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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15.

 

큰 한국문학 413 (44)

 

목차

 

유진오

김 강사와 T 교수

청랑정기

 

안회남

겸허(김유정전)

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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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 김 강사와 T 교수 (1935년)

 

문학사 김만필은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며 학생 시대는 한때 '문화비판회'의 한 멤버로 적지 않은 단련의 경력을 가졌으며 또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 년 반 동안이나 실업자의 쓰라린 고통을 맛보아 왔지만 아직도 '도련님' 또는 '책상물림'의 티가 뚝뚝 듣는 그러한 지식 청년이었다.

S 전문학교 교문을 들어선 택시가 기운차게 큰 커브를 그려 육중한 본관 현관 앞에 우뚝 섰을 때에는 벌써 김만필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늘이 2학기 개학하는 날이라 학생들은 둘씩 셋씩 떼를 지어 웃고 떠들고 하면서 희희낙락하게 교뮨을 들어가고 있었다. 저 학생들 - 저 다 큰 학생들을 앞에 놓고 내일부터 강의를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몹시 기쁘기도 하나 일변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김만필은 세내 입은 모닝의 옷깃을 가다듬고 넥타이를 바로잡아 위의를 갖춘 후에 자동차를 내렸다. 그윽한 나프탈렌 냄새가 초가을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새삼스레 코를 찔렀다. 그는 천천히 일 원짜리를 한 장 꺼내 주고 거스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손짓을 하고 무거운 정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김만필이 그의 울울턴 일 년 반 동안의 룸펜 생활을 청산하는 날이며, 새로이 이 전문학교의 선생으로 - 시간 강사로나마 - 취임하는 날이며 또 이도 또한 이번에 새로 임명된 이 학교 교련 선생과 함께 취임식의 단 위에 오르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기쁨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 학교 교문을 들어선 것은 이상해할 일이 아닌 것이다. (p.9-11)

 

지식 계급이란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어떤 자는 그 수많은 인격 중에서 자기의 정말 인격을 명확하게 쥐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그 수많은 인격에 현황해 끝끝내는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자기는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인가? (p.18)

 

그날 밤에 김 강사는 명치옥에 가서 서양 과자를 한 상자 샀다. 윗덮개에 교장의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자기 명함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종시 두 가지 의시가 싸우고 있었다. 창피하다. 아무리 '자리'를 위해서라 해도 차마 이 짓만은 할 수 없다. 이제 이왕 노염을 산 다음에야 이까짓 과자 상자를 사다 주면 무얼 하느냐. 도리어 노염을 돋울 뿐이다. 내가 이것을 사다 주면 등 뒤에서 T가 능글능글 웃음을 띠고 나의 어리석음을 조소할 것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않아. 이것이 세상이 아닌가. 나는 나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고 또는 나의 어리석은 심정을 조롱하는 사람을 도리어 경멸하면 그만 아닌가. 선물을 보내는 것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은 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리어 받는 자의 인격이 아닌가....

그러나 김 강사는 드디어 그 과자 상자를 교장의 집에까지 가지고 갈 용기는 없었다. 전차를 타고 가다 말고 중간에서 내려 한참이나 헤매다가 생각난 것이 욕심쟁이로 일가 간에 돌림뱅이가 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뜻 아니 한 선물에 무슨 영문도 모르고 그러나 넌지시 과자 상자를 받아들었다. (p.44-46)

 

날이 갈수록 그는 점점 더 피곤을 느꼈다. 감당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 편으로든가 그는 그 모순이 터져 나갈 길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그것을 구할 방도와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

L'emmui lui vint (그에게 권태가 밀려왔다)

벌써 칠팔 년 전에 읽던 도데의 소설에서 우연히 기억한 이 짧은 구절이 무슨 깊은 의미나 가진 것처럼 매일같이 머리에 떠올랐다. (p.4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스갱씨의 염소 - 알퐁스 도데 (김명섭 옮김, 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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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해>

김만필은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사회 현실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을 다 갖고 있습니다. 즉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부조리한 현실을 박차고 일어설 용기는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김만필을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나약하고 이중적인 지식인의 표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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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교육자(대학 교수) 겸 정치인이다.

1906년 5월 13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유치형(兪致衡)이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해방 이후에는 헌법기초위원, 법제처장, 한일회담 수석대표,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12월부터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7년 8월 30일 사망했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김강사와 T교수」(『삼천리』7-3, 1935.3.), 「창랑정기(滄浪亭記)」(『동아일보』1938.4.19.∼5.4.)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학예사, 1939)을 간행했다.
1939년 7월 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그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곧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법학자·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대학원장(1949∼1952)·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 학위령 등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47년 6월 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 8월 초대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9년 『헌법의 기초이론』(일조각), 『헌법해의(憲法解義)』(명세당)를 발간했다. 1949년 고등고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55년까지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고려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 교수단 단장,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4∼8월),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0월 UN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활동했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대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55년 서울하바드클럽 회장·대학조사위원회 위원·교육특별심의회 위원 및 부의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한국연구원 창립이사로 위촉되었다. 1957년 영국 정부가 초청하여 영국을 시찰했고, 한국공법위원회 회장과 한국법철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8년 서울특별시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민간사절로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60년 9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UN한국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고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3년에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고려대학교출판부)를 출판했고, 1964년에는 193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창랑정기(滄浪亭記)」 등을 묶어 소설집 『창랑정기』(정음사)를 출간했다.
965년 10월 고려대학교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월 종로구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 1월 와병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12월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2월 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헌법)이 되었다.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름 위의 만상(萬想)』(일조각, 1966), 「편편야화(片片夜話)」(『동아일보』1974.3.1.∼5.16.), 『젊은 날의 자화상』(박영사, 1976), 『양호기(養虎記)-보전·고대 35년의 회고』(고대출판부, 1977), 『젊음이 깃칠 때』(휘문출판사, 1978), 『다시 창랑정에서』(창미사, 1985) 등을 발표했다.
유진오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68∼81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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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현대문학)

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창비)

김 강사와 T 교수 - 유진오 (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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