴자베스, 그녀가 잔인하게 연인을 빼앗기고 흘릴 눈물과 한없는 슬픔을 생각하니 눈물이 줄줄 흘러냈더. 그리고 한바탕 싸워보지도 않고 적 앞에 쓰러지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밤이 지나고 바다에서 해가 떠올랐다. 내 기분은 한결 편안해졌다. 분노의 격정이 깊은 절망 속에 가라앉은 것을 그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말이다. 나는 집을, 어젯밤의 언쟁이 있었던 끔찍한 현장을 떠나 바닷가를 거닐었다. 바다는 나와 다른 인간들 사이에 놓은 건널 수 없는 장애물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런 사실이 증명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슬그머니 일었다. 차라리 그 황량한 섬에서 시들어가며, 어떤 갑작스러운 불행의 충격도 없이 살다 갔으면 하고 바랐다. 내가 돌아간다면, 그건 나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아니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악마의 손에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헤어져, 그 이별의 불행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유령처럼, 그 섬을 떠돌았다. 정오가 되어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는, 풀밭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밤을 꼬박 새어 신경이 예민했고 눈이 따가웠던 것이다. 그렇게 빠져든 잠이 기력을 채워주었다. 잠에서 깬 나는 다시 인간의 한 성원이 된 기분이었고, 훨씬 더 안정된 마음으로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악마의 말이 죽음을 알리는 종처럼 계속 귀를 울렸다. 그 말은 꿈처럼 다가왔지만 현실처럼 생생하고 무거웠다. (p.244-246)

 

그 악마가 나타났던 이후 내 감정은 완전히 180도 바뀌어 있었다. 그전에는 우울한 절망감에 싸여, 결과가 어떻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눈앞에서 장막을 걷어버린 듯, 처음으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작업을 다시 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의 위협이 꺼림칙하게 마음을 짓눌렀지만, 자발적으로 나선다고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악마와 똑같은 존재를 다시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열하고 극악하게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굳게 못 박은 나는 다른 결론이 나옴직한 생각들을 모두 떨쳐버렸다. (p.249)

 

한순간, 맑게 빛나던 달이 갑자기 구름에 가렸고, 나는 그 어둠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구니를 바다에 던져 넣었다. 꾸르륵 거리며 가라앉는 소리를 확인한 후 자리를 떴다.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공기는 상쾌했고, 마침 북동쪽에서 불기 시작한 산들바람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쌀쌀한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고 기분 좋게 다가와서 좀 더 바다에 머물기로 하고는 키를 방향칸에 고정시킨 채 바다에 누웠다. 구름이 달을 가려 모든 것이 흐릿했고 배의 용골이 파도를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자장가 같은 그 소리에 나는 깜빡 깊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이미 높이 떠오른 뒤였다. 바람이 세게 불면서 파도가 내 작은 배를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바람은 북동풍, 내가 떠나온 해안에서 멀리 밀려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항로를 바꾸려고 했지만 한 번 더 뱃머리를 돌렸다가는 당장 배에 물이 찰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꼼짝없이 바람에 밀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백하지만 그때는 굉장히 무서웠다. 나에겐 나침반도 없었고, 이곳의 태양이 비춰주는 혜택을 받으며 자라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 지역에 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넓은 대서양으로 흘러들어 굶주림에 허덕이거나 또는 거칠게 철썩이며 사방에서 나를 희롱하는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버릴지도 몰랐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고, 나는 이어질 고난의 전주곡과도 같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가린 구름이 바람에 밀려가고 있었지만, 그 빈자리를 다시 다른 구름이 채웠다. 바다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나의 무덤이었다. 나는 고함을 쳤다.

"이 악마야, 네가 할 일이 벌써 다 끝나버렸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아버지를, 클레르발을 - 내가 떠나온 사람들, 그 괴물이 무자비한 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손을 뻗칠 모든 이들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나를 절망스럽고 두렵기만 한 망상에 빠뜨렸다. 이제 그 장면이 영원히 막을 내리려는 이 순간에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몇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해가 수평선으로 기울면서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어 산들바람으로 바뀌었고 바다는 그 훼방꾼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바람이 잠잠해지자 어마어마한 너울이 일었다. 속이 울렁거려 키를 잡고 있기도 힘들어질 때쯤 갑자기, 남쪽에 길게 뻗은 고지가 보였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무서운 불안 속에서 여러 시간을 보낸 후라, 드디어 살았다는 갑작스런 희망이 벅차게 밀려오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그리고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가진 삶의 애착은 얼마나 묘한 것인지! 나는 옷가지로 돛을 하나 더 만들어 기를 쓰고 그 육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멀리서 험한 바위땅처럼 보이던 것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작지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다.

