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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새벽 출정 - 방현석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11.

큰 한국문학 413 (86)

 

방현석 

새벽 출정

 

최시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움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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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 - 새벽 출정 (1991년)

 

오늘 아침 윤희가 떠났다. 새벽어둠이 걷히지 않은 농성장을 떠나는 그녀의 양손에는 짐 가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졸업식 하고 나서 바로 돌아올게요."

몇 번째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윤희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전에라도 싸움 끝나면 곧장 달려와야 해. 우린 꼭 승리할거야."

미정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후반 규찰을 맡은 남자 조합원 하나가 수위실에서 나왔다. 가방을 들고선 윤희와 양쪽의 미정, 민영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철문을 열었다.

"나가는 거야?"

윤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잘 가, 반쯤 손을 들어 보이고 나서 남자 조합원은 수위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희는 입술을 깨물며 공장을 둘러보았다.

"너, 세광 잊으면 안 된다."

민영이 윤희의 목도리를 여며 주었다. 미정은 차마 발걸음을 옮겨 놓지 못하는 윤희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아주 가는 거 아니잖아. 어서 가 봐."

등을 떠밀려 돌아서 걷는 윤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사거리의 가두 매점에 이르기까지 윤희는 몇 번이고 멈춰 섰다. 그리고 한동안 뒤돌아보았다.

가두 매점 모퉁이로 윤희의 모습이 감춰질 때까지 미정과 민영은 정문 앞에서 지켜 서 있었다. 겨울 새벽 공기가 매섭다. 돌아서 걷는 운동장 여기저기로 안료 포대들이 바람에 쓸려 다녔다.

"이제 몇 명 남은 거니?"

미정은 혼잣소리처럼 물었다.

"71명요."

"많이 줄어구나."

미정의 허리춤으로 겨울바람이 휘감고 지나갔다. 민영의 긴 머리칼이 날렸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하늘은 떠나간 윤희의 얼굴만큼이나 어두웠다.

같이 싸우던 동료가 농성장을 빠져나갈 때보다 맥 빠지고 가슴 쓰린 일은 없었다. (p.9-10)

 

셋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정이 둘을 양쪽 팔에 끼고 걸었다. 아직 바닷물이 덜 차오른 개펄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떼 지어 서성거리고 있었다. 민영이 짓궂게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다섯 마리의 갈매기가 날아올랐다. 흰색보다는 검은색에 가깝도록 더럽혀진 몸뚱이를 한 갈매기들은 바쁜 날갯짓을 하며 건너 개펄로 옮겨 갔다.

"저 갈매기들은 뭘 먹고 살까?"

민영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쇳물."

"화공 약품 찌꺼기."

미정과 철순의 대꾸를 흘려들으며 민영이 되물었다.

"똥 바다엔 물고기가 살지 않을 텐데. 식당에서 버린 짬밥을 먹고 살까?"

"짬밥은 돼지 기르는 데서 다 걷어 가지 않니. 갈매기는 꿈을 먹고 사는 거야."

미정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웃었다.

"저 갈매기들은 아마 썰물을 따라 나가면 드넓은 바다가 열린다는 걸 모를 거야. 노동자의 운명은 가난과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처럼 똥 바다가 바다의 전부라고 생각할 거야."

"야, 철순이 얘 시 쓰고 있는데."

셋은 공동의 음모를 가슴에 지녀서인지 괜히 들떠서 소리 높여 웃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셋을 쳐다봤다. (p.42-44)

 

"마지막 건 아냐. 날 줄 모르는 게 어떻게 갈매기야."

민영은 단호하게 마지막 한 마리의 갈매기를 자신이 발견한 숫자에서 제외시켰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은 노동자가 아냐. 철순이 그렇게 말한 건 노조 결성 준비를 시작한 뒤였다.

셋이 주도한 잔업 특근 거부는 예상 이상의 파문을 일으켰다. 화공부와 페인팅실 전원이 잔업을 거부했고 그 다음날 특근은 성형과 제형 부서에서까지 출근 않는 사람이 나왔다. 월요일 출근했을 때 셋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직서와 각서였다. 그들은 탈의장에 가기도 전에 사무실로 불려 올라갔다.

백지 세 장이 주어졌다. 민영과 철순에게는 사직서가, 미정에게는 각서가 요구되었다. 8년과 7년 그리고 3년 동안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며 다녀온 그들에 대한 '우리 회사'의 요구였다. 셋은 그 한 장의 백지가 주는 의미를 무섭게 깨달았다.

민영은 7년 동안 정든 세광물산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구석구석마다 자신의 숨결과 손때가 묻은 세광물산은 민영에게 우리 회사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내밀어진 사직서는 세광물산은 너 따위의 것일 수 없다고 비웃고 있다. 세광물산은 어디까지나 사장 김세호의 것일 뿐이라고 호통 쳤다.

나는 무엇인가, 세광물산에서의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광물산에서의 나의 7년은 무엇인가.

사무실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근면, 자조, 협동, 벽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사훈이 낯설었다. 액자에 담긴 '사원을 가족처럼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사장의 친필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사무실 직원들의 얼굴도 낯설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장 건물도 낯설다. 강민영, 너는 일당 사천 팔십 원짜리 고용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야. 그리고 이제 사장은 네가 필요 없어졌어. 매일 구매하던 사철 팔십 원짜리 물건을 이제는 다른 곳에서 구입하겠다는 거야. 내가 앉혀졌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 앉혀져서 도료를 만지게 될 거야. 7, 8년 동안 흐려져 있던 것이 한순간에 명확해졌다. 결코 사장과 자신들은 같은 줄에 서 있을 수 없음을, 7, 8년이 아니라 70년, 80년을 다녀도 그들이 서야 할 줄은 노동자의 대열임을 뼈아프게 확인하였다.

