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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코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유은경 옮김, 향연)

by handaikhan 2024. 1. 24.

 

이런 꿈을 보았다

 

목차

만개한 벚꽃 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주문이 많은 요리점 (미야자와 겐지)
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쥐 고개 (모리 오가이)
열흘 밤의 꿈 (나쓰메 소세키)
풍류불 (고다 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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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코 (1916년)

 

젠치 나이구의 코라고 하면 이케노오 근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길이는 대여섯 치나 되어 윗입술 위에서 턱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생긴 모양은 그 대여섯 치 정도의 길이가 똑같이 굵었다. 말하자면 기다란 소시지 같은 게 얼굴 한복판에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

쉰을 넘긴 나이구는 옛날 사미 시절부터 나이도죠의 구부직에 오른 오늘날까지 내심으로는 줄곧 이 코를 골칫거리로 여겨왔다. 물론 겉으로는 지금도 별로 개의치 않는 척 의연하게 군다. 그건 오로지 내세의 극락정토를 갈구해야 할 승려의 몸으로서 코에 대해 신경을 쓴다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코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나이구는 평소 설법을 할 때 코라는 말이 나오는 걸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p.67-68)

 

나이구가 코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 그 하나는 실제로 코가 긴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선 밥을 먹을 때도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었다. 혼자 먹게 되면 코끝이 금속제 발우 속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나이구는 제자 하나를 밥상 맞은편에 앉혀 놓고 밥을 먹는 동안 너비 한 치, 길이 두 자가량 되는 판때기로 코를 치켜들고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밥을 먹는다는 건 코를 치켜들고 있는 제자에게나 코를 맡기고 있는 나이구에게나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 제자를 대신했던 동자가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손이 흔들려서 코를 죽 속에 빠뜨렸는데, 그 이야기가 교토로까지 입소문으로 퍼져나갔다. - 하지만 이 일은 나이구가 코 때문에 힘들어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실은 나이구는 이 코로 인해 상처받는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케노오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코를 갖고 있는 젠치 나이구를 위해서, 그가 속세 사람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 코로는 아무도 각시가 되려는 처자가 없을 것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중에는 또 코가 저러니 출가한 거겠지라고 평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구는 자기가 승려이기 때문에 다소나마 코로 인한 번민을 덜 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구의 자존심은 아내가 있다는 결과적인 사실에 좌우되기에는 너무나도 델리케이트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구는 소극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이 자존심의 훼손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p.68-69)

 

코는 - 턱 아래까지 늘어져 있던 코는, 거짓말처럼 줄어들어 지금은 겨우 윗입술 위에서 무기력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불긋불긋한 얼룩이 생긴 것은 아마 밟힌 자국이리라. 이쯤 되면 이제 아무도 비웃을 사람이 없겠지. - 거울 속에 있는 나이구의 얼굴은 거울 밖에 있는 나이구의 얼굴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이 눈을 껌뻑거렸다. (p.74)

 

그런데 이삼일이 지나는 동안에 나이구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한번은 때마침 볼일이 있어 이케노오의 절을 찾아온 대갓집 하인이, 전보다도 한층 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힐금힐금 나이구의 코만 쳐다본 일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전에 나이구의 코를 죽 속에 빠뜨린 적이 있는 동자는 강당 밖에서 나이구와 마주쳤을 때, 처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다가 끝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푸후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이구의 지시를 받은 하급 중들도 마주보고 있는 동안만은 공손히 듣고 있다가도 그가 등만 돌렸다 하면 즉각 킥킥킥 웃어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p.75)

 

'전에는 저렇게까지 거침없이 웃지는 않았는데.'

나이구는 외고 있던 불경을 멈추고 대머리를 갸웃뚱거리면서 이따금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나이구는 그럴 때마다 옆에 걸려 있는 보현 화상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코가 길었던 사오일 전의 일들을 떠올리고는, '지금은 한없이 영락해 버린 사람이 영화롭던 옛날을 그리워하듯' 울적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 나이구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의문에 답을 낼 만한 지혜가 부족했다.

-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든지 타인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행을 어떻게든 극복하게 되면, 이번에는 왠지 서운한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똑같은 불행속으로 밀어넣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틈엔가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적의를 그 사람에게 품게 된다. - 나이구가 이유를 모르면서도 왠지 불쾌하게 여긴 것은 이케노오의 승려나 신도들의 태도에서 바로 그런 방관자의 이기주의를 은근히 느꼈기 때문이다. (p.76)

 

거의 잊혀가던 어떤 감각이 다시금 나이구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나이구는 황급히 코에 손을 갖다 댔다. 손에 닿은 것은 어젯밤의 짧은 코가 아니었다. 윗입술 위에서 턱 아래까지 대여섯 치나 축 늘어진 옛날의 그 긴 코였다. 나이구는 코가 하룻밤 사이에 또다시 원래대로 길어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가 짧아졌던 때와 똑같은 후련한 기분이 어디선가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이젠 아무도 비웃는 사람은 없으렸다.'