해안 가까이에는 선박들이 었었다. 나는 문득 문명화된 인간들의 사회로 돌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그 육지의 굴곡을 눈으로 더듬던 나는 마침내 작은 곶 뒤로 솟아오른 첨탑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p.249-251)

 

내가 왜 죽지 못했을까? 어떤 인간보다 비참했으면서 왜 망각과 영면으로 빠져들지 않았던 것일까? 죽음은 피어나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유일한 희망을 낚아챈다. 꽃다운 신랑신부가 한때 건강과 희망을 활짝 피웠다가도 다음 순간 벌레의 먹이가 되어 무덤에서 썩어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바퀴가 돌아가듯, 계속해서 새롭게 나를 고문하는 그 많은 충격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p.258)

 

대배심에서는 클레르발의 시체가 발견되던 시각에 내가 오크니 섬에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소장을 기각했다. 나는 혐의를 벗은 지 2주 후에 감옥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내가 억울한 살인혐의를 벗고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 것과 내 조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이런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나에게는 지하 감옥의 장벽이든 궁전이든 똑같이 싫기만 했다. 삶의 잔에는 가시지 않을 독이 퍼져버렸고, 햇빛은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비추고 있었지만 내 주위에는 짙은 어둠뿐, 어떤 빛도 그 어둠을 뚫지 못한 채 번뜩이며 나를 응시하는 두 눈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때로 그 눈은 앙리의 눈으로 나타났다. 죽어서 생기를 잃은 짙은 눈동자가 검고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이 거의 덮여 있었다. 때로는 그 괴물의 눈이 되어, 잉골슈타트의 내 연구실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물기 어린 흐릿한 눈으로 보였다. (p.265-266)

 

착하고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어느새 촉촉해진 감정이 사랑과 기쁨의 낙원에 대한 꿈을 속삭였다. 그러나 금단의 사과는 벌써 먹어버렸고, 천사의 팔은 나를 모든 희망에서 떠밀고 있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것이다.

괴물이 자신의 협박을 실천에 옮긴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결혼이 내 운명을 재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파멸은 몇 달 안에 찾아오겠지만, 그 악마가 자신의 협박 때문에 내가 결혼을 미룬다고 의심하면 보나 마나 더 끔찍하게 복수할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내 결혼 첫날밤에 같이 있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에 조용히 있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피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협박을 공표한 후 곧바로 클레르발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촌과 곧바로 결혼하는 것이 그녀나 아버지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차피 적은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고 그 음모는 한 시간을 넘지 않고 끝날 테니까. (p.276)

 

아! 불행한 사람은 운명에 체념하면 그만이지만 죄를 진 사람한테 평화는 없는 법이다. 슬픔에 탐닉하다 보면 이따금씩 달콤한 사치를 누릴 때도 있지만 양심의 가책은 그마저도 독살시킨다. (p.278)

 

무심한 하늘이여! 왜 나는 그때 죽어버리지 못했을까! 왜 여기 앉아서 가장 아름다웠던 희망과 가장 순수했던 존재의 파멸을 이야기하고 있단 말인가? 그녀가 거기 있었다. 숨을 거둔 채 미동도 없이, 침대 위에 내던져져 고개를 축 늘어뜨린 자세로.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반쯤 가리고 있었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똑같은 모습만 보였다 - 그녀의 핏기 없는 팔과 늘어진 몸이. 그 광경을 보고도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아아! 목숨이란 가장 떨쳐버리고 싶은 순간에 가장 집요하게 들러붙는 법이다. 한순간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공포로 숨죽이며 나를 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소스라치는 전율이 내게는 비웃음으로, 날 짓누르는 감정의 그림자로 느껴졌다. 엘리자베스, 내 사랑, 나의 아내, 너무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녀가 시체로 누워 있는 방으로 갔다.

