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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3. 동양 - 고전 수필

마음속의 대나무 - 소동파 (김병애 옮김, 태학사)

by handaikhan 2023. 2. 2.

마음속의 대나무 - 소동파 (택한산문선 202)

소동파 - 마음속의 대나무

 

달밤 뱃놀이 - 적벽부(赤壁賦)

임술년(1082년) 가을 7월 16일에 나는 손님과 더불어 배를 타고 적벽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았따. 잔 들어 손님에게 권하고 <시경>의 명월 시를 읊으며 요조장을 읊고 있으려니, 조금 있다가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두성과 우성 사이를 배회하는데 휜 이슬이 강물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접해 있다.

한 조각 작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아득히 너른 바다를 흘러가노라니, 하도 넓어 허공에 의지한 듯 바람을 탄 듯 멈출 곳을 모르며, 두둥실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 돋아 신선 세계에 오르는 듯하니, 매우 즐거워 술 마시고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아대로

물속에 비추인 달 그림자 치며

반짝이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네

아득히 먼 이 내 생각이여

하늘 한쪽에 있을 아름다운 임 그리네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자가 노래에 맞춰 화답하니 그 소리 구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 실낱 같은 가냘픈 여운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리 들으면, 으슥한 골짜기에 잠긴 교룡도 춤을 추며 외로운 배의 과부도 눈물지으리. 나는 근심스레 옷길을 여미고 고쳐 앉아 손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도 슬픈가?"

손님은 말했다.

"달이 밝으니 별이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삼국시대 조조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얽혀 울창하여 검푸르도다. 이곳이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곤란을 당했던 곳이 아닌가?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물결을 타고 동쪽으로 갈 때에 배는 천 리에 꼬리를 물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술 걸러 강가로 나아가 창을 빗겨들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한 세상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나와 그대는 물가에서 고기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며,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서 술 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간에 하루살이가 부쳐 있는 것이요, 아득한 창해에 한 톨의 좁쌀이로세. 우리네 생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이 끝없음을 부러워하며, 날아다니는 신선을 끼고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려 하지만 대번에 취할 수 없음을 아노니. 여운을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나는 말했다. "손님은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이 이렇지만 일찍이 다 가버린 적이 없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렇지만 끝내 사라지거나 더 커지는 일은 없다. 변하는 쪽에서 보면 천지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쪽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또한 천지간의 온갖 것들은 물건마다 다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터럭만치라도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야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색이 되어,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하지 아니하니, 이는 조물주의 무궁무진한 곳집이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거워할 것이로다."

손님이 기뻐하여 옷과 잔을 씻어 돌아가며 마시니 안주가 다 떨어지고 술잔과 쟁반이 낭자한데, 배 안에서 서로 더불어 베고 깔고 누워서 동방이 이미 훤함을 알지 못하더라. (P.83-87)

 

생각이란 무엇인가 ()

건안의 장질부가 당의 서쪽에 집을 지어놓고 이름하기를 "사(思)"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장차 조석으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을 반드시 생각을 한 뒤에 행할 것이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 나는 천하에 생각이 없는 자다. 일을 만나면 말하고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면 최선이 아니고 이미 말하고 나서 생각하면 소용이 없다. 평생을 이렇게 사니 생각을 모르는 자로다. 말은 마음에서 나와 입에 부딪치는데, 토해내면 남을 거스르고, 삼키면 나를 거스리니 나는 차라리 남을 거스리는 쪽으로 한다. 그러므로 마침내 토해내는 것이다.

군자는 선(善)에 대해서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듯이 하고 불선에 대해서는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한다. 어찌 다시 일에 임한 뒤에 생각하여 미추를 따져보고서 피하거나 취하거나 하겠는가? 의리에 임하여 이익을 생각하면 의로운 일을 반드시 결행하지 못하고, 전쟁에 임하여 살 것을 생각하면 싸움에 반드시 전력하지 못한다. 곤궁하거나 현달한 것, 얻는 것과 잃는 것, 죽는 것과 화를 입거나 복을 받는 것, 이런 것들은 나에게 명이 있는 것이다.

(참고)

대학(大學)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

如惡惡臭如好好色

此之謂自謙故君子必愼其獨也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더러운 냄새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한다.

이것을 스스로 겸손함이라고 하니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혼자일 때 스스로 조심하고 마음을 돈독하게 해야한다.

(함께보면 좋은 책)

대학집주 - 성백효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대학, 중용 - 이기석 (홍신문화사)

중용, 대학 강의 - 김충열 (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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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에 은자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도에 가깝게 가려면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하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과 욕심이 이처럼 똑같은가요?"하니, 그는, "생각은 욕심보다 심한 것이 있다네"하고는 뜨락에 물을 받아 놓은 두 개의 양동이를 가리키며, "이쪽 양동이는 개미 구멍이 있어 새고 있고, 또 저쪽 양동이는 일부러 날마다 한 되씩 퍼다가 버린다면 어느 쪽이 먼저 말라버릴까?"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개미구멍이 있는 쪽이 먼저 마를 것입니다"하였다.

'생각'은 이와 마찬가지다. 생각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은미하여 드러나지 않으니, 은자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나는 생각을 적게 하리라.

생각하지 않는 즐거움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 비었지만 환하고 한결같지만 통하고, 편안하지만 게으르지는 않고, 머물러 있지 않아도 고요하며, 술 마시지 않아도 취하며, 눈을 감지 않아도 잠들 수 있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사당(堂_에 대한 기문을 짓는다는 것이 혹 어긋난 일은 아닐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에는 각각 합당한 것이 있다. 만물에는 나란히 자라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음이 있고, 도는 아울러 행해지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현명한 장질부에게는 이른바 '생각'이라는 것이 어찌 세속에서 생각에 분주히 골똘해하는 것과 같겠는가? <주역>에, "생각함이 없다" "함이 없다"라 하였으니 나는 그런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시경>에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 하였으니 장질부는 그렇게 할 것이다. 

원풍 원년 1월 24일 (p.156-158)

(참고)

논어(論語)

子曰詩三百 一言以幣之曰思無邪

논어, 그 오해와 진실 - 안성재 (어문학사)

논어 집주 - 성백효 (한국인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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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蘇軾, 1037년 1월 8일 ~ 1101년 8월 24일)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황주(호북성)로 유배를 갔지만 낙천적인 성격으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혜주(광동성)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해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중앙의 명을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해남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지어 살 수 있었다.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항저우, 밀주, 서주, 호주 등에서 벼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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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평전 - 왕수이자오 (조규백 옮김, 돌베개)

소동파 시선 (조규백 옮김, 문학과지성 대산세계문학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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