나이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 긴 코를 새벽녘 가을바람에 건들거리면서.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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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4일)

일본의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해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과 같은 단편 소설들을 주로 저술했고 「거미줄(원제: 蜘蛛の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내용의 「방황하는 유대인」을 저술했다.

1892년(메이지 25년) 3월 1일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였던 아버지 니하라 도시조(일본어: 新原敏三)와 어머니 후쿠(일본어: フク) 사이에서 니하라 류노스케(일본어: 新原龍之介)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아쿠타가와라는 성은 원래 그의 어머니쪽 성씨였다). 이때 태어난 시간이 진년(辰年) 진월(辰月) 진일(辰日) 진시(辰時)였기 때문에 '용(龍)' 자를 이름에 넣어 류노스케(龍之介)라 짓게 되었다고 전하나 실제 그가 태어난 1892년 3월 1일은 간지로는 임진년·임인월·임진일에 해당하며 출생 시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없다. 이름도 호적상으로는 '龍之介'이지만 그가 양자로 들어갔던 아쿠타가와 집안이나 졸업한 학교의 명단 등의 문서에는 '龍之助'로 되어 있다(아쿠타가와 자신은 '龍之助' 표기를 싫어했다).

원래 류노스케의 위로는 하쓰(はつ)와 히사(ひさ)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였던 하쓰는 류노스케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어서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다.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시 혼죠구 고이즈미쵸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졌고, 백모 후키(フキ)가 양육을 맡았다. 11살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자 이듬해에 그는 외삼촌으로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된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는 사족(士族)으로서 대대로 도쿠가와(德川) 집안을 섬겨 다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스키야호즈(數寄屋坊主) 집안이었고, 예술·연예를 애호하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자라는 상장을 받기도 했고, 덕분에 제1고등학교는 시험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19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의 성적 우수자에게는 고등학교 입학시 시험 없이도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乙類)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 가운데는 기쿠치 간도 있었다. 2학년으로 오르면서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한 방을 쓰던 이가와 쿄(井川恭)와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이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는 1학년 가운데 합격자가 불과 몇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다이쇼 3년) 2월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기쿠치 간·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을 간행하여, 우선 '야나가와 다카노스케(柳川隆之助)'[1]라는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바르타자알」, 이에이트의 「봄의 심장」의 일역을 기고한 뒤, 10월에 『신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 「노년」을 동잡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의 작가 활동의 시작이었다.

1915년 10월, 『데이코쿠 분가쿠』(帝國文學)에 그의 대표작 「라쇼몬」(羅生門)을 본명으로 발표했고, 급우였던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의 소개로 나쓰메 소세키 문하에 들어간다. 1916년에는 제4차 『신사조』(멤버는 제3차와 거의 같다)을 발간하는데, 그 창간호에 실었던 「코(원제: 鼻)」는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아 문단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이 해에 대학을 20인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이때 그의 졸업 논문은 「윌리엄 모리스 연구」였다. 12월에 해군기관학교 영어 교관을 맡아왔던 아사노 가사부로(浅野和三郎)가 황도대본(皇道大本)이라는 신종교에 입신하기 위해 사직하면서 구로야나기 가이슈(畔柳芥舟)나 이치카와 산키(市河三喜)등의 영문학자의 추천으로(나쓰메 소세키의 조언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쿠타가와는 아사노의 후임으로서 해군기관학교의 촉탁 교관(담당은 영어)으로서 근무하였다. 그 틈틈이 창작에 힘써 이듬해 5월에는 첫 단편집 『라쇼몽』을 간행했다. 그 후로도 단편 작품을 하나씩 발표해, 11월에는 이미 두 번째 단편집 『담배와 악마(원제: 煙草と悪魔)』를 발간하고 있다.

1916년의 가을, 『미타문학』(三田文学)의 동인으로서 친하게 지내던 고지마 마사지로(小島政二郎)의 알선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취직 제의를 받고 이력서도 제출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17년 3월에, 해군 기관 학교의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로 출근 의무는 없다)해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덧붙여서 스승의 소세키도 10년 전인 1907년에 똑같이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아쿠타가와는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由比ガ浜)에서 하숙생활을 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오오 정(大町)에 거주했다.