그녀는 내가 처음 보았던 자세에서 옮겨져 있었다. 바로 눕혀져 있었고 얼굴과 목에 걸쳐 손수건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녀가 잠든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달려가서 내 몸이 부서져라 그녀를 껴안았지만, 품에 안긴 차가운 몸뚱이는 더 이상 내가 사랑하고 이끼던 엘리자베스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악마의 손아귀가 남긴 살인 자국이 그녀의 목에 새겨져 있었고 입술에서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p.286-287)

 

말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호수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밖엔 바람이 사납게 불고 비가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곧 동이 틀 시간이라 내일 밤이 되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배를 저을 사람들을 구하고 나도 힘껏 노를 잡았다. 육체를 혹사시키면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를 덮친 엄청난 비애와 감당하기 벅찬 불안감 때문에 육체를 움직일 힘마저 없었다.

나노를 팽개치고 턱을 괸 채 우울한 생각들이 떠오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개를 들면 행복했던 시간, 나에게 익숙했던 풍경이, 불과 하루 전에 그녀와 함께 감상했던 풍경들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그림자로 기억에만 남아 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비가 잠시 그친 터라 물속에서, 몇 시간 전과 똑같이 노니는 물고기들이 들여다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보았던 그 물고기들이었다. 갑자스럽게 닥친 커다란 변화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태양은 빛나고 구름은 여전히 드리우겠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어제와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한 악마가 나에게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버렸다. 지금까지 그 어떤 존재도 나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렇게 무서운 사건은 다시없었다. (p.288-289)

 

당신에게 엘리자베스는 딸 이상이었으며 인간이 느끼는 모든 애정을 쏟아부은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몇 남지 않은 식구들을 거느린 만큼,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욱 열심히 매달렸다. 저주받을, 그 망할 악마가 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에 불행을 덧씌워 비참함 속에서 당신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겹겹이 에워싼 참극 속에서 더 버티지 못했다. 아버지는 침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며칠 만에 내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p.290)

 

어차피 자유란 내게 쓸모없는 선물이었고 내가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면서 동시에 복수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이 나를 짓누를수록 나는 그 원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내가 만들어낸 그 괴물, 내가 세상에 내보낸 그 비열한 악마가 나를 파괴한 것이었다. 그를 생각할 때면 미칠 듯한 분노에 사로잡혔고, 내 손으로 그를 붙잡아 멋지게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다고 증오심으로 오랫동안 헛된 기도에 매달린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잡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p.290-291)

 

제네바를 떠나면서 우선 한 일은 사악한 적을 뒤쫓기 위해 단서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제네바 변경에서 여러 시간을 헤맸다. 밤이 다가올 무렵 나는 윌리엄과 엘리자베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묘지 입구에 서 있었다. 묘지로 들어가 그들의 묘비가 있는 무덤으로 다가갔다. 모든 것이 고요했고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들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 거의 캄캄해지자 주위 풍경은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진지해질 정도로 ㅜㄱ연했다. 떠난 사람들의 혼령이 주변을 날면서 애도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보이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했다.

이런 풍경이 주는 슬픔은 곧바로 분노와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었다. 그들을 죽인 자 역시 살아 있었고, 그를 죽이기 위해 나는 이 비틀거리는 존재를 질질 끌고 가야 했다. 나는 풀밭에 무릎을 꿇고 입술을 떨며 땅에 키스하고 소리쳤다.

"내가 무릎 꿇은 성스러운 땅에 걸고, 내 곁을 방황하는 혼령들을 걸고, 내가 느끼는 깊고 영원한 슬픔을 걸고 맹세하노라. 그리고 밤이여, 그 위에서 지내는 혼령들이여, 나는 이 불행을 야기한 악마를 쫓아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겠노라! 이 목표를 위해 내 목숨을 부지하겠노라. 이 간절한 복수를 위해 나는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태양을 보고 땅의 초록 풀들을 다시 밟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부탁하나니, 사자의 혼령이여, 방황하는 복수의 사신들이여, 내 목표를 이루도록 부디 도와주시오. 그 저주받을 사악한 괴물이 처절한 고통을 마시도록,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 절망을 그가 느끼도록 해주시오." (p.296-297)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하얀 벌판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인생에 발을 내딛는 당신이, 알 수 없는 새로운 고통을 걱정하는 당신이, 내가 느껴왔고 지금도 느끼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추위와 궁핍, 피로는 내가 견디어야 할 최소한의 고통이었다. 나는 지독한 악마의 저주로 영원한 지옥을 짊어지고 다녔다. 그러나 선한 영혼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발길을 인도해 주었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관에서 갑자기 구해주기도 했다. (p.298)