그놈의 정 때문에, 를 되풀이하며 다닌 세광에서의 세월은 이날부터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의 배신과 분노를 통해 가슴속 깊이 각인된 것은 노동자라는 세 글자였다. (p.46-4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청년 노동자 전태일 - 위기철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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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정각, 조합원 전원이 식당에 모였다. 모두들 옷을 단단히 차려입었다. 식당 안은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묵념. 정면에는 검은 액자에 담긴 철순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조합원 동지들, 마침내 결단의 시간이 왔습니다. 150일 동안 싸워 온 우리들의 투쟁은 승패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우리의 150일은 힘겹고 험난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150일 동안 흘린 땀과 눈물은 우리 모두를 위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땀 흘림과 눈물을 아까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직 눈뜨지 않은 노동자였을 때 우리의 시간들은 오로지 사장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살기를 갈망하며 싸워 온 지난날들은 비록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동안 우리는 해방의 세상에 살았습니다. 사장은 우리를 돈으로 무릎 꿇게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2억, 우리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큰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동지 철순이는 단돈 1500원을 더 받으려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미정은 말을 끊고 천장을 쳐다봤다.

"2억, 너무나 큰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했던 돈은 인간다운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것이었을 뿐,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김세호 사장이 내놓은 2억의 돈을 우리는 뿌리치기로 결의했습니다. 김세호 사장에게는 돈이 가장 소중한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지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애정과 참 인간다운 삶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천만 노동자의 자존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돈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피눈물을 흐르게 하고 자신은 궁궐 같은 집에서 제 피붙이와 희희낙락 살게 내버려 두지는 말기로 합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해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불타는 적개심으로, 비타협적으로 싸울 뿐입니다."

미정은 조합원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조합원 동지들, 우리는 승리해야만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김세호를 무릎 꿇려야만 현장에 들어가 다시 작업대에 앉을 수 있습니다. 이기고 돌아옵시다."

조합원 동지들, 사랑합니다, 며 미정이 말을 맺었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멀리 갔어도, 어깨를 걸고 나지막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토막초가 하나씩 나누어지고 불어 꺼졌다. 굵은 눈물 흘리며, 역사가 부른다.

미정부터 촛불과 함께 결단의 마음을 밝혔다.

"노동자의 눈물 없는 해방의 새날을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우겠습니다."

민영이 촛불을 이어받았다.

"우리로부터 웃음을 빼앗아 간 자들로부터 다시 웃음을 빼앗기 위해 싸웁시다."

"정상 가동이 되어 나도 친구들 앞에 월급봉투를 내밀고 싶다.."

"그동안 동료들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65개의 촛불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순옥이 출정 선언문을 읽어 나갔다.

"김세호 사장, 또 다른 생명을 요구하는가! 더 많은 피를 요구하는가!

노동부, 당신들은 송철순 동지의 목숨 하나로는 아직 우리의 희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더 큰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가!

당신들이 우리를 짓밟음으로써 열사의 뜻을 지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2500만 노동자의 자존심을 짓뭉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착각인가를 우리는 보여 주겠다.

우리의 요구는 단 한 가지. 우리의 일터를 돌려 달라!

이제 우리는 당신들을 2500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응징할 것이다!

우리는 선언한다. 죽을 수 있어도 질 수는 없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악수를 했다.

모든 촛불을 껐다. 온통 어둠뿐이다.

낮은 노랫소리가 가슴에서 가슴으로 물결쳤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 쪽 나도 지킨다...

민영은 2조의 조장이 되어 정문을 빠져나갔다.

미정은 마지막 5조를 이끌고 세광을 나섰다.

캄캄한 새벽하늘에 펄럭이는 깃발들만 소리 없는 함성으로 이들의 출정을 배웅했다. (p.94-9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어머니 - 막심 고리키 (정보라 옮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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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해>

<새벽 출정>은 어떤 사건이나 갈등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미정을 비롯한 65명의 조합원들이 회사 측의 위장 폐업에 맞서 결연한 의지로 출정하는 모습으로 작품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농성 투쟁이나 파업 투쟁의 승리 또는 패배라는 어떤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으로 결말을 처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혹한 노동 현실에서의 노동자 해방 운동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료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얻은 회사 측과의 합의가 결국 자본가의 기만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았음을 조합원들은 깨닫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새벽 출정을 통해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주체적인 현실 자각과 진정한 노동 해방이라는 희망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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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1961년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교수이다.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고,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8년 실천문학 봄호에 〈내딛은 첫발은〉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으며, 1988년 노조결성 관계로 해고당한 바 있다.
1991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아 장편 《십년간》을 펴냈으며, 2003년 오영수 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 《새벽 출정》,《내일을 여는 집》,《랍스터를 먹는 시간》,《존재의 형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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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집 - 방현석 (창비)

새벽 출정 - 방현석 (아시아)

랍스터를 먹는 시간 - 방현석 (창비)

새벽 출정 - 방현석 (창비)

존재의 형식 - 방현석 (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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