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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움딸 - 최시한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11.

큰 한국문학 413 (86)

 

방현석 

새벽 출정

 

최시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움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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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한 - 움딸

 

그는 대합실의 활짝 열린 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밀 듯이 오가는 인도 너머로 차들이 또 줄지어 오갔다. 낯선 경상도 사투리가 먹먹한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새벽참에 떠났는데도 어느덧 열두 시가 가까웠다. 무언가 좀 먹어 두어야 했다. 대합실 구석의 간이식당 앞에서 젊은이 서넛이 선 채로 국수를 먹고 있었다. 무럭무럭 솟는 김 속에 얼굴을 박고 국수를 입에 퍼 넣다시피 하였다. 저런 나이에는 어디서 무얼 먹어도 탈이 없었다. 튼튼한 위장, 많은 시간, 그리고 타오르는 야심, 경솔한 야심. 그에게는 음식을 실어 나르는 밀차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복도 끝의 병실에서부터 점심을 배급하는 건강한 여자들. 그들의 뽀오얀 손이 재빠르게 오갈 적마다 밀차가 움직이고, 그 고무바퀴에서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났다. 바퀴만 빼고 온통 금속속인 밀차였다. 그는 자기 침대 옆에 놓이는 그 싱겁기 짝이 없는 음식보다도 작은 건드림에도 예민하게 움직이는, 한 곳에 매여 뱅글뱅글 회전하는 그 바퀴의 소리에 야릇한 절망을 느끼곤 했다. 의사는 말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수술에 관한 것이든 뭐든 되도록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움직이려면 먹어야 했다. 그러나 무얼 먹으면 또 토할지 몰랐고, 볼일을 끝내기 전에는 먹는 행동 같은 걸 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거리에는 계속 사람과 차가 흘러가고 있었다. 순간순간이 달랐다. 매 순간이 유일하고 독특했다. 저 사람과 차들은 다시는 이 시각에 거기에 그렇게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말고는 다시 이 도시에 오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번잡한 풍경이 뭐 특별스럽다거나 소중하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만사가 다 한 번뿐이었다.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직선이었다. 하지만 문득 그는 자기가 아주 먼 길을 지나왔고, 그렇게 멀리까지 왔으므로 이제는 도로 맨 처음의 출발점에 가까워진 게 아닌가, 사실 이 직선은 아주 멀리까지 간 사람만이 눈치재게 되는 곡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따. 누구보다도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온 것 같다. 정말 곡선이기만 하다면, 새벽부터 한나절 내내 버스를 타고 움직여 온 거리는, 출발점까지의 마지막 얼마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의 출발점은 어디였던가를 그는 생각해 보려고 했다. 고향의 집이라든가 부모의 모습은 언제나 똑같아서 이제는 꿈만 같았다. 지금과 맞닿기에는 너무 멀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평양상회에서 심부름을 시작한 날,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밖으로 낯선 인파가 지나가고, 혹시 아버지가 도로 와서 데려가 주지나 않을까 간절히 바라던 그날이 출발점일까? 아니면 삼팔선을 넘어온 날, 아내가 죽은 날, 딸이 죽은날....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배 속이 쓰리고 무지근하게 아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서둘러 나왔으니 약을 넣었을 리 없었다. 병원에서는 지금쯤 찾느라고 야단일 것이다. 수술받지 않기를 잘했다. 수술대에서 아예 내려오지 못하게 되면, 누가 내 일을 대신 해 준단 말인가.

끝은 어딜까? 끝 지점에 가면, 모든 게 질서 있게 정리될 수 있을까? 그는 자기가 병원 시체실에서 끝나게 되어 있는 길을 억지로 잡아 늘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부터 끌고 나온 길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대로 늘어나서 이제는 늘어나기보다 뒤로 당겨지는 성싶었다. 그는 그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다리가 허뚱거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똑바로 대합실 문을 나가 인파 속으로 들어섰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어도, 그 일 한 가지만은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데까지 지어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다. (p.140-143)

 

"보람이 에미를 아시오?"

"제가 보람이 어머이 아입니꺼?"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지. 보람이 에미지. 그러니까 자네는, 내 딸인 셈이구만, 죽은 자리에서 솟아난 움딸이지. 죽은 딸도 자네처럼 착하기는 했는데..."

막 잎이 피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하루가 저물었다. 그러나 여행은 끝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지금 살아 있었다. 아직도 길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고, 그 사람을 딸처럼 여길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p.172)

 

다 잘될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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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한 ( 1952년 - )

대한민국 소설가.

1952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상대 사범대학 국어국문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낙타의 겨울>,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고치고 더한 수필로 배우는 글읽기>, <가정소설연구>, <소설의 해석과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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