 

그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고, 나는 바다의 얼음 산맥을 너머 끝도 없는 죽음의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 얼음 바다의 추위는 그 마을 주민들도 오래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한데, 더구나 온화하고 따뜻한 고장 출신인 내가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악마가 사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분노와 복수심이 고개를 들며 힘센 물결처럼 다른 감정들을 압도해 버렸다. 나는 잠깐 동안 잠을 청했는데, 꿈에 죽은 자들이 나타나 나더러 고난을 무릅쓰고 복수하라고 부추겼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육상용 썰매 대신 울퉁불퉁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기 적합한 썰매로 바꾸고, 많은 양식을 사들인 후 육지를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복수심 하나에 의지해 목숨을 유지하면서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거대하고 험준한 얼음산이 앞길을 가로막았고, 나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는 거대한 파도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그러나 다시 혹한이 닥치면 바닷길은 안전해졌다.

점점 줄어드는 식량의 양을 보면 그렇게 3주를 여행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듯한 희망 때문에 종종 쓰디쓴 낙담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절망은 사실 나를 먹이로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나는 곧 그 비참함 속으로 가라앉을 운명이었다. 한 번은 불상한 개들이 빙산의 경사면 위로 날 끌어올리느라 모진 고생을 한 탓인지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참담한 마음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을 때, 어둑어둑한 평원 위에 검은 점 하나가 불현듯 눈길을 끌었다. 그것이 뭘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던 나는 썰매와 그 안에 탄, 눈에 익은 거대한 육신을 알아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 내 가슴에는 희망이 얼마나 세차게 다시 타올랐던가! 뜨거운 눈물이 눈앞을 가렸지만 재빨리 닦아냈다. 눈물 때문에 그 악마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쓰라린 눈물로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고 곧이어 격한 감정에 사로 잡혀서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나머지 개들을 죽은 녀석으로부터 떼어놓고 먹이를 넉넉히 주고서 한 시간쯤 쉬었다.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후에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썰매는 여전히 내 시야에 있었고 거대한 얼음 바위의 우뚝 솟은 위용에 잠시 가렸던 때를 제외하곤 그 썰매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썰매의 윤곽을 꽤나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틀이 지난 후, 불과 1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적을 보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런데 그 철천지원수를 따라잡으려는 찰나 갑자기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그의 흔적을 놓쳐 그 어느 때보다 곤란해진 것이다. 거대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천둥소리를 내면서 발 밑에 있는 물이 구르며 부풀어올라 시시각각으로 더욱 불길하고 무서워졌다. 버티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바람이 일고 바다가 우르릉거렸다. 거대한 지진 같은 충격과 함께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얼음 바다가 쩍 갈라졌다. 상황은 곧 끝났다. 몇 분 동안 나와 나의 적 사이에서 바다가 요동을 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쪼개져 나온 얼음판을 타고 떠다니고 있었다. 계속 작아지는 얼음판은 나의 오싹한 죽음을 예고 하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흘러갔다. 개 몇 마리가 또 죽었고 나는 계속되는 고난으로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나에게 구조와 생명의 손길을 내밀며 정박해 있던 당신의 배를 본 것이다. 배가 그런 북극까지 온다는 걸 전혀 몰랐던 나는 그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썰매를 부수어 노를 만들어 기력이 다한 몸으로 얼음판을 당신 배 쪽으로 밀어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당신이 남쪽으로 간다고 하면 내 목표를 포기하느니 바다의 자비로운 품에 나를 맡기겠다고 결심했었다. 당신한테 배 한 척을 달라고 부탁해서 그 배로 적을 쫓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은 기진진한 나를 승선시켰고, 나는 마침내 그 동안의 고난에 무릎을 끓고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갔다.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 내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302-305)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내 자신ㄴ이 굉장히 크게 성공할 운명이라고 믿었다네. 그런 감정은 확고했지만 한편으로는 빛나는 성공을 위한 냉철한 판단력도 지니고 있었네. 나에 대한 이런 자부심은 나머지 감정들이 억눌릴 때에 나를 지탱해주었지. 인유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능력들을 쓸데없는 슬픔 속에 던져버린다는 것은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이야. 내가 완수한 그 일, 실로 감각과 이성을 지닌 동물을 창조해낸 업적을 생각하면 내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볼 수가 없어썽. 그러나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 힘이 되어주었던 그 생각은 결국 나를 먼지 구덩이 속에 밀어넣고 말았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무위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하던 대천사장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묶인 신세가 되었어. 내 상상력은 무궁무진했고 분석력과 응용력도 탁월했지. 이런 자질을 결합함으로써 나는 인간의 창조를 떠올렸고 실행하게 된 거야. 지금도 그 일이 완성되기 전의 공상들을 떠올리면 그 열정이 되살아난다네. 나는 공상 속에서 천국을 밟았고 내 능력 속에서 기뻐했으며 그 결과를 기대하며 기쁨에 타올랐지. 어릴 적부터 나는 높은 이상과 고결한 야망에 젖어 있었어. 그러나 지금 나는 얼마나 몰락했는가! 아! 친구여, 자네가 옛날의 나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타락해버린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나는 절망이 뭔지 몰랐다네. 내겐 화려한 운명이 펼쳐질 것 같았지. 내가 절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걸 확신할 때 까지는.": (p.309-310)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네들은 선장한테 무슨 요구를 하는 거요? 그렇게 쉽게 계획을 포기한단 말이오? 당신네들은 이 항해가 영예로운 탐험이라고 하지 않았소? 무엇 때문에 이 일이 영예로웠소? 남쪽 바다에서처럼 뱃길이 순탄하고 잔잔해서가 아니라 위험과 공포가 가득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강한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온갖 새로운 사건 때문에, 사방에 도사린 위험과 죽음 때문에, 바로 여러분이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할 난관 때문이었소. 그 때문에 이 항해가 영예로웠고 훌륭한 과업이었던 것이오. 여러분은 인류에 공헌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그 이름들은 명예를 지키며 죽음에 맞선 용감한 사람으로 추앙받을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보시오. 이제 겨우 위험을 상상하면서, 여러분의 용기를 시험하는 강력하고 무서운 심판대에서 겁을 집어먹고 추위와 위험에 무력한 남자들로 기억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소. 실제로 그렇게 가련한 남자들은 추위를 느껴서 따뜻한 불가로 돌아갔소. 사실, 그러려면 이런 준비가 필요 없었소. 그리고 스스로 겁쟁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당신네 선장을 이렇게 멀리까지 고 와서 실패하게 만들어 망신을 줄 필요도 없었소. 부디! 사나이가 되시오. 아니 그 이상이 되시오. 목표를 굳게 새기고 바위처럼 흔들리지 마시오. 이 빙산은 여러분의 마음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오. 빙산은 변화기 쉽고 여러분이 물러서지 않는 한 버티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의 이마에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새긴 채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싸워서 정복한, 그리고 적에 맞서 물러서지 않았던 영웅이 되어 돌아가시오." (p.314-315)