또한 이 해에 해외 특파원으로서 중화민국을 방문하였고,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후스를 만나 그와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상해유기(上海遊記)」 등의 기행문을 지었다. 1922년(다이쇼 11년) 11월 8일에는 차남 다카시(多加志)가 태어났다. 그런데 중화민국을 방문한 1921년 이후로 아쿠타가와는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의 병을 얻는 등 점차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유가와라마치(湯河原町)로 온천 치료를 떠나기도 했다. 작품수도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른바 '호키모노(保吉もの)' 등의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은 만년작 「톱니바퀴(원제: 歯車)」, 「갓파(河童)」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이 해에 일본을 강타했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주동 세력인 자경단의 단원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25년경에 아쿠타가와는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로 취임하였는데, 1926년부터 위궤양에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다시 심해져 유가와라에서 요양해야 했다. 한편 아내 후미도 남동생 쓰카모토 핫슈(塚本八洲)와 함께 요양을 위해 구게누마(鵠沼)에 있던 친가 소유의 별장으로 이주했다. 2월 22일, 류노스케도 구게누마의 여관 아즈마야(東屋)에 머무르며 그곳으로 처자를 불러온다. 7월 12일에 3남 야스시(也寸志)가 태어났고, 20일에는 아즈마야의 대별장 「이-4호」를 빌려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야스시와 살았다(여름방학이 되면서는 히로시나 다카시도 불러왔다). 그 사이에 「집을 빌리고 나서(원제: 家を借りてから)」, 「구게누마 잡기(鵠沼雑記)」, 나아가 「점귀부(點鬼簿)」 등의 작품을 탈고하였고, 또한 구게누마의 개업 의사 후지 다카시(富士山)의 병원에 통원치료를 다녔다. 9월 20일에 류노스케 일가는 「이-4호」의 서쪽에 있던 '시바 씨의 이층 집(柴さんの二階家)'를 연말까지 빌려 옮긴다. 여기서 구게누마를 무대로 한 「유유장(悠々荘)」을 탈고한다. 이는 간토대지진이 있기 전에는 기시다 류세(岸田劉生)가 살았고 지진 후에 재건되어 시인 구니키다 도라오(国木田虎雄)가 빌리고 있던 대별장을 돌아봤을 때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류노스케 일가가 구게누마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또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사이토 모키지(斎藤茂吉)나 쓰치야 분메이(土屋文明), 쓰네토 야스시(恒藤恭),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쿠치 간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연호가 쇼와로 바뀐 뒤 류노스케는 「이-4호」로 돌아왔다. 조카이자 문예평론가였던 구즈마키 요시토시(葛巻義敏)와 가마쿠라에서 섣달 그믐을 지새고 나서 처자가 가있던 다바타(田端)로 돌아오지만, 구게누마에서 살던 집은 4월까지 빌려두고서 때때로 방문하고 있다.

1927년 1월, 의형 니시카와 유타카(西川豊)가 방화와 보험금 사기 혐의로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바람에 아쿠타가와는 니시카와가 남긴 빚이나 가족을 떠맡아야 했다. 4월부터 「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원제: 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이라는 문예평론에서 '이야기의 재미'를 주장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맞서 '이야기의 재미'가 소설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론해, 훗날 패전 뒤에 일본에서 벌어질 이야기 비판적인 문단의 메인 스트림을 예견한 일본문학사상 유명한 논쟁을 펼친다. 여기서 아쿠타가와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 순수한 소설의 명수로서 시가 나오야를 칭찬했다.

1927년 4월 7일, 부인의 동창생으로 아쿠타가와 자신의 비서로 있던 히라마쓰 마쓰코(平松麻素子)와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함께 동반 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가 변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7월 24일 새벽, 「속(續) 서방의 사람(원제: 続西方の人)」를 모두 쓴 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사이토 모키지로부터 받아온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2]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とした不安)'[3]이 그가 밝힌 자살 이유였다. 그의 계명(戒名)은 의문원용지개일숭거사(懿文院龍之介日崇居士). 묘소는 지금의 도쿄 도 도시마구(豊島区) 스가모(巣鴨)에 있는 자안사(慈眼寺)이다.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1935년 친구이며 문예춘추사 사주였던 기쿠치 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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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송태욱 옮김, 서커스)

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서은혜 옮김, 민음사)

지옥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양윤옥 옮김, 시공사)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김영식 옮김, 문예출판사)

아쿠타가와 작품선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진웅기, 김진욱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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