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표본실의 청개구리 - 염상섭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10.

삼성 주니어 문학

 

목차 

 

김동인

배따라기

감자

광홧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전화

 

이광수

소년의 비애

무명

 

................................................

염상섭 -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

 

무거운 기분의 침체와 한없이 늘어진 생의 권태는 나가지 않는 나의 발길을 남포까지 끌어왔다.

귀성한 후 칠팔 개삭간의 불규칙한 생활은 나의 전신을 해면같이 짓두들겨 놓았을 뿐아니라 나의 혼백까지 두식하였다. 나의 몸은 어디를 두드리든지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취를 내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피로하였다. 거두나 6-7월 성하를 지내고 겹옷 입을 때가 되어서는 절기가 급변하여 갈수록 몸을 추스르기가 겨워서 동네 산보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친구와 이야기 하려면 두세 마디째부터는 목침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무섭게 양분한 신경만은 잠자리에서도 눈을 뜨고 있었다. 두 홰 세 홰 울때까지 엎치락뒤치락거리다가 동이 번히 트는 것을 보고 겨우 눈을 붙이는 것이 일주일간이나 넘은 뒤에는 불을 끄고 드러눕지를 못하였다.

그중에도 나의 머리에 교착하여 불을 끄고 누웠을 때나 조용히 앉았을 때마다 가혹히 나의 신경을 엄습하여 오는 것은 해부된 개구리가 사지에 핀을 박고 칠성판 위에 자빠진 현상이다.

내가 중학교 2년 시대에 박물 실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서 자는 아기 누이듯이 주정병에 채운 후에 홍위하고 서서 있는 생도들을 돌아다보며 대발견이나 한 듯이,

"자 여러분, 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시오."

하고 뽀족한 바늘 끝으로 여기저기를 콕콕 찌르는 대로 오장을 빼앗긴 개구리는 진저리를 치며 사지에 못 박힌 채 발딱발딱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8년이나 된 그 인상이 요사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나서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아니 되었다. 새파란 메스, 닭의 똥만 한 오물오물하는 심장과 페, 바늘 끝, 조그만 전율....차례차례로 생각날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하고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것 같았다. (p.98-99)

 

 

 

.........................................................................................................................................................................................................................

염상섭(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본관은 서원(瑞原). 본명은 염상섭(廉尙燮). 호는 제월(霽月) 또는 횡보(橫步). 서울 출생.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 김영옥(金英玉)이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官立師範附屬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반일 학생으로 지목되어 중퇴하였다.
1912년 보성소 · 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교토[京都]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1918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오사카[大阪]에서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금고형을 받고 학교는 중퇴한 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기자가 되어 1920년 귀국하였다.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지만, 이후 줄곧 신문 · 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 · 평론에 전념하였다.
문예전문지 『폐허(廢墟)』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중편소설 「만세전」(1922)을 집필, 연재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이 확인되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적 반일감정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 성과 없이 귀국하여 1929년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장편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표작 「삼대(三代)」를 비롯하여 「무화과(無花果)」 · 「백구(白鳩)」 등과 「사랑과 죄」 · 「이심(二心)」 · 「모란꽃 필 때」 등 우수한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단편 역시 초기에는 암울,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으나 사회 전반을 다루는 경향으로 나가면서부터는 보다 치밀한 관찰과 객관적 기술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리얼리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제야(除夜)」 · 「해바라기」 · 「금반지」 · 「고독」 · 「조그만 일」 · 「두 출발」 · 「남충서(南忠緖)」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말기 10여 년(1936∼1945)은 만주 · 신경에 살면서 『만선일보』 편집국장 · 회사 홍보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다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 · 25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제대 후 한때 서라벌예술대학장으로 있기도 하였지만, 창작에 정진하여 병중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삼팔선」 · 「임종」 · 「두파산」 · 「굴레」 등 단편과 「효풍」 · 「난류」 · 「취우」 · 「새울림」 · 「미망인」 등의 장편은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963년 3월 직장암으로 작고할 때까지 완성된 본격 장편 20여 편, 단편 150편, 평론 100여 편 이외에 기타 수필 등 잡문 2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 삶과 문학의 특징은 민족적이었고 전통적이었으며 야인적이었다. 식민지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하였다. 또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윤리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더욱이,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고 식민지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은 돋보인다.

 

..........................................

삼대 - 염상섭 (문학과지성사)

만세전 - 염상섭 (문학과지성사)

두 파산 - 염상섭 (문학과지성사)

만세전 - 염상섭 (글누림)

..........................................................