 

"아! 내가 의지하던 힘도 이제 다했어. 나는 곧 죽을 거야. 그리고 나의 적, 파괴자는 여전히 살아 있겠지. 월튼, 내가 마지막 순간에도 한때 나타냈던 것처럼 증오와 복수의 열정에 사로잡혔다고 오해하지는 말게. 아마도 내 적의 죽음을 갈망하면서 내 자신을 정당화했던 것 같아. 이 마지막 며칠 동안 내 지나온 과거를 곰곰 생각해 보았네. 남한테서 욕을 들을 만한 일은 없었어. 열정적인 광기에서 이성을 가진 존재를 창조했고, 내 힘이 미치는 한 그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해주려고 했었어. 그것이 나의 의무였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어. 내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의무가 내 욕심보다 더 중요했어. 인간들이, 행복과 불행에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첫 번째 피조의 반려자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고 그것이 옳았어. 그는 끝간 데 없는 원한과 해로운 이기심을 보여주었지. 그는 내 친구들을 죽였네. 섬세한 감수성과 행복, 지혜를 지닌 사람들을 해치는 데 몰두했어. 그 복수를 향한 갈증의 끝이 어디인지는 모른다네. 자신이 비참하다고 다른 이까지 비참하게 한다면 그는 죽어야 마땅하네. 그를 파멸시키는 일은 내가 했어야 했지만 나는 실패했어.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마음 때문에 자네한테 내가 못다 한 일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제 이성과 덕을 되찾은 상태에서 다시 부탁하겠네.

