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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초정리 편지 -배유안 (창비)

by handaikhan 2024. 4. 5.

 

배유안 - 초정리 편지 (2006년)

 

장운은 짚신을 꿰어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마당가에 서니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아래쪽에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이 몇 채 있고, 그 뒤로 스무 채 남짓한 초가들이 작은 개울을 끼고 옹기종기 앉아 있다. 마을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군데군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장운은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마을을 보노라면 오늘은 어제보다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 마당을 쓸어 놓고 보리죽으로 간단히 요기까지 마쳤다. (p.7)

 

"너, 글을 아느냐?"

"글을요? 모릅니다."

"배워 보련?"

"예? 글을 배워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선비에게 일렀다.

"종이오아 붓을 가져오너라."

선비가 조용히 대답하고 내려가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다 할아버지 옆에 놓고는 먹을 갈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붓을 들었다.

ㄱ ㅋ ㅇ ㄷ ㅌ ㄴ ㅂ ㅠ ㅁ ㅈ ㅊ ㅅ

. ㅡ ㅣ ㅗ ㅏ ㅜ

(p.2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종처럼 - 박현모 (미다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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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 마을로 들어가 논밭을 조금 사서 살았다. 그러나 글을 모른 탓에 이듬해에 고스란히 그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p.40)

 

장운은 다시 돌 앞에 반듯하게 앉았다. 이 큰 돌 안에 연꽃이 가득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에 감춰진 연꽃을 피어나게 하려면 꽃을 덮고 있는 돌을 깨 내야 한다. 장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가 조심조심 불필요한 부분을 깨 나가기 시작했다.

돌이 한 점 한 점 떨어져 나가자 천천히 꽃잎 형태가 드러났다. 둥글불룩하게 꽃잎을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딱딱한 돌로 그저 꽃 모양을 낸다는 생각은 말고 정말 꽃잎을 피운다고 생각해야 된다. 마음속에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꽃잎을 다듬을 수 있어."

판돌이 아저씨가 장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p.171)

 

'어쩔 것인가? 누가 일부러 그랬건 어쨌건 깨진 돌을 이제 어쩔 것인가?'

장운은 머리르 움켜잡고 몸을 웅크린 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아아!"

문득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 하지 마라. 너를 해코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네 책임이다. 미움을 못 풀어 준 건 너일 테니까."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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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유안 (1957 - )

1957년 경남 밀양에서 나고, 부산에서 자랐다.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했고,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동화를 쓰고 있다. 농민신문사에서 내는 월간 [어린이 동산]의 2003년 중편동화 공모에 『유모차를 탄 개』가, 200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고추잠자리에 대한 추억』이 당선되었다. 또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초정리 편지』로 2006년 ‘창비 좋은 어린이책’ 창작 부문 대상을 받았다. 어린이 그림책, 교양도서, 어른이 읽는 동화 및 청소년 소설을 쓰면서 도서관과 학교 등에서 다양한 강연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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