하지만 이 과업을 위해서 자네한테 조국과 친구들을 버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이제 자네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이상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말한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자네의 의무와 어떻게 조화를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네한테 맡기겠네. 죽음이 코앞에 와 있으니 나는 벌써 판단력이나 사고가 흐려진 것 같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달라는 건 아니야. 아직도 열정 때문에 내가 잘못 판단할 수 있으니까.

그가 살아가면서 재앙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간, 내가 해방을 기대하는 이 짧은 순간이 최근 몇 년 동안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이야.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앞에 어른거리니 서둘러 그들에게 가려네. 잘 있게, 월튼! 평온함 속에서 행복을 찾고 야망은 피하도록 하게. 야망이 아무리 순수하고, 과학과 발견의 세계에서 자네를 빛내줄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피해야 하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지? 나는 그런 야망 때문에 파멸을 자초했지만 다른 사람은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말할 기력조차 잃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한 시간 반쯤 흐른 후 그는 다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힘없이 내 손을 잡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서 부드러운 미소의 빛이 사라졌다. (p.318-319)

 

"후회도 그 정도면 지나치다. 네가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날카로운 가책의 말을 들어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복수를 하지 않았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아직 살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그때엔 고통과 가책을 못 느꼈다고 생각하시오? 저 자는," 그는 시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복수한 결과가 어떤 건지 맛보지 못했소. 그렇고 말고! 그 복수를 행동에 옮기면서 일이 신속히 깨끗하게 끝나지 않는 동안 내가 느꼈던 고통의 만 분의 일도 겪지 않았단 말이오. 무시무시한 이기심이 나를 재촉했지만 내 마음은 가책으로 멍이 들었소. 클레르발의 신음소리가 내게는 음악으로 들렸을 것 같소? 사랑과 동정에 민감하게 만들어진 내 마음이 불행 때문에 악행과 증오를 뒤틀렸을 때, 그 급격한 변화에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ㄴ고통을 느꼈소.

클레르발을 살해한 뒤 나는 완전히 낙담한 채 스위스로 돌아갔소. 프랑켄슈타인이 측은하게 느껴졌소. 측은하다 못해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소. 나는 내 자신이 싫어졌소. 그러나 그가, 내 존재를 만들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지어냈던 그 작자가 다시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는 내가 느끼는 불행과 절망의 구렁텅이를 더욱 깊이 파면서 정작 자신은 욕망에 탐닉하고 감정과 열정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소. 그것은 나에게는 영원히 금지된 것이기에 나는 무력한 부러움을 느꼈고, 쓰디쓴 분노와 함께 채울 수 없는 복수의 갈증에 사로잡혔소. 내가 그에게 했던 협박을 떠올리며 그대로 실행하리라고 결심했소. 그가 나에게 무서운 일을 계획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아무리 싫어도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의 노에였지 주인이 아니었소.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그래, 그때 나는 비참하지 않았소 나는 극심한 절망에 항거하기 위해 모든 감정을 떨쳐버렸고 모든 고뇌를 억눌려 버렸소. 그때부터 내게는 악이 선이었소. 그렇게 되자 내가 기꺼이 선택한 악에 내 본성을 길들일 도리밖에 없었소. 그 사악한 계획을 끝내는 것이 탐욕스러운 욕망이 되었소. 그리고 이제 모든 게 끝났소. 저기 있는 것이 내 마지막 희생자요!"

처음에 나는 그의 말에 동정이 갔다. 그러나 그가 번드르르한 말솜씨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켄슈타인의 말이 올랐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친구를 보자 다시 분노가 타올랐다.

"비열한 녀석! 스스로 자초해서 처량한 신세가 되어 놓고 여기 와서 울다니. 그래도 싸지. 건물 더미에 횃불을 던져놓고는 건물이 다 타버린 후 그 잿더미에 앉아 통곡하는 셈이지, 위선자! 네가 애도하는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여전히 그는 네 가증스러운 복수의 대상일 것이고, 다시 그 제물이 되었겠지. 네가 느끼는 건 연민이 아니야. 너는 다만 네 죄악의 희생자가 네 손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오. 그게 아니오. 그동안 나의 행동으로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지. 하지만 내 불행을 동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오. 절대 동정할 리도 없겠지만. 내가 처음 인가의 동정을 구했을 때 그것은 선에 대한 사랑, 나에게 넘쳐흐르는 애정과 행복의 감정을 같이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소. 그러나 그 선이란 지금 나에게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행복과 애정은 씁쓸하고 지긋지긋한 절망으로 변해버렸는데, 어디에서 내가 동정을 구한단 말이오? 나는 내 고난이 지속되는 한 나 혼자 괴로워하는 것에 만족하고. 내가 죽으면 혐오와 비난으로 나를 기억할 거라는 사실에 만족하오. 한때 나는 선과 명에, 즐거움을 꿈꾸면서 공상으로 위안을 받았었소. 한때는 나의 겉모습을 용서해 주고, 또 내가 과시할 수 있는 탁월한 자질들로 나를 사랑해 줄 존재들을 만나고 싶은 헛된 바람을 가졌었소. 나는 명예와 헌신이라는 고매한 감정으로 충만했었소.

그러나 지금은 죄 때문에 가장 비천한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소. 어떤 죄악이나 해로움도, 어떤 악행이나 불행도 나의 것과 비교될 수 없을 거요. 내가 저지른 그 무서운 죄악들을 돌이킬 때면, 한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선행을 꿈꾸며 숭고한 것만을 생각했던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 믿기지 ㅣ않소. 하지만 현실은 그렇다오. 타락한 천사는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니까. 그러나 신과 인간의 적인 악마에게조차 그 쓸쓸함을 나눌 친구가 있지만 나는 철저하게 혼자요.

당신, 프랑켄슈타인을 친구라 부르는 당신은 나와 죄와 그의 불행에 관해 들어서 알고 있나 보군. 그가 당신한테 얼마나 자세히 말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무력한 열정 속에서 헛되이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을 요약하지는 못했을 거요. 왜냐하면 나는 그의 희망을 무너뜨렸지만 내 자신의 욕망은 만족시키지 못했으니까. 욕망은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기만 했소. 그래도 나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했고 여전히 배척당했소. 그건 옳은 일이오? 인간들은 모두 나에게 죄를 저지르는데 왜 나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오? 당신은 왜 펠릭스를, 자기 은인을 문전박대한 그는 미워하지 않는 거요? 자기 자식을 구해준 사람을 죽이려 한 그 시골 농부는 왜 탓하지 않는 거요? 그래, 그들은 착하고 결백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나 흉측하고 버림받은 이 기형아는 멸시당하고 따돌림받고 짓밟힐 운명이고, 그 부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끓어오르고.

하지만 내가 비열하다는 건 사실이오. 사랑스럽고 연약한 자들을 살해했으니까. 그 순박한 사람들이 잠잘 때 목 졸라 죽였고, 나를 ㅣ롯해 어떤 생물도 해치지 않을 어린아이를 목 졸라 구였소. 나는 내 창조자들,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도록 선택된 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내 삶을 바쳤소. 나는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파멸로 몰아붙였소. 저기 그가, 창백하고 싸늘하게 죽어서 누워 있소. 당신은 내가 밉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는 만큼은 아닐 거요. 이게 그 일들을 저질렀던 손이오. 나는 이 손을 보면 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 손을 보고도 괴로운 상상이 따라다니지 않을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오.

내가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까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할 일은 거의 끝났소. 나의 존재를 완성하고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이나 다른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오. 내가 이 마지막 희생을 미룰 거라고도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타고 온 얼음장을 타고  배를 떠나서 지구의 북쪽 끝까지 갈 생각이오. 거기서 화장용 장작을 모아서 이 비참한 육체를 재로 태우겠소. 어떤 호기심 많고 불경스러운 못난이가 나와 같은 존재를 다시 만드는 일이 없도록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테요.

나는 죽을 거요,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고뇌를 느끼지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는 일도 더 이상 없겠지요. 나를 만들어주었던 그는 이제 죽었소. 그리고 이제 내가 죽으면 우리 둘에 대한 기억도 곧 잊혀질 거요. 나는 더 이상 태양이나 별을 보지 못하고 뺨에 와닿는 바람도 느끼지 못할 거요. 빛과 느낌, 감정도 사라질 테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 행복을 찾게 될 것이오. 

몇 해 전, 이 세상의 모습이 맨 처음 내 앞에 펼쳐졌을 때, 여름의 유쾌한 온기를 느끼고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이었을 때 울다가 죽었으면 좋았을 거을. 이제 나의 유일한 위안은 죽음이오. 죄악으로 얼룩지고 괴로운 가책에 만신창이가 된 지금, 죽음 밖에 달리 어디서 쉴 수 있단 말이오?

잘 있으시오! 이제 떠나겠소. 당신이 이 눈으로 보는 마지막 인간이 될 거요. 잘 있으시오. 프랑켄슈타인! 그대가 아직 살아 있어서, 아직도 나에 대한 복수의 열망을 불태웠다면 나의 죽음보다는 삶을 만족시켰을 것을.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구려. 당신은 나를 없애고자 했소. 내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말이오.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어떤 방식으로 당신이 지금도 계속 생각하고 느낀다 해도 당신의 복수심이 나의 그것만큼 심하지 않을 거요. 당신도 불행했지만 내 고통은 당신의 고통보다 더 컸소. 괴로운 죄책감이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아픈 상처를 쑤셔댈 테니까."

"하지만 곧" 그는 슬프고도 엄숙한 열정으로 소리쳤다.

"나는 죽을 거요. 그러면 지금 느끼는 감정도 더 이상 못 느끼겠지. 이 타오르는 비참함도 곧 사라지겠지. 난 의기양양하게 화장용 장작더미에 올라가 살을 태우는 고통스러운 불꽃 속에서 기뻐 날뒤리다. 그 화염이 꺼지면 나의 재가 바람에 실려 바다로 갈 것이오. 내 영혼은 평화로이 잠들 것이오. 혹시 영혼이 생각을 한다 해도 괴운 생각은 아니겠지요. 잘 있으시오."

그는 이 말과 함께 선실 창문으로 튀어 오르더니 배 근처에 떠 있던 얼음장 위로 뛰어내렸다. 파도에 밀려가던 그의 모습이 곧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졌다. (p.32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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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년 8월 30일 ~ 1851년 2월 1일)

영국의 소설가·극작가·수필가·전기 작가이자 여행 작가.

그는 또한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편집하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철학자이자 여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부부의 딸이다.
메리 고드윈은 고작 생후 11일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이후 부친의 손에서 자라났다. 메리가 네 살 때, 부친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이웃 메리 제인 클레어몽과 결혼했다. 고드윈은 딸에게 자금·학술·교육 면에서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 그가 그의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동참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814년에 메리 고드윈은 부친의 정치적 추종자 중 한 사람, 나중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와 연애하기 시작한다. 메리의 배다른 자매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이 둘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후 2년 동안, 그와 퍼시는 주변의 손가락질과 계속된 자금난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뱃속의 딸을 유산하였다. 퍼시 셸리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해리엇과 사별한 뒤, 이 둘은 1816년 말엽에 혼인하였다.
1816년, 부부는 바이런 경과 존 윌리엄 폴리도리,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근방에서 여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메리는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큰 틀을 구상하였다. 셸리 부부가 1818년에 영국을 떠나 자리 잡은 이탈리아는, 그들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넷째 아이 퍼시 플로렌스를 낳기 전, 둘째와 셋째 아이를 잃은 곳이다. 1822년에 그의 남편은, 라스페치아 근해에서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일 년 뒤 메리 셸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그의 여생을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하며 보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 년을 지루한 투병생활로 보냈는데, 그가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뇌종양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메리 셸리는 주로 남편 퍼시 셸리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참여한 공로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많은 희곡과 영화로 재구성되고 있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만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최근에서야 학계는 메리 셸리가 남긴 자료를 조금 더 포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인정하였다. 문단에서는 점차 그의 집필 자료들, 특히 역사소설 《발퍼가》(1823)와 《퍼킨 워벡의 행운》(1830), 묵시소설 《최후의 인간》(1826),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두 소설 《로도어》(1835)와《포크너》(1837) 등, 그가 남긴 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기행문 《1840, 1842, 1843년 독일과 이탈리아 산책》(1844)과 다이어니셔스 라드너의 전기문인 《잡동사니 백과사전》(Cabinet Cyclopaedia)(1829~46) 등 그의 덜 알려진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메리 셸리의 생애 전반에서 정치적 급진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평가를 뒷받침한다. 메리 셸리는 종종 작품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가정에서나 보여주던 협력과 조화로 시민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선은 부친 윌리엄 고드윈으로부터 물려받은 계몽주의 정치론과 남편 퍼시 셸리의 조력에 기인했으며,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낭만주의의 품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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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 메리 셀리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94)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셀리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셀리 (임종기 옮김, 문예 세계문학 62)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셀리 (한애경 옮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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